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 대표작가, 민촌 이기영
“춘원이여, 연애소설이나 쓰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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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에서 집필 중인 이기영. |
당신이 현 문단의 인기적 작가임에
아마도 누구나 이의가 없으리라
그러나 대가엔 부주(腐柱)가 위험하다
이광수의 옛날의 지위는 당신 차지다
그런 것이 역사적 필연성이니
당신은 반드시 역사에 감사하여서
다시 더 참다운 역사성에 충실하여라
소극적 만네리즘에 자경자숙하여라
당신의 문학적 본령은 ‘고향’이 대표한다
그러나 <イロハ>판은 번역이 표열하여
원작의 향기를 석사(惜死)하고 있는 듯하다
‘고향’이 만부나 팔렸다 하니
조선적 인세의 박수(薄酬)를 위안하여라
당신이 어른된 문학적 ‘고향’이
어길 수 없는 카프의 요람이어든
그 시대의 정신을 새롭게 발휘시켜라
당신의 ‘서화’를 낭화(狼火)로 연소시켜라
시절은 이제야 맥추(麥秋)를 엿보는데
당신의 ‘맥추’를 수확하여라
당신의 ‘어머니’는 아직도 소녀기니
무어라 비평할 시기가 상조이나
흥미를 노리는 통속적 자장가를 경고하라
고리끼의 ‘어머니’를 숙독하여 배우라
애기를 키우는 ‘어머니’엔
모성애가 생명이고
‘어머니’를 키우는 작가에는
현실적 사회애가 좋은 젖이다
‘이기영(李箕永)’이라는 제목 아래 쓰여진 김용제(金龍濟) 시이다.
<문단 풍자시>라는 큰 제목 아래 모두 9명 시인, 작가, 평론가들 이름이 올라 있으니,
이기영, 백철(白鐵), 임화(林和), 장혁주(張赫宙), 박영희(朴英熙), 한설야(韓雪野), 엄흥섭(嚴興燮),
유진오(兪鎭午), 이북명(李北鳴)이다.
<비판> 1937년 9월호. 제1회 ‘국어문예총독상’을 받은 시인 겸 평론가 금촌용제(金村龍濟)가
풍자시로 다루고 있는 문인들 가운데 친일 상채기가 없는 이는 딱 둘밖에 없다.
이기영과 한설야. 두 사람에 ‘낙동강’ 작가 포석(抱石) 조명희(趙明熙)를 넣어
‘카프 트로이카’라고 불렀을 만큼 인간적으로나 사상적으로 스스럼없는 사이였다.
이기영은 1895년 충남 아산(牙山)에서 충무공 이순신 12대 손으로 태어났다.
4살 때 천안으로 이사하여 서당에 다니며 진서 공부를 하다가
11살 때 부친과 최승희(崔承喜) 남편인 안막(安漠) 아버지 안기선,
무관학교 출신 심상만을 일으킨 이로 하여 세워진 영진학교에 들어갔다.
20살에 무과급제하였으나 벼슬자리를 못 얻어 서울 대가댁 출입을 하며
양반상놈 가리지 않는 어씁(호협)한 무가 기풍으로 술을 좋아하는 아버지였는데,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를 미워하며 죽어도 술을 안 먹는다고 마음 다졌다.
한설야·조명희와 함께 ‘카프 트로이카’
1908년 14살 때 2살 위인 한양조씨와 혼인을 하였으나 어린 나이에 아버지 억지로 한 혼인이었으므로
부인한테 정이 없어 뒷날 다른 여자와 살게 된다.
15살 때 아버지가 뽕빠져 큰고모댁 행랑살이를 하였고 가정교사로 들어가 살며
학교를 마친 것이 16살 때였는데, 아버지가 부잣집 사둔 마름 노릇을 하여 살아갔다.
