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바람 손님 그런 날 있잖아요. 세상이 어제와 딴판으로 달라 보이는 날. 그랬다니까요. ‘어- 바람 냄새가 다르네? 어제 그 바람 냄새가 아니네?’ 가을 초입, 호박꽃 피고 호박 익어가고, 대추도 굵어가고, 감도 조금씩 노란 빛깔로 변해가네요. 저 푸른 논배미도 금방 황금들판이 되겠지요. 밑에 동네 가운데 황금리라고 있어요. 광주 나갈 때 그 앞을 지나가곤 하는데, 가을에 황금마을 앞은 그야말로 황금들판. 입을 다물 수 없게 만들어요. 대미를 장식한 건, 하안거 마치고 잠깐 나들이 오신 스님 친구들. 정부의 종교편향 어쩌고 하는 이야기도 잠깐 나눴네요. 그쪽 동네는 가을바람 언제부나 싶어요. 같은 종교 집안사람들끼리 밤낮없이 부둥켜안고 감싸주면 비질비질 땀나는 삼복더위만 여전할 텐데…. 암튼 이제부터는 가을손님 맞아야지요. 가을손님 일번타자는 가을바람이에요. 산 위에 나무꾼이 나무를 할 때, 이마에 흐른 땀을 씻어 준대요.” 마른 나뭇잎 뒹구는 산길, 가을바람 쐬면서 부지런한 나무꾼은 오르락 내리락. - 2008년 08월 27일
풀벌레소리 개가 하도 짖어대 깼다. 여호와 아짐들이다. 냇물 건너 당골네 집에나 가보시지…. 내가 곱빼기로 죄 많은 녀석이란 일급정보가 결국 샜단 말인가. 모자란 잠을 아쉬워하며 기상. 명절도 다가오는데 예초기를 돌려 집주변 풀들을 벴다. “빡빡머리 밀어불 듯 개안해부네. 오글딱지게도 해부는구마. 심(힘)부치겄네. 쪼까만치 쉬었다하소.” 이른 산책을 나오신 동네 어르신이 칭찬을 주시고 가신다. 말씀 받잡고, 밭으로 가는 물 호스에 입을 대고 갈증부터 덜었다. 그늘에 앉아 숨을 고르는데, 아~ 풀벌레소리. 우리 집은 허물지 말아달라, 꼬마들까지 울면서 애원을 한다. 첫서리가 내릴 때까지 풀이랑 풀벌레들이랑 그냥 같이 살기로 결심했다. 고흐처럼 옛 귀를 자르고, 오늘은 내가 새 귀를 뜬다. 글을 쓰는 지금도 문 밖에선 솔솔바람을 타고 풀벌레소리가 나분하다. 아침하고는 다르게, 다정하고 살가운 소리다. 고맙다는 사랑의 인사를 들려주는 것인가. - 2008년 09월 10일
잠자리는 날아가고 그대 아는가. 잠자리가 자동차로 달려드는 까닭…. 햇빛에 반짝거리는 자동차가 마치 물 위에 반짝이는 햇빛처럼 보여 거기다 알을 낳기 위해 내려앉는 거란다. 자동차에 치여 죽는 게 잠자리뿐은 아니지만, 잠자리의 경우는 참말 안타까운 사연이 아닌가. 곡식이 익을 즈음이니 잠자리가 떼를 지어 비행 중인 요즘. 반찬 사러 읍내 다녀오는 길, 내 차로 잠자리 한 마리가 뛰어들어 목숨을 잃었다. 미안, 죄송 쩝쩝…. 그런 고대의 생명체 잠자리가 고작 1769년 프랑스에서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 생명체도 아닌 철물 조립기계 자동차에 치여 비명횡사해야 하다니. 비행에 지친 잠자리 한 마리가 백일홍 나뭇가지에 앉아 쉬었다 가더라. 이 땅별의 본래 주인에게 나뭇가지는 기꺼이 어깨를 내어주고…. 전에 나는 이런 하이쿠 시 하나를 쓴 일이 있다. “자존심이란 어떤 감정일까. 공장 굴뚝 곁에서, 의연한 미루나무여.” 미루나무처럼 자존심 센 잠자리가, 가까이 광주공항으로 착륙하는 비행기보다 더 멋진 선회비행을 마치더니 위풍당당 창공을 향해 날아갔다. 부디 자동차에는 뛰어들지 말고, 물웅덩이를 만나 알을 낳기를….
