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글(어제)이 있는 그림
신하들에게 ‘어제가 있는 그림’은 그것을 쓴 왕, 그들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왕을 떠올리게 한다.
자신들에게 내려진 어제를 받들면서 그들은 왕을 기억한다.
궁중의 행사를 기념하기 위해 그린 궁중기록화는
어제를 통해 기억되는 왕의 모습을 살펴보는 데 매우 좋은 예가 된다.
궁중에서 각종 의례가 치러지고 연회가 베풀어지면
수시로 신하들에게 선온(宣醞)하거나 술자리를 갖는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왕이 축시를 짓는 일은 빠질 수 없었으므로 어제 시가 많이 전한다.
이 시들은 행사가 끝난 후 제작되는 기념화첩이나 병풍 등에 수록되었다.
8. 기사계첩(耆社契帖)
- 숙종어제(1719년, 숙종 45)
숙종은 1719년(숙종 45) 승하하기 한 해 전인 59세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숙종은 군신 간의 의리를 존중하였던 태조의 뜻을 기리고 그 행적을 되살리고자 기로소에 들었다.
숙종이 기로소에 든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신하들에게 큰 영광일 뿐만 아니라,
창업주 태조 이래로 처음 맞는 경사였다.
기로신(耆老臣)들에게 사연(賜宴)을 베풀었고 기로신들은 관례에 따라 이 경사를 기념하기 위해
숙종의 기로소 입소 기념 계첩을 만들었으니 <기사계첩(耆社契帖)>이다.
<기사계첩>은 이듬해인 1720년에 완성되었지만 숙종은 계첩이 완성되기 전에 승하하였다.
숙종 승하 후 비 인원왕후는 기로신에게 사연을 베풀던 날 숙종이 지었던 어제시를 내렸다.
기로신들은 마침 제작중이던 계첩에 숙종의 어제시를 수록하였다.
<기사계첩>에는 붉은 바탕에 정서한 수종의 어제시와 시를 받게 된 경위를 적은 글이 수록되어 있다.
지금 숙종대왕께서 세상을 떠난 후에 인원왕후께서 선대왕이 지은 시를 조정에 보냈는데
그 가운데 위의 시가 들어 있었다. 臣등이 삼가 읽으니 슬픔이 북받친다.
마침내 판목에 새기어 기로소 벽 위에 걸어두고 항상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아둔다.
이 글에는 계첩이 완성되기 전에 세상을 뜬 군왕에 대한 기억이 솔직하게 담겨 있다.
어제(御製)의 수록은 그 기억을 보존하는 것이자 군왕에 대한 경모(敬慕)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선대왕의 유품을 갈무리하는 중에 우연히 얻어진 어제를 수록한 것으로
기로소 사연(賜宴)을 기념하는 계첩의 본래 구성에는 없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계첩에 실린 축시(祝詩)의 내용에서도 짐작된다.
축시는 모두 기로신의 시로 어첩을 봉안한 날과
다음날 왕에게 축하의 글을 올리는 진하전(進賀箋) 때 지은 시, 기로연(耆老宴)에서 지은 시이다.
이 시들은 어제와 무관하게 기로신 가운데 몇 사람,
예를 들면 김창집, 홍만조, 임방의 시를 차운하여 지은 것이다.
만약 왕의 시가 있었는데도 신하들이 어제에 차운하지 않았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앞서 보았듯이 신하들은 숙종 어제시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다.
왕이 승하한 후 기로소에 내려진 숙종의 어제는 그래서 더욱 뜻깊고 애틋했던 것이다.
기로신은 어제를 현판에 걸어두고 왕에 대한 기억을 보존했다. 또한 계첩에 실어 기념하였던 것이다.
<기사계첩>
肅宗大王御製 (숙종대왕 어제)
親臨景賢堂耆老諸臣錫宴一作
경현당에 친히 왕림하여 기로소 여러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푼 날에 지음
不覺吾年及六旬 어느덧 내 나이 육십이 되어
親參耆社舊章遵 기로소에 직접 참가하여 전해져오는 옛 제도를 따른다.
强痾陞殿群官集 아픈 몸을 이끌고 전각에 오르니 많은 신하들이 모여 있고
作樂行醦十老臻 음악을 연주하며 술잔을 돌리니 열 명 원로신하들이 온다.
