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사기열전(史記列傳)’ ②]
태사공자서
겨울을 난 벚나무에 향기로운 꽃이 피고
한 권의 책은, 곧 그 책을 쓴 사람이다. ‘사기’를 읽는 건 사마천을 읽는 것이요, ‘목민심서’를 읽는 건 다산의 생애와 사고를 오롯이 읽는 것이다. 후세에 길이 남을 고전은 결코 순탄하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사마천은 가장 치욕스러운 시기를 저술로 견뎌냈고, 정약용은 슬픔과 고독을 책으로 달랬다. |
‘원(怨)은 난(亂)을 만들고 한(恨)은 문화에 통한다.’
이병주 선생은 사마천에 대한 글을 쓸 당시 나에게 이런 문장을 주었다. 이병주식 촌철살인이다.
이병주 선생 역시 ‘사기(史記)’를 처음 읽은 곳이 경찰서 유치장이었고, 서대문형무소에서 10년형을 살면서 한서(漢書)로 ‘사기’를 읽기 시작했다.
사마천이 억울하게 궁형을 받고 쓴 ‘사기’, 이병주 선생이 억울하게 10년형을 받고 감옥에서 읽은 ‘사기’. 시공간을 뛰어넘는 인간 정신의 교류다.
‘사기열전’의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와 반고의 ‘한서’에 수록된 ‘사마천전’을 읽으면서 나는 글쟁이의 운명에 대해 친구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독하게 글 쓰는 이들을 얘기하면서, 그 독함은 바로 그들의 고통과 슬픔이라는 말도 오갔다. 비록 이름을 널리 알리지는 못했으나, 가난과 슬픔, 고통 속에서 진주 같은 작품을 쓰는 시인이 많다.
글쟁이의 진정성은 어디서 나오는가? 그것은 문화에 통한다는 한(恨)이 아닌가. 세상에 남은 고전은 작가들이 말로는 전할 수 없는, 말로는 다할 수 없는, 말로 해서는 안 되는 상황에서, 어둠과 고통 속에서 기어이 하늘로 띄운 별이 아니던가.
사마천 이전에 ‘안 되는 건 죽어도 안 된다’고 목숨 걸고 밝히며 역사가의 전범(典範)을 보여준 용감한 삼형제가 있었다. 제나라의 권력가 최저는 임금인 장공을 죽였다. 이에 제나라의 태사(太史)는 ‘최저, 장공을 시하다’라고 기록을 남겼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깔끔한 문장이다.
최저는 태사가 괘씸해 죽여버렸다. 그러자 이번엔 태사의 동생이 ‘최저, 장공을 시하다’라고 썼다. 최저는 그 동생도 죽였다. 두 형의 죽음을 본 태사의 또 다른 동생도 마찬가지 기록을 남겼다. 잔인무도한 최저라지만, 이번엔 사람도 문장도 죽이지 못했다. ‘사기’의 ‘제태공세가(齊太公世家)’에 수록된 이야기다.
이 이야기를 읽고 나는 나 자신에게 물었다. ‘너는 문장 하나 때문에 죽을 수 있느냐?’
죽음보다 더한 치욕
간혹 죽음이 자비로울 때가 있다. 극심한 고통에 처한 사람은 죽음을 간절히 원하기도 한다. T S 엘리어트의 시 ‘황무지’에 등장하는 항아리 속 할머니에겐 죽음이 자비인 것이다. 고대 중국에서 남근을 거세하는 궁형(宮刑)은 최악의 형벌이었다.
사마천은 문장을 위해 죽음보다 더한 치욕을 견디며 ‘사기’를 집필했다. 그는 누구인가? 사마천은 한 경제의 중원 5년(기원전 145년)에 태어났다. 아버지 사마담은 사마천이 다섯 살 때에 태사령(太史令)이 되었다. 태사령은 사관(史官)을 의미하며 아들이 아버지의 직위를 이어받는 세습직이다. 사마천은 20세에 전국을 여행했으니, 그의 문장은 당시 온 세상이나 다름없던 중국을 유람한 경험에서 비롯됐다. 22세에 벼슬을 처음 했고, 38세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태사령이 됐다. 42세에 ‘사기’를 쓰기 시작했지만 본격적인 저술활동은 하지 못했다. 공사다망했기 때문이다. 48세에 이릉(흉노를 정벌하러 떠났다가 포로가 된 장군)을 변호하다 궁형을 당하고, 50세 무렵 출옥해서야 본격적으로 저술활동에 임할 수 있었다. 55세에 ‘사기’를 완성하고, 62세에 세상을 떴다.
