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복사지(神福寺址),
저물녘 지친 햇살속에 어머니를 보다
< 어머니가 아이를 낳을 때 3말 8되의 응혈을 흘리고 8섬 4말의 혈유를 먹인다.
따라서 부모의 은덕을 생각하면 왼편 어깨에 아버지를 업고 오른편 어깨에 어머니를 업고,
살갗이 닳아서 뼈에 이르고 뼈가 닳아서 골수에 이르도록
수미산을 백 천 번 돌더라도 그 은혜를 다 갚을 수 없다. > - 부모은중경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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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복사지 삼층석탑과 석불좌상 ⓒ 들찔레 |
해가 설핏 기우려 할 때, 강릉에 들어섰다. 내친걸음으로 신복사지를 찾아가는데
바쁜 마음에 주요 지표가 되는 내곡동 소방파출소를 찾는데 애를 먹었다.
소방서 바로 뒤로 들어가면 절터가 있다는데 도시의 한가운데서 이렇게 길을 헤매고 있는 것이다.
그런 혼란스러움 속에서도 머릿속에는 한 주전에 치른 어머님의 기제사 생각을 한다.
신복사지를 찾는 이유가 석탑 앞에 놓인 공양보살상을 보기 위함인데
나를 낳기 위해, 죽을 때 까지 자식의 올바른 성장을 위해 절집을 수없이 드나들었던 어머님의 모습이
떠오른 것이다. 이미 돌아가신지 오래라 요즈음은 꿈속에도 잘 오시지 않는 어머님의 모습을
그 보살상에서 찾아보고 싶은 것인지 모른다.
관동대학교와 내곡동 일대를 몇 바퀴째 돌다가 겨우 절터를 찾았을 무렵
하루 종일 세상을 달구었던 여름 해는 저도 지쳐 열기를 삭이고 있었다.
열을 받은 차에서 내려 휙 지나가는 바람에 땀을 훔친다.
넓지 않은 절터는 단정히 정리되어 있고 등을 보인 신복사지 석불좌상(보물 제84호)은
해넘이 직전까지 탑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리는 뒷모습을 보여준다.
왼쪽 다리를 세우고 오른쪽 다리를 꿇어앉은 자세로
무엇인가를 잡고 두 손을 가슴에 모은 저 보살은 무엇을 그렇게 소원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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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복사지 석불좌상의 뒷면/ 측면 ⓒ 들찔레 |
높고 무거운 관을 쓴 보살상을 옆으로 돌아가서 보면 보살상의 볼은 도톰하게 살이 붙은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은근하지만 큰 기쁨을 얻은 미소 띤 얼굴로 천년을 지나도록 지친 기색이 없다.
높다란 관을 쓰고 관 아래로 머리카락을 드러낸 보살에게는
몸의 굴곡을 따라 옷의 주름이 자연스럽게 흐르고 있다.
연꽃잎으로 장식된 대좌가 더욱 편안해 보이고
몸을 장식한 팔찌나 목걸이의 수식도 단순하지만 귀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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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복사지 석불좌상의 얼굴 ⓒ 들찔레 |
이러한 공양상은 강원도의 사찰이나 절터에서 발견되는 특징적인 것으로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국보 제124호)이나
월정사 팔각구층탑 앞에 놓여 있던 공양보살상(보물 제139호)과 그 형태가 동일하며
모두 고려 초기에 조성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 도착하기 전 들렀던 월정사 성보박물관에서 보았던 공양보살상은
약왕보살상으로 달리 불리기도 한다. 부처님의 사리를 수습하여 팔만사천의 탑을 세우고
탑마다 보배로 장엄한 다음, 그 앞에서 칠만 이천세 동안 자신의 두 팔을 태우며 공양했다는
법화경의 약왕보살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이런 양식이 유독 강원도에서만 발견되는 이유는
통일신라 후기부터 후삼국시대라는 혼돈의 시대를 거쳐 고려가 건국되는 과정에서
치열한 역사의 소용돌이를 겪었던 탓이라고들 말한다.
어느 누구도 이 깊은 강원도의 산골짜기를 자기 수중에 넣지 못하고 전장의 터가 되었던 탓에
애꿎은 피해를 입게 된 이 지역 백성들이 미륵신앙에 그들의 운명을 의탁해야했던
역사에 기인한 것이라는 말이 된다.
