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느끼며(시,서,화)

모나리자 도난사건

Gijuzzang Dream 2009. 1. 8. 10:40

 

 

 

 

 <모나리자 도난사건>

 

 

 

 

 Mona Lisa

Oil on poplar panel, c.1503-1505

30 1/4 x 20 3/4 inches (77×53cm)

Louvre, Paris

Leonardo da Vinci

모나리자. 대단한 이름이다.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그림으로 더 유명한 이름이다.

광기(狂氣)로 가득찬 르네상스 시대의 천재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

기이한 인생을 살아간 그가 그린 이 그림에 사람들이 그렇게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명품이 되려면 스토리가 있어야”

그는 공동묘지에서 갓 죽은 시체를 모르게 훔쳐와 집에서 직접 해부해 해부도를 만들었다.

그림 그려서 판 돈으로 여자를 사서 육체를 뜯어보고 감상하면서

인간의 완전한 육체가 무엇인지를 그렸으며 여성해부도까지 만들어냈다.
괴이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비밀과 미스터리가 많은 걸까?

다빈치 코드라는 소설은 왜 그렇게 세상을 흔들어 놓은 작품이 됐을까?

기독교라는 거대한 종교에 반항했다는 이유 때문일까?

그렇다고 생각한다면 종교에 대항한 작품이 한두 개인가?

 


‘간염에 걸린 임신부’라는 평가도 있어


외신에서 읽은 이야기다. 미술을 전공하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한 교수가 이런 말을 했다.

“여러분은 모나리자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아주 순결하고 흠잡을 곳이 없는 완벽한 여인이라고 생각합니까?

여러분은 모나리자처럼 생긴 여자와 결혼하고 싶습니까?

그런 꿈은 접어 두시기 바랍니다. 아마도 실망할 겁니다.
그리고 여성분들은 모나리자에게 질투를 느낄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모나리자보다 훨씬 잘 낫고 똑똑합니다.

생각하기에 모나리자는 괜찮은 여자라고 추천할 만한 사람이 결코 아닙니다.

제가 만약 여러분들처럼 젊은이로 돌아간다면 모나리자와 같은 사람은 결코 찾지 않을 겁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건가?

 

“그림의 얼굴을 자세히 관찰하면 일반 사람과는 다릅니다.

눈썹이 없다는 것은 당시 사회환경이 그러니까 넘어가고…,

얼굴에 황색의 기운이 많습니다. 이 얼굴이 정확한 모델이라면 모나리자는 간염에 걸린 여자입니다.

다시 말해서 황달에 걸려 무척 고생을 하고 있는 여자입니다.

그리고 모나리자의 아랫부분을 유심히 보기 바랍니다.

당시 여성의 미(美)의 기준이 요즘과 달리 통통한 편이라고 해도 배가 너무 큽니다.

이는 모나리자라는 모델이 임신한 여성이라는 겁니다.

얼굴 크기와 몸매를 견주어 짐작하건대 배의 크기가 이 정도라면 분명히 임신한 여성입니다.

다시 말해서 다빈치가 그린 모나리자는 황달에 걸린 임신한 여성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렇게 고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잘못 해석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저의 주장이 틀렸다는 것을 전제로 반론을 제기하는 리포트를 제출하기 바랍니다.

저의 주장이 오류라는 것을 조목조목 반박하기 바랍니다”

이 정도면 대단한 교수다.



 

 

예술품, 그러니까 미술작품 가운데 가장 비싼 그림은 무엇일까?

2005년 최고 경매낙찰가를 기록한 미술작품은 피카소의 ‘파이프를 든 소년’이다.

1억400만 달러, 현재의 환율로 계산해보면 대충 1천4백억 원에 달한다.

우리나라 부의 상징으로 손꼽히는 도곡동 타워팰리스 124평형이 50억 원 정도니

20채 정도를 살 수 있는 액수다. 엄청난 돈이다.

그렇다면 모나리자는 얼마나 될까?

거래시장에 내놓지 않기 때문에 가격을 매길 수 없다.

프랑스 정부의 루브르 박물관이 팔려고 내놓겠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문화 강국이라는 자존심이 강한 프랑스에게 가당하기나 한 이야기겠는가?

프랑스의 자존심 루브르 박물관은 모나리자로 더욱 유명해졌다. 

그러나 경매에 팔린다는 것을 전제로 기네스북은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으로 모나리자를 올려놓고 있다. 6억7천만 달러다.

이 돈이면 기아로 죽어가는 수백만 명의 아프리카인을 1년 동안 먹여 살릴 수 있다. 광기의 천재 화가 다빈치가 그린 그림이 말이다.

사람들은 왜 명품에 집착하는 걸까?

예술, 그리고 예술품은 가장 주관적이다.

사람들은 그러한 주관적인 예술품에 왜 객관적인 판단을 내리는 걸까?

아니, 수억 달러라는 돈으로 객관적인 판단을 내린다는 것이 이성적일까?

명품의 조건은 무엇일까?

천재 화가로 통하는 다빈치의 모나리자가 고매한 작품인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그러나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그림은 아닐지 모르지만 가장 유명한 그림인 것은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그림과 같은 예술품이 명품이 되기 위해서는 그 작품을 둘러싼 스토리가 많아야 한다.

작품을 그린 화가도 그렇고, 작품의 역사가 파란만장할수록 값어치가 있게 마련이다.

모진 굴곡과 풍상(風霜)을 거듭해야 명품으로 나는 것이다.