17살부터 23살 때까지 책방 점원, 막일꾼패 통역과 날품팔이, 행상, 광부, 유성기 약장수를 하며
집을 나가 마산, 부산, 인천까지 갔다가 아버지한테 붙들려 왔다.
진서와 왜글 · 왜말에 횅하고 고대소설 · 신소설을 두루 읽다가 기독교에 끌리게 되는데,
새로운 학문과 알음알이에 목말라 하던 젊은이에게
기독교는 어지러운 세상을 건질 수 있는 구멍수로 보였다.
예수교 여학교 선생을 하다가 3·1운동 물너울에 휩쓸렸고
1922년 일본 동경으로 가 세이고쿠(正則) 영어학교에 들어가 영어를 배우며
러시아 소설들을 골똘히 읽기 비롯한다. 그리고 기독교와 연줄을 끊는다.
“성격의 교리란 게 논리적으로도 모순되는 것은 고사하더라도
목사를 위시한 소위 교역자란 자들의 행실이 그야말로 양의 털옷을 입은 승냥이와 같았다.
한번 그 속을 알게 된 나는 날이 갈수록 예수교에 대하여 환멸과 반항심을 가지게 되었다.
교회는 허위와 위선으로 가득 차 있으며 소위 선교사란 자들은 종교의 탈을 쓰고
침략의 마수를 뻗치고 있는 제국주의 앞잡이들이었다.
나는 날이 갈수록 예수교의 위선적 흑막이 더욱 똑똑히 보이어서 마침내 교회를 떠나고 말았다.
나뿐 아니라 속을 모르고 믿었던 당시 청년들도 교회를 차차 멀리 하였다.”
이기영은 고국에서부터 알고 있던 홍진유(洪鎭裕)와 동경에서 만나
한 셋집에서 밥을 끓여먹으며 고학을 한다.
대서업자한테 글씨품을 팔며 세이고쿠 영어학교 야간을 다니다가 귀국한 것은
1923년 동경대지진을 겪으면서였다. 귀국하기 전 조선 유학생들 모임에서 조명희와 만나게 되는데,
사회주의 운동가로 나서는 홍진유와 함께 이기영 삶에 대수로운 동무가 된다.
홍진유가 얻어다 주는 ‘자본주의의 기구’라는 팸플릿을 처음 읽어보고 맑스주의 책들을 즐겨 읽었으며,
러시아문학을 알게 된다. 푸시킨, 고골리, 톨스토이, 투르게네프, 체홉, 고리키 작품을 읽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고리키 작품에 빠져들었다. 그때 속마음이다.
“참으로 쏘비에뜨문학은 나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확 바꿔놓게 하였다.
나는 그때까지 계급사회의 모순을 분명히 해명하지는 못하였다.
이 세상이 옳지 않은 것은 알았지만 무슨 까닭으로 그렇게 되었는지
과학적·이론적으로 그 원인을 해명할 수 없었다.
그것은 마치 운애가 낀 먼 산을 바라보는 것과 같이 유심론의 너울이 가리어서
나의 심안에 계급사회의 윤곽이 뚜렷이 보이지 않았다.
그랬던 것이 쏘비에뜨문학-프롤레타리아 문학작품과 사회주의 서적을 읽어감에 따라서
나는 계급의식에 눈을 뜨게 되었다.”
러시아 작가 고리키에 빠져들어
귀국하여 습작을 시작한 이기영은 단편소설 ‘오빠의 비밀편지’가
<개벽>지 현상문예에 3등으로 입선하여 소설가 길을 걷게 되니, 1924년 30살 때였다.
포석 뒤스름(알선)으로 <조선지광>사에 들어갔고, 동경에서 출옥한 홍진유가 귀국한다.
단편 ‘가난한 사람들’ ‘오남매 둔 아버지’ ‘외교관과 전도부인’ ‘고난을 뚫고’ ‘원보’를 발표,
1928년 무정부주의자 연합기관인 ‘흑기연맹사건’으로 징역을 살던 홍진유가 병사하고,
8월 21일 포석이 소련 연해주로 망명한다.