따라서 생사윤회의 괴로움에서 벗어난다고 하는 육자진언(六字眞言) '옴마니반메홈'을 들먹이며
민심을 희롱했던 궁예의 미륵사상은 그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고 이미 마음을 다 주어 생명을 의탁했던
이곳 사람들의 심리를 이용하려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자아내기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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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정사 석불좌상 ⓒ 들찔레 ◇ 경주 남산 할매부처 모습 |
그러나 나는 이 보살상과 마주한 자리에서 그런 역사적 배경이 가지는 의미보다
그 옛날 이곳의 백성들이 치성을 드렸던 속 내용, 가족의 안녕을 기원하며
하루를 평안히 살게 해 달라고 빌던 어머니들의 모습을 읽는다.
우리네 어머니들이 가족의 안녕을 비는 정성도 부처님 앞에 칠만 이천세 동안 자신의 두 팔을 태우며
공양한 약왕보살의 심정과 다르지 않았으리라 보기 때문이다.
미륵사상이란 부처님께 귀의한 채 만민이 골고루 평화 속에 소박한 행복을 바라는
작은 기원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모습을 가진 부처님 하나를 다시 떠올린다. 경주 남산 북서쪽에 계시는
부처골 감실여래좌상(보물 제198호)으로 일명 '감실할매부처'라고 불리는 것이다.
단아하게 앉아 온화한 미소로 세상을 바라보는 모습은 부처님이 아니라 나를 쳐다보며
무언의 격려와 올바른 사람됨을 일깨우는 모습의 어머니의 살아생전 모습이다.
이 부처와 이곳 신복사지의 보살상은 그 처지와 시대가 다를지언정
그냥 불심 깊은 어머니의 모습으로 기억하고 싶다.
"어머님의 열 번째 은혜는 끝까지 불쌍히 여기시는 은혜니,
어머니의 높은 나이가 100살이 되셨어도 80된 그 아들의 근심이 적지 않으니,
모자의 은애(恩愛)가 끊어질 때가 언제인가? 목숨이 없어져도 그 생각은 항상 따르나니,
이와 같은 열 가지의 은덕이 있으므로 부모의 은혜는 한량이 없고, 불효의 허물은 말로 다 할 수 없느니라." - 부모은중경 중 '구경연민은(究竟憐愍恩)' 부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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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 앞의 공양상 ⓒ 들찔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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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어머님의 은혜를 바꾸어 공양하는 모습의 탑과 공양상이 또 다른 곳에서 발견된다.
바로 우리가 잘 아는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국보 제35호)과 그 앞에 있는 공양상이다.
일명 효대(孝臺)라고 불리는 이 탑 앞의 공양상은
아들이 돌아가신 어머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치성을 드리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이 탑 앞에 놓인 공양상은 탑을 향해 석등을 머리에 이고 있는 스님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연기(緣起)조사가 어머니를 위해 탑을 조성했다는 전설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렇듯 어머님이 자식과 가족을 위해, 자식이 어머님을 위해 기도하는 모습은
종교를 초월하는 또 다른 힘이 있다.
이쯤에서 전설 하나를 소개한다.
신라의 한 처녀가 우물에 비친 햇빛을 보고 그 물을 마신 후 아기를 갖게 되었다.
집안사람들이 이 아이를 내다 버렸으나 아이 주위로 빛이 맴돌아 괴이하게 여겨 다시 데려다 기르게 된다.
아이의 어머니는 이 아이 이름을 범(梵)이라 짓는다.
나중에 성장한 범이 출가하여 승려가 된 후 고향으로 돌아와 절을 지었다고 한다.
이 스님이 바로 신복사와 인근 굴산사를 창건하고
신라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하나인 사굴산파를 처음 연 사람으로 범일국사(梵日國師)다.
범일국사 역시 그 어머님의 큰 은혜를 잊을 수 없었을 것이기에
자신이 태어나고 성장하였던 터를 다시 찾아 지은 굴산사에서 40년을 기도하며 살았다.
