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지켜(연재자료)

[현대사 아리랑] 이태준

Gijuzzang Dream 2008. 12. 20. 05:51

 

 

 

 

 

[현대사 아리랑]

 

 카프작가 아니면서 월북한 이태준

 

‘구인회’ 얽어 순수예술 파고들다

서울 성북동에 있는 상허 이태준의 고택 ‘수연산방’. <남호진 기자>


지난 7월 상순경 소개해 갔던 3·8이북 안협(安峽)에 정리할 것이 있다고 서울을 떠난

문학가동맹 부위원장 상허(尙虛) 이태준(李泰俊)씨는 그동안 소식이 묘연하여

일반의 궁금의 대상이 되어 오던 중 지난달 막부(莫府)통신으로는

씨가 북조선 문화사절단으로 소련에 가 있는 것이 알려져서 그 귀환이 기대되던 바

요즘 동씨가 동사절단 일행과 함께 평양에 들어와서 체류 중이라는 기별이 왔다.

최초의 씨의 소식은 문학가동맹원에게 보내는 멧세지로서

씨의 소련관은 과거가 과거이니만큼 퍽 흥미를 끄는 것인데 동동맹이 공개한 서간은 다음과 같다.

<독립신보> 1946년 11월 8일치 기사 이다.

 

‘악수할 날도 불원, 동지여! 영웅적으로 싸우라’는 제목 밑에 실려 있는 ‘평양서 이태준씨 멧세지’

여러분의 비분한 얼굴들이 눈에 선합니다. 어떤 난관이던 돌파하실 줄 압니다.

쏘베트는 무엇보다도 인간들이 부러웠습니다. 그전 문학에서 보던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자연으로 돌아가라,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받느니라, 아무리 외치어도 잃어버리기만 하는

인간성의 최고의 것이 유물론의 사회에서 소생되어 있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사실이리까.

제도의 개혁이 없이는 백천 번 외친대야 미사여구에 불과하므로 예술이 인간에 보다 크게 기여하려면

인간을 바르게 못살게 하는 제도개혁부터 받아야 할 것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여러분의 오늘 분투는 어둡고 구석진 듯하나

세계의 민주정신의 태양이 여러분의 무대를 쏘아 비추고 있는 겁니다. 영웅적으로 일하십시오.

우리의 악수할 날도 그리 머지않을 겝니다. 평양에서 상허.


물무늬 같은 서정의 ‘단편소설 완성자’


상허는 1904년 강원도 철원(鐵原) ‘육부자네’로 떵떵거리던 용담(龍潭) 이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였던 개화당 아버지를 잃은 것이 6살 때이고,

연해주 가까운 함경북도 배기미라는 갯마을에서 어머니를 여읜 것이 9살 때였다.

10살도 못 되는 나이에 나라와 함께 어버이를 잃은 상허는

옛살라비 곁붙이집에 맡겨져 봉명소학교를 나온다.

원산 따위를 2년간 떠돌며 객주집 심부름꾼 노릇을 하다가

휘문고등보통학교에 들어간 것이 18살 때였다.

윗반에 정지용(鄭芝溶), 김영랑(金永郞), 박종화(朴鍾和), 아랫반에 박노갑(朴魯甲)이 있었고

스승이 가람(嘉籃) 이병기(李秉岐)였다.

1924년 졸업을 1년 앞둔 4학년 1학기 때 동맹휴교를 목대잡다가 퇴학당하고, 일본으로 갔다.

신문과 우유배달 따위 밑바닥 일을 하며 나도향(羅稻香) 같은 문학청년들과 사귀며 문학을 갈닦았다.

단편 ‘오몽녀(五夢女)’를 <조선문단>에 보내어 뽑혔고,

 <시대일보>에 실림으로써 문학동네에 이름 석 자를 올렸으니, 22살 때였다.