鐫字金杯光似玉 금 술잔에 글자를 새기니 玉처럼 빛이 나고
揷花烏帽髮如銀 오사모(烏紗帽)에 꽃을 꽂으니 귀밑머리는 銀처럼 하얗다.
斯筵本出尊高意 이 연회는 본래 나이든 사람을 존경하는 뜻에서 나왔으니
滿酌何妨到手頻 가득한 잔에 손길이 자주 간들 무슨 상관이 있으랴?
恭惟我先代王於去年己亥, 遵太祖大王故事, 入耆老所,
以四月十八日燕耆老諸臣於慶德宮之景賢堂,
特賜銀杯, 以寵之,
及今仙馭上賓之後, 慈聖命下先代王御製于朝,
其中有此一律 臣等奉讀悲咽,
逐敢以繡板, 揭諸耆社壁上, 以寓弓劍之慟.
선대왕께서 과거 기해년에 태조대왕의 고사를 준수하여 기로소에 들어갔다.
4월18일에 경덕궁의 경현당에서 기로소 신하들에게 연회를 마련해주고,
은술잔을 특별히 하사하여 총애하는 마음을 나타내었다.
지금 숙종대왕께서 세상을 떠난 후에 인원왕후께서 선대왕이 지은 시를 조정에 보냈는데
그 가운데 위의 시가 들어있다. 臣 등이 삼가 읽으니 슬픔이 북받친다.
마침내 판목에 새기어 기로소 벽 위에 걸어두고, 항상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아둔다.
- 기사계첩(보물 929호)
조선 1719-1720년(숙종 45-46), 김진여 등, 비단에 먹과 색, 35×52㎝/ 송성문 기증
숙종이 59세로 기로소에 들어간 경사를 기념하기 위해 제작한 화첩이다.
숙종의 어제와 함께 당시 열렸던 중요한 행사 장면을 그린 그림 5점,
기로신들의 축시와 초상화 등으로 꾸며져 있다.
- 어첩봉안도
숙종이 기로소에 드는 것은 창업주 태조 이래로 처음 맞는 경사였다.
기로소 입소는 태조와 숙종의 이름을 쓴 어첩(御帖)을 기로소에 봉안함으로써 이루어졌다.
그러나 숙종은 안질과 환후가 중하여 친필로 이름을 쓰지 못했고,
왕세자(후에 경종)가 대신 제명(題名)하였다.
기로신들은 이 어첩을 어가(御駕)에 모시고 가서 기로소에 봉안하였다.
<어첩봉안도>는 이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화첩 왼쪽 중앙에 어첩을 모신 가마가 보인다.
- 계첩 마지막 면에 실린 실무자 명단(왼쪽 : 기사계첩 / 오른쪽 : 기사경회첩)
계첩의 마지막 장에는 화첩 제작에 참여한 서사관과 화원 등 실무자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다.
실무자 명단 가운데 화원 장득만은 <기사계첩>과 <기사경회첩>에도 이름이 올라 있다.
▲ <기사계첩>과 <기사경회첩>의 구성
순서 |
<기사계첩> - 숙종의 기로소 입소 기념 |
<기사경회첩> - 영조의 기로소 입소 기념 |
序 |
임방(任埅)의 계첩 서문 |
영조 어첩 자서(自敍) |
어제 어필 |
▪ 경현당 석연(錫宴) 때의 숙종어제 |
▪ 입기사일작 영조 어제어필 ▪ 어제에 차운한 기로신의 시 ▪ 경현당 선온(宣醞) 때의 영조어제 ▪ 어제에 이어 지은 기로신의 연구(聯句) |
본문 |
▪ 어첩 발문 - 민진후 |
|
▪ 각 행사에 참석한 기로신의 명단 ▪ 행사도 5점 (어첩봉안도, 숭정전진하전도, 경현당석연도, 봉배귀사도, 기사사연도) ▪ 좌목 ▪ 기로신 초상화 |
▪ 좌목 ▪ 행사도 5점 (영수각친림도, 숭정전진하전도, 경현당선온도, 사악선귀사도, 본소사연도) ▪ 기로신 초상화 ▪ 각 행사에 참석한 기로신의 명단 | |
▪ 기로신의 자필 축시 |
▪ 이성룡의 발문 | |
마지막장 |
실무자명단 |
실무자명단 |
9. 기사경회첩(耆社慶會帖) - 영조 어제 어필
영조의 기로소 입소를 기념한 <기사경회첩> 전체의 구성은
기본적으로 숙종 때의 <기사계첩> 체제를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행사의 주요장면을 그린 5장의 그림과 기로신의 초상화를 수록한 것이 그렇다.