 


風霜을 거듭해야 명품이 돼

아마 1911년 8월 모나리자 도난 사건이 없었다면

그렇게 열광하는 ‘영원한 미소’ 모나리자는

결코 유명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르네상스의 천재 다빈치의 주가도 그렇게 뛰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악마의 서적으로 비난 받기도 한 다빈치 코드가

영화로까지 만들어지면서

그렇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루브르 박물관이 세계 최대 박물관으로 떠오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떻게 본다면 모나리자 도난 사건은

그저 평범한 도난사건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저 박물관에 갔다가 정말 좋아하는 그림이어서

‘슬쩍’한 것으로 넘어갈 수도 있는 사건이다.

그리고 당시만 해도 모나리자는

그렇게 중요하고 대단한 작품으로 꼽히지는 않았다.

모나리자가 유명하게 된 것은 당시, 그것도 벌건 대낮에

세계 최고의 위용을 자랑하는 프랑스의 자존심 루브르 박물관에서 도난 당한 이후부터였다.

도난 당할 당시 모나리자는 그리 중요한 작품이 아니었기 때문에

루브르 박물관의 한 복도에 걸려 있었고 도난 방지 시스템도 없었다.
프랑스 수사기관은 모나리자를 찾는 데 대단한 열의를 보이지도 않았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그림이었기 때문이다.

모나리자가 세인의 눈앞에 다시 모습을 나타낸 것은 2년 후

모나리자의 본국 이탈리아 출신의 범인이 자수했기 때문이다.

 


루브르 박물관도 덩달아 유명세를 타

이로 인해 모나리자는 세기의 관심이 됐다. 관심이 되자 모나리자의 주가는 치솟았다.

수많은 소설과 영화의 대상이 됐다. 쳐다보지도 않았던 모나리자는 성모(聖母)의 상으로 둔갑하면서

성스러운 종교의 대상으로까지 변모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완벽한 인간을 기하학에 맞추려고 노력했다. 

 

뿐만이 아니다. 그림을 소장하고 있는 루브르 박물관의 주가도 뛰었다.

성모를 방문하기 위한 행렬이 계속됐고, 그 그림을 보는 관람객들은 합장(合掌)과 기도 속에서

종교적 희열을 만끽했다. 왜 그랬을까? 도난 됐던 성모가 다시 부활했기 때문이다.

범인은 왜 이 그림을 훔쳤을까?
그리고 왜 다시 자수해서 고스란히 되돌려 준 것일까?

양심의 가책 때문에? 아니면 시중에 팔려고 했는데 별로 돈이 되지 않아서?
또 아니면 모나리자를 세기의 최고의 명품으로 만들기 위해서
저지른 고도의 술책은 아니었을까?

어쨌든 ‘신비로운 미소’ 모나리자가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면서

출세하게 된 것은 도난 당했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확실하다.

지난 2007년 삼성 특검이 있었다.

이로 인해 홍라희 여사의 소유로 알려진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이 유명세를 탔다.

이 사건으로 이 그림이 더욱 유명해지고 주가가 오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명품은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 흥망성쇠의 역사처럼 굴곡과 풍상을 함께 해야 한다.

이런 차원에서 모나리자 도난사건을 접할 필요가 있다.

따뜻한 가슴이 아니라 냉정하고 차가운 시각으로 말이다.

세계화가 진행되면 될수록 민족주의는 점차 사라질 것으로 사람들은 예상했다.

근본주의를 표방하는 색깔이 강한 종교도 점차 그 색이 바랠 것으로 기대했다.

종교, 정치, 인종을 대변하는 문명적 이데올로기가 끝날 것이라고 점치는 학자들이 많았다.

그러나 어디 그런가? 종교와 민족에 호소하여 국민을 분노하게 만들고

전쟁을 정당화시키는 정치적 행위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 가지다.

이라크 전쟁뿐만 아니라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 목격할 수 있는 일이다.

 


민족주의와 종교는 여전히 폭발력이 커

사람의 감정에 불을 붙이는 데 가장 폭발력을 발휘하는 것이 종교와 민족이다.

쉬운 예로 월드컵을 보면 알 수 있다.

선수나 관중 모두가 마치 축구라는 이데올로기에 홀려 전장에 참여한 전사들 같다.
일부 유럽 관중들은

세계 역사상 가장 추악하고 잔인한 전쟁으로 꼽히는 십자군 전쟁의 전사들의 복장을 마다하지 않는다.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무자비한 십자군 전사가 되고 싶은 것이다.

그들은 기독교의 성지 인 이슬람 영토에서 십자군이 무엇을 했는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축구장에서는 십자군 전사가 되고 싶어진다. 모든 수를 동원해서 이겨야 한다.

“To the Victors, Goes the Spoils. 전리품은 승자에게”는 오랫동안 내려온 정치의 원칙이다.

전리품은 전쟁에서 패배한 상대국의 영토가 될 수 있고, 각종 재물, 여자, 노예들이다.

따지자면 역사 또한 위대한 전리품이다. 역사는 강자가 자기에게 유리하기 쓰기 때문이다.
전리품 가운데 또 중요한 것이 있다. 상대국의 훌륭한 예술품들이다.

각종 유명한 조각이나 공예품과 같은 문화적 유산들도 중요한 전리품이다. 전쟁에서 승리한 자의 몫이다.

특히 불교문화를 근간으로 한 동양의 불상(佛像)들은 중요한 전리품들이다.

 


“예술품은 중요한 전리품”

“전리품은 승자에게” 원칙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선거에서 이긴 대통령이나 총리는 행정수반이 돼 각 부처 장관을 지명한다.

정부투자기관을 비롯해 국영기업체 사장도 사실은 대통령의 임명에 따라 이루어진다.

영국이나 프랑스, 미국도 마찬가지다.

이 국가들의 거대한 박물관에 가보면 그들의 고유한 문화재는 거의 없다. 외국 문화재들이다.

그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이 중국, 이집트, 이란, 인도, 고대 메소포타미아 등

소위 문명의 발상지에서 온 문화재들이 주류를 이룬다.