1927년 상지(上智)대학 예과에 들어갔으나 배움비발과 살림비발을 댈 길이 없어 학교를 그만두고

조선으로 돌아왔다. <개벽>사 기자로 들어가 <학생> <신생> 같은 잡지 꾸미는 일을 거들며

동화, 단편소설, 희곡을 선보였다.

1930년 27살 때 이화여전 음악과를 갓 나온 이순옥(李順玉)과 혼인하였고,

다음해 <중외일보> 기자가 되었는데

그 신문이 문을 닫으면서 이름을 바꾼 <조선중앙일보> 학예부 기자가 되었다.


“문장으로 독자를 빨아들이는 작가”


30살 때인 1933년 이종명(李鍾鳴) · 김유영(金幽影) · 이효석(李孝石) · 이무영(李無影) · 유치진(柳致鎭) · 조용만(趙容萬) · 김기림(金起林) · 정지용과 ‘구인회(九人會)’를 얽어 순수예술을 파고 들었다.

비롯한 지 얼마 안 되어 ‘구인회’를 일으켰던 이종명, 김유영과 이효석이 물러나고

박태원(朴泰遠) · 이상(李箱) · 박팔양(朴八陽)이 들어왔으며,

그 뒤로 유치진, 조용만 대신 김유정(金裕貞) · 김환태(金煥泰)가 들어와 숫자는 늘 9명이었다.

카프 계급문학에 반하는 이른바 순문학을 두남두었는데,

더구나 이태준은 아름다움을 파고드는 서정성 높은 문장에서 거의 독판치는 자리를 차지하였다.

34년 단편집 <달밤>, 37년 <가마귀>를 펴내었고,

처녀작 ‘오몽녀’가 춘사(春史) 나운규(羅雲奎) 마지막 영화로 만들어졌다.

39년 <문장>지 편집자 겸 새사람 작품을 가려뽑는 일을 맡아

임옥인(林玉仁), 최태응(崔泰應), 곽하신(郭夏信)을 밀었다.

40년 <문장강화>, 41년 수필집 <무서록>, 일어판 단편집 <복덕방>을 펴내었다.

43년 단편집 <돌다리>를 펴내고 옛살라비 안협으로 내려가 해방 때까지 엎드려 있었다.

 

 

상허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가마귀’에 대한 카프 평론가 한효(韓曉) 꼲아매김 이다.

 

 

<비판> 1936년 10월호.

이 작품은 폐병으로 신음하는 젊은 여성의 사(死)에 대한 공포와 불안과 자포자기와 불신과 환멸 등의

제심리를 묘파함과 동시에 조선에 있어서의 작가생활의 궁상과 고독을 극히 단편적으로 취급하면서

그 고독의 속에서의 제반 우울 또한 젊은 여성에게 대한 애정의 문제를

씨의 독특한 수법을 가지고 지극히 간결하게 표현하였다.

사건의 전개라든가 ‘가마귀’를 중심으로 한 두 개의 성격 창조라든가 하는 것은

그의 문장의 세련과 한 가지로 매우 자연스럽게 묘사되어 있으나

그러나 인간의 사회적 관계와 형상의 개성과의 결부의 필수를 전혀 망각한 씨의 관조주의적 편향은

어느 때나 씨의 작품을 현실의 생동적 혈맥의 표현과 멀리 이탈시키는 동시

편협한 주관적 감정의 과정과 신경질적 감수성의 평면화의 속에 방황하게 하는 것이다.


“주인공이 그 시대의 생활을 대표하는 인물이 아니다”는 김동석(金東錫) 꼬집음이 있었으니,

이른바 ‘사회적 전형을 창조해내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조동일(趙東一)은 더욱 매섭게 꼬집는다.

이태준

가마귀’는 친구의 퇴락한 별장에서 방 하나를 얻어 외롭게 지내는 작가가 폐병 요양을 하러 근처 마을에 와서 머무르고 있는 처녀에게 관심을 가졌는데 그 처녀는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연민 때문에 애인이 되어주려고 했더니 약혼자가 있었다.

