일본 가가미 진자(경신사, 鏡神社) 소장 '수월관음도'
14년만에 통도사에서 다시 전시
일본 가가미진자(鏡神社) 고려 수월관음도 특별전
‘600년만의 귀향 - 일본 가가미진자 고려 수월관음도 특별전’
전시일자 : 2009년 4월 30일~2009년 6월 7일
제작시기 : 고려(1310년), 비단에 채색
작품크기 : 419.5×252.2cm, 일본 중요문화재
소 장 처 : 원) 사가현(佐賀縣) 카라츠시(唐津市) 가가미(鏡) 1827번지 가가미진자(鏡神社)
: 현재) 사가현(佐賀縣) 현립박물관 기탁보관중
영축총림 통도사에서는
성보박물관 신축 개관 이래 매년 봄과 가을 총 2회에 걸쳐
전국에 봉안된 괘불을 전시하여 조선시대 불교문화의 정수를 만방에 알리고 있다.
2008년 가을까지 전국에 흩어져 있는 약 80여 점의 괘불탱화 가운데
20점의 괘불을 통도사박물관으로 이관 전시하여
괘불전시에 새로운 지평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괘불은 높이 10m 이상의 초대형 불화로
일반 사찰에서는 1년 1회 정도 특별한 날에만 걸게 되어 있으므로
일반인이 괘불을 친견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통도사박물관의 괘불탱 특별전은 단 1점의 불화로 개최되는 국내 유일한 전시이면서도
1점의 불화가 갖는 의미는 특별하다.
2009년 4월 통도사성보박물관 신관 개관 1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고려불화 가운데 가장 크고 뛰어나 한국불교회화의 백미로 일컫는
일본 사가현 가가미진자(鏡神社)의 수월관음도를 국내로 운송하여 전시하기로 확정되었다.
(표구보함 전체높이 약 5.3m)
고려미술을 대표하는 수월관음도를 전시함으로서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불보종찰 통도사와 양산시의 위상을 높이고
일반 시민과 불자들에게 우리문화재의 우수성과 귀중함을 확인시켜
나아가 국외에 반출된 우리문화재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마련하고자 한다.
가가미진사(鏡神社) 수월관음도의 공식보험가가 약 150억 원에 이르는데
통도사 성보박물관은 국내에 소개하는데 의미를 두고 관람료를 받지 않을 계획이다.
양산 영축총림 통도사성보박물관은 신관 개관 10주년을 맞아
‘600년만의 귀향- 일본 가가미진자 고려 수월관음도 특별전’ 개최.
현존하는 고려불화 가운데 명품으로 손꼽히는 가가미진자 수월관음도는
화폭 크기는 254×430㎝로, 한 장의 비단에 그려졌다.
특히 불화에 사용된 비단은 중국과 일본회화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크기가 크고 화려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에도시대(江戶時代)의 기록을 보면 270× 500cm 였다고 되어 있어
현재 네 변이 조금 잘린 채 장황된 상태를 감안하면 원화는 더 크고 장대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불화는 <화엄경> ‘입법계품’에서 구도의 길에 오른 선재동자가
28번째 보타락가산에서 관음보살을 친견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그림 왼쪽 상단에는 화려하게 장식된 바위 위에 반가부좌 자세의 관음보살이 부들자리를 깔고 앉아 있다.
그 뒤로는 두 그루의 대나무가 서 있고, 앞쪽 정병에는 버들가지가 꽂혀 있다.
오른쪽 하단에는 선재동자를 표현하였는데
관음보살이 오른쪽에 배치된 다른 수월관음도와는 다른 화면 왼쪽을 향해 앉아 있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배경인 죽림과 암굴, 청정한 계곡, 산호가 피어오르는 물가 등은
모두 불교, 특히 화엄종 성산인 보타락가산을 나타낸다.