단편 ‘제지공장촌’을 발표하고, 1931년 제1차 카프사건으로 전주형무소에 갇혔다가 기소유예로 풀려나고,
<조선지광> 폐간으로 일자리를 잃고 <중외일보> 휴간으로 장편 <현대풍경> 연재가 끊어지면서
몹시 가난에 시달린다.
1925년 봄에 <조선지광>에 한설야의 평론이 처음으로 발표되었다.
이 논문은 당시 반동문학의 두목격인 이광수와 노자영 등의 문학을 비판한 것으로서 주목을 끌었다.
이 글을 보고 포석은 “됐소. 패기 있는 신진이 나왔소!” 하며 의미 있는 미소를 띠었다.
그후 얼마 안 되어 설야가 서울 청진동에 있는 <조선지광>사에 나타났다.
그는 후리후리한 키에 양복을 조촐하게 입고 있었다.
그때 조명희, 최서해, 나 세 명이 그를 만났다.
조명희와 나는 두루마기를 입고 있었다. (…) 포석이 말을 이었다.
“이광수도 더 쳐야 하며 김억이도 쳐야겠소” 하며 그는 정열적으로 이야기를 이끌었다.
(…) 그러나 카프 창건 직후에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발전의 길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당시 우리들은 우익 부르주아 반동작가들, 소위 ‘순수문학’파들, ‘해외문학’파들과
싸워야 하였을 뿐만 아니라 맑스주의의 탈을 쓴 아나키스트들과도 싸워야 하였고
이들과 타협한 대열 내에 잠입한 기회주의자들과도 투쟁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한설야와 나)
이광수 소설 ‘혁명가의 아내’ 비판
이기영한테 ‘민촌(民村)’이라는 아호를 지어준 것은 벽초(碧初) 홍명희(洪命熹)였다.
1927년 단편집 <민촌>이 나오면서 이기영 이름이 문학동네에 크게 새겨지게 되었을 때,
벽초가 호가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고 없다고 하자 “그럼 민촌으로 하지” 해서 된 것이었다.
카프 대표작가였던 민촌이 ‘’혁명가의 아내’와 이광수’ 라는 글을 쓴 것은 1933년이었다.
<비판> 4월호에 실린 것으로, 알맹이만 추렸다.
이 소설에는 요부와 같은 여류혁명가라는 여주인공인 방정희가 있고
알부랑자 비슷한 혁명가 공산이라는 부주인공이 있는데
이야기의 줄거리를 추려보면 이 소설의 제목과는 놀랄만치 엉뚱하게
그저 추잡한 치정관계를 추악하게 그린 것뿐이다.
방정희라는 모여자고보를 졸업한 신여성이 학비의 보조를 받은 강의사(그때는 의전 학생이었다)와
연애를 하다가 삼방약수터에서 공산을 처음 만나가지고
그의 혁명가적(?) 인물에 홀딱 반해서 공과 연애를 하게 되었다.
그래서 동거를 하게까지 되었는데 공의 사상에 감화가 되어서 자기도 첨단적 여류혁명가가 되었다 한다.
그런데 공산의 폐결핵이 점점 심해져서 와병하게 되자
장근 일 년 동안을 성적으로 주린 그의 아내 방정희는 성욕을 더 참을 수가 없어서
다 죽어가는 병부를 어서 죽으라고 날마다 두어 숟갈씩 떠먹게 하는 구미 당길 약병을 발길로 차서
엎질러 버렸다. 그래서 풍파가 났다.
그때 마침 공산에게 정맥주사를 놔주러 오는 그 이웃에 살던 의전학생 권오성을
그 전부터 욕심내고 있던 방정희는 그날 밤에 병부의 옆에서 자다가
병부가 낮에 싸움한 탓으로 피를 많이 쏟고 병세가 덧쳐서 마취약을 먹고 혼도한 틈을 타
미리 자기의 금침을 펴놓고 의전학생을 재워둔 건넌방으로 살짝 건너가서
겨울의 긴긴밤이 일분과 같이 짧도록 간통의 단꿈을 꾸었다.