어첩의 서문과 어제, 기로신들의 축시, 기로소 입소의 경위를 상세히 적은 발문 등
계첩의 수록내용도 거의 같고, 형식과 장황도 <기사계첩>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기사계첩>의 체제를 거의 이어받아 제작한 것은
기로소 행사의 전통과 관습을 존중하는 차원이기도 했지만
영조에게는 부왕 숙종의 행적을 뒤잇는다는 면에서 더욱 의미있는 것이기도 했다.
<기사경회첩>에 실린 그림과 글의 내용은 구체적인 행사 진행에 약간의 차이가 있었던 만큼
<기사계첩>과 달라진 점이 있다.
숙종은 환후로 인해 어첩에 직접 제명(題名)하지 못하였고
어첩을 보관하는 장소인 영수각(靈壽閣)에도 친림하지 않았기 때문에
왕세자가 대신 제명한 어첩을 받들고 기로소로 향하는 행렬 장면인 ‘어첩봉안도’가 그려졌다.
그러나 <기사경회첩>에는
영조가 영수각에 친림하여 어첩에 제명하고 봉안하는 장면인 ‘영수각친림도’를 실었다.
기로신들에게 베푼 잔치의 규모도 달라서 숙종은 석연(錫宴)을 베풀었지만
영조는 규모를 작게 하여 경현당에서 선온(宣醞)하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이에 따라 이 장면을 그린 두 그림
‘경현당석연도(景賢堂錫宴圖)’와 ‘경현당선온도(景賢堂宣醞圖)’에도 차이가 있다.
<기사계첩>과 <기사경회첩>의 본질적인 차이는 역시 어제에 있다.
<기사경회첩>에 실린 어제는 모두 3편이다.
‘승정원일기’ 영조 22년(1746) 6월 2일(을미)조에 의하면, 영조는 화본(畵本)을 3층으로 정하여
상층에는 어제를, 중층에는 ‘주자어류(朱子語類)’의 본문을, 하층에는 그림을 그리라고 지시하였다.
첫 번째는 영조가 지은 어첩자서(御帖自敍)이다.
두 번째는 기사에 든 날 짓고 써 준 어제어필(御製御筆) 시(詩)이다.
기로신들은 모두 이 시의 운(韻)에 맞추어 축시(祝詩)를 지었다.
세 번째는 경현당에서 선온할 때 지은 시이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신하들은 영조의 명에 따라 연구(聯句)를 지어 갱진(賡進)하였다.
계첩의 첫 장에 수록된 ‘어첩자서’는 어첩을 봉안한 다음날 지어 장황한 후
영수각의 어첩 함 안에 보관토록 하교한 것이었다.
이 글에는 자신이 태조와 숙종의 행적을 뒤이어 기로소에 들었고,
그 깊은 뜻을 새겨 후왕(後王)에게 권면한다는 영조의 마음이 담겨 있다.
선왕(先王)의 행적을 이어 후손에 훈유(訓諭)하는 것,
이것은 영조가 지속적으로 추구했던 통치의 한 방법으로, 어제어필 시의 내용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기사경회첩>의 어제는
영조의 통치이념을 상징함과 동시에 영조의 통치행위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 영조의 어첩자서(御帖自敍)
御帖自敍
同月十二日, 傳曰,
自序後乃置如何.
今日禮房承旨, 奉以函袱, 安於耆英館.
十三日, 粧䌙, 奉安于靈壽閣御帖函內.
같은달 12월에 전교를 내리기를,
“자서 후에 그대로 두면 어찌하겠는가?
오늘 예방승지가 함을 가지고 와 기영관에 안치하였다.
13일에 장황하여 영수각의 어첩 안에 모셔두었다.
夫耆英之會. 自唐之香山, 宋之洛社始, 而此皆縉神大夫尙齒會也.
入我朝聖祖開國三年甲戌, 親入耆社.
命文臣正二品以上同參居九五之位, 與臣僚尙齒. 自國初始, 猗歟盛哉.
기영회는 唐의 백거이(白居易)가 주도한 향산구로회(香山九老會)와
宋의 사마광(司馬光)이 이끈 낙사회(洛社會)에서 시작되었지만
이것들은 모두 진산대부들의 상치회(尙齒會)이다.
