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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향녀(還鄕女)와 화냥년

Gijuzzang Dream 2008. 10. 24. 17:55

 

 

 

 

 

 환향녀(還鄕女)와 화냥년 
 

서방질하는 계집을 '화냥년'이라고 한다.

일러스트 · 김영민

 

그러나

서방질과 화냥년은 엄연히 다르다.

 

화냥년은 청나라 이민족으로부터

 자국 여인을 보호하지 못한

집권층의 무능과 무책임의 소산이며,

서방질은 자의에 의해 제 남편이 아닌

음탐하는 사내놈들과 놀아나는 무분별한 짓거리이다.

 

 

화냥년의 비극은 병자호란에서 유래됐다.

1636년 병자년 겨울에 조선 땅을 무단침입한 청 태종은

이듬해 1월, 남한산성에서 인조의 항복을 받아낸다.

단군 이래 최대의 굴욕과 치욕의 역사였다.

청 태종은 소현세자를 비롯한 60여 만명의 조선 백성을 심양으로 끌고 가

인질로 삼았다. 2년 후 조선의 집권세력은 청나라에 몸값을 치르고

인질 석방에 성공, 만백성의 박수를 받으며 수만여 명이 환국했다.

 

그러나 환호도 잠깐.

'환향녀(還鄕女)' 라는 이름으로 손가락질하며 멸시하기 시작했다.

정절을 잃었다는 이유로 남편들로부터 공개적으로 가혹한 이혼을 요구받았다.

나라를 위하여 끌려가서 몸까지 빼앗기고 돌아온 여성들을

이 땅의 남성들은 등을 돌리고 용납하지 않았다.

인조는 물론 이러한 남편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아내를 멀리하는 남편들을 위하여 공식적으로 첩을 허용해 주었다.

강화도에서 청군에 붙잡혀 끌려간 영의정 장유의 며느리는

청에 끌려가 절개를 잃었다는 이유로 시부모로부터 이혼 청구를 당했다. 

결국 사대부 가문 출신의 환향 여인들은 손가락질을 견디지 못해

자진(自盡)의 길을 택하기도 했다.

 

환향녀 문제로 민심이 흉흉해질 것을 우려한 정부는 특단의 대책을 발표한다.

“환향녀가 절개를 잃은 것은 음행(淫行) 때문이 아니라 전란 탓이다.

대동강, 한강, 낙동강, 금강, 섬진강, 영산강 등 전국 각지의 강(江)을

내 친히 지정하노니 도처에 흩어져 살고 있는 환향녀들은

이 강물에 심신을 정결하게 씻어낼 것을 명하노라.

강물에 몸을 씻어낸 환향녀들은 잃어버린 정조를 다시 되찾은

회절(回節)여인 으로 간주할 것이다.

만일 회절한 환향녀를 거부하는 집안은 중벌로 다스릴 것이다.”

정부에서 지정한 이 강들이 ‘정조를 되찾는’ 회절강(回節江)이 된 것이다.

 

 

그때의 '환향녀'가 '화냥년'으로 변천해 오늘날까지 이어져

‘부정한 여인’을 지칭하는 보통명사로 정착됐다.

화냥년은 약소국가의 비극과 위정자의 무책임이 담긴 통한의 ‘이름씨’요

지도자를 잘못 둔 백성의 슬픔과 회한이 서린 단어이며

죄 없는 여인을 두 번 죽이는 옹졸하고 비겁한 어휘이며

그 이면에는 이 나라 남성들의 무지몽매와 유약함, 나라 잃은 부끄러움이 묻어있다.

 

 

이런 논리라면 좌익게릴라 조직인 콜롬비아 무장혁명군(FARC)에 납치돼

6년여를 인질로 붙잡혀 있다가 최근 극적으로 구출된

잉그리드 베탕쿠르(46) 전 콜롬비아 대통령후보도 화냥년이다.

 

남존여비를 불문율로 받아들이던 조선시대에는

순종(順從)이 여인의 커다란 덕목이었다.

지아비가 계집질로 황음(荒淫)을 전횡해도 실효적 지배만으로 안위해야만 했다.

일부종사(一夫從事), 부창부수(夫唱婦隨), 여필종부(女必從夫)라는

관습화된 도덕규범은 남편과 사별한 후까지 지속됐다.

그리고 그 수절(守節)의 고통을 열녀문(烈女門)에 새겨

부부 간의 도리를 다한 열녀(烈女)로 보상하고 칭송하던 시대였다.