그 후로 남편의 병세는 더한 데다가 정희는 의전학생 권오성에게 아주 정신이 빠져서
허둥지둥하는 바람에 남편의 간호도 부주의하였고
따라서 공산이도 정희와 권오성과의 불순한 관계를 눈치채게 되자
중병에 상심까지 더하게 된 공산은 마침내 그 이듬해 정초에 죽어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부상을 당한 정희는 남편의 시체를 파묻고 오는 길로
바로 며칠 있다가 온양온천으로 권오성과 같이 미진한 육욕을 채우러 밀행하였는데
육적 향락이 불과 일주일에 자기의 임신한 것을 알게 되자 정희는 그만 낙담실색해서
정부 권오성에게 폭행을 하다가 권이 발길로 차는 바람에 정희는 다량의 하혈을 하고
유산까지 하게 되었다.
이 꼴을 본 권오성은 대경실색해서 치료약재를 사러 간다고 그 길로 도주해버렸다.
그래서 정희는 할 수 없이 공산의 동지인 여와 어멈의 구호로 다시 서울로 올라와서
공교히 치료를 받게 된 의사가 옛날 정희의 첫 애인이던 강의사였다.
그래 그에게 지성껏 치료를 받았지만 정희도 또한 그 길로 죽고 말았다는 것이 이 소설의 종말이다.
민촌이 춘원에게 하는 타이름이다.
“쥐는 쥐인 척하는 것이 오히려 제격에 들어맞는 법이다.
작자는 여실하게 부르조와 연애소설이나 쓰던지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비위에 맞는 강담소설이나 쓸 것이지
아예 이와 같은 무모한 경거망동의 만용은 부릴 것이 아니다.
아무리 관념론자이기로 이만한 이해관계는 구별할 만한 두뇌가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장편소설 ‘고향’ 베스트셀러 오르다
농민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연 민촌 이기영. <고향> 문학사상가 인용 |
주인공 이름을 ‘공산’이라고 한 것부터 맑스주의자를 색골로 그린 이광수(李光洙) 장편소설명색 <혁명가의 아내>를 꾸짖고자 쓴 것이 <변절자의 아내>였다.
<신계단>에 연재하기로 하였으나 1회분만 실리고 원고를 빼앗긴다.
‘카프작가’들에게 더욱 모지락스런 일제 검열을 뚫고 발표한 것이 중편 <서화(鼠火)>였는데, 3·1운동을 앞뒤로 한 농민들 삶을 속속들이 현실 속에서 그렸을 뿐 아니라 농민들이 두루 지니고 있는 소소유자로서의 두길보기를 거짓없이 보여준 작품으로 높은 값을 받았다.
1933년 7월 17일부터 8월 말까지 한 40일 동안 고향 성불사(成佛寺)에서 쓴 것이 <고향>이었다.
한 2000장 되는 애벌글로 생각이 잘 풀리는 날에는 100장 위를 쓴 적도 있을 만큼 검님(신명)이 올랐던 민촌이었다.
1933년 11월 15일치부터 이듬해 9월 21일까지 <조선일보>에 연재되어 독자들한테 커다란 손뼉을 받은 <고향>은 검열로 꺾자당한 곳이 적지 않았음에도 2500장을 넘는 부피였다.
그런데 <고향>을 연재 중이던 8월 25일 딴 이름 ‘신건설사사건’,
곧 제2차 카프사건이 터지면서 민촌은 전주형무소에서 16개월 동안 징역을 살게 된다.
