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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릉(고종황제와 명성황후 왕릉)과 능지기

Gijuzzang Dream 2008. 10. 8. 20:53

 

 

홍릉(洪陵)과 능지기

 

 

홍릉(洪陵) 능지기이야기에 앞서 우선 홍릉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홍릉(洪陵)은 조선 제26대 왕 고종과 고종비 명성황후(明成皇后) 민씨(閔氏)의 능입니다.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위치한 홍릉은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207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같은 능역에 있는 고종의 아들 순종과 순종비의 유릉(裕陵)과 동일사적으로 지정되었습니다.

 

명성황후는 1897년 서울특별시 청량리 홍릉에 묻혔다가

1919년 고종이 죽자 지금의 자리로 천장하였습니다.

능제는 종래의 제도와 달리 특이하게 명나라 태조의 효릉(孝陵)을 본떴다고 합니다.

역대 조선의 왕릉과는 그 모습이나 형식이 많이 다른 것은

고종이 1897년에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 연호를 광무(光武)로 고치면서

왕을 황제(皇帝)로 격상시켰기 때문에 능도 명나라 태조의 효릉을 본떠서 만들었습니다.

즉 고종의 능은 왕릉이 아니라 황제의 능인 것입니다.

즉, 종래의 정자각(丁字閣) 대신 정면 5칸, 측면 4칸의 침전(寢殿)을 세웠고

그 앞 양쪽으로 문무석(文武石)을 세웠으며, 이어 홍살문까지

기린 · 코끼리 · 해태 · 사자 · 낙타 · 말의 순서로 석수(石獸)를 세워놓았습니다.

 

조선시대의 능에는 여러 가지 석물들이 세워집니다.

석물들은 사대부 묘와 능이 다를뿐더러

황릉과도 엄격히 차이가 있습니다.

즉, 왕릉에는 문인석, 무인석, 말, 사자, 양들과 같은 석물이 봉분을 중심으로 세워지는데 이와는 달리 황릉은 신도라 하여 무덤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봉분이 있는 언덕까지 긴 길을 두고, 이 길 양 옆으로 말, 호랑이, 낙타, 기린 등 여러 가지 석물을 세우게 됩니다.

이와 같이 홍릉과 다른 능이 다른 점은 석물의 조성 기법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전까지의 석물들은 조선의 전통 기법으로 지어져 그 양식이 낯설지가 않으나,

홍릉의 석물들은 서양의 기법을 도입하여 만들어져

서양의 조각품들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다음은 대한제국의 황제였던 고종황제의 능인 홍릉에 대한

조성 내역, 능지기 등에 대한 이야기를 몇 자 적어 볼까 합니다.

온 나라가 독립만세로 뒤숭숭한 속에서 고종의 장례는 1919년 3월 3일에 치러졌습니다.

그러나 장례식에 참석한 우리나라 사람은 70여 명에 불과했고

송병준, 이완용 등 친일파 관리들이 대부분이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장례식을 일본식으로 치르고 복장도 일본 고대의 상복차림을 하도록 강요했기 때문에

종친들이 많이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고종의 장례는 10일제, 20일제, 50일제 등으로 순차적으로 진행하여 갔지만

그 때마다 순종을 비롯한 종친들은 몸이 불편하다는 등 바쁜 일이 생겼다는 핑계로

장례식장에 참석하기를 꺼렸다고 합니다.

이럴 때마다 곤란해진 이왕직 직원들은 온갖 수단을 다하여

억지로 장례식장에 왕과 종친들을 모셨다고 합니다.

이런 순종의 행동은 모두 일본식 장례에 대한 반발에서 나온 것입니다.

 

인산 날에는 순종과 영친왕, 의친왕 등은 소의마관(素衣麻冠)을 입고 참석하였습니다.

한산했던 빈전과는 달리 장례 행렬이 금곡리에 이르렀을 때

길가에는 수만 명의 민중들이 나와 통곡을 했으며,

밤이 되자 지나가는 마을마다 불을 밝혀 고종의 마지막 가는 길을 애통해 했다고 합니다.

