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동전(銅錢)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동전(銅錢)인 조선통보(朝鮮通寶))와 상평통보(常平通寶)가
통용된 역사를 살펴 화폐의 경제적 가치를 살펴보고자 한다.
조선통보(朝鮮通寶)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최초의 동전으로, 저화(楮貨) 유통의 부진을 보완하기 위하여
세종 5년(1423)에 唐의 개원통보(開元通寶)를 모방하여 만들었다.
동전을 만들어 사용하자는 논의는 태조 3년(1394)부터 있었고,
태종 15몀(1415) 조선통보의 주조, 유통문제가 결정되었다가 중단되기도 하였다.
이후 저화의 가치가 폭락하자 세종 4년(1422) 동전을 주조 발행하여 저화와 함께 사용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동전은 해서체로 ‘조선통보(朝鮮通寶)’라고 썼고, 10전(錢)을 1냥(兩)으로 하였다.
동전의 주조 발행은 사섬서(司贍暑)에서 관장하였고
서울, 경기도, 경상좌우도 등 각 지방에서도 주조되었다.
이 동전은 저화와 1 : 2의 가치로 함께 유통되었는데
저화는 거의 유통되지 못하여 세종 7년(1425) 중단되었다.
이후 동전도 일반인들이 실질가치가 큰 베(布)나 쌀(米) 등을 주로 사용함에 따라
세종 27년(1415) 저화가 다시 사용되면서 유통이 중단되었다.
이후 인조 11년(1633) 국가재정과 국민의 생활을 풍족하게 한다는 호조(戶曹)의 건의로
동전 주조가 다시 시작되었다. 이때 만들어진 동전은 明의 만력통보(萬曆通寶)를 모방하였는데,
이전의 조선통보와 구별하기 위하여 서체를 팔분서체(八分書體)로 바꾸어 만들었다.
동전의 주조는 호조가 주관하였는데 중앙 뿐 아니라 지방에서도 주조되었다.
그러나 이 조선통보는 실제로 거의 유통되지 않다가
인조 14년(1637) 병자호란으로 인해 주조가 중단되었다.
상평통보(常平通寶)
상평통보는 숙종 4년(1678)부터 고종대 근대화폐가 발행되기까지 통용된 대표적인 금속화폐이다.
병자호란으로 중단된 동전의 주조는 숙종 당시 영의정 허적의 제안으로 재개되었다.
상평통보의 ‘상평(常平)’은 ‘상시평준(常時平準)’의 줄인 말이다.
이 말은 유통 가치에 등가를 유지하려는 의도와 노력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화폐는 기본적으로 외형이 납작하고 둥근 가운데 네모난 구멍이 있다.
앞면에는 ‘常平通寶’라는 글자가 적혀 있고,
뒷면에는 주조한 관청의 줄여 쓴 명칭, 천자문(또는 五行) 중의 한 글자, 숫자나 부호 등이 표시되어 있다.
종류, 모양 및 개수, 글자의 서체 및 크기, 테두리의 너비, 명목가(名目價)의 표시 및 동전의 크기 등의
차이를 통해 그 유형을 다양하게 세분할 수 있다.
이 화폐는 중앙의 7개 기관과 감영 및 군영 등에서 주조하였다.
그러나 이후 통화량의 조절 등 상황에 따라 주전소를 줄이거나 늘렸으며,
정조 9년(1785)부터 호조만 주조하다가
순조 대에는 세금징수를 목적으로 사주(私鑄)도 가능해져 주조된 동전의 양이 크게 늘어났다.
그러나 고종 31년(1894)에 신식화폐가 주조됨에 따라 상평통보의 주조는 종언을 고하게 되었고,
기존의 화폐도 보조화폐로서의 기능을 갖게 되었다.
동전의 주조를 통해 납세 징수와 재정 지출을 점차 현물 위주에서 화폐로 그 비중을 늘려 나갈 수 있었다.
또한 농업 위주의 자연경제에 민간의 물자 생산과 유통을 활성화하는데 기여하였고,
화폐 생산에 따른 수공업 및 광공업의 발전에도 기여하였다.
- 이효종, 국립중앙박물관 역사관 사회경제실
- 큐레이터와의 대화 121회, 2008년 12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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