궁형을 당한 선비들은 으레 자결했지만, 그는 그런 식으로 도피하지 않았다. 한 무제는 궁형을 당하고도 살아남은 사마천에게 중책을 맡기고, 곁에 머물러 역사를 기록하게 했다. 사마천이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쓰는지 지켜보고 싶었던 것일까?
‘사기열전’의 맨 마지막인 70번째 열전이 ‘태사공자서’다. 사마천은 ‘태사공자서’에 자신의 출생배경과 학문적 배경, 경력 등을 소상히 밝혀놓았고, ‘사기’의 구성에 대해서도 짧게 언급해, 책 전체를 이해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사마천은 사람이 살아 있음은 정신이 살아 있음을 말하고, 따라서 정신과 육체를 잘 운용해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정신이 고갈되고 육신이 피폐해져, 결국 육체와 정신이 분리되면 죽는다는 얘기다. 사마천은 정신이야말로 사람의 근본이며, 육신은 삶의 도구라고 했다. 이 삶의 도구, 그중에서도 남성의 상징이자 중심을 앗아간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사마천은 이릉 장군을 변호하다가 궁형을 당했다. 사마천으로 하여금 이러한 불행을 겪게 한 이릉 장군은 누구인가? 왜 사마천은 조정의 대세를 따르지 않고 무서운 군주 한 무제의 심기를 건드리면서까지 이릉 장군을 변호했을까?
이릉의 화(禍)
사마천은 이렇게 말한다. “나와 이릉은 같은 문하에 있었는데 본래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취미도 달라 술잔을 나누며 친하게 환담한 적도 없다. 그러나 그의 사람됨을 볼 적에 본래 예사롭지 않은 선비였다. 효심이 두텁고 신의가 있으며 청렴하여 공연한 선물은 받지 않았다. 물건을 나눌 때에는 제 몫을 남에게 양보하고, 항상 공경하는 마음과 사양하는 몸가짐을 가졌다. 항상 분기하여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국가의 위난에 뛰어들었다. 이것이 그의 평생의 자세였다.”
사마천은 역사를 기록하는 독수리눈을 가진 선비였다. 그의 눈은 그의 입이기도 했다. 행동과 말이 다르지 않았다. 이것이 화근이었다. 전술했듯, 역사가는 단 한 문장 때문에 목숨을 버리기도 한다. 사마천은 이러한 일이 바로 되지 않으면,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군주가 군주답고, 신하가 신하답고, 자식이 자식다워야 함은 이러한 정직성과 정확성에 기인한다.
이릉은 5000 병력으로 흉노를 정벌하러 갔다. 북방의 호랑이 같은 수만의 흉노 대군을 5000 군사로 제압하려다 적군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식량과 화살이 떨어지고, 구원병마저 오지 않는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이릉이 진중(陣中)을 바라볼 때, ‘병사들은 몸을 일으켜 눈물을 흘리고 피로써 얼굴을 씻고 눈물을 마시며, 살도 없는 활을 당기면서 시퍼런 칼날에 몸을 던지고, 북을 향해 앞 다퉈 죽어’ 가고 있었다. 그때 궁에서는 이릉이 용맹무쌍하게 싸우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일찌감치 승리를 자축하며 술잔을 높이 들고 있었다.