수월관음도는 『화엄경(華嚴經)』「입법계품(入法界品)」에서 선재동자가 보살의 가르침대로 행하기 위해
53선지식을 찾아가서 보살도(菩薩道)를 배우는 내용을 근거로 제작되었다.
그 중 선재동자가 28번째로 찾아간 선지식이 보타락가산의 관세음보살이다.
보타락가산(補陀洛迦山)은 인도 남쪽 바다 가운데 있는데 관세음보살은 이 곳에 머물면서
중생을 제도한다고 전해진다. ‘수월관음’이라는 뜻은 달이 높이 떠올라서 휘영청 밝은 가운데
관음보살이 물가의 벼랑 위에 앉아서 선재동자에게 법을 설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화면은 손상이 많은 편이지만 관음보살이 선재동자에게 자애로운 눈길을 보내는 장면은 뚜렷하다.
관음은 머리에 보살 특유의 보관을 썼는데 보관 중앙에는
관음보살의 대표적 징표인 아미타여래 화불을 모셨다.
상반신은 금색 피부를 노출했으며 빨강과 초록, 파랑과 같은 색색 구슬과 금을 가슴과 팔에 부착했다.
옷가지로는 다양한 문양을 넣은 치마를 두르고, 이를 복대와 끈으로 고정시켰다.
투명하고 얇은 베일은 머리에서 걸쳐 내려 전신을 덮은 모습이다.
한 줄기 버드나무가지를 꽂은 정병 또한 관음보살이 걸터앉은 기암 끝에서 찾을 수 있다.
지금은 없어졌으나 이 그림에는 원래 화기(畵記)가 있었는데
이노 타다타카(伊能忠敬)가 1812년 작성한 <측량일기(測量日記)>에 의하면
이 불화는 1310년 충선왕의 왕비였던 숙비가 지대(至大) 3년(1310)에 발원하고
김우문(金祐文), 이계(李桂), 임순(林順), 송연색을 포함한 8명의 궁중화가가 그린 것이다.
불화조성 후 100년이 되지 않은 1391년 승려 료우켄(良賢)이
지금의 가가미 진자(神社)에 진상했다고 나와 있다.
“畵成 至大三年 五月日, 願主王淑妃,
畵師內班從事金祐文, 翰畵直待詔李桂, 同林順, 同宋連色, 員外中郞崔昇(?)等四人”이라 하여
그림 원래의 화기(畵記)를 기록하고, 이 그림이 경신사에 오게 된 연유인 기진명(寄進銘)을 기록하였다.
또한 ‘통도사 금강계단과 도량장엄 의식구’ 특별전도 열리는데
그간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았던 불화들이 처음으로 공개되며
금강계단을 통해 전래되는 통도사 공유의 장엄구가 전시된다.
다른 사찰과는 달리 통도사는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계단의 특수성으로
많은 도량 장엄의식구들이 남아 있어 한국불교와 통도사를 이해하는데 좋은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최초로 모습을 드러내는 오계수호신장번과 십이지신번도 전시되는데,
오계수호신장번(幡, 1736년, 170×149.7㎝, 통도사 성보박물관 소장)은
불상샐, 불사음, 불투도 등 5가지 계율을 수호하는 신장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십이지신번(幡, 근대, 122.6×67.1㎝, 통도사 성보박물관 소장)은
사찰에서 큰 행사를 할 때 잡귀의 침범을 막고자 하는 의미로 12방위에 걸었던 족자형 그림이다.
그리고 오방불번(조선, 204×57.5㎝, 통도사 성보박물관 소장), 감로탱화(1580년, 개인소장)외
200여 점이 한꺼번에 공개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통도사성보박물관은
경주 황룡사에서 출토된 사리장엄구를 최초로 공개하는 ‘불사리장엄 특별전’을 비롯해서
티베트 유물, 감로탱화 특별전을 개최하였고,
또 지난 2006년부터 최근까지 일본 나라 강고지연구소와 사찰벽화 보존수리작업을 진행하였으며,
지난 10년간 매년 2회에 걸쳐 전국 사찰에 산재해 있는 10m가 넘는 괘불전시를 해왔다.
