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사기열전(史記列傳)’ ④] 백이열전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 아름답다 할 수 있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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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잠깐 ‘쪽’ 팔리더라도 실리를 챙기고, 욕을 좀 먹더라도 돈 되는 일을 마다하면 바보가 되는 시대인가? 멀고 먼 옛날이야기라지만, 굶어 죽더라도 소신을 포기하지 않고 불에 타 재가 되는 한이 있어도 절개를 굽히지 않은 이들이 있었다. ‘사기열전’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백이와 숙제는 익명성으로 감추고 돈으로 덮어버린 현대인의 부끄러움을 반성하게 한다.
덧붙여 예나 지금이나 온갖 탈법에 불법을 일삼는 이들이 일평생 호강하고, 군자의 도를 지키는 사람은 재앙을 만나는 일이 수없이 많다고 한탄한다. 이런 사실은 역사가인 사마천을 당혹스럽게 했다. 그래서 절규하듯 말했다. ‘만약에 이것이 하늘의 도리라면, 이것은 과연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
생각해보니 우리는 부끄러움이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는 과거에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잠시 ‘쪽’ 팔리더라도 길게 잘 먹고 잘살면 된다는 풍조가 만연하다. 선비의 절개는 이제 ‘사기열전’에나 나오는 이야기가 되어버린 것일까? 백이와 숙제는 그러한 시대에 늘 푸른 소나무인 것이다. 공자는 ‘추운 계절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안다’고 했다.
부끄러움 없는 시대
하지만 현실이 어디 그런가. 소나무 같은 인물은 공자나 그 밖의 위인 중에서나 찾아야 할 것 같다. 실제 삶에서는,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만 해도 변신의 귀재가 정권이 바뀜에 따라 완전히 변신하는 데 대해 우리는 뭐라 욕하지도 않는다. 삶이 구차하기 때문이다. 그저 조금 안쓰럽게 생각하고 더는 그 사람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 생활고에 시달려 변신하는 사람들에 대해선 백이와 숙제를 따르지 않는다고 욕하기 힘들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이기에, 그들의 처지를 알기에 그렇다. 하지만 그래도 마음 한구석은 개운치 않다.
철새 정치인이나 노출증에 걸린 연예인 등 이른바 공인의 행태는 그 나라의 도덕성을 보여주기에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개처럼 벌어 정승처럼 쓰면 되고, 돈에 꼬리표 달리지 않았다고 하지만, 부정부패와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사회에서 산다는 건, 부서진 배를 타고 망망대해를 건너는 것과 같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적어도 이들에게는 사마천이 말하는 부끄러움을 가르치고 싶다. 하지만 나는 안다. 이들에게 부끄러움을 가르치는 것이 ‘소 귀에 경 읽기’요 ‘벽에다 대고 말하기’라는 것을 잘 안다.
신라 마의태자는 신라 왕조 1000년이 무너지자 베옷을 입고 여생을 보냈다. 그때의 심경을 헤아리기란 쉽지 않다. 신라의 왕관을 비롯해 화려한 의상을 벗었다는 것은 더 이상 세속적인 영화를 누리지 않겠다는 의미다. 또한 자신의 존재를 숨기는 행위이기도 하다. 즉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의 처신이다. 부끄러움을 안다는 것은, 비로소 하늘을 바로 올려다볼 수 있는 자유를 의미한다. 그는 부귀영화 대신에 자존감을 지켰다. 마의태자는 굶어 죽지는 않았지만, 금강산 비로봉 아래에 그의 무덤이 있다. 바로 옆에는 그가 타고 다니던 용마가 돌로 변했다는 용마석도 있다. 마의태자가 고려에 항복하는 수모를 절개로 견뎌냈다면, 신라를 무너뜨린 고려 역시 조선에 의해 왕조가 바뀐다. 역사는 일정한 순환의 고리를 갖고 있고, 사람들이 사는 법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나쁜 놈, 좋은 놈 그리고 이상한 놈이라는 분류도 가능하다.
