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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발명국임을 고증한 박병선 박사
(1)프랑스 국립도서관 소장 외규장각도서 순강원 <상시봉원도감의궤(어람용)> 표지 국내에 없는 유일본이다. (2) 박병선박사가 받은 제7회 비추미여성대상특별상 트로피 |
《직지》는 충청북도 청주 흥덕사에서 1377년(고려 우왕 3)
금속활자로 찍은 책으로
《직지》의 정식 책 이름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로 백운 스님이 부처님과 부처의 제자인 인도와 중국 및 한국의 역대 고승(高僧)이 남긴 말씀 중 선(禪)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내용을 요약한 책이다.
이 책은 백운화상에 의해 저술되었고,
그의 제자인 석찬과 달잠 그리고 재정적지원자인 비구니 묘덕 등에 의해 두 가지 형태로 책이 만들어졌다.
하나는 앞서 설명한 금속활자로 찍은 책이고,
또 하나는 1378년 백운화상이 입적(入寂 : 사망)한 경기도 여주 취암사에서 목판으로 찍은 책이다.
1378년에 인쇄된 목판본 《직지》는
현재 국립중앙도서관, 한국학중앙연구원(장서각)에 상, 하권이 보존되어 있으며,
1997년 전라남도 영광 불갑사에서 출토되어 총 3종의 목판본이 국내에 현존한다.
이에 반해 금속활자본 《직지》는 하권 1책 만이 프랑스파리국립도서관(동양원서부)에 보존되고 있다.
금속활자본 《직지》는 19세기 말에 초대 주한 프랑스공사로 부임한 꼴랭드 쁠랑시가 수집하여
프랑스로 반출하였다. 그 후 《직지》는 1911년 드루오경매장에서
꼴랭드 쁠랑시 소장 컬렉션 경매 때 앙리 베베르가 구입하여 보존하고 있다가,
1953년 앙리 베베르의 유언에 따라 프랑스국립도서관에 기증된 것이다.
금속활자본 《직지》에 대한 기록은
꼴랭드 쁠랑시와 조선에서 함께 근무한 모리스 꾸랑이 1901년 지은 《조선서지》에 있다.
이 책은 불어판으로 출간되었지만 당시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한국이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 사용했다는 사실을 서구의 학자들은 인정을 하지 않았다.
백인우월주의와 서양의 문물이 동양을 앞지른다는 고정 관념에서 나온 결과였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 한국이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 사용했음을 고증하여
유럽내 동양학 학자들의 모임인 동양학 학회에서 이 사실을 발표하여 인정받은 분이 박병선 박사이다.
그 후에야 많은 한국의 학자들에 의해 연구되었다.
(위) 프랑스 국립도서관 외규장각 도서 <문회묘영건청등록>의 본문
정조의 아들 문효세자의 사당인 문희묘를 세우는 과정을 기록한
건축일지로 국내에 없는 유일본이다.
(왼쪽) 청주 고인쇄박물관 방문 당시 박병선 박사(2008,7.17)
(오른쪽) 청주 고인쇄박물관 직지 금속활자 인쇄과정
6.25후 초기의 프랑스 유학생
박병선박사는 192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와 큰 오빠는 일제 강점시기 서울에서 사업을 하면서
비밀리에 중국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들에게 자금을 조달하신 분이다.
그녀는 1950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사학과를 졸업했다.
졸업 후 도불을 원했던 그녀는 6.25를 겪었고 프랑스 유학을 결심한 후 마침내 고국을 떠나게 된다.
프랑스 유학을 위해 모교 은사님들에게 인사를 다니던 그녀에게, 이병도 선생은 다음과 같은 당부를 한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이 강화에서 약탈해간 물품의 행방을 찾게.”
은사의 이 한마디는 프랑스 유학의 숙명으로 받아들였고,
약탈해간 물품의 소재를 찾는데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해방 이후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이 된 그녀는
프랑스인들의 한국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소르본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하면서
프랑스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만나서 한국에 대하여 알리고자 노력하였다.