섬세 묘사로 종교 이상미 뽐내
"마하사다바야 마하가로니가야…" 세상 중생의 고난을 보살핀다는 자비의 관세음보살,
그의 그림 밑에서 불자들의 독경 소리는 그칠 줄 모른다.
달빛 아래 보타락가산 암벽에서 관음보살이 진리를 찾는 선재동자에게 불법을 일깨우는 그림,
이름하여 '수월관음도'가 고고히 빛나고 있다.
약 700년 전 고려 왕족의 불심을 담아 그려진 뒤
곧장 일본 땅으로 속절없이 떠나버린 이 불화의 과거는 이제 세월일 뿐.
화려한 보관에 훤히 비치는 베일을 두른 관음보살은 여전히 자애로운 얼굴로 세상을 내려다본다.
경남 양산 통도사 성보박물관(관장 범하 스님) 대형홀에서는
요즘 고려 불화의 최대 걸작으로 꼽히는 일본 가가미 진자 소장 '수월관음도'(도판 부분)를 볼 수 있다.
현전 고려 불화는 160여 점. 대부분 일본, 미국 등 외국에 있는데,
세로 4m, 가로 2m를 훌쩍 넘는 이 그림은 가로세로 1~2m 정도인 다른 고려불화들을 압도한다.
1310년 왕실 발원으로 그려진 뒤 곧장 유출된 것으로 짐작되는 이 불화는
1995년 호암갤러리 '대고려국보전'에 출품된 이래 14년 만에 들어왔다.
박물관 개관 10돌을 기념해,
연중 40일도 채 보여주지 않는다는 그림을 일본 쪽과 어렵게 교섭했다는 후문이다.
'수월관음도'는 단 한 폭의 대형 비단이 화폭이다.
바위 위에 반가좌로 앉은 수월관음의 설법 자태를 화려한 색채 기법으로 그렸다.
가까이에서 보면 우선 현실과 전혀 다른 종교화 특유의 순수하고 이상적인 아름다움과 만나게 된다.
금색 살갗에 귀갑문, 연꽃무늬 입힌 붉은 치마와 '시스루패션' 같은 투명 베일을 걸친 보살의 옷차림과
단아하면서도 영적인 자세가 눈을 쓸고 간다.
화면 오른쪽 하단의 작은 선재동자와 달리
거대 보살이 화면 상단과 하단을 압도적인 흐름으로 지배하는 시선의 구도가 숭고한 환영을 낳는다.
옛적 고려 화공들은 여백과 혼색을 싫어했다.
빨강, 흰색 등의 단순한 원색을 바탕색으로 칠하되 금물로 매혹적인 선묘를 부려 꽉 찬 화면을 만들었다.
날갯짓처럼 곡선 그리는 흰빛 실선으로 관음이 두른 베일이 투명하게 너울거린다는 느낌을,
입술을 금물로 덮었지만 위아래 입술이 맞붙는 곳과 언저리를 빨간색 톤으로 마무리 지어
색의 강약을 주었다.
투명한 베일에 흰 빛깔을 미묘하게 농도 조절하면서 구름과 봉황 무늬를 넣어
베일의 우아한 실존감을 드러낸 표현은 환상미의 극치다.
화면 왼쪽 하단의 대나무 바위 묘사는 수묵화의 먹 같지만,
자세히 보면 표면에 미세한 초록색을 덧입혀 먹색이 강해 보이지 않도록 조절했다.
이 그림을 과학적으로 조사해 지난 8일 통도사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시로노 세지 국립도쿄문화재연구소 연구원은
"정밀 분석 결과 보살 이마 위 백호는 1㎜도 안 되는 세밀한 나선 모양의 선을 계속 되풀이해 그린 것이며,
아래 바위도 초록색 안료를 입혀 그늘을 드리운 효과를 연출했다"고 밝혔다.
