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사기열전(史記列傳)’ ①]
자객열전
한번 떠나면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
동양의 고전인 ‘사기열전’에는 수많은 인물 유형이 있다. 예를 들어 ‘자객열전’에서는 안중근, 이봉창, 윤봉길의 원형을 볼 수 있고, ‘화식열전’(대부호에 대한 경제적 통찰)에서는 정주영이나 이병철을, ‘백기왕군열전’(군인의 삶)에서는 이순신이나 원균을 볼 수 있다. 세상에는 참으로 다양한 인간이 있지만, 대체로 ‘사기열전’에 나오는 인물 유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한국 역사 속에 살아 숨쉬는 위인들도 마찬가지다. 이 점에 착안해 ‘사기열전’의 인물 유형으로 본 한국의 인물 이야기를 풀어가고자 한다. ‘자객열전’으로 첫 장을 연다.(편집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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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 아래서 공원을 산책했다. 소슬한 바람과 나무가 뿜어내는 신선한 기운들. 나무들 사이로 사람들이 보였다. 소나무와 같은 상록수는 검게 보이고, 은행나무, 플라타너스와 같은 낙엽송들이 눈에 들어온다. 겨울나무는 앙상하다. 아직까지 가지에 매달려 있는 나뭇잎 하나가 바람이 불자 툭 떨어진다. 나뭇잎 한 장을 주워 들고 물어본다. 넌 어디에서 왔느냐? 누가 너를 떨어뜨렸니? 지난 가을 나무는 가지와 잎자루 사이에 떨켜를 만들어 나뭇잎으로 흘러가는 영양분을 차단했다.
잎을 떨어뜨리는 떨켜. 겨울을 나기 위해 나뭇잎은 나무를 떠난다. 대신 나무가 잘 산다. 이젠 흙으로 돌아가는 낙엽을 도와주는 떨켜, 우리 인간 유형 중에 이 떨켜형이 있다. 타인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사람들. ‘사기열전’에 나오는 자객열전의 영웅들을 나는 ‘떨켜 인간’이라고 부른다.
만주 벌판을 달리는 준마들
내 책상 위에는 안중근 장군의 휘호가 새겨진 작은 병풍이 있다. 국가안위노심초사(國家安危勞心焦思) 위국헌신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과 같은 휘호 옆에는 단지(斷指)한 손도장이 찍혀 있다. 어진 이는 자신이 죄를 짓지 않았으면 몸이 묶이는 치욕을 당해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사마계주(사기의 ‘일자열전’에 나오는 인물)는 말했다. 안중근 장군은 일본인의 시각에서는 테러리스트이지만, 우리 혹은 나는 안 장군을 어진 사람으로 본다. 그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었기 때문이다.
안중근 장군처럼 세상을 살면서 단 한번이라도 절절하게 온 힘을 다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깨진 항아리를 연못에 던지듯, 온몸을 던져 자신의 목숨을 거부하고 세상의 삶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한세상을 움직이겠다는 말이 공허하게, 혹은 코미디처럼 들리는 세상이다. 사나이 대장부라는 말이 왠지 어울리지 않는 세상. 사내란 그저 월급 타고, 가족 부양하고, 착한 아버지가 되어야 할 것 같은 세상이다. (그것 역시 보람찬 일이긴 하지만, 왠지 성에 차지 않지 않은가)
이제는 만주 벌판을 달리는 준마와 같은 사내들이 다 사라져버렸다. 일산에 사는 늙은 선배는 한때 말했다. 만주 벌판을 달리는 말은 마구간을 돌아보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 늙은 선배도 언제부터인가 술을 먹다가 밤 11시가 되면 마구간으로 서둘러 돌아가는 마구간의 말이 되어버렸다. 이렇듯 세상과 사내들의 삶이 자잘하게 쪼개지고 무너지고 가치 있는 일에 대한 개념 자체가 바뀌어버려서인지, 우리는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고 대의를 향해 길을 떠나는 삶 자체를 잊어버린 지 오래다.
