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지켜(연재자료)

[현대사 아리랑] 고경흠 - 진보적 민족주의 언론인

Gijuzzang Dream 2008. 12. 20. 05:50

 

 

 

 

 

 

 진보적 민족주의 언론인 고경흠

 

 

“우리 민족의 봄은 언제 오려나

여운형이 암살당한 혜화동로터리.

여운형의 수행비서 역할을 했던 고경흠 역시 당시 현장에 있었다.

이 사건에 충격을 받고 그는 월북했다.


 

고경흠(高景欽)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1946년 5월 <독립신보>를 창간하여 주필로 있으며

자주독립을 바탕으로 한 겨레의 오롯한 통일을 위하여 애썼던 언론인이다.

 

 

1946년 ‘독립신보’ 창간 주필 맡아

 

10대 뒤판에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고학을 하면서 <노동자신문>과 <현계단>을 찍어내었고,

<전기(戰旗)> <인터내셔날> <무산자> 같은 잡지를 펴낸 문필가이기도 하였던 그가 쓴 글 가운데

한 편이다. <독립신보> 1947년 3월 26일치에 실려 있다.

“해방 후 유쾌할 것이라고는 그리 찾아볼 수 없는 우리네 살림살이와

국제적으로 몇 번이고 약속되었던 조선독립은 미소의 의견 불합으로 여지껏 공위가 열리지 않고

국내의 모든 공장은 모리배와 원료 부족 등으로 파손 내지 정지 상태에 있고

쌀값과 모든 물건값은 비행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듯 선량한 인민과 월급쟁이들을 울리고 있으며

광목 고무신이 우리네 살림에 가장 긴요한 것인데도 거리에서 광목 한 자 볼 수 없고

고무신이라고는 노인네 뱃가죽 같은 한번 신으면 찢어져 없어지는 것이다.

해방이 됐다고 고국에 돌아온 전재 동포들은 움 속에 있게 되고

단간방이라도 제 집을 지닌 사람은 해방 후 창호지 하나를 똑똑이 못 바르고

그날그날 밥걱정과 원인 모르는 테러와 공포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

 

 

먹고살기 힘든 인민생활을 걱정하는 고경흠 붓은 줏대를 잃어버린 무식대중들,

갈팡질팡과 수많은 목숨들이 죽고 다치는 인민봉기가 이어지게 되는 우리 겨레의 불행 위로 달려간다.


“일본년이 남기고 간 야릇한 옷감으로 얼룩덜룩 양장이라고 해 입고

고슴도치 머리에 쥐 잡아 먹은 주둥이에 ‘껌’을 씹고 다니는 이 거리의 일부 조선여성은

해가 어디서 뜨는지도 모르고 국적 불명의 가련한 제2세를 낳고 있다.

정치운동을 하는 자 모두가 애국자라면서 자기의 이념에 맞지 않으면 비애국자요

국제공약까지 무시하며 조선독립을 호언하는 무지배들의 난무로 말미암아

국내의 테러와 살생과 폭행 전율은 여름 장마같이 계속되고 있다.

작년 9월 철도파업에 뒤이어 10월 봉기로 수많은 동족은 살상 희생되었고

수천 명은 검거되었었던 대구사건만 하더라도 20여 명의 사형까지 내게 하였다.

우리 민족이 거족적으로 경축하여야 할 3·1절에 우리 민족의 피는 이 땅에 또다시 물들이게 되었다.

이 마당이 만일 일제 때라면 수백 명 수천 명 우리의 피로 우리의 빼앗긴 땅을 찾기 위하여

피를 흘릴 수도 있지만 해방된 이 땅에 경향 각지에서 불상사가 일어난 것은 확실히 조선민족의 불행이다.

그뿐 아니라 정계 요인 덕에 계획적인 폭탄사건과 언론기관과 언론인이 구타는 예상사요

배움에 굶주린 조선학생들은 국대안 문제 때문에

자유롭고 향기로운 학원은 꽃피지 못하고 대부분의 학생들은 거리에서 방황하고 있다.”

 


‘대지에 봄은 왔건만 민족의 봄은 안 오나!!’
글 제목인데, 일제 때와 다름없는 관공리 썩어문드러짐과 억누름에 대하여 노여워하고 있다.

“일제의 최후 말기 4, 5년 동안은 징병이니 학병이니 작업이니 무엇이니 하여 공부를 못하고

해방 후 1년 반이 지나도 자리를 잡고 공부를 못하게 되는 것은

참으로 장래 조선을 위하여 무엇보다도 화급히 해결할 문제이다.