까마귀 소리를 불길하게 여기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한 마리 잡아 예사 새와 다름이 없는 줄 알게 하려 했는데, 까마귀를 활로 쏘아 죽이는 날 그 처녀가 운명했다.

까마귀를 핏덩이로 만들자 그 처녀에 대한 기대도 끝나고 마는 좌절을 맛보았다.

서술자가 주인공인 그 작가는 패배의식에 사로잡힌 예외자가 되어 음산한 기분으로 살아가면서, 자기 주변의 일을 불길하게 해석하는 기이한 상상에 사로 잡혔다. 소설이 자아와 세계의 대결임을 부담스럽게 여겨,

자아가 대결에서 벗어나 세계를 실상은 무시한 채 일방적으로 자아화하는 상상에 사로잡히곤 했다. 그런 방식으로 소설을 서정시에 근접시켜 서정적 소설을 만들어야

문학의 순수성이 보장된다고 믿는 경향은 이태준이 특히 뚜렷하게 나타냈다.


‘농군’은 임화한테서 “비록 단편일망정 이 소설을 꿰뚫고 있는 것은

분명히 크나큰 비극을 속에다 갖춘 서사시의 감정”이라는 높은 기림을 받았고,

40년 선보인 ‘밤길’은 ‘잔잔한 애수’로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캄캄한 풍김새를 보여준다.

카프 작가들이 민중을 그릴 때 무엇보다도 먼저 눈여겨보는 것이 ‘계급의식’이었는데,

배운 것 없고 가난한 민중에게 그지없는 사랑을 가지고 인간적 믿음을 보내는 것이

상허 소설의 다른 점이었다.

 

낡아서 사라져버리는 것들에 대한 더없는 사랑을 기울여 쓴 작품들 가운데

물무늬처럼 잔물결치는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이 ‘달밤‘이다.

상허 문학에서 다룬 것들은 계급모순이 아니라 민족모순이었다.

반제 · 반파쇼를 외치며 죽창 들고 뛰어나가는 ‘젊은피’들이 아니라

땡볕에 타서 새까맣게 구겨진 여느 조선 사람들 주름진 얼굴을 주장삼아 다루었다.

단편, 중편소설 80여 편과 장편소설 14편을 썼지만 상허 문학 본바탕은 단편소설이었다.

“우리 문인 중에서 누구보다도 ‘문장’으로 독자를 빨아들이는 작가”라는 김기림 말처럼

오래 묵은 술향기처럼 아름다운 단편소설 완성자였다.


“언제 또 오시렵니까?”
“이런 서울 오고 싶지 않소이다. 시골 가서도 그 두문동 구석으로나 들어가겠소.”
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분연히 층계를 내려가고 마는 것이었다.

현은 잠깐 멍청히 섰다가 바람도 쏘일 겸 옥상으로 올라갔다.

미국군의 찝이 물매미떼처럼 서물거리는 사이에 김직원의 흰 두루마기와 검은 갓은 그 영자 너무나

표표함이 있었다. 현은 문득 청조 말의 학자 왕국유의 생각이 났다. (…)

일제시대에 그처럼 구박과 멸시를 받으면서도 끝내 부지해온 상투 그대로,

‘대한’을 찾아 삼팔선을 모험해 한양성에 올라왔다가 오늘, 이 세계사의 대사조 속에 한 조각 티끌처럼

아득히 가라앉아 가는 김직원의 표표한 뒷모양을 바라볼 때,

현은 왕국유의 애틋한 최후를 연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람이 아직 차나 어딘지 부드러운 벌써 봄바람이다. 현은 담배를 한 대 피우고 회관으로 내려왔다.

친구들은 ‘프로예맹’과의 합동도 끝나고 이번엔 ‘전국문학자대회’ 준비로 바쁘고들 있었다.