‘자객열전’에는 만주 벌판을 달리는 준마와 같은 사내들이 있다. 책장을 넘기면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가 나의 심장을 쿵쾅거리게 한다. ‘자객열전’에는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자객들이 있다. 모두 다섯 명의 자객이 등장하는데, 이들의 모습은 각양각색이다. 거사에 성공한 이도 있고, 실패한 이도 있다. 하지만 이들의 행동은 성공과 실패 이상의 울림을 전한다. 그게 뭘까 싶었다.
비수 하나로 땅을 되찾다
열전에 처음 등장하는 자객은 노나라 장수 조말이다. 그가 날카로운 비수 하나로 전쟁에서 패해 잃어버린 땅을 되찾은 기묘한 사건이 있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조말은 노나라 장공을 섬겼는데, 제나라와 세 번 전투를 치러 모두 패했다. 노나라 장공은 수읍 땅을 제나라에 바치고 화친을 청했다. 당신이 강하니 우리 땅 좀 가져가고 전쟁하지 말자는 뜻이었다. 제나라의 환공은 이를 허락하고, 승리자답게 기분 좋은 술자리를 열었다. 그때 조말이 비수를 들고 뛰어올라, 환공의 목숨을 위협하면서 당당하게 말했다. ‘제나라는 강하고 노나라는 약하다.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침범하는 건 가혹한 일이다.’ 비수로 일단 상대를 제압하고 약한 나라의 어려움을 겸손하게 이야기한 다음 간곡하게 부탁했다. “군주께서는 이 점을 헤아려주십시오.”
일단 살고보자는 심정으로 환공은 빼앗은 노나라의 땅을 모두 돌려주겠다고 한다. 그러자 조말은 비수를 멀리 내던지고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장군의 모습이 이러했다. “북쪽을 향해 신하들의 자리에 앉았는데, 얼굴빛에 변함이 없었고 말소리도 조금 전과 다름이 없었다.”
허허, 기가 막힌 일이다. 조말의 간덩이가 과연 부었구나, 내가 비록 너의 비수에 잠시 위기를 맞았으나 모면했으니 이제 요놈 맛 좀 봐라, 칼 한 자루 가지고 나를 위협하다니, 뭐 이런 심정으로 환공은 화를 내면서 약속을 내던지려 했다.
그때 관중이 나서서 군주의 체통을 지킬 것을 부탁한다. 사나이가 한번 뱉은 말은 절대 돌리는 게 아니다. 그럼 당신은 천하의 인심을 잃게 된다. 소탐대실하지 말고 약속 지키라고 한다.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인가? 양국이 화친하는 자리이니 신하와 군주가 모두 모인 자리다. 이들의 입을 모두 막을 수도 없었다. 결국 갑작스럽게 상황이 종료되고 곰곰이 생각한 환공은 결국 사나이답게, 천하의 군주답게 노나라 땅을 돌려주고 돌아간다.
이 풍경은 한 폭의 동양화다. 이 정도 의리가 지켜지는 사회는 공자가 그리워한 저 요순의 시절과 무엇이 다르랴. 지금 전세계를 향해, 전 국민을 향해 국가 정상들끼리 한 약속도 돈 때문에 하루아침에 날려버린다. 이른바 실용주의란다.
사실 지금의 최첨단 정보시대와 비교해보면 조말의 자리는 밀실과도 다름없을 것이다. 대(對)국민 발표를 하고도, 은근히 말을 바꾸기 일쑤인 작금의 현실을 보자. 정치인은 말 바꾸기의 선수다. 이들에게는 부끄러움도 없다. 실용적인 면에서 어제 한 말을 오늘 바꾸기도 하고, 방금 말해놓고 머리로는 딴말을 준비하는 것 같은 가증스러운 얼굴들은 조말의 비수에 잠시 놀라 헛소리를 하긴 했지만 세상을 바르게 다스리기 위해, 즉 올바른 정치를 위해 쓴맛을 감수하는 제나라의 멋쟁이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하긴 내가 잘 알지도 못하는 정치까지 갈 필요가 뭐 있나. 나나 너나 다 조말의 비수를 잃어버린 지 아주 오래이지 않은가.
