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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질하는 계집을 '화냥년'이라고 한다. |
그러나 서방질과 화냥년은 엄연히 다르다.
화냥년은 청나라 이민족으로부터 자국 여인을 보호하지 못한 집권층의 무능과 무책임의 소산이며, 서방질은 자의에 의해 제 남편이 아닌 음탐하는 사내놈들과 놀아나는 무분별한 짓거리이다.
화냥년의 비극은 병자호란에서 유래됐다. 1636년 병자년 겨울에 조선 땅을 무단침입한 청 태종은 이듬해 1월, 남한산성에서 인조의 항복을 받아낸다. 단군 이래 최대의 굴욕과 치욕의 역사였다. 청 태종은 소현세자를 비롯한 60여 만명의 조선 백성을 심양으로 끌고 가 인질로 삼았다. 2년 후 조선의 집권세력은 청나라에 몸값을 치르고 인질 석방에 성공, 만백성의 박수를 받으며 수만여 명이 환국했다.
그러나 환호도 잠깐. '환향녀(還鄕女)' 라는 이름으로 손가락질하며 멸시하기 시작했다. 정절을 잃었다는 이유로 남편들로부터 공개적으로 가혹한 이혼을 요구받았다. 나라를 위하여 끌려가서 몸까지 빼앗기고 돌아온 여성들을 이 땅의 남성들은 등을 돌리고 용납하지 않았다. 인조는 물론 이러한 남편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아내를 멀리하는 남편들을 위하여 공식적으로 첩을 허용해 주었다. 강화도에서 청군에 붙잡혀 끌려간 영의정 장유의 며느리는 청에 끌려가 절개를 잃었다는 이유로 시부모로부터 이혼 청구를 당했다. 결국 사대부 가문 출신의 환향 여인들은 손가락질을 견디지 못해 자진(自盡)의 길을 택하기도 했다.
환향녀 문제로 민심이 흉흉해질 것을 우려한 정부는 특단의 대책을 발표한다. “환향녀가 절개를 잃은 것은 음행(淫行) 때문이 아니라 전란 탓이다. 대동강, 한강, 낙동강, 금강, 섬진강, 영산강 등 전국 각지의 강(江)을 내 친히 지정하노니 도처에 흩어져 살고 있는 환향녀들은 이 강물에 심신을 정결하게 씻어낼 것을 명하노라. 강물에 몸을 씻어낸 환향녀들은 잃어버린 정조를 다시 되찾은 회절(回節)여인 으로 간주할 것이다. 만일 회절한 환향녀를 거부하는 집안은 중벌로 다스릴 것이다.” 정부에서 지정한 이 강들이 ‘정조를 되찾는’ 회절강(回節江)이 된 것이다.
그때의 '환향녀'가 '화냥년'으로 변천해 오늘날까지 이어져 ‘부정한 여인’을 지칭하는 보통명사로 정착됐다. 화냥년은 약소국가의 비극과 위정자의 무책임이 담긴 통한의 ‘이름씨’요 지도자를 잘못 둔 백성의 슬픔과 회한이 서린 단어이며 죄 없는 여인을 두 번 죽이는 옹졸하고 비겁한 어휘이며 그 이면에는 이 나라 남성들의 무지몽매와 유약함, 나라 잃은 부끄러움이 묻어있다.
이런 논리라면 좌익게릴라 조직인 콜롬비아 무장혁명군(FARC)에 납치돼 6년여를 인질로 붙잡혀 있다가 최근 극적으로 구출된 잉그리드 베탕쿠르(46) 전 콜롬비아 대통령후보도 화냥년이다.
남존여비를 불문율로 받아들이던 조선시대에는 순종(順從)이 여인의 커다란 덕목이었다. 지아비가 계집질로 황음(荒淫)을 전횡해도 실효적 지배만으로 안위해야만 했다. 일부종사(一夫從事), 부창부수(夫唱婦隨), 여필종부(女必從夫)라는 관습화된 도덕규범은 남편과 사별한 후까지 지속됐다. 그리고 그 수절(守節)의 고통을 열녀문(烈女門)에 새겨 부부 간의 도리를 다한 열녀(烈女)로 보상하고 칭송하던 시대였다.
- 신동아, 2008.10.01 통권 589호(p604~605) / 정정만(M&L 世優美클리닉 원장) - 일부 발췌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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