예술성 기반 좌우파 문학 아우르다


1946년 3월 23일 끝낸 단편 ‘해방전후’ 끝 어섯이다.

조선문학가동맹이 마련한 ‘해방기념조선문학상’을 받은 작품으로,

심사위원은 정지용·안회남·홍명희·김기림·김남천·이원조·이병기·조벽암·권환·양주동·임화·박치우였다.

8·15를 맞아 문학을 사북으로 한 문화동아리 채잡이가 된 상허였다.

조선문학건설본부 중앙위원장이 되었고,

역사적인 전국문학자대회에서는 김태준(金台俊)과 공동의장을 맡아 모임을 목대잡았으며,

‘문건’과 ‘예맹’이 합쳐진 ‘조선문학가동맹’에서도 목대잡이가 되었다.

위원장인 홍명희는 시늉만이었고 이태준과 함께 부위원장이었던 이기영 · 한설야는

해방되던 해 11월 월북해 있었다.

무엇보다도 작품 그것의 예술성으로 높은 꼲아매김을 받았던 상허였으므로

좌우파 문학을 아우르는 줏대가 될 수 있었다.

카프작가가 아니었던 상허 월북은 놀라움이었다.

그리고 평양에서 보내온 전갈과 함께

1947년 1월(9회)부터 서울 조선과학자동맹에서 펴내는 <주보민주주의>에 이어 실린 ‘소련기행’은

더구나 놀라운 것이었다.

 

‘소련기행’ 한 대문이다.

나는 바른 편에 앉은 농민대표의 호미처럼 흙을 풍기는 거친 손의 윤영감을 바라보고

이 여행이 비행의 감격이 다시금 새로웠다. 농민도 학자도 다같이 비행기를 탈 수 있는 사회,

이 한 가지는 모든 조건에 있어 비약이요 그 약속이기 때문에

실로 아름답고 꿈인가 싶게 감격되지 않을 수 없었다. “꿈꿀 힘이 없는 자는 살 힘이 없는 자다!”

나치 독일과 가장 맹렬히 싸운 작가 에른스트 롤러가 어느 작품 서두에 써놓은 말이다.

지금 우리가 이런 꿈 같은 화려한 양식으로 찾아가는 쏘베트야말로

위대한 꿈이 실현되어 있는 나라가 아닌가!

 

 30년대 ‘순문학의 길’ 홀로 걷다

전통찻집으로도 운영되는 서울 성북구 이태준의 고택 ‘수연산방’.

<정지윤 기자>


“게쇼.” 굵은 목소리였다.
“예.”
“이거 땜질 좀 해주슈.”
“예에, 해드리죠. 잠깐만 기다리세요.”
노인은 키가 훤칠하고 나이에 비해서 건강한 체구였다. 젊었을 때는 꽤 미남일 성싶은 얼굴이었다.

척 보기에 범상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남한말을 써서 궁금증이 더했다.

나는 정중하게 물어보았다.
“실례지만 뭐 하시는 분이시죠?”
“…”
그는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어디서 본 얼굴 같기도 했다. 땜질하면서 나는 그의 얼굴을 곰곰이 뜯어보았다.

한참 동안 생각해도 떠오르지가 않았다. 나는 물어나 보자 하고 다시 말을 걸었다.
“혹시, 글 쓰시는 분 아니십니까?”
“…”
<조국> 에 나오는 대문이다.

 


해방되면서 ‘현대일보’ 주간 맡아


 ‘남파공작원’ 김진계 선생이 불러주는 것을 보고문학가 김응교가 간추린 것으로,

8·15부터 70년대 첫무렵까지 우리 현대사의 아픈 상채기들이 서리서리 담겨 있는 값진 적바림이다.

‘조국통일사업’을 위하여 땜쟁이 기술을 익히고자 원산에서 평양 쪽으로 가다가

마천령산맥 기슭에 있는 장동탄 광지구에 열흘간 머물 적이었다.

