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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화순과 나주는 광주광역시와 지척에 있으면서도 서로 뚜렷이 다른 질감을 지니고 있다. 화순은 조용하고 한산한 마을이다. 지금은 길이 잘 뚫려 왕래가 편하지만 예전에는 구불구불한 너릿재길을 넘기가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덕분에 화순 땅에는 옛것들의 운치가 잘 보존되어 있다. 특히 백성의 정서가 배어 있는 민불과 개성강한 남도 돌장승들을 마주할 수 있으며, 독특하고 기묘한 천불천탑 운주사는 화순답사의 중심이다. 또한 부도예술의 정수인 철감선사부도를 쌍봉사에서 만나볼 수 있다. 나주는 영산강이 흐르는 너르고 비옥한 평야지대로 오래전부터 전라도의 중심이었다. 전라도라는 말은 북도의 전주와 남도의 나주를 섞어 만든 지명이다. 또한 나주평야에 흉년이 들면 곧 전라남도가 흉년이었을 만큼 전라남도 지방의 농사를 가늠하는 잣대역할을 했다. 남도답사의 시발점이기도 한 화순과 나주 땅을 돌아본다.
화순 도암면, 해발 100미터 남짓한 야트막한 산자락에 운주사가 있다. 여느 고찰처럼 화려한 건축물은 없지만 이곳엔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운주사만의 놀라운 유적들이 있다. 운주사는 천불천탑. 즉, 천 개의 탑과 불상이 있었던 곳이다. 지금은 석탑 12기와 석불 70여 기만 남아있지만 1942년까지만 해도 석탑이 30기, 석불은 213기가 남아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무슨 연유로 이 자그마한 산자락에 그 많은 유물이 자리하고 있었을까? 운주사 천불천탑에는 이와 관련된 여러 가지 설화들이 남아 있다. 신라 때의 고승 운주화상이 돌을 날라다 주는 신령스러운 거북이의 도움으로 이곳에 천불천탑을 만들었다는 이야기와 중국 설화에 나오는 마고 할미가 지었다는 설화 등이다.
이곳의 돌부처들이 대체로 비슷한 손놀림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아 한사람이 평생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석공들의 연습장이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져 온다. 그러나 가장 널리 퍼져 있는 것은 도선국사와 관련된 이야기다. 도선은 풍수 비보에 일가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우리나라 지형을 배의 형상으로 보고, 배가 안정되려면 배의 중심에 무게가 실려야 하므로 그 중심에 해당하는 이곳 화순 땅에 천불천탑을 세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곳 유물들을 꼼꼼히 살펴보면 대체로 12~13세기 양식을 갖추고 있다. 도선국사는 이보다 훨씬 전인 9세기에 살았던 인물이니 연대가 맞지 않는 것이다. 도선국사의 풍수설은 그저 민간신앙과 이어져 내려오던 설화였을 것이다. 이곳에서 또 한 가지 유명한 것은 누워있는 불상, 즉 와불이다. 대웅전으로 향하는 길 왼쪽 산 중턱에 다른 곳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와불이 있는데 이와 관련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어떤 사람은 세우려다 못 세워 그대로 누워있는 것이라 하고 또 어떤 이는 부처가 누워있는 것에 의미를 두었는데 와불이 스스로 일어서는 날 세상이 개벽한다는 설화를 이야기한다.
운주사 주변은 전체가 사적 제312호로 지정돼 있으며 입구 쪽에 있는 구층석탑과 중심부의 석불감 쌍배불좌상, 원형다층석탑이 각각 보물 제796, 797, 798호로 지정돼 있다.
“풍속이 소박하고 간략하니 종래부터 후했고, 산이 순수한 정기를 감췄으니 발설하기 더디네” 라고 적혀 있다. 화순 땅은 예전부터 이처럼 소박한 백성의 땅이었다. 화순을 돌아다니다 보면 민초들의 심성이 깃든 돌장승이나 민불 등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나주 땅에 속하지만 운주사의 지척에 있는 운흥사터와 불회사에는 정감 넘치는 남도 돌장승들이 남아 있다. 남도장승 특유의 퉁방울눈과 주먹코, 갖가지 재미난 입 모양들을 보고 있으면 웃음이 절로 난다. 영락없는 우리 이웃의 모습이며 선조의 모습일 게다. 불회사 석장승과 운흥사터 석장승은 각각 중요민속자료 11호와 12호다.
