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 도전리 마애불상군 앞에서 | ||||||
누가 떼어내었는지는 몰라도 자세히 살피면 꼭 망치 자국이나 정 자국이 있으며 거북같이 생긴 바위도, 토끼같이 생긴 바위도 다 그러하다’는 전언을 들은 적이 있다. 사람의 눈에 거슬리는 부분은 제거하고 싶은 본능이 너 나 할 것 없이 있었나 보다. 또 편평한 바위만 보면 누구나 기원과 소망을 새기고 싶은가 보다.
30여 구의 마애불이 빼곡히 조각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조각은 유희 본능과 기억(기록) 본능이라 했는데 여기는 광집에 가까운 불상의 군집이다.
지방색이 뚜렷한 그 고장 사람들의 발원이 끊이지 않았다. 원래 선종은 절대적인 불타에 귀의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존재하는 불성을 깨치는 것을 중시하는 개인주의적인 성향을 지녔다. 따라서 중앙의 간섭을 배제하면서 지방에 웅거하여 독자적인 세력을 갖춘 지방호족의 의식과 부합되었던 것이다. 이들은 불상의 존재를 당연시할 필요가 없는 선종 사상 아래서도 중앙의 화엄적 풍습을 답습하여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마애불을 새기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지금의 풍수지리가 라말여초의 개성 중심의 풍수설임은 사실이나 당시의 모든 풍수설이 개성 중심의 것만 있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오히려 그것은 지방을 명당이라 함으로써 지방 호족세력을 정당화하려는 경향을 가졌기 때문에, 지방 호족은 저마다의 풍수설을 가졌을 가능성이 있다.
옛부터 지리산이 영산(靈山)이고 인근에 단속사지(斷俗寺址), 삼장사지(三藏寺址), 법계사(法界寺), 내원사(內院寺) 등의 고찰(古刹)이 있음으로 볼 때 도전리의 석벽은 부처님의 외호(外護)가 병풍처럼 에워싸져야 할 필요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도 저도 아니면 처음의 어느 누구가 부처님을 새겨 엄청난 복락을 받아서인지 줄을 이어 마애상이 마련되었을 것으로 짐작해보기도 한다.
마애불상군이 있는 앞으로는 도로가 나고, 낙동강이 흘러가지만 예전에는 강물만이 묵묵히 흘러가는 고즈넉한 공간이었을 것이다. 지금까지도 이 상을 갖고 싶은 사람들의 욕심인지 아예 상 자체를 떼어낸 것도 있다.
아래에는 내림연꽃 위에는 올림연꽃의 이중 연화좌나 단독의 올림연꽃 연화좌 혹은 내림연꽃의 연화좌 위에 앉아 있다. 손 모양도 여러 가지여서 선정에라도 든 듯 배 앞에서 양손을 포갠 것, 심신이 아픈 사람들을 치유하는 약함을 들고 있는 것, 그리고 석가의 깨달음을 전하는 설법의 수인, 옷으로 가려져 있으나 양손을 가슴 앞에 모은 공수의 모양 등 다양하게 표현되어 이 불상들을 조성한 사람들의 각가지 염원들이 마치 손으로 표현된 듯하다. 어쩌면 공수형태의 불상들은 당시 예배자의 모습 혹은 도를 이루고자 하는 당시 사람들의 수행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게 한다.
대의는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우견편단이나 양 어깨를 덮은 통견으로 입었다. 특히 통견으로 입은 대의 중에는 V자형으로 가슴이 노출되어 통일신라 9세기 이후 유행하는 철불, 광주 증심사 불상과 닮아 있기도 하고, 또 경주 분황사 불상군에서부터 통일신라 후기 불상에서 자주 등장하는 U자형의 주름을 이루면서 앞치마 모양으로 양다리를 덮은 대의자락이며, 석굴암 불상조성 이후 지독하리 만큼 유행한 양다리사이의 부채꼴 주름은 이를 증명하는 증언인 샘이다.