조말이 죽고 나서 167년 오나라의 전제가 칼을 들었다. 오나라 당읍 사람인 전제는 오자서라는 뛰어난 인물의 눈에 띈 인물이다. 초나라에서 오나라로 피신와 있던 오자서는 왕이 되고 싶어하는 공자 광에게 전제를 추천했다. 과연 오자서의 혜안대로 공자 광은 전제의 칼을 빌려 요왕을 제거하고, 왕이 되었으니 그가 합려다. 합려는 오나라의 24대 왕으로 재임하면서 초나라 신하이던 오자서를 재상으로, 그리고 손자병법의 손무로 하여금 군대를 조직하게 해서 결국 초나라를 공략하고 오나라의 세력을 중원으로까지 넓힌 왕이다. 요왕을 제거하기 위해 전제는 구운 생선을 요왕에게 올리는 시늉을 했다. 그 생선의 뱃속에 칼이 들어 있었다. 수저가 닿을 자리에 놓인 생선에서 칼을 꺼냈으니 그의 거사는 거의 이겨놓고 싸운 거나 다름없었다. 차원이 다르기는 하지만 영화에 나오는 킬러들의 세계에서도 가장 고난도의 저격은 바로 칼이라는 얘기가 있다. 프랑스의 저격수 레옹이 마틸다에게 멋진 음성으로 남긴 말이다. 목표물에 다가서기가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수는 그림자처럼 목표물에 스며든다.
생선 뱃속에 숨긴 칼
‘사기열전’의 자객들은 프로가 아니다. 프로는 시장경제의 논리에 따라 실용적으로 움직인다. 돈을 받아야 한다. 암살 대상에 따라 돈의 규모도 다르다. 다름 아닌 인간의 목숨을 가지고 거래하니 그들은 소인배이고 무뢰한이다. 하지만 자객들은 돈 거래를 천박한 짓으로 여겨서인지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그들이 추구한 것은 다름 아닌 명분과 의리, 한걸음 더 나아가 공자의 인(仁) 사상이었다. 이러한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준 자객은 진나라의 예양이다.
전술한 자객들은 나름 깔끔하게 일처리를 했다. 하지만 진나라 사람인 예양은 지독하게도 운이 없거나 아니면 칼과는 거리가 먼 선비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오로지 선비의 지조를 세우기 위해 비수를 품었다.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여인은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화장을 고치는 것이다. 선비가 지조를 지키는 데 전제조건은 자신을 알아보고 인정해주는 주군이 있다는 것이다. 예양은 진나라에서 범씨와 중항씨라는 두 주군을 섬겼다. 하지만 그들은 예양을 여느 선비와 다르게 보지 않았다.
예양을 알아본 주군은 바로 지백이었다.
지백은 조양자를 능멸했는데, 열 받은 양자는 한나라 위나라와 함께 마치 신라가 당나라와 손을 잡은 것처럼 군대를 모아 지백을 멸했다. 조양자는 지백에게 맺힌 한이 많았는지, 그의 두개골을 잘 모셔다가 옻칠을 예쁘게 해서 술잔으로 썼다.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예양은 일단 산속으로 숨는다. 그리고 자기를 알아준 지백을 위해 한 목숨 바칠 것을 각오한다. 예나 지금이나 죽기를 각오하면 못할 게 없다. 하지만 일지매처럼 뛰어난 칼 솜씨가 있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억울한 주군의 원을 풀어주겠다는 일념으로 일단 몸에 비수를 품고 ‘막무가내’로 달려들어 양자의 배에 칼을 푹 담글 생각을 한다.