우리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태조가 개국하고 3년이 지난 갑술에 기사에 직접 들어갔다.
문신 정2품 이상에게 명을 내려 구오지위(九五之位)와 동참하라고 하였으며
신하와 더불어 나이가 든 사람을 존경하였다. 국초부터 시작이 되었으니 아름답고도 성대하다.
逮于三百餘年己亥仲春, 我聖考追踵故事, 逐入耆社.
書御帖而奉安靈壽閣. 仍命詞臣, 題跋帖下.
由是以後, 聖祖昔年之盛事,
聖考繼述之考思. 燦然詳備于耆社矣.
300여 년이 지난 기해년 봄에 우리 성고(聖考)께서 옛일을 답습하고자
마침내 기사에 들어가 어첩을 쓰시고 영수각에 모셔두었다.
그리고는 글 잘짓는 신하에게 명령을 내리어서 첩(帖) 아래에 발문을 쓰도록 하였다.
이때부터 태조께서 행하신 지난날의 성대하신 행사,
숙종께서 전대의 업적을 계승한 효성스런 생각이 환하게 빛을 내며 기사(耆社)에 구비되었다.
嗚呼, 小子受付托之重. 承列朝之業, 臨御幾三紀, 春秋踰五旬,
而德弗及於先烈, 澤末究於下民,
心常歉恧. 若隕淵谷,
因宗臣之陳章, 大臣諸臣. 繼以請焉,
所引香洛望六之說, 俱有例之可據.
此非過自謙, 抑勉循其請, 禮已成焉.
오호, 나는 나라를 이어받고 역대 왕들의 업적을 계승하여 왕위에 오른 지도 거의 30년,
나이가 50이 넘었다.
그러나 덕행은 선대왕들의 업적에 미치지 못하고, 은택도 백성들에게 널리 퍼지지 못하였다.
마음으로 항상 부끄럽게 여김이 깊은 못과 계곡에 떨어지는 듯하다.
종신들이 글을 올리고 대신 이하 여러 신하들이 계속 요청하였다.
항상 구로회와 낙양기영회에서는 60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다는 설을 인용하여,
모두 예증으로 삼을만한 근거가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과도한 겸양이 아니라 그들의 요청에 따른 것이요, 예법도 이미 성립되어 있다.
噫, 以小子之備經往歲, 豈意有今日,
而何幸躬追舊典, 拜閣書帖,
開寶匣而涕被, 受几杖而興感,
大臣諸臣請以續撰跋文. 而事近繁文, 其令置之.
而回闕半夜, 追慕一倍, 弗可弗略敍其事. 以寓此懷,
아, 나는 과거에 많은 일을 경헙하기는 하였지만
오늘같은 일이 있을 줄을 어찌 생각이나 했겠는가?
다행히도 예로부터 내려오는 훌륭한 일을 직접 뒤이어 실행하면서
영수각에 남아 있는 서첩에 경의를 표시한다.
역대 왕들의 글씨가 담겨 있는 보배로운 상자를 여니 눈물이 흐르고, 궤장을 받으니 감회가 인다.
대신들은 발문을 계속해서 지으라고 요청한다.
그렇지만 일만 번거롭게 만들므로 내버려두라고 하였다.
한밤중에 대궐을 둘러보니 추모하는 마음이 갑절이나 된다.
그 사실을 서술하여 나의 마음을 붙여두지 않을 수 없다.
嗚呼, 此實我陟降之垂佑也.
受祖宗之陰隲, 忽愛恤乎蒼生,
奚特下孤小民, 上負陟降矣,
凜然于心, 興慨于此. 益自勉焉.
而尤有所愴感者,
오호, 이것은 참으로 우리 조상들의 영혼이 도움을 내리신 것이다.
역대 왕들의 말없는 도움을 받았으니 우리 백성들을 사랑함을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어찌 아래로는 백성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위로는 조상들이 거는 바램을 어길 수 있겠는가?
마음에 두려움이 일어나고 감회가 생기니 열심히 더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더욱 더 안타까운 감회가 있다.
噫, 昔年書帖之時, 同侍便殿若昨日,
而倏忽光陰, 今已二十有六年矣,
于今此擧, 實予恒日之至願, 雖欲告幸, 遙望雲邈,
此正曾子所謂, 誰爲孝誰爲弟之歎者也.