해맑은 미소를 간직한 벽나리 민불
한편 운주사 쪽에서 화순시내로 들어서기 직전, 철길 건너 우측으로 보면 들녘 한가운데 큰 나무가 서 있는데 그 아래 다소곳이 자리한 민불 하나를 만날 수 있다. 벽나리 민불로도 불리는 대리석불이다. 민불은 불교와 민간신앙이 결합한 마을 공동체 신앙의 산물이다. 백성에게는 딱딱한 유교나 불교 같은 기성종교보다 더 편안하게 자신의 마음을 의지할 신앙물이 필요했던 것인데, 그러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민불이고 장승이며 당산이다. 키가 4m나 되지만 정면에서 보는 민불의 표정은 해맑은 어린아이의 표정처럼 순박해 보인다. 동그란 맨머리에 가는 반달눈, 수줍은 듯한 미소가 마음을 푸근하게 한다.
쌍봉사는 신라 경문왕 때 철감선사 도윤이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고찰이다. 한갓진 산자락 어귀에 있는 고즈넉한 사찰로 지금은 대웅전과 명부전, 극락전과 새로이 지은 요사채 등이 남아있지만 일제 강점기 때만 해도 제법 많은 전각이 있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큰불이 났다는 기록도 있어 원래는 규모가 큰 사찰이었을 것으로도 추측된다.
쌍봉사에 들어서면 아름드리나무 사이로 특이한 양식의 목조건물 한 채가 눈에 들어온다. 쌍봉사 대웅전이다. 3층 목탑양식의 보기 드문 건물로 한때 보물 163호로 지정돼 있었지만 1984년 불이나 몽땅 타버리고 지금 건물은 1986년 말 다시 복원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목조탑 형식의 건물은 매우 드문 것인데 속리산의 법주사 팔상전을 예로 들 수 있다. 어쨌거나 새로이 지어진 대웅전은 본래의 모습 그대로 재현됐다. 오랜 시간의 흔적이 묻어 있는 멋스런 향취는 덜 하더라도 우리나라 목조탑 건물의 양식을 이어받아 독특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감상할 수 있어 다행이다.
쌍봉사에 들르면 꼭 보아야할 유물이 있다. 국보 제57호로 지정된 쌍봉사 철감선사 부도이다. 철감선사부도는 통일신라시대뿐 아니라 우리나라 부도를 통틀어 손꼽힐 정도로 아름다운 부도다.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으로 만들어진 팔각원당형 부도로 목조건축식 구조와 정교하고 세밀한 조각들이 볼만하다.
(위) 나주 반남면 덕산리 고분군(사적 제78호) (아래) 신라 경문왕 때 창건된 고찰 화순 쌍봉사, 쌍봉사 철감선사 부도(국보 제57호)
영산강 유역 사람살이의 역사 - 반남 고분군
나주시 반남면 일대에는 고대의 고분들이 남아 있다. 반남면 신촌리, 대안리, 덕산리의 30여 기에 이르는 고분이다. 그 규모가 신라의 왕릉과 비슷해서 발견 당시부터 많은 궁금증을 자아냈던 고분군이다. 이 고분들은 고대 영산강 유역에 막강한 세력의 집단이 살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것으로, 신촌리 9호분의 경우 금동관이나 팔찌, 귀걸이 같은 장신구, 봉황무늬가 있는 칼과 창, 화살촉 등의 무기가 발견돼 지배계층의 무덤으로 추측되고 있다.
무덤들은 대개 거대한 봉분을 쌓아 올리고 그 안에 여러 개의 독널을 묻은 것으로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들을 함께 묻은 공동묘의 형태다. 독무덤을 쓰면서 봉분을 왕릉처럼 거대하게 쌓아올린 것은 영산강 유역의 고분들이 유일한데, 이것은 백제의 힘이 전라남도 지역에 미치기 이전, 즉 마한의 토착 집단이 이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던 시절의 무덤이라는 것이다. 한편 이 무덤들은 이 지역이 고대 일본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는 고대 일본에서 유행했던 무덤형식으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이곳에서만 발견된 것이라고 한다 또 덕산리 3호분과 대안리 9호분 둘레에는 도랑이 파여 있는데 이것도 역시 일본의 고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방식이다. - 글, 사진 : 남정우 - 2008-12-05, 문화재청 월간문화재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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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불천탑 운주사의 와불(臥佛)은 언제 일어날 것인가?