신라 마의태자처럼 고려 두문동 선비들은 백이와 숙제의 마음으로 자존감을 지켰다. ‘두문불출’이라는 고사성어로 잘 알려진 두문동 선비들은 이성계의 조선 건국에 반대한다. 고려 유신 72명은 개성 남쪽에 있는 부조현에 관복을 벗어던지고 두문동에 들어가 대문에 빗장을 걸고 새로운 왕조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이에 분노한 이성계는 두문동에 불을 질렀다. 한 나라를 열기 위해서는 인재가 필요한데 유신들이 전 왕조에 대한 지조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말을 듣지 않으니 노여움이 불길같이 타올랐다. ‘이놈들이 타죽기 싫으면 나오겠지’ 하는 마음이지 정말 죽일 생각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선비들은 불에 타 죽을 때까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타 죽을망정 네 밑에서는 일을 못하겠다’는 선비의 절개였다. 또한 인간으로서의 수치심을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부끄러움이 삼류가 되면 시쳇말로 ‘쪽 팔리는 걸 못 참는 중딩’의 행동, 조폭이나 건달의 ‘가오’와도 연결된다.
이때부터 문 걸어 잠그고 세상에 나오지 않는 상황을 일컬어 두문불출이라고 했다. 당시 희생된 선비들을 ‘두문동칠십이현’이라고 한다. 그들의 이름이 다 밝혀지지는 않았다. 밝혀진 이들에 한해 추모하는 마음으로 적어본다. 신규(申珪) 신혼(申琿) 신우(申瑀) 조의생(曺義生) 임선미(林先味) 이경(李瓊) 맹호성(孟好誠) 고천상(高天祥) 서중보(徐仲輔) 성사제(成思齊) 박문수(朴門壽) 민안부(閔安富) 김충한(金沖漢) 이의(李倚) 등이다. 두문동은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광덕산 서쪽 기슭을 가리키는 옛 지명이다.
죽은 뒤를 생각해야 君子
신라와 고려는 더럽게 망하지는 않았다. 조선은 그야말로 더럽게 망해버렸다.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으니 선비들의 마음은 갈 길을 잃었다. 어찌 이런 일이 있단 말인가? 이것은 백이와 숙제, 마의태자, 두문동칠십이현 때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1905년 을사늑약이 발표되자 장지연 주필의 ‘시일야 방성대곡’과 신채호 선생의 ‘시일야우 방성대곡’으로부터 시작된 나라 잃은 슬픔은 매천 황현을 비롯한 많은 선비가 더러운 세상을 향해 목숨을 던지는 비극으로 이어졌다.
물론 이런 시절에도 친일파들은 희희낙락 부귀영화를 누렸다. 사마천은 이러한 세상에 대해 원망에 찬 목소리를 낸 것이다. ‘하늘의 도, 공자의 인 같은 절대 진리가 무너져내리는 순간에 인간이란 과연 무엇인가? 이것이 인간이란 말인가?’ 하는 울부짖음이 있었다.
한일합병이 체결되자 아편을 먹고 자결한 황현은 어려서부터 총명해 신동으로 불렸다. 청년시절에 과거를 보려고 서울에 와서 강위 · 이건창 · 김택영 등 학식이 높은 이들과 우정을 나누었다. 1883년(고종 20) 보거과(保擧科)에 응시해 장원을 했지만, 시골 출신이라는 이유로 시험관이 둘째로 내려놓았다. 이 일로 그는 조정의 부패를 절감했다. 그는 더러운 세상이라 여기고 회시 · 전시에는 응시하지 않고 관리가 되려는 뜻을 접었다.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가 가지 않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효가 우선이었다. 결국 아버지의 명을 어기지 못해 1888년 생원회시(生員會試)에서 장원으로 합격했다. 당시 조선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이후 청국의 적극 간섭정책 아래에서 수구파 정권의 가렴주구와 부정부패가 극심한 상황이었다. 황현은 다시 귀향했다. 조선 말기의 상황은 절개 있는 선비들이 설 자리가 매우 적었다. 황현은 구례에서 작은 서재를 마련해 3000여 권의 서책을 쌓아놓고 독서와 함께 시문(詩文) 짓기, 역사연구, 경세학 공부에 열중했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국권이 박탈당하자 중국에 있는 김택영과 국권회복운동을 하려고 망명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1910년 8월 한일합방의 비보를 듣고는 더는 하늘을 올려다볼 면목이 없었다. 절명시(絶命詩) 4수를 남기고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고귀한 삶을 접고야 말았다.