인근인 이곳 신복사지의 공양보살상은 혹시 범일국사를 위해 기도하는 그의 어머님 모습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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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복사지 삼층석탑 ⓒ 들찔레 |
세속의 명리와 헛된 명예에 얽매이지 않은 진정한 선지식으로 존경받았던 범일국사는
9세기를 대표하는 승려로 40년 동안 굴산사에 머무르는 동안 신라 경문왕. 헌강왕. 정강왕 등
세 명의 왕이 모두 그에게 왕사나 국사가 되어 주기를 권한 것에 한 번도 응하지 않고
수도와 불경연구에만 전념하다 입적했다.
범일국사의 영정은 지금 공주 마곡사 국사당에 있으며 부도는 인근 강릉 굴산사지에 남아있고
현재는 강릉의 수호신으로 여겨 강릉단오제의 주신인 국사성황신으로 추앙받아
대관령국사 성황사에 모셔지고 있다.
공양보살상이 바라보며 치성을 드리는 대상, 부처님의 현신인 신복사지 삼층석탑(보물 제87호)이
지는 석양을 받아 부드럽지만 단단한 석질을 드러내며 우뚝 서 있다.
신라의 전형적인 탑의 양식에서 벗어난 고려초기의 것으로 월정사의 탑만큼 화려하지는 않지만
약간은 이형탑의 형태를 빌어 나름대로 잘 꾸미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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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층석탑의 몸돌에 새겨진 감실 / 삼층석탑의 상륜부 ⓒ 들찔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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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의 기단을 쌓고 3층의 탑신을 올린 석탑은 바닥돌 위에 복련을 전체를 돌려 양각 하였으며
아래 기단의 네 면에는 각 면마다 3개씩의 안상을 음각 하여 놓았다.
탑의 기단과 몸돌의 각 층 밑에는 널돌로 굄돌을 넣었는데
삼국시대나 통일신라의 것들에서는 잘 볼 수가 없다.
탑신 각 층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씩의 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1층 몸돌 정면에는 부처님을 안치하는 방인 감실(龕室)모양을 파 놓았고
1층의 몸돌에 비해 2·3층은 갑자기 그 크기가 줄어들어 매우 얇다.
또한 각 지붕돌의 층급받침은 3단으로 되어 있다.
상륜부는 간소화된 형태를 보여주지만
연꽃 봉오리로 장식된 풍만한 모습이 복을 다 들어 줄 것처럼 풍성한 모습이다.
이 중 바닥돌에 새겨진 복련, 각 층 사이에 넣은 굄돌, 아래 기단에 새겨 넣은 안상, 3단의 층급받침 등은
고려시대 탑의 특징으로 볼 수 있다.
이곳에서 석탑을 향해 기도를 드리는 공양상을 보면서 월정사의 약왕보살상을 생각하고
감실할매부처와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 앞에서 어머니를 위해 기도하는 연기조사를 기억해냈다.
그 바탕은 마음으로 어머니를 만나고 싶은 욕구가 일었기 때문이다.
절터 뒤편 구릉에 앉아 지는 해를 바라보며 아직 열기가 남은 햇살을 받는다.
목이 탄다. 단지 땀을 흘리며 하루를 넘김으로서 생기는 갈증으로만 목이 타는 것은 아니다.
어머니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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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복사지 삼층석탑과 석불좌상 ⓒ 들찔레 |
해가 기우는데 범일국사가 사굴산파를 처음 연 굴산사지(강릉시 구정면 학산리 사적 제448호)를
찾아가는 마음이 바쁘다. 느긋한 일정이 아니어서 신복사지 가까이 있는 굴산사지를
해 떨어지기 전에 가볼 것이다.
범일국사의 어머니가 아들을 갖게 된 우물 석천(石泉)에서 손을 씻고 마음을 씻고
내 어머니의 원혼에 위로를 드릴 것이다.
범일국사가 버려졌던 학바위 근처 범일 국사의 부도탑에 예를 올리고
사람됨과 믿음, 불자로서의 큰마음을 배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당간지주가 있는 들판에서
들녘으로 오는 저녁을 맞아 바람결에 내 몸을 맡길 것이다.
- 2008.07.27 데일리안 배강열 칼럼니스트 <들찔레의 편지 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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