아마도 이 암벽의 조건에 맞게 불상을 조성하다 보니 크고 작은 불상들이 생겨나게 된 것일 것이다. 이 마애상들 중에서 유난히 눈길을 끄는 것은 암벽의 가운데에 가장 아랫단에 조각하기도 어려운 위치에 수줍은 듯 숨어 있는 9cm의 작은 불상이다. 어깨는 통통해 양감이 느껴지고 양다리의 폭이 넓어 자세에도 안정감이 있다. 얼굴은 마모되어 그 윤곽은 알 수 없지만 신체에서 드러나는 형태를 보면 비록 작은 상이지만 당시의 양식을 잘 표현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온몸을 웅크리고 이 작은 불상을 조각한 무명의 조각가를 생각해 보면 매일 20시간씩 천정을 바라보며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를 그린 미켈란젤로의 마음과 의지가 어떻게 다를 수 있겠는가.
정확한 내용도 알 수 없고, 언제 글씨가 쓰여졌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혹자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 승려들의 이름일지 모른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글자를 새기는 것 자체가 훼손이지만 그 글자를 새기는 마음만큼은 사람들의 바람이 담겨 있었음에 틀림없다. 현재의 도전리 마애불상군은 인위적인 파괴 뿐 아니라 사암이라는 돌 차체의 특성 때문에 더욱 훼손이 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0구나 되는 많은 수의 불상이 높이 약 3m, 폭 약7m인 암벽의 한 공간에 새긴 사례는 전무하며, 당시 이 지역사람들의 불교신앙에 한 단면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큰 가치가 있다.
외딴 곳에서 홀로 묵묵히 세월을 지켜낸 도전리 마애불상들은 자연적이든 인위적이든 훼손이 더욱 진행된다면 이 마애불상군은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할 것 같다. 선인들의 예배 대상인 마애상은 한 구 만으로도 소중하기가 이를 데가 없는데 수많은 마애상 앞에서의 작은 떨림은 이대로 두어선 후일을 기약하기 어려운 현실이었다. 한 구 한 구에 새긴 뜻을 알 수가 있다면 좋으련만 왜 무심(無心)이라는 말이 자꾸만 공염불처럼 들리는가? - 이희정, 문화재청 김해국제공항 문화재감정관실 이희정 감정위원 - 2008-11-24, 문화재청, 문화재칼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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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리마애불상군동짓날 매화 기다리는 마음처럼 설레임으로 만나는 도전리부처님 |
그리지 않았다. 대신 뜰 앞에 긴 가지를 드리운 수양버들이 봄바람이 불어오기를 진중하게 기다린다는 말인 '정전수양진중대춘풍(庭前垂楊珍重待春風)'이라는 글씨를 쓰기로 했지만 한꺼번에 대뜸 쓰지는 않았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쓰기는 썼지만 컴퓨터로 글씨의 외곽선만 따 놓았을 뿐 그 안은 하얗게 비워 놓았다. 그리고는 하루에 한 획씩 그 속을 먹으로 채워 나가고 있다.
오늘이 동짓날로부터 열여섯 새가 되는 날이니 이제 겨우 정(庭)자를 먹으로 채웠고 전(前)자는 글씨꼴이 되어 가고 있는 중이다. 이 글자들은 모두 아홉 자이며 전체 획수가 81획이다. 庭이 열, 垂가 여덟 획인 것을 빼면 나머지는 아홉 획씩이며 그 획이 모두 채워지는 날이면 어느덧 꽃피는 봄인 3월10일 경이 된다.
나라 안에서 가장 작은 마애불이다. 도전리 마애불상군의 가운데 맨 아래쯤에 있다.
곧 매화를 기다리는 것이다. 봄을 기다리는 이 뜨거운 마음을 어찌 달랠거나. 길 떠나는 수밖에 별달리 뾰족한 수가 없으니 다시 행장을 챙겼다. 눈보라가 몰아칠 지언 정 봄은 오고 있을 것이기에 그를 찾아 나서는 길에 경남 산청은 빠질 수 없는 곳이다. 북종선의 탯자리인 단속사터를 비롯해 지리산과 덕유산 기슭에 뭇 절터들이 흩어져 있으며 가까이에 빼어난 아름다움을 머금고 있는 합천의 영암사터까지 있으니 나만의 성지 순례라고 해도 모자람이 없는 것이다.