용화세상(龍華世上)에 대한 화두의 답은 역시 현실의 이 땅이다. 이곳이 진정 평화의 땅이요, 세계 문명의 중심지로 성장할 곳이기 때문이다. 운주사의 와불은 진정한 용화세상이 피안의 세계가 아니라 우리가 이 땅 위에서 일구고 만들어가야 할 우리 모두의 숙제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매우 유쾌한 일이지만 아직 보지 못한 우리 산하의 문화유산을 찾아 떠나는 길은 더 없이 기쁜 여행길임이 틀림없다. 더구나 찾아가기 어렵고 다른 문화유산과 다른 문화적 특질을 지니고 있는 문화유산을 찾아 떠나는 답사라면 그 흥분감은 배로 증가하게 마련이다. 이렇게 유쾌하며 흥분이 고조되는 답사의 가장 대표적인 곳이 단연코 전남 화순의 만산계곡에 자리 잡은 운주사일 것이다.
충청 · 전라도 일대의 읍성과 산성을 찾아 떠나는 길에 새로운 문화의 충격을 보자며 운주사 답사를 일정에 포함시켰다. 사실 운주사에 대한 이야기는 연구회 뒤풀이에서 젊은 답사꾼들에게 가끔 들어 매우 가보고 싶은 곳이기도 했다. 그들은 술 한 잔을 걸치면 자주 운주사의 신비함을 목청 높여 외치곤 했다. 하지만, 수원시의 도시계획을 전담했고 새로이 세계문화유산 화성을 보전하는 일의 책임을 진 공직자로서 시간을 내서 운주사를 방문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때마침 우리 화성연구회에서 운주사 답사 계획이 확정됨에 따라 만사를 제쳐 놓고 회원들과 운주사로 길을 떠났다. 나주에서 출발하여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세워졌다는 불회사(佛會寺)를 거쳐 굽이굽이 포장길을 돌아 운주사 주차장에 들어섰다. 예전 80년대 초반에 남평에서 비포장 길을 통해 엄청나게 어렵게 이 길을 찾아왔다고 우쭐해 하는 후배를 보며 옛 길의 아름다움을 떠올렸다. 아마도 지금보다 약간은 불편했겠지만 몇 시간에 한 대씩 있는 버스에 올라 전라도 사람들 특유의 육자배기 소리를 들어가며 시골길을 한나절 달려 찾아오는 그 맛이 한편으로 그리웠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누가 찾아오는 것일까 생각하며 일주문을 지나자마자 그대로 충격이었다. 협곡의 안쪽으로 들어가는 순간 길게 솟아있는 탑과 길 옆으로 붙어있는 불상들은 기존에 우리의 의식구조에 있던 그 탑이 아니요, 불상이 아니었다. 탑은 전혀 알 수 없는 형식으로 가득했고 불상은 부처의 위엄은 사라지고 그저 농투성이 모습 그대로였다. 못생긴 것을 떠나 절 밖에서 모내기를 하다 지게를 메고 방금 들어온 농사꾼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런데 왜 이상하게 정감이 가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석굴암 본존불과 같은 위엄으로 말미암아 다가서기 힘든 불상이 아닌 그저 만지고 끌어안아도 싫증 내지 않고 허허 웃을 것 같아서였던 모양이다.