프랑스에 유학중인 그녀는 학문에 남다른 열정을 기울였고,
많은 정보를 섭렵하고자 파리국립도서관을 자주 출입하면서 도서관내 많은 서적을 접하였다.
그녀의 잦은 도서관 출입은 도서관 직원들 사이에 회자되었고, 특별연구원으로 채용되는 결과를 낳았다.
(왼쪽) 목판인쇄와 활자인쇄
(가운데) 청주고인쇄박물관 직지금속활자 인쇄과정
(오른쪽) 위 - 청주고인쇄박물관 방문 당시 박병선박사(2008.7.17)
아래 - 청주고인쇄박물관에서 직원들과 함께(2008.7.17)
박병선 박사는 《직지》를 1967년경에 처음 접했다. 이 책은 한국 서적 코너 한 귀퉁이에 있었다.
《직지》의 마지막 장에 쓰여진 간행기록을 본 박병선 박사는 소스라치게 놀랐다고 한다.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인쇄되었다고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꼴랭드 쁠랑시와 모리스 꾸랑도 만약 간행기록이 사실이라면
독일 구텐베르크 금속활자보다 70여년 앞서 한국이 금속활자를 먼저 사용했음을 의심을 가지고 다루었다.
그러므로 박병선 박사는 이에 한국 금속활자임을 고증하기 위해 인쇄술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한국 금속활자 인쇄술에 대한 연구는 처음부터 어려움이 많았다.
우선 프랑스에 중국과 일본에 대한 인쇄술 관련 책자는 있지만,
한국 인쇄술과 관련된 책자는 전무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에 박병선 박사는 한국에 있는 친구나 친지들에게 한국 인쇄술과 관련된 책을 요청하였지만,
돌아온 것은 관련 자료가 없다는 회신뿐이었다.
당시 한국에서는 인쇄술을 연구하는 학문인 ‘서지학’이 막 태동하는 시기였기에
박병선 박사가 만족할 만한 자료를 제공할 수 없었다.
이에 박병선 박사는 프랑스내 간행되어 있는 중국과 일본 인쇄술 관련 자료를 섭렵하고
프랑스내 대장간을 돌며 금속활자 인쇄술에 대한 연구를 지속했다.
또한 감자와 지우개 등 각종 재료를 사용하여 금속활자와 목판 인쇄술의 차이점을 증명하고자 노력하였다.
이 와중에 3번의 화재를 겪었다.
납활자를 만들기 위해 가스렌지에 납을 녹이면서 다른 연구를 하던 중 화재가 난 것이다.
박병선 박사는 이런 갖은 난관을 극복하며 마침내 《직지》가 금속활자로 인쇄되었음을 증명하였다.
이 연구 성과는 1972년 프랑스국립도서관 주최로 개최된 “BOOKS” 전시회와
1972년 개최된 유럽내 ‘동양학 학자대회’에서 발표되어 인정받았다.
조국을 위한 그녀의 또 다른 행보
박병선 박사에 의해 《직지》가 금속활자로 인쇄된 것임이 고증되어
한국이 독일보다 70여 년 앞서 금속활자를 발명, 사용했음을 서구에서 인정하자
국내에서는 이 사실을 대서특필하였다.
박병선 박사의 《직지》에 대한 연구는
그 후 국내 서지학 학자들에 의해 계승되어 많은 연구 성과를 낳았고,
궁극적으로 2001년 9월 4일 《직지》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는 쾌거를 이루었다.
직지의 고장 청주시에서는 박병선 박사의 노고를 기리기 위해
1999년 4월 청주시명예시민증을 수여하였고,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1999년 9월 은관문화훈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박병선 박사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청주고인쇄박물관내 ‘박병선실’을 설치 · 운영하고 있다.
1972년 《직지》고증 이후, 박병선 박사는
본격적으로 《외규장각 도서》소재를 파악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박병선 박사가 《외규장각 도서》의 행방을 찾은 것은 1978년이었다.
도서관 구내식당에서 전에 같이 근무했던 직원과 식사를 하던 중
우연찮게 《외규장각 도서》가 거명되었고,
이 직원의 제보로 프랑스국립도서관 별관 수장고에서 이 책을 찾았다.
