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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의 모양이 아름다워 과상용으로 많이 이용되며,
열매가 구충제 및 변비치료제나 기름을 짜는데 쓰이는
강진 삼인리비자나무(천연기념물 제39호)
마음의 의지처, 노거수(老巨樹)
지방에 가서 마을 안 노거수를 조사하다보면 ‘큰 일 난다’며 손사래를 치시는 동네 어르신을 종종 만난다.
불경스러워 보였거나 아니면 혹시라도 나무를 상하게 하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 일거다.
마을의 큰 나무는 대개 마을의 수호신격인 경우가 많다.
이런 나무에서 나무의 크기를 잰다고 나무를 안고 돌기도하고 나무 가지를 휘어잡기도 하는 모습이
마을 어른들에게 예사로 보일 리가 없을 것이다.
우리의 조상들은 예로부터 주변의 산이나 하천, 바위, 집터 등에 신이 있다고 믿어왔듯이
큰 수목에도 정령이 있다고 믿었고 그러한 나무를 신목으로,
또한 그 나무에 깃들어 있다고 믿어지는 신이나 정령을 수목신이라고 받들어 모셨다.
이러한 나무 숭배 풍습은 오랜 옛날 농경사회에 자연스럽게 싹트게 된 민간신앙의 한 형태로 생각된다.
크게 자란 나무의 풍성한 열매가 다수확의 상징으로 여겨졌을 수도 있고,
하늘을 향해 높게 자란 나무를 신의 영역인 하늘과 인간을 연결해주는 가교역으로 믿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수목숭배 습속은 비단 우리만의 풍습은 아니다.
이웃한 일본이나 중국은 물론이고 고대 서양세계에서도 널리 성행하였던 풍습이다.
다만, 우리나라를 비롯한 중국, 일본 등지에서는 그 유풍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단군신화에서 환웅(桓雄)이 태백산 신단수(神檀樹) 아래 내렸다는 전설은
이미 이때부터 나무가 신성시된 단적인 예이다.
지금도 강릉단오제에서는 대관령 국사서낭당(國師城隍堂)의 한 나뭇가지에 내린 신을 영신(迎神)하여,
그 나뭇가지를 신목으로 모셔다가 굿을 하는 풍습이 있다.
이렇게 특수한 나무가 아니더라도 어디에나 크고 오래된 나무에는 신이 깃들어 있고
그 신은 인간사에까지 영향을 미쳐 복을 주기도 하고 화를 주기도 하는 것으로 믿고 있다.
사람대접 받는 나무
오래되고 큰 나무들을 신성시(神聖視)하는 이런 마음은 마침내 나무를 인격화(人格化)하기에 이르러서 나무에게 자신의 재산을 물려주는 일까지 생겼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나무 가운데 ‘용문사 은행나무’와 ‘속리산 정이품송’이 각각 ‘당상관’과 ‘정이품’의 벼슬을 하사받았다는 것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사실이고, ‘예천 천향리 석송령’과 ‘예천 금남리 황목근(팽나무)’은 나무이면서도 재산을 소유하고 세금까지 내는 부자(富者)나무로 유명하다.
천연기념물 제294호 ‘예천 천향리 석송령’은 소나무의 한 품종(반송)이다.
나이가 600살쯤 되는 것으로 알려진 오래된 나무이지만
나무의 키가 약 11m 정도로 높지 않고 가슴높이의 줄기둘레도 3.7m 정도여서
현재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소나무들 가운데서 그리 큰 나무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 나무는 줄기의 밑둥치에서부터 크게 갈라진 가지들이 길게 자라서
동서방향의 가지 길이가 19.4m, 남북방향의 가지 길이는 무려 26m를 넘어서
나무가 만드는 그늘 면적이 1,071㎡나 된다는 기록도 있다.
마을에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 소나무는 약 600여 년 전 마을 북쪽의 풍기땅에 큰 홍수가 났을 때
마을 앞 석간천을 따라 떠내려 온 나무를 지나가던 나그네가 건져 올려 이곳에 심은 것이라고 한다.
나무는 무럭무럭 잘 자랐고 마침내는 마을사람들의 쉼터가 될 만큼이나 크게 자라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때부터 이 나무를 마을사람들과 마을의 무사안녕을 지켜주는 마을의 당산나무로 여기고
해마다 음력 정월 열나흗날이면 이 나무에서 동제를 지내왔다고 한다.
그러나 이 나무를 지금처럼 유명하게 만든 것은 이 나무의 크기나 나이가 아니다.
1920년대 말, 이 마을에 살았던 이수목이라는 노인은 비교적 넉넉한 살림살이였지만
이 재산을 물려주고 대를 이어갈 자식이 없는 것이 늘 걱정거리였다.
그러던 중 1928년 어느 날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이수목 노인의 귀에 분명하게 들려오는 소리는
“걱정하지 말아라” 였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오래된 소나무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노인은 “소나무가?” 하고는 놀라 잠에서 깨었다. 꿈이었다.
꿈에서 깨어 일어난 이수목 노인은 곧바로 군청으로 찾아갔고
거기서 그는 마을의 수호목인 소나무에게 ‘석송령’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후
자신의 전재산인 땅 2,000평을 ‘석송령’ 앞으로 등기해 주었다.
이로서 자연물인 소나무는 자연인 ‘석송령’이 되었고
큰 재산까지 소유한 어엿한 마을의 주민으로서 부과되는 세금을 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소유 토지의 수익금으로는 지역의 인재 육성을 위한 장학금도 제공해 왔다고 한다.
세금 내는 나무
세금 내는 나무는 또 있다. 천연기념물 제400호‘예천 금남리 황목근(팽나무)’이다.