과거 탑이 있던 주위는 모두가 논이었다고 한다. 운주사가 언제인지 모르지만 폐사가 되고 나서 농군들이 들어와 탑과 불상들을 제외하고 나머지 땅을 모두 논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은 이 땅에 살붙이고 살았던 것이다. 그 논이 모두 잔디밭으로 변했으니 한편으로 아쉽기 그지없다. 논 위에 탑이 있다면 오히려 더한 정취가 있을 것이고 그것이 진정 생명력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형식의 파괴는 우리를 충격으로 몰아넣기에 충분했고 우리는 탑신부에 새겨진 ‘X’자 문양 등의 다양한 문양을 보며 이 탑을 만든 당대 사람들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과연 이곳이 절집이 맞는 것일까 하고 말이다. 그러나 한발 한발 앞으로 내디딜수록 새로 단장된 이곳이 너무도 안타깝게 느껴졌다. 이곳도 결국 세속으로 들어오는구나. 피안의 세계가 세속으로 들어오니 세속의 사람들은 과연 누가 구제해줄 것인가? 새로 중건된 운주사 경내를 지나 공사바위로 오르는 곳에 참으로 예쁜 탑을 보았다. 둥근 시루 모양의 돌을 이어 만든 탑은 신라시대 이층기단의 삼층석탑, 백제의 정림사지 오층석탑과는 비교 대상이 아니었다. 부처가 곧 농군이듯 우리의 삶 주위에 있는 그 무엇이든 쌓아 올리면 그것이 바로 탑이었다. 석가모니의 사리가 있어야 탑이 되는 것이 아니라 평생 땅을 딛고 살아갔던 그들의 숨결이 담겨 있으면 그것이 탑이었다. 너무도 못생긴 4층의 시루 모양의 탑은 그 어떤 고귀한 문화유산보다 나를 감동시켰다. 천불천탑의 운주사를 한눈에 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공사바위에 올라가야 한다. 전라도 일대의 절집 중에서 도선이 창건하지 않았다는 절집은 거의 없을 것이다. 도선이 세웠건, 아니면 고려 초 이 지역의 원래 백성이었던 백제 유민이 세웠건, 이들의 공통된 생각은 바로 용화세상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모두가 평등하고 전쟁과 살육이 없는 평화 그 자체의 세상인 용화세상을 만들기 위해 천불천탑을 건립한 것이었다. 그 평화를 위한 천불천탑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공사바위에 오르면 만산계곡의 신비로움이 그대로 눈에 들어온다. “아! 아!” 하는 감탄을 연발하다가 눈을 지그시 감고 천 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간다.
공사바위를 내려와 운주사의 절정인 와불을 보기 위해 능선을 타고 올라갔다. 중간 곳곳에 우리의 모습과도 같은 불상과 탑이 어우러져 있고 마지막 꼭대기에 미처 일어나지 못한 부처가 누워있다. 이곳 와불의 전설은 새로운 세상의 꿈이었다. 천구의 미륵석불이 ‘하룻밤 새’ 만들어져 세워지면 수도가 바뀐다고 했다. 아마도 고려왕조가 건국되고 그 치하에 있던 백제유민들은 지상의 ‘용화세계’를 만들고자 하였던 것이다. 즉 미륵의 세상을 만들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사람들의 이목을 피할 수 있는 만산계곡에서 정과 망치로 끈질기게 탑을 만들고 부처를 만든 것이었다. 하지만, 구백구십구 개의 부처를 만들고 마지막 부처를 일으켜 세우는 동안 새벽닭이 울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서 부처는 일어나지 못했고 지금까지 이 자리에 누워있는 것이다.
만약 존재한다면 나의 용화세계는 어디일까? 운주사를 세계에 알린 독일의 예술사학자 요헨 힐트만은 이곳이 세계 최초의 평화공동체였다고 역설하였고, 그와 더불어 80년대 중반 이곳에서 술 한 잔 나누며 천불천탑을 거닐었던 송기숙과 이태호, 그리고 황석영 역시 이 땅이 용화세계였음을 강조했다. 그렇기에 황석영은 장길산의 마지막 대목에서 길산의 무리가 이곳 운주사로 들어와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았음을 보여준 것이리라.
나의 용화세상에 대한 화두의 답은 역시 수원 화성인 것이다. 그곳이 진정 평화의 땅이요, 세계 문명의 중심지로 성장할 곳이기 때문이다. 속세가 곧 용화세상이요, 용화세상이 곧 속세이듯 세속의 한가운데 있는 화성이 곧 우리의 용화세상일 수 있는 것이다. 화성을 올바르게 보전하여 역사문화도시로만 인정받을 것이 아니라 진정 세계의 평등평화의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는 온 힘을 다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운주사의 와불은 곧 화성의 와불이 되는 것이며 결국 흰 새벽에 벌떡 일어나 새로운 세상을 만든 것이리라. 멀리 고개를 돌려 천불천탑의 만산계곡을 바라보니 어느덧 전라도 육자배기가 내 온몸에 휘감기는 것을 느꼈다. - 월간문화재사랑, 2006-07-1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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