또한, 능이 마련된 금곡리에는 1만 5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매우 혼잡했다고 합니다.

 

에서 살펴보았듯이 고종의 생존 시에 마련된 이 능은 명조시대 때의 왕릉을 본떠 만든 것으로 고영희라는 사람이 직접 중국까지 갔다와서 조성한 능이라고 합니다.

호화로운 능도 능이지만 동대문 밖에서 금곡리에 이르는 약 60 리의 도로를 4간 폭의 넓은 길로 만들었으며, 길가에는 버드나무를 심어 풍치있게 조성하였습니다.

 

고종은 생전에 이 금곡능의 도면을 어실에 넣어 두고

틈만 있으면 꺼내 상궁들과 시종들에게 보이며 어린 아이처럼 즐거워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고종의 마지막 유언을 무시한 채 윤덕영이라는 신하는

금곡은 장례경비가 많이 든다는 이유로 명성왕후가 묻힌 홍릉에 합분 하자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능은 이미 조성되어 있었고『유언을 존중하는 것이 죽은 사람에 대한 최대의 예』라는

의견이 맞서 금곡릉에 모시기로 결정이 되었습니다.

윤덕영이 주장한 이면에는 고종이 이미 왕위를 내놓았으므로

능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없다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명성왕후가 묻힌 홍릉에 먼저 합분을 한 다음 적당한 시기에 금곡리로 옮겨

능명도 함께 붙이자는 것이었습니다.

윤덕영의 주장은 무시되고 고종은 금곡리에 묻히기는 했지만 능명은 붙여지지 않았고

‘대한고종황제홍릉’ 이라고 새긴 능비는

가마니에 둘둘 쌓여 그대로 비각 속에 처박혀 있었습니다.

 

이 능비가 세워 진 것은 4년 뒤

경기도 장연(長淵) 군수로 있던 고영근 이라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의 노력 덕분이었습니다.

고영근은 고종을 위한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던 충신으로

명성황후의 살해에 가담했던 우범선을 암살하고 광도에서 옥고를 치른 사람이었습니다.

고영근은 고종이 금곡에 묻히자 능참봉을 자원, 능지기로 지내고 있었습니다.

고종을 안장한 후 ‘대한고종대황제홍릉(大韓高宗大皇帝洪陵)’ 이라 새겨진 능비를 세우려 하자

조선총독부에서는 세울 수 없다는 통고를 하면서

비문 앞에 “전(前)”을 더 새겨 넣는다면 좋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안에는 근친들이 반대를 해 결국 4년이나 끌게 되었던 것입니다.

고영근은 4년 동안 아침저녁으로 거적에 쌓인 능비를 바라보다

일단 세워놓고 보자는 생각에 인부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고영근은 몹시 추운 날 야음을 틈타 목욕재계를 한 다음 능비를 세웠습니다.

능비를 세우고 난 후 고영근은 선왕의 홍은(鴻恩)을 이제야 보답했다고 하면서

“순종폐하의 슬하에 죽어도 좋다”는 내용의 상소문을 들고

창덕궁으로 가서 돈화문 앞에 무릎을 꿇고 죄를 빌었습니다.

상소문을 받아 든 궁내부는 한참 술렁거리더니 비석을 그대로 두고

고영근을 참봉직에서 파면시키고

이왕직장관이었던 이재극도 자리를 내놓는 것으로 사건은 일단락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순종은 벙긋이 웃었다고 합니다.

허울뿐인 식민지 치하의 황제로써 아버지의 능비도 마음대로 세우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자조석인 웃음이었을 것입니다.

고영근은 홍릉밖에 초가집을 짓고 살다가 이듬해 죽어 고종의 능 인근에 묻혔다고 합니다.

- 문화재청 궁능관리과 정종익

- 2008-10-07, 문화재청, 문화유산e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