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씨통전(杜氏通典)
옛 책 속에 담긴 이야기
서울유형문화재 제 178호로 지정되어 있는 <두씨통전>의 이름은 원래 <통전(通典)>이지만,
당나라 때 두우(杜佑)가 중국 고대로부터 당나라 때까지의 전장제도를 정리하여 편찬하였기 때문에
<두씨통전>이라고 불러왔다.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더라도 국가의 각종 제도와 의례 등에 관계된 의사결정 과정에서
<두씨통전>의 내용을 참고한 사례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이 책은 모두 200권 75책으로 구성되어 있고,
(‘권券’은 오늘날의 ‘장, Chapter'의 개념과 유사하고, ‘책冊’은 오늘날의 ‘권’과 같다)
제일 첫 번째 책의 첫면에는 국왕이 하사한 책임을 알 수 있는 ‘선사지기(宣賜之記)’라는 인문이 찍혀 있다.
- 선사지기(宣賜之記)
일반적으로 ‘선사지기’가 찍힌 오른쪽의 빈 면에는 ‘언제 누구에게 무슨 책을 내린다’는 내용이
적혀 있는데, 아쉽게도 이 책은 그 내용이 찢겨져나간 상태이다.
‘선사지기’가 찍혀 있는 면의 아래쪽에는 이 책을 소장했던 사람과 관계된 인문이 몇 개 더 찍혀 있는데,
그 중에 ‘김부의씨(金富儀氏)’라는 인문이 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이 책이 왕으로부터 하사된 것이고 김부의라는 사람이 소장했었다는 사실이다.
그럼 이 책은 언제 간행되었을까?
이것을 추정할 수 있는 단서가 몇 가지 있다.
바로 이 책이 조선시대 금속활자의 하나인 을해자(乙亥字)로 간인되었고
이 책과 동일한 판본으로 추정되는 것이 일본의 봉좌문고에 소장되어 있으며,
이 책의 소장자가 바로 예안에 세거한 광산김씨 김부의(1525-1582)라는 사실이다.
을해자는 1455년(세조 원년)에 처음 주조되었고,
기존 연구에 의하면 을해자로 간인된 책은
주로 을해자가 주조된 초기부터 임진왜란 발발 사이에 분포하고 있다.
그리고 일본 봉좌문고에 소장중인 <두씨통전>에는
‘1560년(명종 15)에 사간원 헌납 이령(李翎)에게 두씨통전을 내린다’는 기록이 적혀 있다.
또한 김부의는 1555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는데
마침 모친상을 당하여 삼년상을 마친 뒤 성균관에 입학하였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따라서 이 <두씨통전> 또한 1560년 무렵에 간인되어 하사된 것일 가능성이 크다.
- 조태억이 지은 발문(跋文)과 김부의(金富儀) 소장印
옛 책에는 대개 서문(序文)과 발문(跋文)이 붙어 있다.
이 책에도 서문과 발문이 있는데, 서문은 중국 당나라 때의 이한(李翰)이 지은 것이고,
발문은 조선의 조태억(趙泰億, 1675-1728)이 1722년에 지은 것이다.
이 발문은 인쇄된 형태와 작성 시기를 고려할 때 후대에 추가된 것으로 보인다.
조태억이 지은 발문에는 이 책과 관련된 일화가 담겨 있다.
조태억은 최근 모방송사에서 방영중인 사극에서 세종과 대립하고 있는 대표적인 인물인
조말생(趙末生, 1370-1447)의 후손으로서 영조 재위시기에 벼슬이 좌의정에까지 오른 사람이다.
이 발문에는 조태억의 10대조 조말생과 관계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 두씨통전 1부 75책은 나의 10대조이신 문강공께서 태종조에 하사받은 책이다.
그 1권의 표지 안쪽에 ‘영락 5년(1407) 4월 모일에 직제학 조말생에게 두씨통전 1부를 하사한다.
사례는 생략하라. 우부승선 신 이(서명)’이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고,
‘선사지기’라는 네 글자 전서체 인문이 또렷이 찍혀 있다.
……
영락 정해년(1407)부터 지금까지 320여 년 사이에 집안 대대로 전해오던 옛 진적들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고 오직 이 책만 남아있는데,
이 책도 처음에 우리 집안의 외손 중 영남에 사는 광산김씨 부의(富儀)가 소장하여
여러 번의 병란을 겪으면서도 누대에 거쳐 보전하여 잃어버리지 않았으나
우리 집안의 자손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경자년(1720) 겨울에 내가 경상도관찰사가 되어서야 이 사실을 듣고는
마침내 예안현으로 가서 김공의 후손인 대(岱)에게서 이 책을 얻게 되었다.
……
무릇 나의 자손들은 세세토록 이 책을 보배처럼 잘 간직하여
감히 더럽혀지고 훼손되거나 잃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여
내가 공경하고 소중히 여기며 지키고 아낀 마음을 져버리지 말지니라.
조태억은 자신의 집안에서 조상의 손때가 묻은 책들을 잘 간수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늘 마음 한 켠에 안타깝고 죄스러운 마음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침 경상도관찰사의 직임을 명받아 공무를 수행하던 중
10대조 조말생이 왕으로부터 받은 책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었고,
그 책을 찾아 직접 책장을 넘겨보면서 할아버지의 이름을 확인하고
그동안 이 책이 어떻게 보전되어 왔는지를 알게 되면서 그 감동과 소회를 위와 같이 밝힌 것이다.
조상의 손때가 묻은 책을 ‘수택본(手澤本)’이라고 부른다.
책에 조상님의 손 기운, 손때가 여전히 남아있다는 의미이다.
오늘날도 여전히 조상들의 손때가 묻은 책을 애지중지 잘 간수하고 있는 후손들을 볼 수 있다.
옛사람의 당부가 새삼 절실하게 느껴진다.
- 박성호, 서울역사박물관 유물관리과 고전적 담당
- SEMU, 제 19호, 2008년 가을, 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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