《외규장각 도서》의 소재를 찾고자 결심한 지 20여 년 만에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외규장각 도서》는 베르사이유에 있는 파리 국립도서관 별관에(파손된 서적을 보관하는 건물)
방치되고 있었던 것이다.
《직지》를 찾아 고증한 이후 열광했던 프랑스국립도서관은
《외규장각 도서》를 찾은 그녀에게 권고사직이라는 선물을 안겨 주었다.
이렇게 프랑스국립도서관을 떠난 박병선 박사는 현재까지
프랑스에 한국을 알리거나 유럽지역에 보관되어 있는 한국 관련 자료를 수집 연구하고 있으며,
프랑스에 있는 숨어있는 한국 독립운동 자료를 찾아 고증하고 있다.
청주 흥덕사지 통일신라부터 고려 후기까지 그 명맥을 유지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절터로, <직지심체요절>을 금속활자로 인쇄한 곳. |
박병선 박사는 매년 청주시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하고 있다.
그러나 아무도 그녀가 오십 여 년이란 긴 세월을 때때로 수돗물로
허기를 면하고 명예도 사생활도 희생해가며 문화재를 찾는데
헌신하고 있는 나약한 여성이라는 것을 알고 인정하는 한국인들은 많지 않다.
박병선 박사는 파리에 유학하고 있는 한국학생들에게
“조국이 너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지 말고,
네가 조국에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찾아서 하라.”는 말씀을
항상 하신다.
이 말은 프랑스 유학생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어야 하지 않을까?
- 라경준 고인쇄박물관 학예연구실장
- 사진, 눌와, 경향신문사
- 월간문화재사랑, 2009-04-13
박병선 박사(1929-2011)는 우리 문화재를 찾고 그 가치를 알리는데 평생을 바친 인물로,
서울대 역사교육과를 졸업하고 1955년 전쟁이후 최초로 유학비자를 받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 뒤,
파리제7대학교 대학원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은 박병선박사는
1967년부터 13년 동안 프랑스 국립도서관(BNF)에 사서로 근무하면서
1972년 프랑스 국립도서관의 귀퉁이에서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을 발견하고
중국과 일본 등 아시아의 인쇄술에 대해 연구하고
직접 감자와 지우개를 통해 활자체를 만들어 비교하는 등 갖은 노력 끝에
직지가 1455년에 나온 구텐베르크 성서보다 78년이나 빠른 1377년에 만들어진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이라는 사실을 1972년 입증했다.
이로써 2001년 비로소 직지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고
박병선박사는 ‘직지의 대모(代母)’로 일컬어졌다.
박병선 박사는
“직지를 볼 때마다 먼 옛날 스님들이 활자체로 경전을 찍어내던 성스러운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한국문화의 정체성은 역사에서 찾아야 하고 그러한 역사가 문화유산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우리 문화재의 상당 부분이 유럽에 있지만 그것을 돌려달라고 주장하기에 앞서
역사와 문화재를 아끼는 그들의 정신부터 배워야 한다.
과연 직지가 프랑스에 보관돼 있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남아있었을까 하는 반성부터
진지하게 해야 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박병선 박사는 프랑스 외교부에서 한국독립운동 관련문서를 찾아내는가 하면
한국과 관련된 모든 자료를 50년 넘게 수집해
무려 1만5,000쪽 분량의 문서와 2,000상자가 넘는 한국 자료를 보관하기도 했다.
1999년 4월에는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대방광불화엄경변상도(大方廣佛華嚴經變相圖)’를 비롯해
15종 46점을 청주시에 기증하였다.
한편 병인양요(1866) 당시 프랑스에 의해 약탈당한 외규장각 도서를
프랑스 국립도서관 별관 지하 폐지 창고에 찾아내 흩어져있던 297권을 모두 찾아냈다.
1975년 외규장각 도서의 소식을 파리주재 한국 기자들에게 제보해 관련 사실을 국제적으로 알렸지만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는 ‘비밀 누설’ 구실로 사표를 요구해 1980년 불명예 퇴직했다.