이릉은 한나라의 장군으로서 적에게 항복했다는 죄목으로 한 무제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이때 사마천이 한 무제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제가 생각하기로 이릉은 평소 맛있는 것도 먹지 않고 부하와 더불어 고난을 함께하니, 모두가 이 사람을 위해서라면 죽음도 아끼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옛 명장도 이릉보다 뛰어나지 않았습니다. 몸은 비록 적에게 붙들려 있지만, 당초 생각은 적당한 기회에 한에 은혜를 갚으려 했던 것입니다. 이미 패한 건 어쩔 수 없으나, 흉노를 무찌른 공훈은 천하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입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세상을 사는 일은 시인에게도 그리 녹록하지 않다. 그러니 정치판 같은 곳에서야 오죽하겠는가. 그의 충성은 호도되었고, 결국 이릉은 온 가족이 사형에 처해졌으며, 사마천은 궁형을 당해 한겨울 벌판에 알몸으로 서 있는 형국이 됐다.
살아남아야 할 이유
사마천이 ‘사기’라는 대작을 집필할 수 있었던 것은 가혹한 형벌 궁형 덕분이다. 그는 살아남아야 할 이유로 글쓰기를 택했다. 그러고 나니 육체적인 죽음이라고 할 만한 궁형은 오히려 정신을 되살려냈다. 그는 형벌을 받으면서 심각하게 고민했다. 먼저 억울함을 곱씹었다.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런 수모를 겪는단 말인가’ 미치기 직전까지 정신이 팽창한다. 몸과 마음은 터져버릴 것 같은 공황상태에 이른다. ‘이것이 내 죄인가? 이것이 내 죄인가? 몸이 망가져 쓸모없게 되었구나.’
몸의 망가짐이 정신의 죽음으로 이르기 직전에 사마천은 트라우마(외상 후 스트레스장애)를 극복하고 자신의 쓸모를 찾아냈다.
“대체로 시경과 서경의 뜻이 은미(隱微)하고 말이 간략한 것은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바를 펼쳐 보이려 했기 때문이다. 옛날 서백은 유리에 갇혔기 때문에 ‘주역’을 풀이했고, 공자는 진나라와 채나라에서 고난을 겪었기에 ‘춘추’를 지었으며, 굴원은 쫓겨나는 신세가 되어 ‘이소’를 지었고, 좌구명은 눈이 멀어 ‘국어’를 남겼다. 손자는 다리가 잘린 후 ‘병법’을 논했고, 여불위는 촉나라로 좌천되자 세상에 ‘여람: 여씨춘추’를 전했고, 한비는 진나라에 갇혀 ‘세난’과 ‘고분’ 두 편을 남겼다. 시 300편은 대체로 현인과 성인이 발분(發憤)하여 지은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모두 마음속에 울분이 맺혀 있는데, 그것을 발산할 수 없기 때문에 지나간 일을 서술하여 다가올 일을 생각한다. 좌구명이나 손자는 실명하거나 다리가 절단되자 희망을 잃고 물러나 책을 지어 토하고 글에 의지해 깊은 뜻을 세상에 알리려 했던 것이다.”
궁형, 거세를 당한 것은 그가 이제 더 이상 남성으로서 국정에 나가 이런저런 말을 할 수 없다는 의미기도 하다. 사마천은 이제 사회의 마이너리티로 그림자와 같은 삶을 산다. 그에게 오늘은 사라지고, 대장부의 명분도 없어진 것이다. 그에게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과거와 미래뿐이었다. 그래서 ‘지나간 일을 서술해 다가올 일을 생각하는’ 문장을 남긴다. 이것이 바로 역사가의 운명이었다.
그는 벗 임안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런 글을 남기기도 했다.
그는 한겨울 헌 가마니 한 장에 의지해 서울에서 밤을 지새운 일을 회고하면서 고통이 심하면 인간은, 목소리가 변하고 시력마저 잃어 세상이 잿빛으로 보인다고 회고했다. 온전한 사람이 아닌 것이다.
한하운은 그때의 심경을 이렇게 적었다. ‘이제는 나는 말도 잊었다 울음도 잊었다.’
이러한 고통 속에서 그의 절창(絶唱)이 터져 나왔다.
그의 시 ‘전라도 길’이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 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 삼거리를 지나도 쑤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 막히는 더위 속으로 찔름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자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 길.