잡혀간 카프 동아리들이 모두 200명이나 되었는데,
프로문학의 이론적 목대잡이였던 팔봉(八峰) 김기진(金基鎭), 회월(懷月) 박영희(朴英熙) 같은
거의 모든 카프맹원들이 사상 전향을 하게 된다.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잃은 것은 예술”이라는 유명한 박영희 ‘전향의 변’이 나온 것도 이 무렵이다.
이광수의 ‘흙’보다 두 배 이상 팔려
1935년 여름 경성경찰부에서 여러 차례 김남천(金南天)을 불러 카프를 흩어버릴 것을 윽박질렀고,
1935년 5월 21일 문학부 책임자였던 김기진 이름으로 카프 해산계를 내게 되니,
1925년 8월 비롯된 이래 10년 만에 카프는 그 막을 내리게 된다.
이때 끝까지 지조를 지켜 전향을 하지 않은 것은 딱 세 사람이었으니, 민촌과 한설야,
그리고 평론가 안함광(安含光)이었다.
여기서 골칫거리가 되는 것이 일제강점기 리얼리즘소설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로 꼽히는 <고향>이다.
연재 동안 작가가 잡혀갔으므로 연재가 동강나게 되었던 것이다.
다음은 김기진 증언이다.
“이기영은 그때 조선일보에 <고향>이라는 장편소설을 쓰고 있는 중이었으므로
만일 자기가 나보다 먼저 붙잡혀 가게 되거든 <고향>의 원고를 나더러 계속해서 써주는 동시에
신문사에서 주는 원고료를 자기집에서 찾아가도록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승낙하였다. 그러자 과연 이기영이 먼저 붙들려 가고(9월 하순경)
나는 12월 7일에 검거되었는데 이 동안에 나는 이의 집으로부터 <고향>의 신문 절취철을 가져다가
처음부터 읽어보고서 그 소설을 끝맺어 주기에 신문 횟수로 35,6회를 매일 계속해서 집필하였던 것이다.
나는 병원에 누워 있었고 내 원고는 이의 처남이 날마다 신문사에 날라갔었으므로
신문사에서도 내가 쓰는 것임을 알지 못했다. 그후 이것이 상·하 두 권으로 출판되었을 때,
이때 나는 이더러 <고향>의 최종 35,6회분을 본인이 다시 집필하여 고쳐 가지고서 출판하라 하였건만
이는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고 하고서 그대로 단행본을 내놓았다.
그런 까닭으로 지금도 <고향>의 말단은 내가 쓴 그대로이다.”
(김팔봉 ‘한국문단측면사’ <사상계> 1956. 12)
그런데 이런 팔봉 말에 다른 생각을 다는 사람이 있다. 바로 민촌 손자인 이성렬이다.
이성렬이 2006년 펴낸 <민촌 이기영 평전>을 보자.
<고향>의 마지막 36회분의 시작은
‘34. 경호’ 편의 ‘이 바람에 경호는 오랫동안 참고 있던 분한 생각이 (…)’로 시작되는
1934년 8월 8일자 연재분(217회)이다.
그로부터 그해 9월 21일자의 마지막 연재분(252회)까지는 전체의 약 1/7에 해당된다.
또 40여 회(전체의 약 1/6)를 김기진이 더 썼다면
‘33. 재봉춘’부터, 또는 그 이전부터 김씨가 이어 썼는지도 모른다.
연재중 체포돼 김기진이 대필
‘9월 하순경’에 민촌이 ‘붙들려 가고’ 그해 8월 8일부터 <고향>을 이어 썼다는 김씨의 기억에는
문제가 있다. 필자가 조사한 민촌의 검거 시점은 그해 25일이다(<조선일보> 1934. 8. 26 보도).
아무래도 아귀가 맞지 않는다. 이상한 일이다. 김씨는 8월 26일 이후 20여 회분만 대필했을지도 모른다.
