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백리 황희의 반구정 vs 권모술수 한명회의 압구정
삶만큼 극명한 대조
가슴속 어떤 정자에서 갈매기와 벗 삼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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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파주 임진강변의 반구정(伴鷗亭)과 서울 강남 한강변의 압구정(狎鷗亭)은 각각 조선시대에 ‘일인지하 만인지상’인 영의정을 지낸 황희(黃喜 · 1363~1452)와 한명회(韓明澮 · 1415~1487)가 퇴은(退隱) 후 세상의 치란성쇠(治亂盛衰)를 잊고 갈매기와 허물없이 짝을 지어 즐기고자 지은 ‘강정(江亭)’이다.
현재 압구정은 불타버려 압구정동이라는 이름으로만 남아 있지만 반구정은 자유로를 타고 가다 연천으로 빠지는 문산읍 사목리에 황희 정승 유적지로 고즈넉하게 남아 있다.
황희와 한명회. 반세기의 격차를 두고 태어난 두 정승의 삶은 드라마틱하면서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황희는 조선 왕조에서 가장 명망 높은 청백리 재상으로, 한명회는 권모술수의 대가로 역사에 자리매김했다. 이들의 삶을 통해 금권(金權)과 연루돼 비리가 난무하는 저간의 세상에 대한 교훈과 처세를 반추해보자.
67세 황희, 파직되자 반구정 지어 청백리 생활
황희는 고려조 거인(擧人)으로 허조(許稠 · 1369~1439)와 더불어 조선조에 입각한 대표적 인물이나, 본래 고려가 망하자 역성혁명에 반발해 조선 왕조에 출사하지 않고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한 유신(遺臣)이었다. 그러나 젊은 나이라는 연유로 두문동 선배들의 강권을 받아 2년 후 하산해 태종 · 세종대에 병조판서, 예조판서, 이조판서, 좌의정, 영의정 등의 환로(宦路)를 거치며 개국 초기의 문물과 제도를 정비하고 높은 학덕과 청렴으로 조선 명재상의 사표가 됐다.
반구정은 황희가 67세 되던 해 국마(國馬) 100여 필이 죽는 사건이 발발해 당사자인 태석균(太石鈞)이 사헌부에 구금되자 “가볍게 다스려달라”고 건의하다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일시 파직돼 교하에 은거하면서 지은 정자다.
황희는 정치(精緻)하면서도 소탈한 성품 덕에 많은 일화를 남겼는데 특히 ‘언언시시(言言是是)’가 유명하다. 어느 날 적각(赤脚 · 여자 종) 간에 언쟁이 벌어졌는데 마침 황희가 옆을 지나게 됐다. 그러자 한 적각이 억울함을 호소하며 시비를 가려달라고 했다. 황희는 그 말을 다 듣고 동정하듯 “너의 이야기가 옳다”라고 수긍했다. 그러자 또 다른 적각이 분하다는 듯이 자신의 주장을 말했다. 황희는 이 역시 다 듣고는 “네가 말하는 것도 옳다”라고 달랬다. 옆에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황희의 부인이 “당신은 싸움을 말리는 거요, 부채질하는 거요? 사물에는 일시일비(一是一非)가 있지 않아요. 당신 말대로 두 사람이 모두 옳다면 싸움을 하겠어요?”라고 나무라자 황희는 “당신의 말도 옳은 말이야”라고 해 싸움판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또 다른 일화도 있다. 어느 해 중국에서 구슬에 구멍을 뚫은 진품(珍品)을 조정에 보내왔는데, 중국 사신이 “중국에는 이 구슬 구멍에 실을 꿰어 반대쪽 구멍으로 내보내는 사람이 있는데 귀국에는 아마 없을 것이다”라고 폄하하는 발언을 했다. 황희가 그 구슬을 들고 구멍을 들여다보니 곧게 뚫리지 않고 구불구불해 반대쪽 구멍이 보이지 않았다. 이러니 실오라기가 들어갈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그의 삶은 결과가 참담해 손자 한경기(韓景琦 · 1472~1529)는 할아버지의 삶을 수치스럽게 여겨 심성을 닦는다고 언제나 홀로 문을 닫고 앉아 아내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으며, 계집종들이 근처에만 와도 지팡이를 들고 쫓아가 야단을 쳤다고 한다. 한경기는 과거에 급제했지만 할아버지의 비정한 행적을 알고 허무주의에 빠져 공신의 손자라 하여 나라에서 준 음직(蔭職)도 마다했으며, 세상을 등지고 살아간 남효온, 홍유손 같은 선비들과 어울려 시와 벗하고 살아 할아버지 한명회와는 달리 죽림칠현(竹林七賢) 또는 조선의 이태백이란 말을 들었다.
최근 서울 강남구가 ‘한강 공공성 회복 사업’의 일환으로 압구정을 복원하고자 압구정 복원자문위원회를 구성했다고 발표했다. 잊힌 역사의 복원이라는 점에서는 반갑지만 그다지 긍정적이지 못한 인물과 문화유산의 복원이라 씁쓰레하다.
황희와 한명회의 삶만큼이나 정자 또한 대조를 이뤄 오늘을 사는 후손에게 의미 있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오늘, 나 자신을 위하여 또는 후손을 위하여 가슴에 정자를 짓는다면 반구정과 압구정 중 어느 것을 지어 갈매기와 벗 삼아 즐길 것인가.’
- 이영철 목원대 겸임교수·역사학 hanguksaok@hanmail.net - 주간동아, 2009.05.05 684호(p78~79)[이영철 교수의 5분 한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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