명문을 보면, 이 불화는
1310년 충렬왕과 아들 충선왕을 대대로 모신
후궁이자 그들의 사후 고려 권력자가 된 숙비의 발원으로 태어났다.
이 그림이 당시 왜구의 주요 본거지였던 규슈 서해안의 가가미 진자에 1391년 봉안됐다는
다른 후대 기록 또한 상상력을 자극한다.
고려 서해안에도 수시로 출몰했던 왜구들이 가져갔을 공산이 크다는 게 통설이지만,
명확한 진상은 수월관음만이 아실 것이다.
2009년 6월7일까지. (055)382-1001.
- 사진 : 통도사 성보박물관 제공
- 2009.05.11 ⓒ 한겨레신문사
수월관음도의 진실
<수월관음도>, 고려 1310년, 견본채색, 430cm×254cm 일본 가가미진자(鏡神社) 소장
1392년 7월 무인 이성계는 공양왕을 쫓아내고 조선왕조의 태조로 등극한다.
그 여덟달 전인 1391년 11월,
고려를 괴롭히던 왜구의 유력한 본거지였던 일본 규슈섬 서해안 사가현의 가가미 신사에
고려 불화가 한 점 들어왔다.
료켄이란 승려가 바친 불화는 고려 왕실이 정성껏 발원한 <수월관음도>였다.
보관 쓰고 온몸에 베일 두른 관음보살이 달빛 아래 암벽에서 진리를 묻는 선재동자를 바라보는 정경,
아름다운 불화였다.
그림 명문에는 1310년 5월 고려 26대 충선왕(재위 1308~13)의 후궁이던 숙비 김씨가
화원 8명을 시켜 그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고려사>를 보면 숙비는 원래 충선왕의 아버지인 25대 충렬왕의 후궁이었다.
원나라 출신 왕비를 잃은 부왕을 위해 충선왕이 과부였던 숙비를 애첩으로 들여준 것이다.
1308년 8월 충렬왕이 죽자 숙비는 왕위를 이은 연하의 충선왕과 동침하며 다시 후궁이 되어 권세를 부린다.
게다가 충선왕은 등극 석달 만에 원나라로 떠나 다시는 고려 땅을 밟지 않고 편지로 정사를 보았다.
불화는 그 뒤 1310년 5월 그려졌다. 일본 기록에 불화가 나타난 건 다시 그로부터 81년 뒤다.
왜 불화를 발원했을까. 그리고 또 어떤 곡절로 일본으로 갔을까.
학계에서는 발원 배경으로
충선왕의 아들 낳기 기원설, 다른 후궁 순비와의 권력투쟁설, 충렬왕의 원 왕비 추모설 등이 엇갈린다.
<고려사>를 보면, 1310~1391년은 왜구들이 교동도에 진을 치고 개경 부근까지 노략질을 일삼아
천도까지 논의하던 시기였다.
흥천사의 충선왕 영정이 탈취당하고, 태조 왕건의 아버지 초상까지 털어갔다는 기록들이 보인다.
그래서 이 기간 왜구가 개경 부근 사찰에서 <수월관음도>를 가져갔다는 추정이 통설이다.
지난달 30일부터 경남 양산의 통도사 성보박물관에서 전시중인 가가미 신사 소장 <수월관음도>는
바로 이 복잡다단한 역사적 곡절이 깃든 그림이다.
금물로 채색된 이 숭고한 걸작 앞에서 많은 이들이 옛 그림에 대한 자부심을 느꼈다고 말한다.
하지만 전시 준비 과정을 지켜본 일부 미술사학자들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1년간 공들인 전시가 막판에 한 국내 방송사의 취재 탓에 좌초될 뻔한 위기를 겪었다는 후문이다.
불화를 위탁 보관하면서 한국 전시 대여를 준비해온 일본 사가현립박물관에
지난달 국내 취재진이 찾아와서는 대뜸 불화를 가져간 왜구의 후손을 취재하려 하니 알선해달라고
부탁하더라는 것이다. 대경실색한 박물관 쪽은 곧장 통도사에 강한 불쾌감을 전했고,
통도사 쪽은 전시가 무산될까 봐 비상이 걸렸다고 한다.