이러한 박물관을 방문한 관람객들은

고국의 문화재가 다른 나라의 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것을 보면서 묘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빼앗겼다는 민족주의 감정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낀다.

유통경로를 따지기 앞서 말하자면 세계적인 우리의 보물 직지심경(直指心經) 또한 마찬가지다.

어쨌든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에서 탄생한 모나리자가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는 것은

일부 관람객에게는 민족적 울분을 충분히 자아낼 만하다. 이탈리아가 어떤 나라인가?

모든 길은 로마로. 세계를 지배했으며 서양문명의 근간이 된 천 년의 로마제국이다.
아마 당시만 해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무명의 모나리자가

세계 최고의 걸작으로 탄생하게 된 것도 바로 이런 연유,

민족주의를 자극시킨 데서 비롯됐다는 지적이 많다.

 


민족주의를 자극시킨 도난사건

다시 말해서 훔친 사람은 이탈리아 출신이다.

그는 모나리자를 그린 사람이 이탈리아 피렌체 출신의 레오나르도 다빈치이기 때문에

당연히 이탈리아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민족적 감정에 호소해서 훔쳤다는 것이다.

루브르 박물관에 모나리자 그림이 걸렸다가 뜯겨나간 자리. 

이로 인해 그렇게 유명하지 않았던 이 그림은 세계적으로 언론의 집중을 받으면서 최고의 예술품으로 대접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모호하고(ambiguous), 신비하며(myth), 마치 암호처럼 그 비밀을 풀 수 없는(enigmatic) 모나리자는

역시 대단한 가치를 누릴 운명을 이미 타고 났는지도 모른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모나리자의 인생역정이 만만치가 않다.

우선 광기(狂氣)의 천재화가이자, 그 역시 신비스럽고 모호한 다빈치가

그린 그림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이외에 탄생 이후에도 여러 가지 복잡한 사연과 풍상을 안고 있는 그림이 바로 모나리자다.

모나리자 도난사건 자체는 너무나 간단하다.

그에 앞서 모나리자가 걸어온 굴곡의 역사를 잠깐 살펴보자.

 


파란만장한 역정의 모나리자



 

모나리자는 다빈치가 1503년에 그리기 시작했다.

4년 동안 중간에 방치했다가 다시 시작해서 완성했다고 한다.

아마 별로 돈벌이도 되지 않을 것 같아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작품으로 보인다.

당시만 해도 르네상스가 시작됐던 이탈리아는 사분오열 찢어져 가난했던 대신 프랑스는

유럽의 최대 강국이었다. 프랑스 궁정으로부터 인정을 받으면서 돈도 자주 얻어 썼던 다빈치는

1516년 프랑스로 가면서 모나리자를 갖고 갔다.
당시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Francois I)의 초청으로 프랑스로 간 다빈치는

국왕의 풍부한 지원 아래 앙브와즈(Amboise) 성 근처에 있는 클로루세(Clos Luce)라는 저택에서

그림에 몰두하게 된다. 현재 다빈치 박물관 자리다.

 

다빈치는 1519년 죽기까지 이 곳에서 많은 활동을 했다.
클로루세를 종종 방문하며 다빈치를 격려하던 왕은 다빈치가 갖고 있던 모나리자에 관심을 가졌다.

기록에 따르면 왕은 당시 돈으로 4천 에쿠스(ecus)를 주고 이 그림을 매입한 후

퐁텐블로(Fontainebleau) 궁에 비치했다. 그 후 국왕 루이 14세는 그림을 베르사이유 궁으로 옮긴다.

 

 

한때 나폴레옹의 침실에 걸리기도

1789년 프랑스 대혁명으로 절대왕정이 무너졌다.

폭압과 사치의 상징이었던 베르사이유 궁전이 혁명지지자들에 의해 소실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모나리자는 지금의 루브르 궁으로 옮겨진다.
그러나 다시 나폴레옹이 정권을 잡자 이 그림을 소중하게 생각한 그는

루브르에서 이 그림을 가져와 자신이 군림하던 튈러리(Tuileries) 궁전에 있는 침실에 걸어 놓았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실각한 후 이 그림은 다시 루브르로 돌아갔다.

프랑스와 독일 간에 보불전쟁(1870~1871)이 일어나자

모나리자는 다시 거처를 알 수 없는 비밀스러운 곳으로 옮겨진다.
나폴레옹이 기거하던 튈러리 궁은 보불전쟁 중 완전히 소실됐다.

만약 모나리자가 나폴레옹의 침실에 계속 있었다면

‘신비로운 미소’ 모나리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보불전쟁이 끝난 후에야 비로소 루브르라는 안식처로 다시 돌아간다.

유럽을 휩쓴 2차대전이 일어났다. 모나리자는 다시 방랑해야 했다.

루브르에서 철수해서 원래 첫 주인이 소유하던 앙브와즈 성으로 피신했다.

그것도 안심이 안돼 다시 록뒤 수도원(Loc-Dieu Abbey)으로,

다시 몽또반(Montauban)에 있는 잉그레스(Ingres) 박물관으로 피난을 가기도 했다.

프랑스가 문화민족이라며 폼 재는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이러한 문화재에 대해 소중히 보존하고 아끼고, 배려하는 마음이 크기 때문이다.

2차대전 당시 프랑스가 히틀러에게

“영토는 침입하되 문화재는 결코 손대지 말라”고 부탁한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페이터의 비평에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해

모나리자는 이렇게 역사와 같이 했지만 실권을 쥐고 있던 왕이나 실력가의 일개 소장품에 불과했을 뿐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이미지로 등장한 것은 결코 아니다.

하긴 그 때까지만 해도 예술품은 곧 왕실이나 귀족의 전유물이었기 때문이다.