 

1969년 1월. 김진계 선생 이야기를 따라가보자.

내 말에 무슨 충격이나 받았는지 멍한 표정을 짓다가 웃음을 흘리는 그는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태준이라고 합니다.”
“…아, 역시 그러셨군요.”


나는 여기서 소설가 이태준을 처음 보았다.
평률리(평북 안주군)에서 민주선전실장을 할 때 도서실을 정리하면서

그가 쓴 창작집 <달밤>이나 장편소설 <가마귀>를 읽어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문장강화>라는 책이 좋다는 말을 여러 번 들어본 적이 있었다.

그때 그의 글을 읽은 느낌은 우리말을 요리조리 자유롭게 쓰면서도 아름답게 표현해서

상당히 민족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소시민적이고 뭔가 약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다가 1954년 어느 날 그의 책 모두가 도서실에서 사라지게 됐다.


“아직 덜 됐나요?”
“예. 조금만 더 하면 됩니다. … 헌데 아직도 글 쓰십니까?”
나는 이 사실이 궁금하였다.
“쓰고는 싶소만….”
그의 표정이 무척 쓸쓸해 보였다.


후에 알아본즉, 그는 숙청당하고 장동탄광에 가서

사회보장(여자 55세, 남자 66세가 넘으면 노동법에 의해서 먹고살 정도로 배급이 나왔다)으로

두 부부가 외로이 살고 있었다. 그의 부인은 15세 정도 아래로 깜끔하게 생겼다.

이태준의 말년의 모습을 본 나는 왠지 우울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우파 진영, 친일문인으로 낙인 찍어


해방이 되면서 문학동네 채잡이로 돋을새김된 상허는

몽양(夢陽)과 이정(而丁)이 이끌던 ‘민주주의민족전선’ 문화부장을 맡았고, <현대일보> 주간을 하였다.

43살 때인 1946년 2월 8~9일 이틀간 서울 기독교회관에서 열린 제1회 전국문학자대회에서

상허는 보고연설을 하였다.

 

‘국어재건과 문학가의 사명’이라는 제목이었다. 보고연설 한 어섯이다.

‘구인회’ 맴버였던 정지용·김기림의 시집.

“문학이 없이 언어는 있되 언어 없이 문학은 있을 수 없다. 조선문학이 없이 조선어는 있을 수 있되 조선어 없이 조선문학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본제국은 조선문화면에 있어 소극적이긴 하나 가장 조선적인 성격을 유지하는 문화행동이었던 조선문학을 금하기 전에 앞질러 조선어를 금한 것이요 일석이조 정책으로 조선작가로 하여금 일본어로 쓰도록 유도한 것이다.

이 음모를 의식했든 의식 못했든 간에 한두 작가씩 고독해 가는 조선어를 버리고 일본어에 붓끝을 모으던 경향은 우리 조선작가로서 모어에 대한 잔인성과 예술가적 자존심의 결핍을 폭로했던 것이다.

8·15 이전 일본과 조선의 경우에 있어 조선작가로 조선어를 버림은 조선문단을 버림이었고

조선작가로 조선문학을 버림은 그냥 붓을 꺾는 침묵이 아니라

일본어에로 전향함은 조선문화의 부정이요 따라 조선민족의 부정이었던 것이다.

관공청에서 조선어가 금지되었고 학교에서 교회에서 노상에서 조선어는 도처에서 구축당했다.

민족과 운명을 같이하는 우리 민족의 최초요 최후의 문학인 조선어의 명맥을

끝까지 사수하기에 적당한 사람은 적든 많든 민중을 가졌고 기록을 남기는 우리 문학가들이었던 것이다.

이런 중대한 의무에 자각이 없이 모어의 곤경을 돌보지는 못할망정

일제 권력에 아첨해 조선어 말살에 채찍을 가한 문학가가 우리 가운데 있다면

우리는 오늘 조선어에와 조선어의 제작자인 우리 민족 앞에 경건히 참회하고

연후에 다시 조선어에 붓을 대일 것이다.”