두 마음을 품고 섬기는 자들이여
이유는 간단하다. 그래야 지백의 은혜를 받은 자신의 영혼이 부끄럽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일단 성과 이름을 바꾸고 가벼운 경범죄를 지어 죄인이 되었다. 자신의 정체성을 완전히 바꾸어버린 것이다. 선비 예양의 몸은 이미 지백과 함께 죽었고, 혼이 잠시 그 몸에 깃든다. 죄수의 신분으로 조양자가 하루에 한두 번은 반드시 오게 되어 있는 화장실의 벽을 바르면서 기회를 엿보았다.
열전에 의하면 사람의 목숨을 빼앗기란 쉽고도 어렵다. 하늘의 보살핌을 받았는지, 아니면 영웅이 화장실에서 일보다가 급사하는 것이 모양이 좋지 않아서인지 몰라도, 양자는 화장실 근처에서 불안감에 휩싸인다. 볼일은 급한데 가슴이 두근거리고, 두려운 마음이 들어 주변을 조사해보니 품 안에 비수를 감추고 있는 이가 있었다. 양자보다 주위에 있는 이들이 더 놀랐는지, 당장 목을 베라고 했다. 하지만 양자는 지백의 원수를 갚으려 했다는 초췌한 몰골의 예양을 보고 뭔가 깨달은 점이 있었다. 그는 너그럽게 예양을 풀어주었다. 예양이 의로운 사람이며 천하의 현인이라는 말을 자신의 주위에 있는 신하들이 들을 수 있게 큰소리로 외치면서 말이다. 즉 너희들도 예양의 이러한 지조를 닮아야 할 것이다. 이쯤 되면 예양도 마음을 바꿀 것이라고 양자는 생각했다.
하지만 예양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의 몸은 이미 자신의 것이 아니라, 근육이 움직이는 한 그는 복수의 화신이었다. 하지만 이미 얼굴이 팔렸고, 목소리까지 들켜버렸으니 어찌할 것인가. 그는 얼굴과 목소리를 추하게 바꾼다. 온몸에 옻칠을 해서 문둥이처럼 꾸몄고, 숯가루를 먹어 목소리까지 탁하게 했다. 그러한 몰골을 아내와 가족도 알아보지 못하자 예양은 미소 지었다.
이제 다시 한번 시도하자. 다시 복수의 길을 떠나는 데, 오직 한 친구만이 예양을 알아보았다.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면서 예양의 뜻과 마음을 아는 친구는 눈물을 철철 흘리면서 기왕에 복수할 거라면 겉으로는 양자를 섬기는 척하면서 양자가 긴장을 풀고 가까이 할 때 일을 치르면 될 것 아니냐고 했다. 그는 예양의 끔찍한 몰골에서 죽음을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친구에게 예양은 이렇게 말하고 뒤돌아보지 않고 가던 길을 떠났다.
“예물을 들고 가 남의 신하가 되어 그 사람을 죽이려고 한다는 건, 두 마음을 품고 자기 주인을 섬기는 것이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인데, 이 길을 걸어가는 이유는 내가 죽고 나서라도 남의 신하가 되어 두 마음을 품고 주인을 섬기는 자들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이다.”
예양의 이 말은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잘 만들어진 활시위처럼 팽팽한 긴장이 흐른다. 그는 자신의 삶 너머를 보았다. 앞으로 자신처럼 살 사람들에게 전범을 제시한 것이다. 그것은 후배들에게 꼭 그렇게 하라는 명령조의 말씀이 아니다. 나는 이렇게 했다는 풍경이고 이미지다. 지금도 이 풍경은 서산의 놀에 떠오른다. 이 이미지는 저녁 하늘 놀처럼 붉고 어둡다. 그 부끄러움이 누천년의 세월을 이어오고 있다. 하여간.