아, 옛적 서첩을 만들 때에 편전에서 함께 입사한 것이 어제 같다.
그런데 세월이 훌쩍 흘러 어느덧 26년이 되었다.
지금의 이 행사는 실로 내가 항상 하고 싶었던 지극한 소원이다.
다행이라고 말해야 할까, 아득한 구름을 바라본다.
이것이 바로 증자(曾子)가 말한 소위 효도를 하고 싶어도 누구를 위해 효도하고
우애 있게 지내고 싶어도 누구를 위해 우애를 한다고 탄식한 것이다.
感幸交集, 因此而予有訓者. 何則,
予之至于今日. 固是陟降之垂佑,
감사와 행운이 함께 모여 이 때문에 내가 해야 할 훈계가 있다. 무엇 때문인가?
내가 오늘까지 오게 된 것은 참으로 조상들의 영혼이 도움을 내리신 것이다.
而亦有三焉.
其一, 雖居此位, 心則無異在邸.
其一, 其雖凉乎學問. 體先賢循欲之戒,
其一, 雖在厦氈玉食之中, 自奉其猶澹然故也.
그렇지만 역시 나에게도 세 가지 장점이 있다.
하나, 왕위에 있기는 하지만 마음은 왕자시절과 다를 바 없다.
하나, 학문이 약하기는 하지만 욕심을 쫓으면 괴롭다는 선현들의 훈계를 체득하였다.
하나, 궁궐에서 맛있는 음식 속에 파묻혀 있기는 하지만 스스로는 오히려 담담하게 생활한다.
噫, 後嗣君若欲追遵乎故事. 舍此心, 奚先,
噫, 此非夸大之文.
一則述懷, 一則勉後, 他日歸奏, 無愧乎心,
躬寫其文, 愴懷冞切, 日後展覽, 豈不惕然乎哉.
아, 미래의 임금들이 고사를 추구해서 실천하고 싶다면
이런 마음가짐을 버린다면 무엇을 우선해야 할 것인가?
아, 이것은 과장하는 글이 아니다.
한편으로는 마음속에 품고 있는 생각을 말함이요,
한편으로는 후대의 왕들이 노력하도록 권면(勸勉)함이다.
훗날 다시 말하더라도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다.
내가 몸소 문장에 이런 생각을 쓰니 아픈 마음이 더욱 절실하다.
앞으로도 이 글을 펼쳐본다면 어찌 조심스런 생각이 들지 않겠는가?
時皇朝崇禎紀元後再甲子重九入耆社越三日丙戌謹書.
황명 숭정기원후 두 번째 갑자년인 1744년 9월9일에 기사에 들어가고,
3일 뒤인 12일에 삼가 쓰다.
기로소 입소 후에도 영조는 30년을 더 살았다.
그동안 어첩이 봉안된 기로소의 영수각을 찾은 것만 해도 십여 차례나 이른다.
영수각은 원로 중신을 예우하는 기로소를 넘어서
영조가 잇고 있는 왕통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
<영수각친림도(靈壽閣親臨圖)>는 다른 그림에 비해 유달리 화려하고 장중하다.
왼쪽면의 기영관(耆英館)은 왕의 임어를 상징하는 겹겹의 장막과 오봉병으로 위엄 있게 표현되었다.
영수각 내 어첩을 보관하는 벽상(壁上)의 감실(監室)은 푸른 장막으로 특별한 공간임을 강조하였다.
주변의 수목은 무성하여 왕의 은덕을 상징하는 듯하다.
<기사경회첩(耆社慶會帖)> 중 <영수각친림도(靈壽閣親臨圖)>
1744-1745년, 장득만 외, 비단에 색, 43.5×67.8㎝,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영수각은 숙종이 기로소에 들 때, 왕이 직접 이름을 쓴 ‘어첩(御帖)’을 보관하기 위해
기로소 옆에 새로 지은 전각이다. 환후로 거둥하지 못한 숙종과 달리 영조는 기로소에 들면서
영수각에 친림하여 어첩에 제명(題名)하였다. ‘영수각친림도’는 이 장면을 나타낸 그림이다.
왕의 임어(臨御)를 상징하는 오봉병과
이름을 쓰기 위해 준비한 서안(書案)을 그려 왕의 존재를 표현하였다.
이 그림은 1765년(영조 41) 영조가 세손과 함께 영수각을 찾아 전배한 일을 기념한
<영수각송(靈壽閣頌)> 등 영수각 친림행사를 그린 그림의 모델이 되었다.