- 신동아, 2008.10.01 통권 589호(p604~605) / 정정만(M&L 世優美클리닉 원장)

- 일부 발췌 정리

 

 

  

 

1636년 인조 14년 12월 병자호란 때 오랑캐는 전리품으로 조선 남녀들을

끌고 갔는데, 요동땅에 버려진 처지로 고려보(高麗保)를 이루게 되었는데

중국 요동(遙東)지방 심양(瀋陽) 남변문 밖에 노예시장을 벌이고 그들을 팔았다.

 

그 무렵 조선에서 중국으로 가던 사신일행이 사행(使行)길에 보면

사행이 지나간다는 소문을 듣고 통나무 울타리가에 달려나와

"나는 어느 고을 진사 아무개의 아내요"라고 소리치며 소식 좀 전해달라 통곡 하는데

때로는 도망을 치다 잡혔는지 어떤 여인은 양쪽 귀에 화살이 꽂히기도 하고,

어떤 여인은 허벅지살을 도려내어 걷지도 못하고 땅을 치며 통곡을 하고 있었다고

사행기록에 비참한 목격담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렇게 노예로 노동력으로 또는 처첩으로 팔려가 수모끝에 계약시한을 채우고는

어쩌다 고향에 돌아온 여인들이지만 조선에서는 환향녀(還鄕女)라 부르고

외국에서 유랑하다 돌아왔다 하여 쇄환녀(刷還女)라 부르기도 하며

그들을 외면했다.

 

이 돌아온 여인들을 상민이나 천민은 반갑게 받아들였지만

법도있는 양반 신분의 여인들은 실절(失節)로 더럽혀졌다 하여

문 안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거부하여 문밖에서 울다가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토록 그리워하며 갖은 고생 끝에 혈육을 찾아 돌아온 그들은

죄책감과 기구한 신세를 원망하고 거부당한데 대한 서러운 감정들이 뒤범벅되어

이상야릇한 웃음을 히죽히죽 웃었다.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우는 것 같기도 한 이상야릇한 한국적인 웃음을

‘환향녀의 웃음’ 이라 하는데

바로 법도를 지키는 가문에서 전란에 납치돼 실절했을 어머니나 아내, 딸들이

문전에서 짓지 않을 수 없었던 기구한 웃음이다.

사무치게 보고 싶었던 그리움, 만나게 되어 설레는 마음, 실절한 데 대한 죄책감,

기구한 신세 한탄, 받아들여지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공포 등등 복합감정으로만

지을 수 있는 그런 한국적인 웃음이다.

 

그런 웃음을 지으며 동구 밖 정자나무에 목을 매거나 깊은 소(沼)에 몸을 던졌으며

더러는 만주 벌판으로 되돌아가 환향녀끼리 어울려 살았다.

어이없는 대접에 요즘같으면 정신이 어떻게 되었다고 하겠지만

그들은 뒤범벅이 된 감정을 감당할 수 없어 그 길로 강물에 몸을 던졌고

더러는 목을 매 죽었다. 그나마 죽지못한 이들은 요동벌을 찾아 되돌아가기도 했다.

다시 노예로 팔려나가거나 고려보(高麗堡)라는 집단촌에서 살아 남았다.

지금 그 지역에 고려보라는 지명이 많은데 바로 그 한많은 집단촌이다.

사행길에 하인들이 그곳에 들려 음식을 사 먹으면 같은 고향사람이라 하여

음식값도 받지않고 고향소식을 묻고는 훌쩍훌쩍 울었다고 한다.

이같이 나라가 난리를 만나면

죄없는 여인들은 끌려가 기약없이 처절하게 고통을 당하다가 죽어갔다.

  

1991년 보스니아 전쟁 때에도 여인들이 수난을 당하였던 여인들,

정권 이양과 더불어 미군수용소에 수감돼 있던 이라크 여성들이 석방되고 있는데

병자호란판 환향녀의 전철을 밟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

한국처럼 가족이나 부족 명예에도 걸리지만, 그 이전에 이슬람의 계율에서 실절에

대한 가혹한 응징이 이라크 환향녀들에게 설 땅을 주지 않았다.

미군 병사들의 학대가 엎친 데 덮쳐 이 여포로들의 실절을 간음으로 간주,

투석형(投石刑)으로 다스리는 것이 관행이기 때문이다.

광장 복판에 구덩이를 파 유방까지 묻고 군중으로 하여금 돌팔매질시켜

돌묻이를 하는데, 맨 먼저 그 여인의 아버지가 돌을 던지는 게 관행이다.

처참한 이 공개형이 두려워 집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또 돌아가도 가족이나 부족에게 미리 살해당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370여 년 전의 인간 비극이 재현되고 있으니

‘그간에 인류문명의 어느 무엇이 발달했다는 말인가’ 하고

역사의 문을 주먹으로 피가 튀도록 치고 싶은 심정이다.

- 조선일보, 이규태코너 등에서 발췌 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