신용철 학예실장은
“1년에 38일만 공개해온 불화를 선의로 빌려준 일본 쪽 인사들 앞에서 정말 난처했다”며
“추정 외엔 약탈 물증이 없는데도, 지레 약탈품으로 단정하는 듯한 태도는 역효과를 빚을 뿐”이라고
지적했다.
일제강점기에 강제로 빼앗긴 문화재는 돌려받아야 한다.
그러나 일본 곳곳에 숨은 불화, 회화, 사경, 종 같은 근대기 이전 유출 문화재들은 성격이 다르다.
약탈 물증이 명확하지 않고, 유출 경위조차 모르는 경우가 숱한데,
피해의식만 내세운다면 유물들은 더욱 깊숙이 숨어버릴 것이다.
현지에 숨은 우리 유물들을 발굴 · 조사하는 양국 전문가들을
나라에서 제대로 지원하고 키우는 배려가 먼저다.
우리가 유출 문화재에 애정이 있음을 그들에게 인식시키는 것이 실마리가 될 것이다.
오는 9월 국립중앙박물관의 100주년 특별전에
일본에 있는 안견의 <몽유도원도>가 온다는 뉴스가 인터넷에 떴다.
당장 나붙은 ‘약탈’, ‘송환 불가’ 등의 댓글들에 한숨이 나온다.
- 노형석, 한겨레 대중문화팀장 2009-05-12
현존 최대 고려佛畵 수월관음도 어쩌다 일본 신사(神社)로 넘어갔을까?
수월관음도에서 고려불화 중에 최고의 인기 품목은
보타락가산에 앉아서 용맹 정진하고 있는 반가부좌를 틀고 용맹정진하고 있는 수월관음
그리고 선재동자가 남쪽으로 쭉 돌아서 선지식들에게 물음을 구하다가
28번째 관세음보살에게 물음을 구하고 있는, 무릎을 꿇고 물음을 구하고 있는 그러한 모습이다.
옆에는 수정 같은 산에 대나무가 청죽이 두 개가 올라가고
머리에는 두광이 있고 몸에는 거신광이 둘러 있고
저쪽 바위에는 정병이 있고, 정병에는 버드나무가 꽂혀 있고 밑에 승반이 있는 것이
이게 정형으로 되어 있다.
수월관음도는 우리나라에서 아미타불화와 함께 가장 많이 그려지는 도상으로
선재동자, 암굴, 염주, 공양자, 보주를 든 용, 한 쌍의 청죽 등의 표현들은
다른 나라 수월관음도에서 볼 수 없는 특징들이다.
온갖 기화요초가 피어난 물가 바위 위에 부들자리를 깔고 쌍죽(雙竹)을 배경으로
관음보살이 반가(半跏)하고 앉았는데, 풍만한 몸과 얼굴, 시원스러우면서도 자애로운 눈매,
자연스러운 자세는 관음보살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머리 위에서 발끝까지 속이 훤히 비치는 바탕무늬가 없고 금색의 화려한 봉황과 구름무늬가 있는
얇은 사라(紗羅)로 몸을 감쌌으며, 기암의 한쪽 끝에는 한 불기 버들가지가 꽂혀 있는 정병(淨甁)이
놓여있는데 다른 그림과 달리 금테 두른 대접받침이 없어 이채롭다.
합장배례한 선재동자(善財童子)의 약간 어른스러운 모습이
부자연스럽지만 관음을 바라보는 경건한 눈은 매우 인상적이다.
‘가라쓰 가가미 진자 소재 고려 수월관음도의 유래’를 탈고한
이영(李領) 한국방송대교수(일본중세사 전공)는
“그림에 얽힌 사연을 알기 위해서는 고려가 몽골의 간섭을 받던 14세기 초의 상황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일본측 <측량일기>에 의하면 1310년(충선왕 2) 숙비(淑妃)의 지시로 그렸다.