더구나 단속사터에는 정당매가, 남명 조식의 서재인 산천재 뜰에는 남명매가 움을 틔울 준비를 하고 있을 터이니 언제나 이맘때면 걸음이 잦아지는 곳이다. 휘둘러 절터를 더듬고 아직 맨 가지로 찬바람을 견디고 있는 매화나무를 만나고 나면 나는 언제나 생비량면 도전리의 마애불상이 새겨진 바위 벼랑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동살이 비쳐드는 새벽부터 노루꼬리 만큼 짧은 동짓달의 해가 서산에 걸릴 때 까지 종일 머무르곤 했던 것이다. 오늘도 다르지 않다.
폭은 겨우 1m 남짓, 너비는 채 20m가 넘지 않으며, 발아래는 수직 절벽이고 머리 위로는 곧 떨어질 것 만 같은 바위들이 박혀있는 곳으로 찾아 든 것이다. 그리고는 스스로를 가두어 버렸다. 아예 꼼짝도 하지 않을 심산으로 물 몇 모금과 주먹밥까지 챙겨왔으니 스스로를 묶어 버린 것이나 다르지 않다.
진표율사가 망신참법으로 법을 구했다는 변산 부사의방(不思議方)의 축소판이라고 하면 지나칠까. 나는 몸을 제대로 운신하기도 쉽지 않은 이곳에서 단 한 번도 답답함을 느끼지 못했으며 불편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나를 옭죄고 있던 것들을 한 순간에 풀어버린 해박대(解縛臺)와도 같았다. 풀린다는 것은 한 순간이었다. 마치 바늘 끝으로 찔린 것 같았지만 오히려 둔기로 얻어맞은 것 보다 더 크게 열렸으니 실오(實悟)란 이런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날부터 참 많은 것이 달라졌다. 아무리 익숙한 것이라도 다시 되새겨서 찬찬히 보게 되었고 이미 읽었던 글이라도 또 다시 꼼꼼하게 읽게 되었다. 아무리 하찮은 것일지라도 눈길 나누는 것 마다하지 않았으며 게으르고 무지한 나 자신에 대해 다시 깊고 깊게 성찰할 수 있었으니 이보다 큰 선물을 또 어디에서 받을 수 있을 것인가 싶은 것이다.
5년 전, 이른 봄날이었다. 그날도 오늘과 같이 마음 급한 봄맞이 순례 길에 나섰고 사흘 째 되는 날은 부처님 곁에 머물렀었다. 그 해는 이곳에 마애불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찾아다니기 시작한지 12년이 되던 해였다. 나라 안 어느 곳에도 이토록 좁은 공간에 29구나 되는 부처님을 마애로 새겨 놓은 곳이 없으니 마음에 차 올랐으며 더구나 그 부처님들이 하나같이 상처 입은 모습을 하고 있기에 더욱 걸음을 나누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날 이후, 지금까지는 그 많은 부처님들 중 유독 한 분을 뵈러 간다. 많으면 일 년에 서너 차례 아니면 한 차례일지라도 걸음을 그치지 않는 까닭은 그 분이 바로 나를 바늘로 찔렀기 때문이다. 그 부처님은 이 좁은 공간을 나에게 무한의 넓이로 재생시켰으며 세상과 자연 그리고 사물을 바라보는 또 다른 눈을 하나 더 준 것이나 다르지 않다. 그 덕에 나는 조금 더 섬세해 질 수 있었으며 더욱 침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분은 쉽사리 눈에 띄지 않는다. 십년이 넘도록 걸음을 나누며 서성거리고 나서야 겨우 뵐 수 있었으니 말이다.