재작년 8·15 해방의 감격은 어디로 갔는가?

얼마를 울어도 울어도 눈물이 끊이지 않던 그 울음 그때는 제 목숨이 죽어도 한이 없다고 하던

그 마음은 어디로 가고 건국을 좀먹는 모리배와 오리(汚吏)의 테러는 날이 갈수록 심하고

조선 경찰은 건재해 있다고 하는데 그 지긋지긋한 일제 전쟁시의 우리의 혼담을 서늘케 하던 ‘싸이렌’은

밤 아침으로 해방된 이 땅에서 야간 통행금지의 증오의 비명을 울리고 있다.

해방 후 한때는 강도 절도로 시민들은 공포 속에 싸여 있었고

지금엔 ‘테러’와 ‘파괴’로 인하여 인민은 공포 속에 싸이고 있다.

근대 민주국가에서 야간 통행금지란 것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것인데

거기다 증오의 ‘싸이렌’까지 듣게 되는 것은 우울한 우리네 살림을 더욱 우울하게 할 뿐이다.

지난 22일에 일어난 24시간부 총파업으로 좌익계 요인이 많이 검거된 가운데

일제 시를 통하여 혁명투사와 애국자가 검거된 것은 이 또한 조선의 우울이 아닐 수 없다.

이 같은 구름이 언제나 개이려나?

이 땅에 봄이 다시 찾아왔거늘 우리 민족의 봄을 찾아야 할 것이 아닌가.”

 


카프에 참여 사회주의 문예운동

고경흠이 참여했던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선언문.

 

고경흠은 1910년 제주도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서울로 올라와 정동공립보통학교를 마친 다음, 1926년 2월 경성중학을 중퇴하고 4월 보성전문학교에 들어가 1년간 다니다가 그만두었으니, 집안 형편이 어려웠음을 알 수 있다.

1927년 3월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고학을 하면서 재동경조선청년동맹에 들어가 집행위원으로 일하였다. 이 무렵 무산자해방운동을 하고 있던 이북만(李北滿) · 홍효민(洪曉民)을 만나 제3전선사를 세우고 기관지 <제3전선(第三戰線)>을 찍어내었다.

제3전선사 간부들과 함께 서울에서 카프, 곧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조직 개편에 뛰어들어

사회주의 문예운동을 펼쳤다.

1928년 9월 일본대학에 들어갔으나 학자금을 못대어 3개월 만에 제적되었고,

신간회 동경지회에 들어가 운동하다가 왜경에 지명수배되어 상해로 망명하였다.

ML파 공산주의그룹과 조선공산당재건운동을 논의하다가 다시 동경으로 돌아가

이북만과 함께 카프 동경지부를 고쳐 짠 ‘무산자사(無産者社)’ 일을 보았다.

이때 시인 임화(林和)가 무산자사 일을 거들어주고 있었는데,

이북만이 데리고 있던 누이 이귀례(李貴禮)와 혼인을 하게 된다.

이 무렵 많은 논설을 썼는데, ‘조선공산당 볼세비키화의 임무’ ‘민족개량주의의 반동적 도량을 분쇄하자’

‘조선에 있어서의 농민문제’ 같은 것이다.

1931년 ‘무산자사’를 터전으로 하여 <코뮤니스트> <봉화> 같은 기관지를 펴내다가 왜경에 붙잡혔다.

서울로 끌려가 법정에 서게 되었는데, 사상 전향을 밝히고 감옥을 나왔다.

여운형이 사장으로 있던 <조선중앙일보> 기자로 들어갔다가

1940년 여운형이 일본을 찾아가 조선독립에 대한 사자후를 토할 때 수행비서를 하였다.

8·15와 함께 여운형이 세운 건국준비위원회에서 장안파공산당 최익한과 함께 조사부 일을 보았다.

1946년 초 조선인민당 당수 여운형 특사로 평양에 가서 김일성과 회담하였는데, 속내는 알려져 있지 않다.

 

 


‘남조선 일대를 휩쓰는 좌익요인의 검거선풍- 검속 이유는 군정포고 위반’

고경흠 글이 실린 지면 머릿기사이다.

22일의 ‘24시간 제너스트’를 계기로 남조선의 경찰대는 돌연 좌익인들에 대한 검거를 시작하여

검거 총수는 다수에 달하는 모양이다.