모나리자가 세간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섬세한 문체의 유미주의자 페이터의 글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모나리자가 일반 사람들에게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중엽이다. 예술가들 사이에 소위 상징주의 운동(Symbolist Movement)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하면서부터다.

특히 예술 평론가로 인문주의자인 그는 ‘예술을 위한 예술’을 옹호한

심미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수필가로 문체가 섬세하고 아름다운 그는

그리스 고전에 심취해 목사가 되려는 꿈도 접을 정도였다.

어쨌든 당대의 유명하고 화려했던 문필가 페이터가

다빈치에 대한 수필을 통해 모나리자를

“영원한 여성스러움을 갖춘 신비의 화신”이라는

(mythic embodiment of eternal femininity)

아름다운 수식어로 평가하면서

오늘날 ‘신비로운 미소’ 등의 각양각색의 표현이 줄을 잇게 되었다.

페이터는 모나리자를 이렇게 표현했다.

“…who is “older than the rocks among which she sits” and who

“has been dead many times and learned the secrets of the grave.”

그녀는 (포즈를 취하기 위해) 앉아 있는 바위보다도 더 나이가 오래된 여성이며,

수없이 죽었다가 다시 태어났으며, 죽음(무덤)의 비밀이 무엇인지를 터득한 영원한 여성의 상징이다.”

 


“죽음의 비밀을 터득한 영원한 여성의 상징”

그의 수필들은 이처럼 너무나 섬세하고 꼼꼼한 문체를 담고 있었으며

르네상스 예술에 대한 남달리 깊은 안목은 철학적 심미주의자로 명성을 얻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그의 문체가 얼마나 섬세하고 아름다웠는지 옥스퍼드대학교에는 그를 숭배하는 클럽까지 생길 정도였다.

모나리자가 유명세를 타기 시작하자 얼굴에 눈섭을 붙이고 코와 턱수염을 한 모나리자 패러디들도 등장했다. 

그는 ‘페이터의 산문’으로도 유명해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져 있다.

지금은 실리지 않고 있지만 30여 년 전에는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도 실려 대단한 유명세를 탔다.

이 정도로 대단한 영국의 문장가 페이터가 섬세하고 아름답게

모나리자를 극찬하자 모나리자는 점점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모나리자를 훼손하려고 했던 몇몇 사건들도

모나리자의 주가를 뛰게 만들었다.

 

1956년 관람객으로 위장한 괴한이 던진 염산세례로

그림의 아래 부분이 심하게 훼손된 적이 있다.

또 같은 해 12월 30일에는 우고 웅가자 빌레가스(Ugo Ungaza Vilegas) 라는 볼리비아 청년이 돌을 던져 왼쪽 발꿈치 부분에 있는 염료가 떨어져 나가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격변의 역사를 함께한 신비로운 미소

그러한 풍상을 견디면서도 우리에게 신비로운 미소를 선사하고 있는 모나리자의 팔자를 생각한다면

아마 이만큼의 역마살(驛馬煞)을 타고난 미술품도 없을 것이다.

어쨌든 이렇게 수많은 풍상을 겪으면서 최고의 예술품으로 우뚝 섰다.
그러나 도난사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모나리자를 최고의 예술품으로 만든 것은 역시 도난사건이다.

그렇다면 도난사건은 어떻게 시작돼 어떻게 끝났기에 세기의 사건이라고 부르는 것일까?

이 사건에는 풀리지 않는 어떤 미스터리가 존재하는 걸까?

 

미소를 짓는 듯 마는 듯, 그래서 한없는 신비감을 주고 있는 모나리자의 도난 사건은

겉으로 볼 때 평범한 도난 사건과 다를 바가 없다.

그저 박물관에 근무하고 있던 한 직원이 ‘슬쩍’한 것이다.
그리고 당시만 해도 예술품을 소장하고 있는 박물관들이

오늘날처럼 철통 같은 보안을 유지하고 있던 것도 아니다.

 모나리자를 소자하고 있던 루브르 박물관도 마찬가지다.

앞서 설명했지만, 모나리자가 그렇게 대단한 예술품도 아니었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문화강국 프랑스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루브르 박물관의 야경.

루브르가 세계 최대 박물관으로 우뚝 서서 관람객을 끌고 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다. 


1911년 8월 21일 모나리자가 원래 있었던 자리에서 없어졌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없어졌다는 것을 확인한 것은 27시간이 지난 다음날이었다는 사실이었다.

 


도난된 지 27시간이 지나서야 신고

세계적인 만화 캐릭터 ‘Casper the Friendly Ghost(귀여운 유령 캐스퍼)’의 창안자로

어린이들의 사랑을 독차지한 바 있는 시모어 라이트(Seymour Reit)는

모나리자 도난사건을 끈질기게 추적했다.

성인용 추리소설인 ‘모나리자가 도난 당한 그날(The Day They Stole the Mona Lisa)’이라는 책에서

모나리자 도난에는 상당히 음모가 있다고 추정하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전개했다.

“누군가 (모나리자가 걸려 있는) 카레館(Salon Carre)으로 들어와 벽에서 그림을 떼고는

모나리자를 갖고 밖으로 나갔다. 그림은 월요일 아침 도난됐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다음날인 화요일 오후가 돼서야 그 사실을 알았다는 것이다”

이 지적은 “만약 일요일에 도난됐다면 조금이라도 변명이 통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월요일이다. 그런데 다음날이 돼서야 알았다는 것은

이 사건에 흑막(黑幕)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주장이다.

 


“홍보용 사진 찍으러 간 거 같은데요?”

 

모나리자가 없어졌다는 것을 처음 안 사람은

다름 아닌 루이 베로드(Louis Beroud)라는 박물관 큐레이터다.

그는 모나리자가 걸려 있던 자리에 4개의 쇠못만을 발견했다.