도전리 마애불상의 특징은 넓지 않은 바위 면에 29구의 부처님들을 다닥다닥 새겨 놓은 것이다. 그것도 편편한 면이 아니다. 바위는 위가 튀어나오고 아래는 들어 간 경사진 면이어서 위에 새겨진 부처님들은 그나마 제대로 뵐 수 있지만 아래로 내려 갈수록 쭈그리고 앉기도 쉽지 않은 탓에 눈여겨보기가 만만치 않다. 그분은 그 중 가장 아래쪽에 계신다. 더구나 바위에 새겨진 마애불로는 나라 안에서 가장 작은 크기의 부처님이니 더더군다나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나라서 가장 작은 마애불상군, 통일신라말기 조성된 듯…
그 때문에 늘 익숙하게 다닌 곳이지만 처음부터 그 자리에 여여히 계셨던 부처님을 그제야 뵙게 되었으니 나의 회오는 크고도 무거웠다. 그것은 겉만 보고 제대로 속을 짚어 보지 못한 것과도 같은 일이었으니 말이다. 곁에 두고 읽는 책인 〈죽창수필(竹窓隨筆)〉에 세상 모든 것은 마음으로 얻어야 한다고 했는데 나는 그저 귀와 눈으로만 얻으려고 했던 것이지 싶어 그 얄팍한 오만함이 부끄러워 고개 들지 못했던 것이다. 옷이 더러워지면 어떨까. 손이 시리고 무릎이 저려온들 무슨 소용일까. 나는 그 앞에 무릎 꿇고 앉아 부처님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며 나를 되돌아 봐야 했다. 무릎을 꿇으면 제대로 바라보기 조차 힘들어 아예 그 자리에 드러눕기는 또 몇 번 이었던가. 비록 나 자신을 향한 참회였지만 부처님 계시지 않았으면 겪지 못했을 일이니 절로 몸이 숙여졌던 것이다.
두 손을 선정인으로 모으고 앉아 계신 부처님은 높이가 겨우 10cm남짓하며 폭 또한 채 6cm가 되지 않는다. 법의는 통견으로 걸쳤으며 훼손당한 눈은 또렷하지만 입 모양은 잇는 듯 만 듯 희미하다. 바위 면에 새겨진 부처님들은 모두 동시대에 새겨진 것으로 보이는데 이 작은 부처님 또한 같은 시기일 것이라고 추정된다. 비록 대좌는 없지만 이곳에 새겨진 여느 부처님들과 같이 돋을새김을 한 것이 그렇고 유난히 많은 선정인을 하고 있으며 입상이 아니라 좌상이기 때문이다. 크기 때문인지 세부적인 표현은 곁에 계신 부처님들보다는 간략하지만 상호와 몸의 구분이 확연하며 가슴께에 U자형으로 모인 법의의 표현 그리고 가지런히 모은 두 손과 결가부좌한 다리의 모습은 뚜렷하다.
29구의 부처님들 중 수인으로 항마촉지인을 한 부처님이 한분도 계시지 않는다는 것은 조성시기가 통일신라시대에서 벗어나는 것이지 싶다. 또한 통일신라시대가 지녔던 세련미나 탄력성은 보이지 않지만 앉음새가 단정하며 법의의 주름들은 촘촘히 밀집되어 있다. 더구나 바위 전체의 부처님을 선새김이 아닌 돋을새김으로 조성했다는 것은 고려 중기 이전으로 봐야 할 것이다.
부처님들이 새겨진 바위 자체가 잘 부서지며 떨어지는 사암류 성질을 지닌 것이어서 화강암에 새긴 것들 보다는 세부 묘사나 양감이 뒤처지지만 불상 하나하나가 지닌 전체적인 균형미는 안정된 편이다.
더더욱 흥미를 끄는 것은 부처님 곁에 제각각 ‘○ ○ ○先生’이라고 쓰여 있는 것이다. 그 글씨 또한 여러 사람의 글씨라고 보기는 힘들며 한 사람의 글씨체로 짐작된다. 곧 누군가에 의해 집중적인 관리를 받았던 흔적인 것이다.
부처님의 크기는 30cm 내외이며 ‘○○○先生’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불상 곁에 개인의 이름을 써 넣는 것이 불가능했던 것이라고 본다면 이는 통일신라가 망하고 고려 왕조가 자리를 잡아가던 혼란기에 조성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통일신라의 미감을 채 떨어내지 못했지만 생각은 이미 분방하여 부처님을 개인 기복신앙의 대상으로 삼았으니 말이다.