프랑스 국립도서관 직원들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외규장각 도서를 펼쳐놓은 박병선 박사를 보고
‘파란 책에 파묻힌 여인(La femme cachee derrie relelivrebleu)'라고 했다.
외규장각 도서의 표지가 파란색(어람용의궤가 녹색표지에 둥근 놋쇠고리 장식 있음)이었다.
박병선 박사는 매일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외규장각 도서를 열람해 개인적으로 목차를 정리하는 등
외규장각 도서의 국내로의 반환운동에 힘을 기울였으며,
뒤이어 서울대규장각의 반환 요구, 1992년에는 한국정부의 공식적인 입장 표명 등으로
프랑스에 도서반환 요청을 나섰다.
결국 145년만인 2011년 5월27일 ‘대여’형식으로나마 외규장각도서를 돌려받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당시 “의궤가 다시 프랑스에 가지 않고 한국에 영원히 남도록 노력해주시길 부탁 올립니다”라는
소감을 밝혔던 박병선 박사가 40년 간 반환운동을 펼쳐온 외규장각 도서는 총 190종, 127권으로,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이 약탈해간 문화재 가운데 일부다.
한국 정부는 그의 공로를 인정해
2007년 국민훈장 동백장, 2011년 8월에는 국민훈장 모란장을 서훈했다.
박병선 박사는
프랑스 현지시간 2011년 11월22일 오후 10시40분(한국시간, 11월23일 오전 6시40분) 별세했다.
향년 83세.
2008년 9월 직장암 4기 선고를 받은 뒤 2009년과 2010년 직장암 수술을 받고
프랑스 파리 시내 15구 잔 가르니에 병원에서 요양생활을 했다.
2011년 6월11일 '외규장각도서 귀환' 대국민 환영식에 참석했고,
병인양요와 외규장각의궤 약탈 과정을 담은 책(‘병인년, 프랑스가 조선을 침노하다’)을 집필중이었으며,
외규장각 의궤 등 반환도서가 ‘일시대여’ 형식이 아닌 ‘완벽반환’으로 꼭 마무리 해달라는
유언을 남긴 채 작고했다.
빈소는 프랑스 파리에 있는 한국문화원에 마련됐으며,
한국 정부는 국립묘지에 안장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 2011년 11월 23일
직지(直指)대모, 외규장각 의궤 귀환의 영웅
박병선 박사 별세
故 박병선 박사님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외규장각 의궤의 존재를 알리고, 귀환 노력을 펼친 박병선 박사님이
2011년 11월22일 별세하셨습니다.
지난 여름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외규장각 의궤 귀환 특별전 <145년만의 귀환 - 외규장각 의궤>를
개최하여 자랑스런 우리 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박병선 박사의 환수 노력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더욱 뜨거운 여름을 보냈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빌며 박사님의 고난했지만 빛나는 업적을 함께 되새겨 봅니다.
박병선 박사 공적
● 프랑스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던 <직지심체요절>과 <외규장각의궤>를 최초로 발견하여
세상에 알리는데에 결정적인 공헌
ㅇ 박병선 박사는 우리나라 여성유학비자 1호로 프랑스로 유학하여 역사학 박사(프랑스 파리제7대) 취득 및 1967~1980년까지 프랑스 국립도서관 직원으로 근무하면서 동서관에 보관되어 있던 「직지심체요절」과 외규장각 의궤 297권을 최초 로 발견하여 외규장각 의궤의 존재를 처음으로 세상에 알리게 됨.