그는 경비 책임자에게 “모나리자가 어디로 갔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이 책임자는 그게 대수냐는 듯 태연하게 말했다.

“글쎄요, 홍보용 사진을 찍으려고 본부로 가져간 거 같은데요?

아마 좀 있으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겠지요. 종종 그런 일이 있잖아요.”

베로드는 다시 박물관 본부로 가 확인했다. 그러나 본부에는 없었다.

홍보용 사진을 찍기 위해 떼어간 것이 아니었다.

그때서야 도난 당했다는 것을 안 베로드는 파리 경찰청에 사실을 전화로 알렸다.
파리 경찰은 즉각 루브르로 달려 왔다. 그리고는 전 박물관 관람객들을 하나하나 점검했다.

또한 모나리자가 파리에서 다른 곳으로 이송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전국 경찰과 역에 수배령을 내렸다.

 


루브르 박물관 일주일 동안 폐쇄

또한 루브르 박물관을 1주일 동안 폐쇄하고는 박물관 구석구석을 뒤졌다.

그러나 어떠한 단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모나리자 도난사건은 언론에 알려지면서 프랑스와 유럽은 물론 전 세계의 관심을 끌었다.
무명의 모나리자가

전 세계 코흘리개 어린이들까지도 그 이름을 아는 세계 최고의 예술품으로 등극하는 순간이었다.

‘신비로운 미소 모나리자’가 종교적인 대상으로 승화할 정도로 찬미의 대상이 되는 순간이었다.

뿐만인가? 세계 문화의 중심지라고 자처하는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 또한

세계 최고의 박물관으로 그 주가가 치솟았다.

말하자면 이 도난사건으로 모나리자의 주가가 대박을 터뜨렸고

그와 덩달아 루브르 박물관 역시 대박을 터뜨린 셈이다.

모나리자의 열기는 뜨겁다.

모나리자를 보려면 1, 2백 미터 줄을

서는 것은 보통이다. 

루브르는 엄청난 관람객을 끌어 들였다.

모나리자를 보려면 박물관 안에서도 1, 2백m의 줄을 서서 순서를 기다려야 한다. 루브르를 방문하는 관람객들 가운데 70% 이상이 바로 모나리자를 보기 위해서다.

문화강국 프랑스의 루브르는 세계 박물관 가운데 가장 큰 돈방석에 앉은 박물관이다. 연일 메워 터지는 관람객 인파 때문이다. 여기에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는 이가 광기의 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모나리자다.

 


모나리자, 루브르 모두 상종가를 쳐

한편, 이탈리아 화가가 그렸지만 소유는 프랑스가 하고 있는 모나리자를 찾아야 한다는 비난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비난 여론이 강하면 강할수록 모나리자의 가치는 더욱 상승해 갔다.
또한 때를 놓칠세라 모나리자 모조품들이 화랑과 골동품 가게에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심지어 “다빈치는 모나리자를 하나가 아니라 수십 개를 그렸다”는 이야기도 공공연하게 나돌기 시작했다.

그러나 수사는 아무런 진척이 없었다.

파리 경찰은 관리를 소홀하게 한 루브르 박물관을 비난하면서 책임을 전가하려고 애썼다.

루브르는 역으로 아무런 단서도 발견하지 못한 수사기관의 무능력을 비웃으며 공방의 끈을 놓지 않았다.

“어느 한 쪽이 의심을 가는 사람을 수사 선상에 올렸다는 정보를 얻게 되면

다른 한 쪽은 그 사람을 더 먼저 체포해 버렸다. 왜냐하면 다른 쪽에 도움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파리 경찰과 루브르 사이에 얼마나 불신의 골이 깊었는지를 지적한 시모어 라이트의 글이다.

2년여 동안 지나면서 아무런 낌새도 알아채지 못하자 사람들은

모나리자를 영원히 못 볼 것이라고 생각했다. 파리 경찰도 루브르도 마찬가지였다.

또 모나리자가 불한당 손에 넘어가 많이 훼손돼 있을 것이라고 걱정하는 사람도 있었다.

 


시인 아폴리네르와 피카소도 혐의 선상에 올라

한편 모나리자 도난사건으로 애꿎게 봉변을 당한 사람들도 나타났다.

도난사건과 관련됐을 거라고 의심을 받은 사람들이다.

거장 파블로 피카소도 모나리자 도난사건 용의자로 지목되어

봉변을 당했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은 흐르고…”로 우리에게 친숙한

<미라보 다리(Le pont Mirabeau)>의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와 파블로 피카소였다.

당시 동료들과 더불어 초현실주의 문학세계를 처음 일구었던 아폴리네르는 성격이 독특했다.

그는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시던 도중 루브르 박물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홧김에 “불살라 버려야 한다”는 말을 내뱉은 적이 있었다.
이 말을 들은 수사기관은 수상하다고 생각하고 아폴리네르를 가두었다.

그는 절친한 친구인 피카소에게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그러나 피카소 역시 힘을 쓸 수가 없었다.

피카소도 모나리자 사건과 연루돼 있다는 혐의를 쓰고 있었다.

왜냐하면 모나리자 모조품을 산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일주일 만에 무혐의로 풀려났다.

어쨌든 모나리자가 사라진 2년 동안 모나리자와 다빈치의 그림들을 둘러싼 이야기는 끝없이 흘러 나왔다.

물론 이 시기에 르네상스 시대의 천재 화가가 다빈치와 그의 작품 또한 상종가를 쳤다.

 


범인은 피렌체 출신의 루브르 직원

그러다 2년이 지난 1913년 11월 어느 날 모나리자 도난사건의 실마리가 풀리는 한 통의 편지가

다빈치가 거주했던 이탈리아 피렌체 한 골동품 가게로 날아들었다.