그러나 부처님 앞에서 미술사를 논하고 미학을 풀어 놓는 일은 나에게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부처님이 나에게 어떻게 작용하며 나는 그 작용으로 어떤 반응을 보이며 변화하는가에 있는 것이다. 도전리의 부처님들은 조각이 빼어나지도 않을 뿐 더러 그 마저도 하나같이 훼손 되었기에 미술사의 관점에서 보자면 하찮은 조각이라고 치부 되겠지만 나에게는 석굴암 본존불 못지않은 가치를 지닌 부처님이다. 부처님을 서로 견준다는 것조차 마뜩치 않은 일이다. 그렇지만 불자들이나 일반인을 가리지 않고 팽배해 있는 국보나 보물 그리고 영험있다는 부처님에게만 경배가 집중되는 풍조는 한번 쯤 되짚어 봐야 할 일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셨던가. 무엇이 다른 무엇에 우선 한다고 말이다. 아니다. 나는 들은 적이 없고 읽은 적이 없다. 그럼에도 왜 우리들은 부처님에게 등급을 매기고 그 차이에 따라 차별을 하고 있는 것인가.
매화 필 즈음 다시 찾겠다는 인사 올리고 〈죽창수필〉의 글 한 줄을 흥얼거리며 그만 일어섰다. “귀로 듣고 얻은 것은 눈으로 직접 보고 얻은 것 보다 넓지 못하고, 눈으로 얻은 것은 마음으로 깨달아 얻은 것 보다 넓지 못하다 … 눈으로서 마음으로 얻은 것을 대신 하는 것은 못난 짓이요, 귀로서 눈으로 얻은 것을 대신하는 것은 더욱 못난 짓이다.”
● 도전리 마애불상군
조선시대 유생의 고의적 훼손 추정 / 29구의 불상 유형문화재로 지정
마을 사람들은 마애불이 있는 곳을 ‘부처덤’, 도전리는 ‘도밭골’로 부른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 209호로 지정되었으며 바위 면에 모두 29구의 부처님을 새겨 놓았다. 더러 깨져 나간 채 대좌만 남거나 불두는 간 곳 없고 몸만 남은 것들도 있다. 더구나 성하게 남아 있는 부처님들조차도 모두 눈을 파냈는데 이는 민간신앙의 속설에 따라 행해졌다가 보다는 고의적으로 훼손한 것이지 싶다.
도전리 마애불상군의 부처님들은 하나같이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속설에 따라 민간에서 부처님의 코를 갈아 먹기는 했지만 눈을 파내거나 아예 상호 전체에 둥근 구멍을 움푹하게 판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이는 산청이라는 지역적 특징을 따져 볼 필요가 있다.
안동의 퇴계(退溪) 이황(1501~1570)은 경상 좌도를 그리고 산청의 남명(南冥) 조식(1501~1572)은 경상 우도를 대표하는 유학자들이다. 남명이 머물렀던 산천재에는 후학들이 줄을 이었고 산청 군청 뒤의 웅석봉 기슭에 있던 지곡사(智谷寺)에는 그와 함께 글을 읽던 유생들의 출입이 잦았던 곳이다. 남명 또한 지리산 유람을 떠나거나 유정산인(惟政山人) 사명을 만나러 단속사로 나들이를 하곤 했는데 이 단속사가 바로 남명의 문인(門人)인 부사(浮査) 성여신(1512~1571)에 의해 불탔다. 1568년 마침 그가 단속사 곁을 지날 때 절에서는 책을 찍고 있었는데 ‘중이 염불만 하면 되지 무슨 책이냐’며 목판을 불사르고 사천왕을 부수었으며 경판을 태워 버렸다는 것이다. 불은 절집까지 번졌으며 그때 불탄 경판이 서산대사 휴정이 지은 〈삼가귀감〉(三家龜鑑)이었다. 이러한 지역적 분위기 속에 부처님이 밀집되어 있는 곳이 무사할 리 없었을 것이다.
가는 길은 대전 - 통영 간 고속도로의 단성 나들목으로 나가 좌회전, 단성교를 건너 100m 남짓가다가 원지 삼거리에서 20번 도로로 고령 방향으로 향하면 된다. 단성 나들목에서 15분가량 걸린다. 단성 나들목에서 우회전해 남사마을을 지나자마자 오른쪽으로 단속사터를 알리는 이정표가 있다. 지곡사는 산청읍내에서 웅석봉군립공원 이정표를 따라 가면 된다. - 이지누/ 기록문학가 - 2007년 1월10일, 불교신문 2292호 |
도전리 마애불상군(群)
지 정 : 경남유형문화재 209호 (1982. 8. 6 지정)
종 류 : 마애불 29구
소 재 : 경남 산청군 생비량면 도전리
단성에서 의령으로 가는 길의 왼편에 생비량면 도전리 어은마을이 나온다.