ㅇ 프랑스 국립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직지심체요절」이 우리 문화재임을 발견하고, 직지심체요절이 현존하는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임도 직접 실험을 통해 밝혀냄으로써 우리 민족의 선진적 인쇄기술과 문화적 전통을 전세계에 알리는데 큰 공헌을 하였음
ㅇ 30여 년의 긴 세월동안 자비로 혼자서 외규장각 의궤목록과 요약본을 불어로 정리하고, “병인년, 조선을 침노하다”라는 한국어/프랑스어 서적을 발간, 병인양요 등 의궤 반출 배경과 외규장각 의궤 반환 문제를 전 세계적으로 이슈화함으로써 외규장각 도서반환 운동을 촉발시키고 결과적으로 우리나라로 반환하게 이끈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음
●「직지심체요절」이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임을 직접 증명하고,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토록 하는데 산파 역할을 한 직지의 대모
ㅇ 박사는 프랑스 국립도서관 한국코너 한 귀퉁이에 있었던 직지를 처음 접했으나, 직지를 단순히 찾아내는 데에 그치지 않고 세계최고본으로 인정받던 구텐베르크 성서보다 78년이나 앞서 금속활자로 인쇄된 책자라는 사실을 직접 증명해냄으로서 한국이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사용했다는 사실을 인정케 하고,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전세계에 알리는 중요한 진실을 세상에 처음 드러냄
- 독일 구텐베르크 금속활자보다 한국이 78년이나 앞서 사용했음을 증명하기 위하여 당시 한국인쇄술에 대한 자료가 전무한 상태에서 중국, 일본의 인쇄술관련 책자를 섭렵하고 프랑스내 대장간을 돌며 금속활자 인쇄술에 대한 연구를 하였음
- 감자와 지우개 등 각종 재료를 사용, 금속활자와 목판인쇄술의 차이점을 직접 증명하며 3번의 화재까지 겪는 험란한 과정을 거쳐 마침내 직지가 금속활자로 인쇄되었음을 증명하였음
- 이러한 연구성과는 유네스코가 정한 1972년 “세계도서의 해”에 프랑스국립도서관 주최 “BOOKS" 전시회와 유럽내 ”동양학 학자대회”에서 발표되어 인정을 받았음.
ㅇ 박사의 직지에 대한 연구는 그 후 한국 서지학 학자들에 의해 계승, 많은 연구 성과를 낳았고, 궁극적으로 2001년 9월 직지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는 쾌거를 이루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
- 직지는 유네스코에서 해당국가에 있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지구상에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책이기 때문에 소재가 어딘가에 대해서는 전혀 문제시하지 않고 세계기록유산으로 선정된 유일한 사례로서, 박사의 연구성과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유네스코에서 인정한 것임
- 특히, 금속활자의 발명은 1999년 미국 유명시사지<라이프>에서 조사한 인류역사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준 100대 사건 중 1위를 기록할 만큼 인류역사상 중요한 사건이었는데, 우리나라에서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사용했다는 사실을 증명한 것은 엄청난 발견으로서 세계최고의 금속활자를 만든 나라라는 민족적 자긍심을 심어주었음
- 또한, 박사는 「한국의 인쇄」를 프랑스어, 영어, 스페인어, 한국어 등 4개국어로 발간(2002~2006), 전 세계에 배포함으로서 한국의 인쇄기술을 세계적으로 널리 알리는데에 결정적으로 기여하였음
● 강대국의 문화적 침략에 홀홀단신 대항한 문화독립운동가로서 애국애족을 직접 실천한 국가유공자
ㅇ 병인양요를 통해 프랑스로 반출된 우리 문화재를 찾기 위하여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 힘으로 30여년의 긴 세월동안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가면서 의궤를 세상밖으로 꺼내는 추적과정은 가히 21세기의 문화 독립운동가라 할 수 있음
- 프랑스국립도서관에서 13여년 근무하면서 어느 누구의 도움도 전혀 없이 매일같이 외규장각 도서목차를 베끼고 내용을 정리하는 등 혼자만의 외롭고도 고독한 연구의 길을 걸어왔음.