내용은 원래 피렌체가 소유해야 할 모나리자 진본을 팔겠다는 것이다.

수사요원들이 출동하자 사건은 너무나 싱겁게 끝났다.

모나리자를 훔친 주인공은 바로 피렌체 출신의 루브르 박물관 직원이었다.

이름은 빈센초 페루지아(Vincenzo Peruggia).

1910년 말 관람객들이 예술품에 손상을 입히는 위해(危害) 행위가 빈번하게 발생하자

루부르는 중요한 작품들을 보호하기 위해 유리상자를 만들어 보호하기로 결정했다.

보호용 케이스를 만드는 일에 참여했던 4명의 기술자 가운데 한 사람인 그가 엄청난 일을 꾸민 것이다.

페루지아는 루브르에서 불과 두 블록 떨어진 허름한 아파트에 살면서

모나리자를 이 곳에 2년 동안이나 보관했다. 그러나 복제품들이 활개를 치면서

너무 비싸게 거래되는 것을 보자 본국에 팔 결심을 했다가 덜미를 잡힌 것이다.

 


이탈리아 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

 

이탈리아 출신 범인

페루지아는 애국심의 발로로 모나리자를 훔쳤다고 자백했다. 

경찰에 따르면 그는 모나리자를 떼어내어 청소도구를 넣는 상자에

일단 숨겼다가 퇴근할 때 코트 속에 숨겨 나왔다고 한다.

그는 조국에 대한 애국심으로 다빈치의 그림이기 때문에 모나리자는 당연히 프랑스가 아닌 이탈리아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훔쳤다고 자백했다.
그의 애국적(?) 발상으로 페루지아는 이탈리아의 영웅이 됐다.

3개월도 채 안되어 감옥에서 석방됐다.

이로 인해 다빈치 고향으로 가게 된 모나리자는 이탈리아 전역에서 전시됐다. 이탈리아의 민족주의에 불을 지피는 계기가 됐다.

그리고 나서 다시 루브르 박물관으로 반환되었다.

페루지아는 정말 애국심의 발로로 모나리자를 훔쳤을까?

아니면 평범한 좀도둑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짜고 친 고스톱에서 주인공 역할을 한 것은 아닐까?

 


프랑스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힘

어쨌든 모나리자 도난사건을 접하면서 미진한 부분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렇게 쉽게 도난 당한 것하며, 27시간 동안이나 방치된 것에 이르기까지….

도난과 피난, 그리고 훼손되는 수많은 풍상을 겪은 현재 루브르에 있는 모나리자는

위작(僞作)이라는 소문도 심심치 않게 들린다.
그러나 스토리 텔러(story teller) 모나리자는 그 굴곡의 역사와 함께 우리를 유혹하고 있다.

비단 영화나 노래뿐만이 아니다. 평생 한번 모나리자를 보는 것이 소원이라는 사람들도 많다.

모나리자 매니아들도 등장했다.

이처럼 엄청난 관광객과 관람객들을 프랑스와 루브르로 끌어들이는 힘은

모나리자가 단연 최고라는 데에 이견을 달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문화강국 프랑스의 자존심을 지키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있다.
- 김형근 편집위원,
hgkim54@naver.com

- 2008.12.11/ 12.18/ 2009. 01.08 ⓒ ScienceTimes [과학과 추리로 풀어보는 세기의 범죄들]

 

 

 

 모나리자 미소, 알고보면 우뇌의 작품

 
 
 
사람의 뇌는 왼쪽 반구(좌뇌)와 오른쪽 반구(우뇌)로 나눠진다.
좌뇌와 우뇌는 비슷하게 생겼지만 그림을 감상하거나 사물을 볼 때 서로 다른 역할을 한다.
최근 모나리자 미소의 비밀을 우뇌의 역할로 풀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또 ‘숲’을 보는 뇌와 ‘나무’를 보는 뇌는 어느 손잡이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논문이 발표됐다.

진짜 모나리자 찾아보세요

- 다빈치의 '모나리자'(왼쪽부터 첫번째)는 그림의 왼쪽 얼굴이 무표정이고

오른쪽 얼굴이 웃는 표정이다.

보통 사람은 우뇌가 작용해 왼쪽 얼굴을 중심으로 전체 표정을 인식하기 때문에 원화의 모나리자는 무표정이 우세한 가운데 언뜻 웃는 표정으로 파악하게 된다.

하지만 원화의 얼굴 표정 좌우를 바꾸거나(두번째) 좌우 모두 웃는 표정(세번째), 또는 모두 무표정(네번째)으로 바꿔보면 신비감이 원화보다 떨어진다.

사진제공 지상현 교수.



우뇌는 정서적 정보, 좌뇌는 언어적 정보 처리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초상화 ‘모나리자’의 주인공은 신비한 미소를 짓고 있다.
자세히 보면 코를 중심으로 왼쪽과 오른쪽 입 근육이 서로 다르다.
보는 사람 입장에서 왼쪽 입은 한일(一)자로 다물어져 있어 무표정하게 느껴지는 반면,
오른쪽 입은 입 꼬리가 약간 올라가 웃는 표정으로 그려져 있다.

한성대 미디어디자인학부 지상현 교수(심리학 박사)는
“얼굴 표정 인식처럼 정서적 정보를 처리하는 데는 우뇌가 관여한다”며
“흔히 화면의 왼쪽 얼굴 표정을 중심으로 전체 표정을 인식한다”고 말했다.
대개 화면의 왼쪽 정보는 우뇌가, 오른쪽 정보는 좌뇌가 처리한다.

예를 들어
사진 왼쪽에 웃는 표정의 얼굴 반, 오른쪽에 무표정한 얼굴 반을 붙여 놓은 ‘키메라’를 제시하고
사진에 대한 인상을 물으면 많은 사람들은 웃는 표정이라고 응답한다는 것이다.
반대의 경우는 무표정하다는 응답이 많다.