경남 산청군 생비랑면 ‘도밭’이란 마을이다. 한자로‘道田’이라고 써서 ‘도전리’라고 하지만
이곳 사람들에겐 도밭으로 통한다. ‘도밭’그러니까 ‘도(道)의 밭’이란 말이다.
‘도를 심고 가꾸는 밭’.... 이 마을이 언제 생긴 것인지는 몰라도
그동안 얼마나 많은 도가 생산된 것인지 모를 일이다.
아무튼 이 마을이 도밭임을 증명이라도 해 주듯
도전리 부처덤이라 불리는 구릉남쪽의 자연석 암벽에 새겨진 마애불이 현재 약 29구가 남아 있다.
도밭마을 앞으로 양천강이 흐른다. 이 강 건너 야트막한 산이 있다. 산 뒤쪽은 밭이다.
이 산 절벽에 불상이 무리를 이루고 있는데 마모가 심해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알기가 힘들다.
언덕 정상부는 마을과 강을 배경으로 선 누각자리이다. 그곳에 눈에 잘 띄지 않는 비석이 하나 있다.
지금은 과수원이 되었지만 어은(漁隱) 오선생(吳先生)이라는 사람이
이곳에 은둔하며 고기잡이로 살았고, 그로 인해 마을이름도 어은마을이 된 것이다.
이곳에서 국도 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급경사의 벼랑에
단아한 불상들이 크기를 달리하여 4단으로 배열된 마애불상군이 보인다.
상단(4층)에 3구, 아래층으로 내려와서 5구(3층), 8구(2층), 13구(1층)가 배치되어 있다.
크기는 30㎝ 내외로 단정한 용모의 얕은 부조이다.
녹색 이끼가 낀 황갈색 바위는 단성지역의 암반들이 대개 그렇듯이 가로로 단층이 난 퇴적암이다.
이런 바위는 역작을 꿈꾸는 조각가라면 피해야 할 재료이다. 돌이 각이 져서 뚝뚝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 점을 우려한 것인지 불상은 모두 소형이며 가장 작은 정으로 조심스럽게 쪼았다.
선각의 연화대좌(臺座) 위에 앉은 이 작은 불상들은
소발(素髮)의 머리에 육계(肉髻)가 높으며 대략 다섯 가지 정도의 형태로 나누어진다.
양어깨를 걸친 통견의(通肩衣) 법의(法衣)를 입고 배 앞으로 양손을 모은 선정인(禪定印)의 좌상,
석가의 깨달음을 전하는 설법의 수인 그리고 약함을 두 손에 들고 있는 좌상,
U자형의 주름을 이루면서 앞치마 모양으로 양다리사이의 부채꼴 주름,
두 손을 옷자락 안으로 넣어 ‘∧’모양을 이루는 좌상,
그리고 우견편단(右肩偏袒)의 옷에 오른손은 가슴께로 올리고 왼손은 배 앞으로 댄 불좌상 등이다.
이들은 고려시대의 상들로 짐작되지만
시대 추정을 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은 바로 상들의 오른쪽에 씌어진 명문들이다.
불상 옆에는 세로줄의 명문을 너댓 자씩 새겨놓았는데
‘○己 (?)旦 ○’ ‘向盖先生’ 등이다.
마모가 심하여 시주자의 이름인지, 혹은 부처의 존명인지 잘 해독되지 않는다.
특이한 불상군의 구성은 당시의 특징적인 배치 방법으로 주목되며,
이에 대한 깊은 연구가 이루어지면 그 중요성은 한결 높아질 것으로 생각된다.
- 《한국의 마애불》, 이태호, 이경화, 다른세상, 2001 부분참조
- Gijuzzang Dream 추가 (2006년도 답사에서 찍은 사진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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