<기영각시첩(耆英閣詩帖)> ‘영수각송(靈壽閣頌)’ / 화첩, 비단에 색,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영수각친림도>를 비롯하여 <기사경회첩>의 제작에 대해
영조가 구체적인 지침을 내렸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4년후 어제를 내리면서 그리게 한 그림 <장주묘암도(漳洲茆菴圖)>는
영조 자신이 직접 의장을 지시하였다. 15년후 제작된 <준천계첩>은 영조의 명에 의해
어람을 위한 내입본(內入本)이 제작되었고 계첩의 내용과 형식이 정해졌다.
<기사경회첩>을 만들 때에 영조는 어떤 지시와 관여도 하지 않았던 것일까?
영조는 51세가 되던 해에 ‘망육(望六)’이라는 의미에서 기로소 입소를 단행하였다.
그러나 처음에 신하들은 숙종이 입소하였던 59세와 비교할 때 다소 이르다는 견해를 보이며 반대했다.
이에 영조는 심기가 상한 채 신하들을 종용하여 기로소 입소를 성사시켰다.
영조가 기로소 입소를 추진한 과정과 <기사경회첩>의 어제에 담긴 뜻을 살펴보면
이미 그 안에 영조의 의도가 내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요컨대 <기사계첩>이 순수한 의미의 기로소행사 기념화첩이었다면,
<기사경회첩>은 군왕 영조를 위해 만든 영조의 화첩이라고 할 만하다.
- 영조의 어제어필
御製御筆
入耆社日作
기사에 들어간 날에 짓다.
列聖仁兮普八方
國有主鬯兮固我邦
一心調劑兮垂元良
역대 왕들의 어지신 사랑이 온 나라에 퍼지고
나라에 주창(主鬯)이 있어 우리나라를 견고하게 하니
한 마음으로 적절히 조화를 시켜 세자에게 남긴다.
倣大風歌秋風辭而作, 是衛武抑戒之意
한고조 유방(劉邦)의 ‘대풍가(大風歌)’와 한무제의 ‘추풍사(秋風辭)’를 모방하여 짓다.
이것은 위무공(衛武公)이 ‘억(抑)’을 지어 항상 자신을 반성하고 타이른 뜻과 같다.
- 영조의 어제
景賢堂耆老諸臣宣醞時御製, 命諸臣聯句
경현당에서 기로소 여러 신하들에게 술을 하사할 때 직접 시를 짓고,
여러 신하들에게 명을 내려 나머지 두 구절을 짓도록 하였다.
故事追行卄六年
今何幸耆英筵
숙종의 옛일을 26년이 지난 지금 따르고
오늘 기영연(耆英筵)을 여니 어찌 다행이 아닌가?
*** 영조와 기록화
그림에 대한 독특한 취향을 바탕으로 숙종은 그림과 어제를 통해 국왕에 대한 충성심을 유도하고 국왕의 권위를 높이는 데 회화의 기능을 이용하였다. 이는 영조에 이르러서 계승되었는데 영조가 그림과 어제를 활용한 방식은 숙종의 경우와는 다른 점이 있다.
숙종은 자신의 취향이 반영된 감상화에 어제를 써서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 보였다. 이에 비해 영조는 자신이 구상하고 적극 추진한 사업을 주제로 기념그림을 그리게 하고, 자신의 생각을 담은 시를 함께 실은 화첩이나 병풍을 만들도록 하여 후세에 전하고자 하였다.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 작품이 <준천계첩> <영조신장연화시도병, 서울대박물관 소장> <근정전정시시도,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경현당수작도병> 등 영조 연간에 제작된 계첩(契帖)과 계병(契屛)들이다.
<준천계첩>의 발문에 의하면 영조는 개천의 준천 행사가 끝난 뒤 계첩을 만들어 들이라는 지시를 직접 내렸다. 이전까지 계첩은 중요한 국가행사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기념의미로 제작하여 한 부씩 나누어가졌던 것으로 관료들 사이에 관습적으로 행해졌을 뿐이었다. 왕에게 보이기 위해 왕을 위하여 제작하던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는데, 이때에 이르러 왕인 영조의 특별한 지시에 따라 만들어진 계첩은 당연히 어람되었을 것이다.