지 교수는 “모나리자의 경우 화면 왼쪽 얼굴의 무표정한 모습이 우세하게 느껴지고
언뜻언뜻 오른쪽 얼굴의 웃는 표정을 보게 된다”며
그의 신간 <뇌, 아름다움을 말하다(해나무)>에서 모나리자의 신비한 미소를 설명했다.

실제 그가 모나리자 원화를 조작해 좌우 입술의 모양을 서로 바꾸자 웃
는 표정이 우세해지고 신비감이 원화보다 다소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브랜드나 중요한 대상 시야의 오른쪽에 배치
좌뇌와 우뇌의 기능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1960년대부터 시작됐다.
우뇌가 얼굴 표정과 같은 정서적 정보를, 좌뇌가 언어적 정보를 주로 처리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웃는 얼굴?
- 웃는 얼굴 반쪽과 무표정인 얼굴 반쪽을 합성한
'키메라' 사진.
왼쪽 사진은 웃는 모습, 오른쪽 사진은 무표정이라는 응답이 많았다. 사진제공 시카고의대
 
 
또 최근에는 우뇌가 숲처럼 전체적인 정보를, 좌뇌가 나무처럼 미세한 정보를 처리한다는 경향이
관련학계에서 주목받고 있다.
 
좌뇌나 우뇌 손상 환자에게 자전거나 집의 그림을 그려보라면 이런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좌뇌 손상 환자는 세부 묘사를 생략한 채 자전거나 집의 전체적인 구조를 그려내는 반면,
우뇌 손상 환자는 전체 구조를 그리지 못하지만 바퀴살이나 창틀 같은 세부 묘사에 충실하다.

지 교수는 “디자인이나 그림에서 브랜드나 중요한 대상을 시야의 오른쪽에 두는 경향도
숲을 보는 우뇌와 나무를 보는 좌뇌로 설명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림의 대부분이 왼쪽 시야에 놓이고 중요하고 세부적인 내용이 오른쪽 시야에 놓이게 하면
우뇌가 숲 정보를 처리하고 좌뇌가 나무 정보를 처리해 자연스럽다는 설명이다.

왼손잡이에겐 좌뇌 우뇌 역할 반대로 나타나

신경과학 전문지 ‘네이처 뉴로사이언스’ 3월호에 따르면
우뇌와 좌뇌의 이런 경향이 왼손잡이에게는 반대로 나타난다.
영국 버밍햄대 심리학부 카멜 메보락 박사팀은 오른손잡이와 왼손잡이 각각 11명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숲을 무시하고 나무에 주목하는 역할을 하는 뇌 부위가
어떤 손잡이냐에 따라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연구팀은 작은 영문자 D를 여러 개 배열해 전체적 모습은 H인 글자를 실험 참가자들에게 보여주면서 세부 글자가 무엇인지를 물었다.
그 결과 오른손잡이는 세부에 주목하는 능력을 제어하는 뇌 부위가 좌측 전두정엽(PPL)인 반면,
왼손잡이는 우측 PPL인 것으로 드러났다.
- 이충환 동아기자, 2005년 02월 17일

 

 

 

 

모나리자 신비의 미소 비밀 밝혔다

 

전혀 붓질이 느껴지지 않는 화면, 밝게 빛나는 볼에서 어두운 턱선까지 부드럽게 이어지는 음영….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는 섬세한 기법으로 일류 화가들까지 입을 다물지 못하게 만든다.

과연 어떻게 이 그림을 그렸을까.

프랑스의 화가 자크 프랑크 씨가 마침내 ‘다빈치 코드’를 풀었다고 선언했다.

그림에 숨은 종교적 의미의 코드가 아니라 마법 같은 화면을 이뤄 낸 기법상의 코드다.

최근 영국 일간지 인디펜던트 인터넷판은 프랑크 씨가 밝힌 ‘모나리자 미소의 비밀’을 소개했다.

프랑크 씨가 밝혀 낸 모나리자 미소의 비밀은 ‘스푸마토(안개 마감법)’라고 불리는 초정밀 붓질.

 

그에 따르면 다빈치는 먼저 밑그림을 그린 뒤에 극도로 묽게 희석한 물감으로

폭이 4분의 1mm에 불과할 만큼 아주 섬세하게 붓질해 나갔다. 붓질의 길이도 2mm를 넘지 않았다.

다빈치는 이렇듯 미세한 붓질을 반복해 밑그림 위에 30겹 이상의 물감 층을 쌓아 나갔다고

프랑크 씨는 설명했다.

이렇게 꼼꼼하게 작업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동량이 요구된다.

프랑크 씨는 다빈치가 이런 섬세한 붓질을 위해

한 손에는 확대경, 또 다른 한 손에는 붓을 들고 작업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가 16년간의 작업 끝에 죽기 직전인 1519년에야 그림을 완성한 것도

이토록 엄청나게 많은 노동량 때문이었다는 것.

프랑크 씨는 직접 ‘다빈치의 기법’을 사용해 단계별로 ‘모나리자’를 그린 화면 6점을

이달부터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에서 전시한다.

‘성 안나의 초상화’를 그가 밝혀 낸 기법으로 그린 복제품도 선보인다.

프랑크 씨는 한 작품을 그리는 데만도 시간으로 따져 3000시간 이상이 소요됐다고 밝혔다.
- 2006년 04월 13일, 유윤종 동아일보 기자

 

 

 

 

 

“모나리자 미소의 비밀은 두가지 물감 이용한 덧칠”

 

 

신비로운 모나리자(사진)의 미소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눈과 입 주변의 그림자를 다른 성분의 물감으로 2차례 칠해서 만든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센터 매디 엘리어스 박사는
물체에서 나오는 빛을 1억 개의 분광(分光)으로 나눠

성분을 측정할 수 있는 고성능 멀티 스펙트럼 카메라를 이용해

모나리자의 미소를 분석했다고 AFP통신이 23일 보도했다.