어지러운 세상 머리털 희게 겪고/ 몇 번 죽으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 했네. 이제는 참으로 어쩔 수 없으니/ 찬란한 촛불 하나 푸른 하늘을 비추네. 요망한 기운에 가려 임금 자리 옮겨지니/ 궁궐은 어둠침침하고 시간은 멈춰 섰네. 조칙 또한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것이니/ 종이 위에 눈물만 흘러내리네. 새와 짐승도 울고 온 산천 찡그리니/ 무궁화 화려 강산 기어이 망해 버렸구나 가을 등불 아래 읽던 책 덮고 역사를 헤아려 보니 글 아는 사람 제 구실하기 참 어렵기만 하네. 일찍이 나라 위해 작은 공도 세우지 못 했으니/ 내 몸 하나 희생될지언정 애국이라 할 수도 없네. 겨우 송나라 윤곡처럼 자결할 뿐이니/ 진동처럼 기개를 펴지 못한 것이 부끄럽기만 하네.
이렇게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사라진 인물들 외에 동굴이나 외딴 시골에 숨어서 이름 없이 사라져간 지조 있는 인물들이 있었을 것이다. 인간의 삶은 선택이다. 어느 순간에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친일파가 되고, 독립운동가가 된다. 백이와 숙제의 선택은 죽음의 길로 이어진다. 마의태자, 두문동칠십이현, 매천 황현과 더불어 이들의 이름은 우리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불려진다. 공자는 ‘군자는 죽은 뒤에 자기 이름이 일컬어지지 않는 것을 가장 가슴 아파한다’고 했다. 죽은 뒤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이 군자다. 하루살이처럼 살아간다면 군자라 할 수 없다.
‘부끄러움을 가르칩시다’
현대사회,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부끄러움이 어디에 있을까? 박완서 소설의 제목처럼 부끄러움을 가르쳐야 할 시대다. 인면수심(人面獸心)의 극악한 범죄자들은 형벌로 다스린다지만, 자존심이나 절개 정조를 제쳐두고 그저 ‘돈돈’ 하면서 우르르 몰려다니는 꼴이 가관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과 익명성이 부끄러움을 가려준다. 백이와 숙제는 선비의 절개 지조 이전에 인간의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었다. 사마천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부끄러움을 알았기에 묵묵히 글을 적었다. 그것으로 부끄러움을 극복한 것이다.
그 시절 사람들은 돈보다 귀한 덕목을 알았다. 우리에게도 인간으로서 자신의 이름을 두고 지켜야 할 최후의 보루가 있다. 장삼이사의 인간관계도 상대방이 수치스러워하는 그 무엇을 건드리면 관계가 단절되곤 한다. 훌륭한 선비에게 절개와 지조는 그러한 것이었다. 배고픈 소크라테스로 살 것인가, 아니면 배부른 돼지로 살 것인가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어떤 순간에 이러한 선택을 해야 한다.
박정희 정권 아래서 장준하와 김준엽은 서로 다른 길을 간다. 장준하는 온몸으로 박정희 독재 정권에 항거하다 의문사를 당하고, 김준엽은 학교에 남아 은자(隱者)의 길을 간다. 그리고 이름조차 남기기를 거부하고 동굴이나 산속에서 백이와 숙제의 길을 걸었을 영혼들은 밤하늘의 별이 되었다.
백이와 숙제는 자발적으로 자신의 길을 선택했다. 하지만 정권의 폭압 앞에 세상에 만정이 떨어진 사람도 있다.
문득 박정만 시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박정만 시인의 인생을 절벽으로 몰고 간 사건이 있었다.