숙비는 젊어 한 번 시집을 갔다가 과부가 되었는데
충선왕이 세자시절 아버지 충렬왕을 위해 그녀를 후궁으로 올렸다.
그런데 1308년 충렬왕이 죽게되자 충선왕은 아버지의 후궁인 숙비를 자신의 후궁으로 삼았다.
<고려사>는 ‘비(妃)가 밤낮으로 온갖 아양을 다 부리니 왕이 혹해 친히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이때 충선왕은 만 33세였고, 숙비는 서너살 연상이었다.
숙비는 오빠 김문연(金文衍) 출세시키며 내정과 외교에서 영향력을 키웠는데
그녀에게는 숙비가 충선왕의 후궁이 되기 3일전 후궁이 된 순비(順妃) 허씨가 경쟁자였다.
둘 다 빼어난 미모와 동시에 명문집안출신, 비슷한 나이의 충선왕의 후궁이었다.
두 여인은 한 연회에서 다섯 번이나 옷을 갈아입으며 서로 옷차림을 뽐냈다는 기록도 있다.
한편, 순비는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난 딸이 원나라 황태자비가 되었는데
숙비를 원나라로 소환하도록 사위에게 청하였다.
그러나 1309년 중랑장 윤길보(尹吉甫)가 황태자를 설득해 소환은 취소되었으나
숙비는 왕실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강화해야 할 필요성에 직면하였다.
그녀는 종교적인 권위를 세우는 방법을 택했다.
1309년부터 1311년까지 개경 인근에 대규모사찰인 민천사(旻天寺)와 흥천사(興天寺)가 건립되었는데
당시는 충선왕과 왕후인 계국대장공주가 원나라에 가 있었던 시기이므로
왕실에서 최고 지위를 지닌데다 열성적인 불교신자였던 숙비가
그 공사를 주도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녀가 ‘수월관음도’ 제작을 지시했던 1310년은 바로 이같은 상황 속에 있었다.
그렇다면 숙비는 ‘수월관음도’를 과연 어디에 두었을까.
이영 교수는 당연히 사찰이었을 것이고, 남편인 충선왕과 관련된 장소였을 것이며,
관음보살의 영장(靈場, 신성한 장소)인 바닷가 근처였을 것으로 분석했다.
이 조건을 모두 만족시키는 곳은
충선왕의 영정(초상화)이 안치되어 있는 예성강 하구와 가까운 흥천사밖에는 없다.
<측량일기>에는 ‘수월관음도’가 가가미 진자에 바쳐진 취지를 기록한 글이
1391년(공양왕 3)에 쓰여졌다고 기록했다.
그렇다면 ‘수월관음도’는 1310년과 1391년 사이에 발생한 ‘어떤 사건’에 의해
흥천사에서 일본으로 옮겨진 것이 틀림없다.
이제 <고려사>의 1357년(공민왕 6) 9월26일의 기록을 보자.
“왜구가 승천부의 흥천사에 침입해 충선왕과 계국대장공주의 초상화를 가지고 갔다.”
가가미 신사의 ‘수월관음도’는 물론, 대마도 다구쓰다마(多久頭魂)신사의 대형청동 징,
金字 묘법연화경 등 문화재들이 모두 이때 약탈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영 교수는 “14세기 말의 왜구는 가난한 어민 출신의 도적떼가 아니었다”고 말한다.
규슈의 토호세력 쇼니 요리히사(少貳賴尙)의 지휘 아래 군량미와 물자를 얻기 위해
계획적으로 한반도를 침공했던 숙련된 무사의 테러집단이 ‘왜구’였다는 것이다.
현존하는 고려불화 120여 점 중 국내에 소장되어 있는 것은 10여 점뿐이며,
나머지는 대부분 일본에서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2009. 4. 4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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