<주간신태양>이라는 신문이 있다.

1947년 5월 3일 창간호를 낸 우익지로 김준연(金俊淵)이 사장이고 윤치영(尹致暎)이 주필이었다.

이 신문 47년 8월 16일치에 상허가 나온다.

‘친일파는 누구? 민족반역은 누가 했나’라는 제목으로 ‘문학가동맹편’이다.

…지금은 북조선으로 가서 소련을 다녀와 <소련기행문>까지 써서 소련 예찬자가 된

문학가동맹 위원장이던 이태준은 <대동아전기>를 출판하여

일본의 ‘미영격멸’ 사상을 고취하고 있지 않았는가. 그는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우리는 잠자코 서로 쳐다보고 있었다. 이렇듯 강한 해군을 가진 국민으로서의 기쁨과

펜과 카메라로 사는 우리가 이 역사적 해전을 이 시퍼런 눈으로 목격하였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복인가!”

이렇게 그는 일본의 충량한 신민이 된 행복감에 도취되었었고

 

“우리는 당황해 덤비는 적들의 허턱대고 쏘는 포연을 비웃으며

유유히 그들의 해면으로부터 자취를 감추고 만 것이다.

이튿날 적측의 방송에 의하면 제철소 외에 조선소에도 피해를 입었는데

피해액은 오천 파운드에 불과하다 하였으며

이는 물론 시민을 속이는 것으로 위주인 그들의 상투적 허위보도가 틀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여

당시 일군의 미군기지 포격에 대한 미군 측의 행동을 경멸하는 허위보도를 하여

미영에 대한 적개심을 조장하기도 하였으며…

 

“모함으로 돌아가려면 갈 만한 상태였으나 원적(怨敵) 이십 년 이제 하와이 군항에 이르러

탄환만으로 성이 차지 않은 때문이리라”하여 육탄공격을 찬양했고

이러한 제국 잠수함의 활동에는 미국 본토가 진감되었고

영국이 인도와 호주의 교통에 위협을 받을 뿐 아니라

사람과 물자의 창고인 인도를 잃어버리는 기운에까지 빠지어 허덕허덕하게 된 것이다.

 

… 미국은 태평양에 부릴 배가 모자라 애쓰던 자이오 샌프란시스코는

서남태평양 방면에 있어 해상교통의 출발점이라

이 항구 일대가 우리 잠수함에게 위협을 받게 된 사실은 미국으로서는 무엇보다도 큰 고통일 것이었다. … 미국의 태평양함대 사령관 니미쓰는 진작부터… 솔직히 비명을 한 것이다.

이렇게 미영의 무력(無力)을 선동하여 왜적에게 충성을 하게 하려고 갖은 노력을 해왔던 것이다.

그때 조선문단에서 친일 상채기가 없는 문학인은 이기영 · 한설야 말고는 없었다.

그리고 이태준 또한 이광수 다음으로 받았던 1941년 제 2회 ‘조선예술상’과

<조광> 42년 1월호에 쓴 ‘행복의 흰 손들’이라는 짧은 줄글과

<신세대> 44년 6월호에 쓴 르포 ‘목포조선 현지기행’ 한 편이 있을 뿐이다.

임종국(林鍾國)이 찾아낸 친일성향 글이 단 2편이었는데,

<신태양>에서 말하는 <대동아전기>라는 책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상허는 창씨개명도 하지 않았고 친일작품을 쓴 것이 없다.

뒷날 북조선에서 쓸어없어졌을 때도 친일작품을 썼기 때문이 아니다.

그리고 위에 따다 쓴 만큼을 가지고 친일문인이라고 할 수 있는가?

<신태평양> 기사는 타고난 친일업보로부터 벗어날 길 없는

이른바 민족주의 우파들이 물고들어가는 언짢은 물귀신작전이었다.