전두환 정권 초창기 이른바 국민의 ‘군기’를 잡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던 5월 어느 날 예고도 없이 일어난 일이다. ‘한수산 필화 사건’에 연루된 박정만은 서빙고동 안가로 끌려가 사흘 밤낮 심한 고문을 당한다. 고문은 상상을 초월하는 폭력이었다. 당시 같은 사건으로 끌려간 ‘중앙일보’ 정규웅 선생의 회고를 읽으면서 나는 박정만 시인의 몸과 마음에 난 상처를 읽을 수 있었다. 권력은 서정시인의 감성을 유린하고, 선비와 시인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 가진 수치심을 모조리 끌어내어 군화로 짓밟아버렸다. 박정만 시인은 소설가 한수산과는 같은 문인으로 서너 번 만난 일 외에는 아무런 연관이 없었으나 정권의 횡포로 인해 영혼에 심한 상처를 입었다. 고문은 몸을 괴롭히지만 영혼의 고통이 더하다. 결국 시인은 인간과 세상에 대한 회의를 품었다. 그래도 살고 싶었다. 두문불출하던 그는 남도 여행을 감행했다. 남도로 향하던 중 불현듯 조치원에서 내려 수안보 부근의 세계사라는 절을 찾아가 인근에 텐트를 치고 2개월여를 보내기도 한다. 자연을 통해 개 같은 5월의 기억을 씻어내고자 노력했지만, 그의 삶은 5월 그 날에 멈추어버렸다. 마치 죽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처럼 술로 세월을 보내던 그는 유서와 같은 시를 쓴다. |
하늘을 바라고 하늘을 바라고/ 울지 말아라 벙어리야
미친 오월의 돌개바람이/ 자지러지게 자지러지게 네 울음을 울어도
말하지 말아라 벙어리야
아무리 기다리고 기다려도/ 아무도 저 하늘을 보려 하지 않는구나.
불 먹은 하루해의 봉분 위에/ 풀잎처럼 쓰러져간 우리네 목숨,
벙어리야 벙어리야
하늘을 바라고 하늘을 바라고 이제 우리 기꺼이 푸른 제(祭)의 사슬이 되자.
( ‘5월의 유서’ 전문 )
억압하면 더 강해진다
사마천은 백이와 숙제에게서 원통한 마음을 보았다.
백이와 숙제가 널리 알려진 것은 공자 덕분이지만,
그들의 인간다운 마음을 읽어낸 것은 사마천이다.
그들의 원통한 마음은 시공을 초월해 한국의 시인에게도 전이된다.
내 가는 길섶에는/ 한 송이 복사꽃도 피지 말아라.
눈물겨운 새소리 하나라도/ 청송(靑松) 높은 가지 위에 앉지 말아라.
바람도 불지 말고/ 그저 앉은 채로 살아 있는 돌멩이같이
그렇게 내 생의 그림자만 보아라. 산도 그냥 우리 말아라.
꽃 피면 서러웁고/ 달 뜨면 아득한 인간의 하루.
물소리 가득하여 나는 못내 못 참아라./ 내 등 뒤에서 내 등을 잡지 말아라.
정작 한 소리 마음을 내노니/ 저편 한 사람 외로운 이도 볼 일이요,
날 기울면 이편쪽 마음도 줄 일이다./ 가는 길 없음을 나는 아노니.
- ‘저 무화(無花)의 꽃상여’ 전문
박정만은 산하에 엎드려 운다.
‘꽃 피면 서러웁고/ 달 뜨면 아득한 인간의 하루’라는 슬픔의 밑바닥에서 통곡한다.
누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는가? 저 광활한 우주로 사라져간 시인의 영혼은 진정으로 자유로울까?
사마천은 ‘백이열전’을 통해 자유로운 인간의 도리를 설명했다.
그 스스로 자유로운 인간이 되기 위해 얼마나 큰 고난을 겪어야 하는지 체험했기에 더 절실하다.
호랑이는 죽어도 풀을 먹지 않는다.
인간 영혼의 고귀함과 자유로움은 그것에 저항하는 세상을 업고 나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선과 악의 개념을 넘어선다. 이 둘은 결국 하나이고, 하나는 결국 둘이다.
백이와 숙제는 무왕이 전쟁으로 평정한 세상이라는 피비린내 나는 혼란을 품고 넘어선다.
거기에 들어가지 않음으로써 들어가 있는 사람들을 품고 가는 것이다.
마의태자, 두문동칠십이현, 매천 황현도 각각 고려와 조선, 그리고 일제라는 억압이 있었기에 존재한다. 세상에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선비의 지조와 절개, 여인의 정조, 그리고 자유는 결국 그것을 억압하는 힘에 의해 더 강해지고 아름다워진다. 이 절묘하고도 가혹한 세상사가 있어 너와 내가 존재하고 그것이 자유롭고 아름답다.
- 원재훈, 시인 whonjh@empal.com
- 신동아, 2009.04.01 통권 595호(p586~5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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