또한 왕이 제작에 적극 관여함으로써, 왕의 행적 자체를 드러내거나 선왕의 자취를 보존하기 위한 행사, 세자와 세손과 함께 한 행사 등 왕실의 종통과 권위를 강조하는 행사로 주제가 확장되었다.
행사의 기념화로서 제작되던 그림을 자신의 통치를 선양하고 숭앙하도록 하는 장치로 활용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영조 연간에는 그 어느 때보다 다양한 주제의 계병과 계첩이 제작되었다. 또 계병과 계첩에는 영조가 행사 때 지은 어제와, 신하들이 차운하고 갱진(賡進)한 시를 수록하였다. 신하들은 어제에 화답하면서 왕의 치적을 칭송했으며 그 찬양은 길이 보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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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온궁영괴대도(溫宮靈槐臺圖) - 정조 어제
<온궁영괴대도> / 조선후기, 족자, 종이에 색, 126.6×58.0㎝
사도세자가 행차하여 활쏘기를 했던 온양행궁의 영괴대를 그린 그림이다.
영괴대는 당시 사도세자가 심은 회화나무가 울창하게 자라자 이를 기리기 위해
축대를 쌓고 붙인 이름이다. 이 소식을 들은 정조는 그 옆에 비석을 세워 기념하였다.
앞면 비석의 글씨는 정조가 직접 쓰고, 뒷면의 비명은 정조의 어제를 신하 윤행임이 썼다.
그림에는 영조의 어제 비명과 함께 윤행임의 일가에게 상을 내린 일이 기록되어 있다.
1795년(정조 19) 을묘년 4월 18일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 1735-1762)가 오래 전에 온양행궁(溫陽行宮)에 심은
세 그루의 회화나무가 무성하게 자라나 축대공사를 했다는 작은 보고를 받았다.
사도세자와 혜경궁의 탄신 주갑을 맞아 원행(園幸)을 구상하던 정조에게
아버지 사도세자의 행적과 관련된 이 소식이 무척 반갑게 들렸을 것이다.
더구나 그것은 영흥 본궁에 환조(桓祖)를 치제하는 일을 준비하면서
사도세자의 사당인 경모궁(景慕宮)에서 재숙(齋宿)하고 돌아온 날 들려왔다.
왕조실록의 기사는 정조의 감동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오늘이 무슨 날인가.
영흥의 본궁의 경사스러운 의식을 위하여 비궁(秘宮)에서 재숙하고 환궁한 날이다.
그런데 이날 이런 말을 들은 것 또한 무언가 맞아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
처창(悽愴)하고 감동되는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사도세자가 온천에 행행(行幸)한 것은 경진년인 1760년(영조 36)이었다.
사도세자는 온양행궁에서 활쏘기를 하고 사대(射臺)에 그늘이 없음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회화나무 세 그루를 가져와 심게 하였다.
그 나무가 30여 년이 지난 즈음에 아름드리나무가 되어 그늘이 무성해졌던 것이다.
정조는 곧바로 사도세자의 옛 행적과 관련된 사람들이 누구였는지 찾아서 보고하게 하고
이 사실을 기록한 비석을 축대 옆에 쌓도록 하교하였다.
이 비석이 ‘영괴대비(靈槐臺碑)’이다.
정조는 비의 앞면 ‘靈槐臺’ 세 글자를 친히 쓰고, 뒷면에 새길 비명(碑銘)을 지었다.
이 비명은 당시 나무를 심었을 때의 군수 윤염(尹琰)의 아들 윤행임(尹行恁, 1762-1801)으로 하여금
쓰게 하였다. 윤행임은 정조 사후까지 정조의 통치이념을 가장 충실히 수행하고자 했던
측근 중의 측근으로 당시 규장각신으로 봉직하고 있었다.
정조에게 축대공사 보고를 한 이는 충청도관찰사 이형원(李亨元)이었다.