전문가라면 문체의 차이를 식별하여 양인의 글을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고향>의 종반부에는 왜말에서 유래하는 속어도 종종 튀어나오는데
이는 그 전반부나 또는 민촌의 다른 작품에서는 좀체로 나타나지 않는 현상이다.
또 맞춤법의 기준이 없었을 때이므로 철자법과 띄어쓰기를 비교함으로써도 그 구분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수고를 들이지 않더라도 갑자기 글의 속도감이 떨어지고 장황해지며
전체적으로 지리멸렬해지는 것을 웬만한 독자라면 다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고향>의 전반부 민촌의 글은 짧고 빠르게 전개되며, 관념을 그대로 표출하지 않고
구체적으로 형상화하되 결코 장황하지 않은 서술로 상황을 적확히 묘사하고 있는 데 반하여,
<고향>의 끝부분에서는 사건의 전개가 느려지고 관념이 그대로 표백되는 경우가 많이 나온다.
김씨의 대필 부분에 확대경을 들이댈 필요가 있다.
다음은 <고향>에 대한 문학평론가 김재용 교수 평이다.
그는 시종일관 농민소설을 창작했는데, 일본 독점자본의 진출로 인한 식민지자본주의에 의해
끊임없이 양극분해되어 가는 조선 농민의 현실을 그렸다.
특히 노동자의 눈으로 농민을 보았기에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다른 농민소설과는 그 근본부터가 다르다.
당시 대부분의 농민소설 작가들은 농민이 노동자계급과 어떤 연관관계를 맺고 있으며
또한 그 관계가 전체운동 속에서 어떠한 위상을 차지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인식을 결여하고 있던 반면,
이기영은 식민지자본주의에 의해 끊임없이 양극분해되어 가고 있는 농민계급은
더 이상 봉건시대처럼 단일한 계급일수 없으며, 특히 빈농계급은 반제국주의적 입장을 가짐으로써
노동자계급의 믿을 만한 동맹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농민작가들이 농민적 입장에서 농민운동을 보고
전체운동의 관점에서 농민운동을 보려고 노력하였으며, 이것에 근거하여 농민소설을 발표했다.
그가 쓴 작품들 중에는 노농동맹을 주제로 한 소설들이 많이 있으며, <고향>은 이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그리고 그가 농민의 전형을 그리면서 주의깊게 본 점은 농민의 소소유자적 특성에 대한 관찰이다.
농민들 중에는 약간의 생산수단의 소유로 생활의 환상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쉽게 노동자의 세계관을 가지기 힘든 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기영은 농민의 이런 속성에 대해서도 눈을 감지 않고 자세하게 관찰하여 작품화하였다.
이처럼 이기영은 농민의 변혁주체로서의 가능성과 그 한계를
일본독점자본의 침탈로 인한 식민지자본주의라는 전체 현실과의 연관 위에서 그려내었다.
민촌은 왜 <고향> 마무리가 제 처음 뜻과는 아주 뒤쪽으로 이제까지 내려온 봉건도덕관념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바보짓을 하였을까? 다음은 이성렬 어림짐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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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의 무대인 천안시 유량동. 밭 언덕 아래 내려다보이는 집이 이기영이 살았던 집. <고향> 문학사상가 인용 |
민촌의 의도대로 그것을 뜯어 고쳤다가는 사건과
인물을 맘대로 처리해달라고 부탁했던 김기진씨에 대한 예의도 아니겠거니와,
대필 사실이- 일제검열당국에- 드러나 김씨에게 어떤 누가 끼쳐질지도 모를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독자들의 반응은 대단하였고 문단에서도 평이 좋았다.
그러니 민촌이 이를 어찌 뜯어고칠 수 있었겠는가?
그가 야심을 가지고 설정한 두 번째 모티브(조혼)가 완결되지도 못하고
두 개의 모티브가 조화롭게 매듭지어지지지도 못한 채 어정쩡하게 끝난 이 소설을
민촌은 그대로 단행본으로 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고향>이 북한에서 1955년에 다시 간행될 때에도,
희준이가 아내와 이혼하고 옥희와 재혼하는 것으로 고쳐 그리기에는
이미 <고향>은 너무 유명해져 있었다.