수많은 기적들 구절초 꽃이, 하얗거나 보랏빛이거나 언뜻 보면 연분홍이거나 여러 빛깔이 한데 모인 구절초가 곱다랗게 꽃피었다. 구절초 꽃내를 맡으니 비로소 시월 어느 날이란 게 실감난다. 약재로 팔려고 할매가 가꾸는 구절초 밭. 꽃향기를 맡고 벌 나비도 방문이 잦다. 추위가 깊어지면 이들도 꽃들처럼 사라질 지상의 목숨들. 잠시 잠깐의 만남인지라 나는 자주 뒷산 언저리 구절초 밭을 우러른다. 기적처럼 제 때 피어나고 기적처럼 제 때 사라져가는 꽃, 꽃들…. 빵과 물고기의 기적은 옥수수 한 알을 심어 수많은 옥수수를 수확하는 일보다 조금도 놀라울 것이 없지.” 오히예사(다코타족 인디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놀라운 기적을 믿고 졸병이 되어 두려워하면서 따르라는 예수님을 나는 알지 못한다. 우리 모두 일상의 갖가지 기적을 맛보며, 감격하고 감사하라는 이야기일 것이다. 기적 같은 만남, 구절초 한 뿌리를 떠서 마당에 옮겨놓고 가까이 꽃을 보기로 했다. 수시로 향기를 맡아야지. 내가 지금 살아있어 이 꽃향기를 맡고, 그대의 고운 머리칼을 쓰다듬을 수 있음이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 2008년 10월 01일
고구마 부자 남녘은 벌써 나락들을 벤다. 그 틈에 나는 밭에 들어가 고구마를 캤다. 해마다 그렇지만, 올 겨울 군것질감도 고구마나 감자, 애지중지 아껴먹을 홍시와 곶감 정도. 멜라민이 묻은 과자는 입에 대본 적이 없다. 맵고 짜고 쓰고 단, 조미료 범벅한 음식은 바깥나들이를 해서야 맛보는 것이다. 라면도 쌓아두면 자꾸 밥해 먹는 게 귀찮아질까봐 비상식량으로 두어 개 정도만. 끼니 때 잡곡쌀 씻어서 밥 지어 먹고, 입이 궁금해지면 고구마를 굽거나 삶아 먹는다. 어떤 경우는 고구마가 주식이 되기도 한다. 밥 앉힐 때 고구마를 썰어 같이 넣으면 그게 고구마 밥이다. 거름도 하지 않았는데 맛이 짱짱하게 잘 들었구나. 장하고 오지다. 정말 기쁘다. 뿌듯하다. 세계 경제가 무너지고, 서민 주머니까지 그 여파가 몰려온다고들 걱정하는 이때, 나는 대관절 팔자가 펴서 고구마 부자가 되었구나. 우쭐함을 얻고 계실 모든 세상의 부자들은 여기 고구마 부자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은….
먹감나무는 포기 못해 | ||||||||||||||||||||||||||||||||||||||||||||||
“새팍(대문 밖)에 감낭구(감나무)까지 다 즈그들 차지인 줄로 안당께. 째깐한 것들이 얼매나 묵어쌌능가 저 달보드름허게 살 오른 것을 조깐 보소이. 할레할레 삼시롱 놀고 묵고… 저것들도 쌔(혀)빠지게 일을 해봐야 쓴디이.” 아재랑 감 따서 하나씩 베어 물다가 꼭대기에 앉은 새들을 보고 일성. 밭에 감나무 몇 그루 있는데 나는 손닿는 아래쪽만 따고 나머지는 내버려둔다. 전엔 지인들 따서 나눠 주고 그랬는데 고마워하는 거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나 혼자 먹으면 얼마나 또 먹겠는가. 새들이나 먹어라 내버려 둔다. 농로에다 나락가마니 말리는 아재에게 새참 삼으시라 따드린 게 처음. 역시 이쪽에서도 고맙다는 인사 대신 “감이 우리 집 감보다 맛이 찌울구마(기울구마). 그래도 떠럽지는(떫지는) 않응게 부지런히 잡솨. 감 나오는 철은 의원이 문을 닫는닥 안 허등가이. 저것들(새들) 돌라가라고(훔쳐가라고) 내배래 두지만 말고.” 새들하고 딱 절반씩만 나눠 먹어야지. 왁작왁작 몰려와서 다 먹어치울지 몰라 장대를 하나 나무에 걸쳐놓았다. 그리고 감나무는 또 그 말에 동의할까. 아무튼 단감은 그렇더라도, 먹감나무는 절대 포기 못해. - 2008년 10월 15일 - 글 · 그림 / 임의진 목사, 시인 단풍 놀이
막바지 들국화는 생을 연연하여 노랗고 흰빛을 끝내 붙잡고 피었구나. 건너편 산등성이는 아침인데도 저녁노을처럼 불그스름. 단풍이 진짜 막바지 절정시대다. 가을 사라지는 겨울입구, 남은 김장철 말고는 일이 없어진 동리엔 앗싸라비아 춤판이나 열어볼까. 단풍구경 소식들이 들려온다. 나는 뭐 집에 가만있는 것도 단풍놀이 같은데, 어르신들은 동네를 하루라도 떠나보고 싶은 모양이다. 여자의 옷은 꽃밭, 남자는 지극한 키스를 퍼붓는…. 난 그 금빛 꽃밭의 격정어린 사랑 그림이 늦가을 붉은 노을잔치거나 내 강산 단풍놀이 풍경처럼 여겨지더라. 지난주는 지리산 문수골로 산행을 하루 갔었는데, 이번 주말도 다시 지리산에 오를 일이 생겼다. 약 올리는 소리로 들으셔도 어쩔 수 없지비. 당신의 생은 당신이 만든 생이니깐. 그래도, 그대여! 잠시잠깐 만사 팽개치고 단풍놀이 못오시나. 짝꿍이 있다면 동행하여 클림트의 키스를 재현해 보시길. 남우세스럽겠다고? 걱정 붙들어 매시라. 마지막 한 잎의 단풍잎이라도 그 순간 살짝쿵 가려줄 테니깐두루.
- 2008년 11월 12일 - 글 · 그림 / 임의진 목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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