예양은 양자가 지나다니는 길목에서 거사를 도모했으나 결국 또 하늘의 도움을 받은 양자에게 들키고 만다. 그때 양자가 꾸짖는다. 왜 이토록 끈질기게 원수를 갚으려 하느냐. 너는 범씨와 중항씨를 섬긴 적이 있지 않는가? 지백이 그들을 죽였는데, 그때 너는 왜 원수를 갚지 않고 나에게만 이러는 거냐고 따져 물었다.
옷을 베어 원수를 갚다
그러자 예양은 범씨와 중항씨는 자신을 평범하게 대했지만, 지백만이 자신을 한 나라의 걸출한 선비로 대접했기에 그에 걸맞은 행동이 이러하다고 말했다. 몰골은 흉하지만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는 예양의 태도에 감탄한 양자는 울면서 예양을 참하려 하였다. 그때 예양이 말했다. “전날 군왕께서는 저를 너그럽게 용서했습니다. 그 일로 사람들이 당신을 칭송합니다. 저는 죽어 마땅합니다. 그러나 당신의 옷을 얻어, 그것을 칼로 베어 원수를 갚으려는 뜻을 이루도록 해주십시오. 죽어도 한이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감히 바랄 수 없는 일이겠지만, 제 마음속의 말을 털어 놓는 것뿐입니다.”
양자는 예양의 간청을 받아들이고 사람을 시켜 자신의 옷을 예양에게 가져다주도록 하였다. 예양은 그 옷을 칼로 내리치고 지백의 은혜를 갚았다고 기뻐하며 그 칼에 엎어져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조나라의 선비들은 모두 울었다.
한국의 선비들에게도 이런 대쪽 같은 정신이 있었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던 시절 고려의 두문동 전설을 예로 든다. 고려 선비들이 새 왕조인 조선을 인정하지 않고 두문동에서 나오지 않자, 태조가 불을 질러 그들의 지조를 시험했다. 그들은 두문불출했다. 그래서 모두 죽었는데, 그 선비들이 억지로 등을 떠밀어 울면서 그 두문동을 나온 선비가 바로 황희다. 선비들은 황희에게 너만은 살아 고려의 정신을 전해야 한다고 그를 내보냈다. 불타는 두문동을 걸어 나와야만 했던 황희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뒷날 사육신도 이러한 선비의 부끄러움을 아는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예양이 비록 칼을 들어 자객 인물의 유형으로 분류되었지만, 열전에 기록된 행간의 의미를 보면 칼보다는 정신의 날이 더 날카로웠다. 때론 문장이 칼날처럼 날카롭게 가슴을 베기도 한다. 무서운 문장이 있다. 잘 벼려진 칼날 같은 문장은 어쭙잖게 입술만 나불거리는 사람의 혀를 베어버리는 힘이 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무잡한 인간들은 진짜 칼을 무서워하지만, 부끄러움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이러한 칼날을 더 무서워한다.
예양이 죽은 지 40년이 지나 제나라 땅에서는 섭정과 그 누이의 장렬한 죽음이 있었다. 섭정 또한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자를 위해 죽는다는 인물 유형이다. 그는 효자다. 옛 나라의 근본 사상인 충효의 모습을 보여준 인물이었다. 섭정은 사람을 죽이고 원수를 피해 어머니, 누이와 함께 제나라에서 개백정을 하면서 살고 있었다. 최대한 신분을 낮추어 구설에 오르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 오빠에 그 누이
섭정에 대한 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람은 엄중자다. 엄중자는 한나라 애후를 섬겼는데, 애후는 한나라 재상 협루와 사이가 나빠 목숨이 위태로웠다. 그래서 협루를 제거할 인물을 찾아 돌아다니다가 섭정을 만나게 된다.