즉 서울에서는 민전 의장 김원봉씨 동 사무국장 박문규씨를 비롯하여 30여 명에 달하는 간부가

피검되었거니와 지방에서는 민전 남로당 민혁당 전평 전농 민청 등 좌익 요원을 모조리 체포하여

간부만도 수백여 명에 달하지 않을까 추측된다. 검속 이유는 군정포고 위반이라고 하는데

이번의 좌익 요인에 대한 검거 선풍은 광범위에 걸친 것으로

경향 각지에 일어나는 좌익에 대한 잔인포악한 테러가 진행되고 있는 이때

이번 검거사건의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일방 서울시에서는 지난 24일 각 학교에서의 학생대회 석상에서

사대 공대 상대 등 제복 입은 학생 수백 명이 구금되었고

휘문중학 등의 많은 중학생들도 다시 피검되었다고 한다.

남조선 일대를 휩쓰는 좌익인에 대한 대검거 선풍에 대하여 경무부 차장 최경진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서울에서는 좌익 요인들이 체포되었고 지방에서도 있었는데

그 피검자 수는 아직 보고가 없어 모르겠다. 체포 이뉴는 군정포고 위반일 것이다.”

 


좌익 요인들을 무차별로 잡아들여 인민대중한테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는 좌익 정당을

없애버리겠다는 것이 미군정 본마음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주적1호로 선정된 소비에트연방공화국과 맞겨루기 위한 대소 전진기지로

조선반도를 위치지었다는 북미합중국 반공이데올로기가 속속들이 드러나는 것이었다.

아래쪽에는 이런 기사가 실려 있어 조국의 앞날을 걱정하는 뜻 있는 독자들 한숨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이완용 옹호의 이의원- 입의 비밀회서 징계키로 결정’ 이라는 제목이다.

매국노 이완용을 옹호하다 분란을 일으킨 입법의원 이남규씨의 설화문제는 큰 파란을 던져

입의에서는 24일 오후 비밀회의를 개최하여 이의원에 대한 처분을 사과로 하느냐 징계로 하느냐 하여

논의가 있었다 하는데 결국 매국노를 옹호하는 것은 이해 못할 일이라고 대다수의 의견으로

단연 징계처분위원회에 회부하게 되었다 한다.

 

 


1956년 조선로동당 중앙후보위원


1947년 5월 여운형이 만드는 근로인민당에 들어갔고, 소미공동위원회 대책 정치위원이 되었다.

7월 19일 하오 1시 여운형이 흉탄에 맞는 순간 고경흠은 곁자리에 앉아 있었다.

고경흠은 북한으로 올라갔다. 언제 올라갔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여운형이 극우파 손에 죽는 것을 보고 절망한 끝에 내린 결론에 따른 것으로 보이는데,

1956년 4월 조선로동당 중앙후보위원이 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은 알 수 없다. 아무런 자취가 없다.

아마도 1956년 7월 19일 박헌영이 총살당한 다음 숙청된 것으로 보인다.

1955년 12월 15일 벌어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재판소 특별재판에서

그때까지 ‘조선의 레닌’으로 결사옹위하던 ‘위대한 인민의 벗 박동무’를 ‘미제의 첩자’요 ‘일제의 첩자’라고

거짓 증언을 하였던 몇 사람을 뺀 거지반 남로당 출신들이 당한 숙청의 칼날을 피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죄목은 박헌영과 마찬가지로 ‘일제첩자’라는 것이었으리라.

이제 농협 통대격인 식량영단 이사를 잠깐 하였다는 것을 들추어

이승엽을 ‘일제 첩자’로 몰아 죽인 빨치산정권에서, 고경흠의 ‘위장전향’을 놓쳤을 리 없다.

고경흠쯤 되는 독립투사에 대해서는 이제 관심을 갖는 사람조차 없다.

드물게 씌어지는 일제강점기와 해방전후사 연구자들 논문에서나 드물게 그 성명삼자만 나올 뿐이다.

우리는 과연 고경흠이라는 한 티없는 진보적 민족주의 언론인을 잊어버려도 좋은 것인가?

 

 

고경흠이 쓴 <독립신보> 1947년 12월 2일치 기사 한 조각이다.

오직 인민의 희망은 두 나라 군인이여 잘 가시오! 그날만 기다리고 고난과 싸운다.
속히 새해가 돌아와서 양 군대가 곧 철퇴하고 우리를 해방시켜준 미소 양군을

서울역과 평양역에서 감사의 뜨거운 악수를 보내며 그들을 그리운 고국에 보내자…

이것은 이 땅 인민들의 간절한 그리고 최후의 희망인 것이다.

- 김성동, 소설가

- 2009 03/03   위클리경향 81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