‘석송령’과 이웃한 예천군 용궁면에 있는 이 나무는 나이가 약 500살에 이르고
키는 12.7m, 가슴높이의 줄기둘레 5.7m로 팽나무로서는 그리 큰 나무 축에 든다고 볼 수 없지만,
‘황목근’이라는 이름으로 토지를 소유하고 매년 고박꼬박 세금까지 내는 나무라는 점에서
천연기념물이 된 나무다.
나무가 사유재산을 보유하고 세금까지 낸다면 그건 이 나무가 이미 단순한 자연물이 아니라
인격으로의 대우를 받고 있다는 말도 되는 것이어서
마을의 나무까지도 마을의 한 구성원으로 받아들인 우리 조상들의 자연관에 새삼 외경심을 느끼게 된다.
더구나 이 ‘황목근’의 재산은 석송령의 경우처럼 어느 한 개인이 자신의 재산을 물려 준 것이 아니라
마을사람들 모두가 한 마음으로 성금품을 모아 만들어 준 것이라는 점에서
우리를 더욱 숙연해지게 만든다.
‘황목근’이 있는 금원마을에 전해오는 자료(1903, 금원계안 회의록;1925, 저축구조계안 임원록)에 따르면,
이 마을에서는 지금부터 약 100여 년 전부터 성미(誠米)를 모아
이 나무를 위한 공동재산을 조성해왔다고 한다.
마을사람들은 이렇게 모아진 공동재산을 1939년 마을의 오래된 팽나무에게 등기 이전하기로 하고
등기부상의 팽나무 이름을 ‘황목근’이라고 했다.
‘황목근’은 현재 토지 약 12,200㎡와 약간의 은행예금을 보유하고 매년 종합토지세도 납부하고 있다고 하니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황목근’은 넓은 경작지 한가운데에 독립수로 서있고 옆에는 조그만 정자까지 마련되어 있어서
이 나무가 농사철 마을사람들의 좋은 휴식처임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또한 나무 앞에는 마을신의 신단(里社之神壇)이라 적힌 제단을 마련해 놓고 이 나무를 당산목으로 삼아
동제를 올리고 마을의 축제를 열어 마을사람들의 화합의 계기로 삼아왔다고 한다.
이처럼 이미 오래전부터 이 ‘황목근’은 이곳 금원마을에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존재가 된 것이다.
(왼쪽) 처진 가지를 보호하기 위해 받침대를 설치한 강진 삼인리 비자나무(천연기념물 제39호)
(오른쪽) 재산을 소유하고 세금까지 내기로 유명한 예천 금남리 황목근(천연기념물 제400호)
병사들의 건강 지킨 나무
강진 삼인리 비자나무의 잎과 열매 |
노거수 가운데는 단순한 마을의 안녕 등을 비는 마을의 수호목으로서가 아니라 국가 방위를 위하여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경우도 있다.
그 중 하나가 천연기념물 제39호인 전남 강진군 병영면의‘강진 삼인리 비자나무’다. 이 비자나무는 나이가 800살 정도로 추정되는 오래된 나무로서 나무높이가 32m에 가슴높이 줄기둘레가 7.2m이며 나무줄기 아랫부분부터 가지들이 고르게 펼쳐져 동서방향으로 약 25m, 남북 방향으로 약 23m 정도나 되는 웅대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갖춘 노거수이다.
이 나무의 유래에 대하여는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오는데
이야기는 모두 옛날 이곳에 설치되었던 병마절도사영(兵馬節度使營)과 관련된다.
1417년 조선 태종이 이곳에 설치한 병마절도사영은 1894년 갑오농민전쟁 때 농민군에 의해 폐쇄될 때까지
180년간 전라도 53주를 총괄하는 큰 병영이었다.
병영의 규모가 컸던 만큼 이 병영을 처음 건설할 때는 주변에 있는 큰 나무를 모조리 베어다 쓸 수밖에
없었다는데 당시에 이 비자나무는 키도 작고 줄기도 굽어 쓸모가 없었기 때문에
베어지지 않고 살아남을 수가 있었다고 한다.
우리 속담의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는 말처럼 못생긴 나무였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 이야기가 이보다 좀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
몸속의 기생충을 없앨 수 있는 이렇다 할 구충제가 없었던 그 시절에는 비자나무의 열매인 비자가
매우 유용한 구충제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기생충으로 인해 배앓이를 하는 병영 내 많은 병사들의 구충제를 얻을 수 있는 비자나무야 말로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나무였을 것이고 그 때문에 이 나무가 오늘날까지 살아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마을 뒤쪽 언덕배기에 홀로 우뚝 서있는 이 비자나무는
지금도 마을의 안녕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마을 사람들의 추앙을 받고 있다.
역사의 기록, 노거수
마을의 노거수는
수백 년을 한 자리에 서서 마을사람들과 온갖 풍상을 함께 겪으며 동고동락해온 자연유산이며
나무의 안팎에 새겨진 이런 저런 흔적들은 바로 우리 조상들의 삶의 기록인 것이다.
그동안 마을과 마을사람들에게 있었을 재난과 기쁨 등 온갖 애환사를 나무의 나이테 속에
레코드판처럼 기록하고 있을 것이기에 노거수야말로 우리의 너무도 귀중한 자산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선조들의 삶의 기록들을 비록 지금 우리의 과학으로는 읽어 낼 방법이 없지만
언젠가는 이것들을 알알이 풀어낼 수 있는 날이 올 것이고
그때를 위해서라도 오늘을 사는 우리는 주변의 큰 나무들을 살뜰히 돌보고 지켜서 물려주어야 할
막중한 책임이 있는 것이다.
- 이은복 문화재위원
- 사진 · 문화재청 천연기념물과
- 2009-04-13 월간문화재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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