한하운의 붉은 황톳길은 이후에 독재 권력에 저항하는 시인들의 길이 되었다. 선배인 김소월 윤동주에서부터 유신독재하의 김지하 황석영과 같은 시인, 소설가들이 이 길을 걸었다. 천형을 받은 건 아니나, 감금되고 통제되는 형벌의 길을 감수했다. 이러한 길은 아마도 인류가 존속하는 한 영원할 것이다. 중국 사람들은 이세상과 저세상을 다르게 보지 않았다. 이승과 저승을 동일 선상에 놓고 보았다. 살아서 황제는 죽어서도 황제이고, 신하는 사나 죽으나 신하다. 제후는 노자를 무덤에 들고 들어가고, 법관은 법조문을 안고 들어간다. 무덤 속의 물건을 보면 주인의 정체가 보인다. 중국인은 왜 입신출세하고, 고관대작이 되려 하는가? 단순히 현세의 호의호식을 위해서가 아니다. 현실의 입신출세는 다음 생인 유택의 세계, 명의 세계에까지 이어지기 때문이다.
아버지와의 약속
사마천 역시 이러한 바람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그는 ‘사기’를 저술함으로써 후대의 역사서인 반고의 ‘한서’에 이름을 남기고 명예를 되찾았다. 그의 저서 ‘사기’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불세출의 고전이 되었다. 그는 치욕을 견뎌내고 살아남아 ‘사기’를 쓴 덕분에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자신의 비통에 찬 마음을 집필로 승화시켰으며, 아버지의 마음을 받들어 효를 행한 것이다.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담은 아들에게 이러한 말을 남겼다.
“내가 죽으면 너는 반드시 태사가 되리라. 태사가 되거든 내가 쓰고자 했던 것을 잊지 말아라. 효행이란 어버이를 받드는 데서 비롯하며, 임금을 섬기는 것은 그 다음의 일이다. 입신하여 후세에까지 이름을 드날리고, 나아가 죽은 부모를 유명하게 하는 것으로 끝난다. 이것이 가장 큰 효행이니라.”
중국의 역사가 ‘춘추’를 끝으로 무주공산이 되어버린 것을 한탄하며, 춘추 이래 400년 남짓한 역사를 기록하라고 간곡하게 명한 것이다. 한나라가 천하를 통일하였으니, 이제 태사가 되어 그걸 기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체절명의 바람이었다.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주공(周公)이 가신 지 500년이 되어 공자가 태어났습니다. 그로부터 500년이 지났습니다. 주공, 공자의 도를 계승하여 이를 밝히고, ‘역(易)’의 해석을 바로잡아 ‘춘추’를 잇고, ‘시 · 서 · 예 · 악’의 전통으로 돌아갈 수 있는 자가 탄생한다면 바로 지금일 것입니다. 나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사마천이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어 이렇게 써나간 지 10년 만에 이릉사건이 발생했다. 그는 궁형을 받은 뒤에 중서령이라는 높은 관직에 올랐다. 이때 친구인 임안이 사마천에게 편지를 보내 옥중에서 사형집행을 기다리고 있는 자신의 다급함을 토로하고, 옛 현신(賢臣)의 도의를 본받으라고 충고했다.
사마천은 ‘임안에게 보내는 글’이라는 답장에서 자신이 비록 중서령의 직책을 맡았으나 쓰레기통에 처박힌 노예나 다름없는 처지라고 했다. 그러면서 ‘사기’를 완성하여 이를 마땅한 자에게 전하고, 큰 마을이나 도시에 퍼져 나가게 할 수만 있다면, 과거의 욕됨을 갚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자신은 다만 쓸 뿐이라고. ‘한서’의 ‘사마천전’에 수록된 ‘임안에게 답하는 글’에는 사마천의 절절한 심경이 잘 드러나 있다. 마치 제갈공명의 출사표 같다.
- 원재훈, 시인 whonjh@empal.com - 신동아, 2009.02.01 통권 593호(p508~519)
|
'지켜(연재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21세기 <사기열전> - ④ 백이열전 (0) | 2008.12.20 |
---|---|
21세기 <사기열전> - ③ 화식(貨殖)열전 (0) | 2008.12.20 |
21세기 <사기열전> - ① 자객열전 (0) | 2008.12.20 |
고고학자 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 - 인천 계양산성 (0) | 2008.12.20 |
고고학자 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 - 조선의 부활을 알린 청진동 (0) | 2008.12.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