예술성 뛰어난 민족문학 작가

이태준의 문학동지였던 정지용.

1946년 6월쯤 월북했고, 47년 방소문화사절단 한 사람으로 소련 나들이를 하였다.

을유문화사에서 단편선집 <복덕방>을,

북조선 문학가동맹 · 조소문화협회에서 <해방전후>와 <소련기행>을 펴내었다.

48년 최고인민회의 표창장을 받았고, 조선문학예술총동맹 부위원장, 국가학위수여위원회 문학분과 심사위원이 되었다.

49년 단편집 <첫전투>, 50년 중편 ‘고향길’을 끝내었다.

51년 ‘백배천배로’ ‘누가 굴복하는가 보자’ ‘미국대사관’ ‘네거리에 선 전신주’ ‘고귀한 사람들’ 끝냄.

52년 재일본조선인교육자동맹 문화부에서 소설집 <고향길>과 <신문장강화> 펴냄.

이즈음 남로당 숙청바람에 몰렸으나 소련파 기석복(奇石福) 뒷배로 살아났다.

55년 소련파가 사그라지면서 일제 때 ‘구인회’ 활동의 반동성과 사회주의사상성의 불철저를 이유로

끔찍한 꼬집힘을 받고 사라졌다. 그뒤 함남 노동신문사 교정원으로 일했다는 증언이 있다.

김진계 증언에 따르면 66살인 1969년까지 살아 있었던 것은 또렷하나, 그 뒷소식은 알 길이 없다.


8·15 바로 뒤 ‘민족문학 수립’이 민족문학사의 맡은 일로 드러났을 때 그 한가운데 세워졌던 이태준이다.

단편소설 완성자였던 상허 이태준은 예술성이 뛰어났던 순문학 작가이며 민족문학 작가였다.

70년대에 서울에서 일어났던 참여문학과 맞서는 개념으로 ‘순수문학이 아닌 순문학’이며,

계급문학과 맞섰던 개념의 민족문학이 아니었음은 물론이다.

 

한뉘 동안 고아의식에 시달렸던 상허 이태준이 홀로 일구어 홀로 걸어갔던 30년대 순문학을

다시 살펴봐야 한다. 빼어난 단편인 ‘밤길’ 을 다시 본다.

문참(文讖)에 걸려버린 상허인 것만 같아 눈앞이 부우옇게 흐려온다.

허턱 주안(朱安) 쪽을 향해 걷는다. 얼마 안 걸어 시가지는 끝나고 길은 차츰 어두워진다.

길만 어두워지는 것이 아니라 바람이 세차진다. 홱 비를 몰아붙이며 우산을 떠받는다.

황서방은 우산을 뒤집히지 않으려 바람을 따라 빙그르 돌아본다.

그러면 비는 아이 얼굴에 홈빡 쏟아진다. 그래도 아이는 별로 소리가 없다.

권서방더러 성냥을 그어 대라고 한다. 그어 대면 얼굴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나 빗물 흐르는,

비비틀린 목줄에서는 아직도 딸랑거리는 것이 보인다. 바람이 또 친다. 또 빙그르 돌아본다.

바람은 갑자기 반대편에서도 친다. 우산은 그예 뒤집히고 만다.

뒤집힌 지 우산은 두 번, 세 번 만에는 갈기갈기 찢어지고 말았다.

또 성냥을 켜보려 한다. 그러나 성냥이 눅어 불이 일지 않는다.

하늘은 그저 먹장이다. 한참 숨을 죽이고 들여다보아야 희끄무레하게 아이 얼굴이 떠오른다. 
 

- 2009 04/21   위클리경향 821호

- 2009 04/28   위클리경향 822호

김성동 - 1947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나 19세에 출가, 10여 년간 스님으로 정진했다.

1978년 소설 <만다라>로 ‘한국문학 신인상’을 수상하고, 소설집 <집> <길> <국수> 등을 냈다.

현재 경기 양평에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