분석 결과 다빈치는 스푸마토 기법(색깔 사이의 경계선을 명확히 구분 지을 수 없도록 부드럽게

옮아가게 하는 기법)을 이용하기 위해 먼저 망간 성분이 든 반투명 물감으로 한 차례 색을 칠했다.
이어 주홍색 안료와 납이 혼합된 물감으로 다시 한 번 덧칠을 해

모나리자의 미소에 담긴 독특한 깊이, 부피, 형태의 느낌을 만들었다.

이 연구 내용은 잡지 <응용 광학> 최신호에 게재됐다.

엘리어스 박사는

“이 연구는 물체에서 나오는 빛의 양을 분석해 미술 작품을 해석한 첫 사례”라고 밝혔다.
- 장택동 동아일보 기자,
2008년 04월 24일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

 

서양미술사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다.

<모나리자>는 탁 트인 실내에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머리를 베일로 덮고 

자수로 장식된 어두운 색의 가운을 입고 앉아 있는 여인을 그린 초상화다.

르네상스 회화의 기준을 정립한 <모나리자>에 대해 정확하게 알려진 것은 없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서명이나 날짜가 기록되지 있지 않기 때문이다.

<모나리자>를 둘러싼 해석이 분분하지만

모나리자의 모델은 피렌체 공화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상인 조 콘다가,

아내 리자가 아들을 낳기 전에 집을 구입해 집안을 장식하기 위해

초상화를 의뢰한 것이라는 배경이 가장 유력하다.

<모나리자>, 목판에 유채, 77×53, 1503~1506년 경,

파리 루브르 박물관 소장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공식 초상화의 우울한 분위기를 제거하기 위해

이 작품을 제작할 당시 악사와 광대를 화실로 초청해 모델의 순간적인 표정을 포착해 스케치했다.

모나리자의 눈썹이 없는 것은 16세기 당시 여인들은 눈썹을 그리지 않는 것이 유행이었기 때문이다.

모나리자가 입고 있는 짙은 색 옷은 당시 결혼한 여자들이 입었던 옷이다.

이 작품의 배경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여러 나라를 여행하면서 본 풍경들을

상상해서 그린 것이기 때문에 계절이나 시간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화면 왼쪽 배경에 있는 돌산과 작은 오솔길과 오른쪽의 말라붙은 강바닥이 보이지만

그 뒤에 있는 저수지와의 연결은 확실하지 않다.

이처럼 황량한 풍경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 이전에 종교화에서 시도했었던 것으로

인간의 잠재성을 의미한다.

초상화 배경으로 풍경을 사용한 것은 플랑드르 지방에서 유행하던 방식이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플랑드르 거장들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풍경을 배경으로 한 초상화를 제작하면서도,

전통적인 방식에서 벗어나 인물을 화면 앞쪽으로 더 가깝게 배치했다.

또한 윤곽선을 강조했던 다른 화가들의 이전 작품들과 달리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모나리자>에서 명암법을 이용해 풍경과 인물의 구별 짓기가 어려울 정도로 일치감을 보여주고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이 작품에서 윤곽선이나 경계선 없이 어두운 밑바탕에서 시작해

반투명 유약으로 칠해 나가면서 입체감이 느껴지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스푸마토 기법을 사용했다.

 

스푸마토 기법
색과 색 사이에 있는 윤곽선을 흐릿하게 표현하는 기법을 말한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대상에 음영을 그린 후 윤곽선을 희미하게 만들기 위해

여러 번 덧칠하거나 손가락으로 문질러 윤곽선을 남기지 않았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이 기법으로 인물을 표현해 입체감을 주었다.

 

이 작품을 가장 유명하게 만든 것은 보일 듯 말 듯한 신비스러운 모나리자의 미소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공식 초상화의 우울한 분위기를 제거하기 위해

이 작품을 제작할 당시 악사와 광대를 화실에 초청해 모델의 자연스러운 표정을 이끌어냈다고 한다. 
그러나 모델의 긴장을 풀기 위해 광대와 악사를 동원했던 것과는 달리

이 작품은 고통의 긴 과정 속에 탄생했다.

화가에게 작품을 수정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모나리자>를 수년간에 걸쳐

제작하는 동안 끊임없이 그리고 수정하고 덧칠했지만 결국 완성하지는 못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다방면에 너무나 많은 관심을 가지고

끊임없이 연구하고 시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작품을 미완성인 채 남겨두고

새로운 작품에 정열을 쏟아 부었다. 그는 생전에 20여 점밖에 완성하지 못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이 작품을 의뢰인에게 전해주지 않고

1516년 프랑수아 1세의 초청을 받고 프랑스로 이주할 당시에도

<모나리자>를 비롯하여 자신의 작품을 가지고 갔다.

프랑수아 1세가 이 작품을 소장하게 된 이유는 정확하게 알려진 게 없지만

16세기 퐁텐블로 궁에 걸려 있었다.

1625년 버킹엄 공작이 영국 국왕 찰스 1세를 대신하여

루이 13세에게 <모나리자>를 영국에 넘겨달라고 했지만 실패했다.

한때 <모나리자>는 튈리르 궁의 나폴레옹 개인 침실에 걸려 있다가 루브르 박물관으로 옮겨져

18세기에 최초로 대중들에게 공개되었다.

- 박희숙, 서양화가, 미술 칼럼니스트, bluep60@hanmail.net

- 2008.10.22 ⓒ ScienceTimes [명화산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