엄중자는 섭정을 찾아가 선비의 예를 갖추어 사귀고 막대한 황금을 주면서 섭정 어머니의 장수를 기원했다고 한다. 물론 그 황금은 거사에 대한 보답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내색은 감추었다. 효자 섭정은 기구한 사연으로 개백정을 하고 있는 자신을 알아보고 과감한 투자를 하는 고위관리인 엄중자에게서 군자의 덕을 보았지만, 어머니를 모셔야 하는 처지이므로 엄중자의 청을 거절했다. 그리고 섭정의 어머니가 천수를 다하고 세상을 떠나자, 이번에는 자신이 엄중자를 찾아가 속마음을 물었다. 내 몸이 필요한 곳이 어디인가?
엄중자는 한나라의 재상인 협루라고 밝힌다. 하지만 그는 세도가로 경비가 삼엄하니 수레와 말, 장사들을 데리고 갈 것을 권한다. 하지만 섭정은 영민한 사람이었고, 엄중자의 안위를 걱정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객으로서 말했다. “한나라와 위나라는 가까이 있고, 지금 그 나라 재상을 죽이려 하는데, 그가 또 그 나라 왕의 친족이라면, 이러한 형세에서는 많은 사람을 써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많으면 생각을 달리하는 자가 생길 수 있고, 생각을 달리하는 자가 생기면 말이 새어나갈 것이며, 말이 새어나가면 한나라 전체가 당신을 원수로 여길 것이니 어찌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그는 엄중자의 걱정을 뒤로하고 홀로 길을 떠났다. 그리고 단숨에 관청의 단청에 앉아 있는 협루를 찔렀다. 협루의 부하들이 섭정을 향해 달려들었지만, 수십명이 섭정의 칼날에 베어졌다. 그런 뒤 섭정은 자신의 얼굴 가죽을 벗기고, 눈을 도려내고, 배를 갈라 창자를 끄집어내고 죽었다.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 한나라에서는 천금의 현상금을 걸고 자객의 신분을 확인하려 하였다. 섭정의 시체는 시장통에 전시됐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섭정의 누나 섭영이 찾아와 울부짖었다. 이미 엄중자와의 만남을 알고 있던 그녀는 엄중자가 섭정을 알아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시장통을 지나다니던 사람들은 어찌 이 위험한 인물을 안다고 하느냐고 염려하였다. 하지만 섭정의 누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큰소리로 자신이 살아 있기 때문에 동생은 신분을 감추기 위해 처참하게 자신의 신체를 훼손하였다고 밝혔다. 또한 동생이 선비로서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고 섭정의 죽음을 애도하다 그 자리에서 자신도 목숨을 놓아버렸다.
한나라 주위에 있던 진나라, 초나라, 제나라, 위나라에서는 모두 섭정만 위대한 것이 아니라 그 누이도 장한 여인이라고 애도했다.
“장사가 한번 떠나면…”
이상 소개한 4인의 자객은 하나같이 대의를 위해 목숨을 버렸다. 그들은 살아 영광을 바라지 않았다. 자객의 죽음은 때론 주군의 한을 풀어주기도 하고, 주군의 뜻을 이루기도 한다. 이들은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물론 지금 시대에 이러한 방식으로 뜻을 이룰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칼로써 자신을 뜻을 전하는 시대가 오지 않기를 당연히 바란다. 칼로써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말이 되고, 그 말이 행동이 되어 예의가 갖추어지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싶어한다. 때론 어설픈 폭력이 속 시원하다는 이도 있다.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는 말이 단적으로 그러한 심정을 대변한다.
개인사에서도 그러하다. 울화통이 터지는 일이 있게 마련이다. 그때 자객들을 생각하면 알량한 개인적인 원한을 가볍게 여길 수도 있다. 운전을 하다가 싸우는 사람들, 돈 거래를 하다가 주먹다짐을 하는 사람들, 일상사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원한은 옛 자객들의 처연한 행동에 견주면 티끌 같다. 거기에 목숨을 걸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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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재훈, 시인 whonjh@empal.com
- 신동아, 2009.01.01 통권 592호(p530~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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