또 민촌은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중혼 경력을 건드리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이미 헤어진 아내에게도 못할 짓이었을 것이다.
<조광> 1937년 2월호에 따르면 한성도서에서 상·하 두 권으로 나온 <고향>(1936. 10, 1937. 1)은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이광수 <흙>보다 두 배 이상 팔렸다고 한다.
2만질 이상이었다니 그때로서는 대단한 ‘베스트셀러’가 아닐 수 없다.
<조국>이라는 책이 있다.
대남공작원으로 내려왔다가 18년 징역을 산 김진계 옹이 1956년 여름 평양 모란봉 극장에서
민촌이 한 ‘선전선동 활동에 대하여’라는 강연을 들을 때였다.
“저는 남조선 일대에서 광부, 막노동꾼, 머슴 등의 일을 닥치는 대로 하면서
도처에서 가난한 농민들의 굶주린 형편과 노동자들의 비참한 생활을 목도할 때마다
치솟는 민족적 격분을 금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이런 비참한 생활을 극복하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분야는 무엇인가 고민했지요. 그건 소설이었어요.
그래서 당연히 제 소설의 내용은 인민의 터전이었고,
인민이 사는 삶의 전형을 순간순간 잘 포착해야 했습니다.
말하자면 소설을 쓰면서 선전선동이란 인민이 사는 터전에 맞게 창안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배운 겁니다.”
극장 문 앞에서 민촌과 악수했을 때 느낀 생각이다.
“나는 깜짝 놀랐다. 그의 오른손 검지손가락에 큰 혹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글을 하도 많이 써서 딱딱하게 굳은 자죽임에 틀림없었다.
그가 얼마나 이악스럽게 자기 일에 집중했는가를 피부로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장편소설 ‘두만강’으로 노벨상 후보
민촌이 한설야, 안막 · 최승희 내외와 함께 월북한 것은 1945년 11월 하순이었다.
굳건한 믿음에 따른 제1차월북이었다. 손자 이성렬 글이다.
민촌 밑에서 문예총부위원장을 하였던 정률(본명 정상진, 1918~ )한테 들은 이야기 가운데 한 대목이다.
“1946년부터 1955년 북한을 떠나기까지 10년간 민촌을 모셨다는 것이다.
민촌은 부하들을 매우 사랑하였고 회식 자리에서 먼저 일어설 때에는 술값을 더 내놓고 가곤 하였다고
하였다. 주량이 대단해서 군악대장인 소련군 중령이 술 마시기 시합을 하자고 대들었다가
큰코를 다친 일화를 소개하기도 하였다. 그렇게 술을 많이 해도 말수가 적어
평소나 다름없이 묻는 말에나 대답할 뿐 거의 말이 없었다는 것이다.
수 차례 거듭된 문인들의 숙청에 관한 자신의 의견이 없지도 않았을 터인데도 일체 함구하였다는 것이다.
이태준, 한설야 등이 연회석에서 늘 여자들을 희롱하고 즐겨도
민촌은 여자들에게 눈길 한 번 주는 법이 없었다고 하였다.”
민촌은 조 · 쏘문화협회 중앙위원장, 조선문학예술동맹중앙위원장(종신까지 역임), 최고인민회의부의장을
하며 조선인민 사절단장과 푸쉬킨·고골리 제전, 소련작가대회 참석차 4번 소련을 방문하였다.
노력훈장과 인민예술가 칭호 및 국기훈장 1급을 수훈하였고,
장편소설 <두만강>으로 인민작가상을 받으면서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르기도 하였다.
그는 1984년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향수 90.
- 김성동, 작가
- 2009 03/24 위클리경향 817호
- 2009 03/31 위클리경향 81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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