자그만 체구에 큰 의궤책속에 묻혀사는 ‘파란책 속에 묻혀 사는 여성’으로 불리기도 하는 등 자신의 모든 것을 의궤에 바쳐왔음
- 박사 개인의 골동품까지 팔아가며 연구비용을 조달했으며, 의궤연구에 대한 끝없는 욕심과 열정탓에 시간이 없어서 밥도 제대로 못먹고 물과 커피로 배를 채우는 시간들이었다는 지독한 자기헌신과 열정은 오늘날 우리의 귀중한 문화재인 외규장각 의궤 반환의 초석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음
ㅇ 당시 프랑스국립도서관측의 박사 개인에 대한 지독한 냉대와 의궤도서에 대한 보호장치 강화 등은 외규장각 의궤의 중요성을 프랑스 정부에서 인정했다는 증거라 할 수 있음
- 도서관측은 한국에서의 언론보도를 매일매일 스크린하는 등 극도로 예민하게 대응하며 국립도서관의 비밀을 외부에 누설시켰다는 반역자 취급을 하며 박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였고, 결국엔 한국에 외규장각을 알렸다는 이유로 질책을 받아 사실상의 해고조치를 당함
- 도서관당국의 강제적인 의궤도서 대출금지 조치에도 불구하고 매일같이 계속되는 박사의 출근투쟁으로 하루 한 권씩 과장 허가를 받아 대출하되 무슨 내용을 본 것인지 보고토록 바뀌었고, 이후 몇해동안 계속되는 박사의 지칠줄 모르는 연구노력에 결국은 자유롭게 대출이 가능하게 되었음
- 평소 우애가 두터웠던 박사의 도서관 동료들에게도 박사를 절대로 도와주지 말도록 조치하였다고 함
- 의궤 발견당시에는 일부 찢어지기도 하고, 훼손되기도 한 상태였으나, 박사의 의궤연구 발표 이후 외규장각 사료에 대한 국내외에서의 관심이 제고되고, 한국에서 반환문제가 대두되면서 처음에는 도서카드도 없던 ‘파지’ 상태에서 중요도서로 격상되는 등 프랑스 정부차원의 강력한 대응조치를 가져오기도 함
ㅇ 박사는 결혼도 포기하고 한국에서의 교수직 제의도 거절하며, 프랑스국립도서관측의 박해와 설움을 받아가면서도 반평생 연구에만 몰두하시며 외규장각 위궤 귀환이라는 국가적 과업의 불씨를 당기고, 우리나라의 잃어버린 역사 한쪽을 145년만에 찾아준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음
ㅇ 외규장각 의궤의 반환은 단순한 문화재의 반환이 아닌, 조선이라는 국가의 공식문서의 반환이라는 역사적 명분을 가짐으로써 앞으로 우리나라와 프랑스 등 선진국간의 미래를 위한 신국제관계를 형성하는 초석을 마련한 것임
- 의궤는 단순한 문화재가 아니라, 왕실이나 국가의 주요행사의 내용을 정리한 당시 조선이라는 국가의 공식문서로서의 중요성과 우리 한국민의 민족의 얼이 담긴 아주 중요한 문화재라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기록되어야 할 사항임
- 외규장각 의궤 반환은 한-프랑스간 외교관계의 강화, 미래발전을 위한 걸림돌 해소라는 국익차원에서 성사가 되었다는 점에서 단순한 문화재의 반환이 아닌, 신국제 관계 형성의 단초로 볼 수 있음
● 프랑스에서의 한국독립운동사 재발견 및 증명
ㅇ 1919년 파리 강화회의 당시 독립을 호소했던 김규식 선생 일행이 파리 9구 샤또덩 38번지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차리고 조국의 독립 승인을 위한 외교활동에 심혈을 기울였던 장소를 박병선 박사가 발견, 집주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사관과 협력, 집요한 노력끝에 한불수교 120주년(2006년)에 현판을 걸게 되었음
ㅇ 조선말기 프랑스에 왔던 사절들의 외교문서와 1900년 만국박람회 고문서를 발굴, 정리하여「프랑스 소재 한국독립운동 자료집Ⅰ」(2006년)을 발간하였음
ㅇ 88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독립과 관련된 연구에 대한 열정으로「병인년, 프랑스가 조선을 침노하다Ⅰ」(2008년)을 출간하였고, 후속연구결과를 마무리작업하고, 김규식 박사 일행의 파리에서의 독립운동 활동상을 기념하는 파리독립기념관 건립을 소원하며 연구에 매진하고 계신 중에 타계하였음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故) 박병선 박사의 국내 빈소를 마련하여
11월 29일 오전까지 조문객을 맞이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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