그가 축대공사를 마치고 지은 글 ‘영괴대기(靈槐臺記)’의 탑본과
<온양행궁도>를 장첩한 <영괴첩(靈槐帖)>이 현재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이 글에는 “세 그루 회화나무의 형상은 솥(鼎)의 형상이고, 한 그루에 2개씩 줄기 6개는 하늘의 본체이니
이 나무는 장헌세자(莊獻世子=사도세자)의 덕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중국 주나라 소공(召公)의 선정을 상징하는 팥배나무처럼
장헌세자의 자취와 덕이 깊이 전해지기를 기원하면서
‘영괴대’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흥미롭게도 그로부터 불과 5년 전인 1790년(정조 14) 이곳을 방문했던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시는 관찰사의 보고와는 사뭇 다른 정경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溫宮有莊獻手植槐一株當時命築壇以侯其陰歲久擁腫壇亦不見愴然有述
- ‘다산시문집’ 권 1. 정약용
정약용의 눈에 띈 것은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세자가 손수 심은 나무가
울퉁불퉁 오그라들고 잡초에 묻혀 아이들 놀이터가 되어버린 쓸쓸한 모습이었다.
정약용은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사도세자의 통한을 생각해낸 듯,
자신이 장차 임금에게 이를 아뢰어 천년토록 길이길이 나무를 드높일 것임을 노래하였다.
정약용이 정조에게 이를 아뢰지 않았더라도
정조는 이미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현창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다.
1795년 사도세자와 혜경궁의 탄신주갑을 맞이하여 준비한 원행(園幸)은 그 사업의 정점이었다.
영괴대와 관련된 보고가 정조에게 올라온 것은 이러한 현창사업을 배경으로 한다.
관찰사 이형원(李亨元)은 온양군수로부터 나무에 대한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된 후
축대공사를 벌이고 이를 보고함으로써 군왕의 사업에 부응하였던 것이다.
- <온양행궁도> 영괴첩(靈槐帖) / 조선후기, 화첩, 종이에 색, 40.5×51㎝, 서울대 규장각
<온궁영괴대도(溫宮靈槐臺圖)>는 영괴대와 그 주변 행궁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관아도 형식으로 그린 <영괴첩(靈槐帖)>의 ‘온양행궁도(溫陽行宮圖)’와 비교해 보면,
건물의 배치와 구조는 거의 같지만 영괴대비를 세우기 이전의 모습을 그린 ‘온양행궁도’에는
비각과 영괴대를 막은 담장이 그려져 있지 않다.
또 행궁의 서쪽에 있는 영괴대를 화면 중심부에 설정하였기 때문에
행궁의 동쪽 부분이 그려지지 않았다.
다만 온양행궁의 표식인 온천과 신정(神井)은 표현했는데,
이는 신정(神井)이 옛날 세조가 충청도 지역의 민심을 살펴보기 위해 행행(行幸)하여
이곳에 머물렀을 때 발견한 냉천(冷泉)이었기 때문이다.
선왕(先王)의 자취가 어려 있는 유적이었기 때문에
그 주변의 공간이 왜곡되어 비좁게 그려지더라도 그림에서 빠뜨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하단에는 ‘어제영괴대비명(御製靈槐臺碑銘)’이 적혀 있다.
어명으로 비 뒷면에 새길 글씨를 윤행임이 자신의 관직과 이름을 쓴 부분도 그대로 베껴 적었다.
이와 함께 윤행임과 부친 윤염, 윤염의 부친에게 상을 하사한 내역이 있다.
(병진년에 정조는 윤염에게 한 자급을 더하여 자헌대부로 삼고 이조판서를 추증하였다)
이로 미루어 보아 이 그림은 윤행임 일가에서 영괴대비 건립과 관련된 그림을 그리고
상전(賞典) 사실을 기록하여 보존하고자 제작한 것이라고 추정된다.
비명 아래에는 윤행임이 어명을 받아 글씨를 썼다고 되어 있지만
이는 비명을 그대로 옮겨 적은 것일 뿐 그의 친필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마지막 기록이 병진년(1796, 정조 20) 2월의 일인 것으로 보아 제작 시기는 이 무렵으로 생각된다.
- <경모궁도설> 궁원의(宮園儀) / 고려대 박물관
행궁을 그린 형식은
고려대학교 도서관 소장 <궁원의(宮園儀)>에 수록된 ‘경모궁도설(景慕宮圖說)’과 유사하다.
<궁원의>는 사도세자의 사당인 경모궁과 묘소인 영우원(永祐園)의 전장(典章)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책이므로 그의 행적이 실린 <온궁영괴대도>를 그릴 때
이러한 도설이 참고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겸재 정선(1676-1759)식의 미점(米點)과 수목으로 표현된 산의 모습도
18세기 말, 19세기 초의 화풍을 보여주고 있다.
신하에게 있어 왕에 대한 기억이란 각별한 것이다.
왕의 글이 새겨진 현액, 비석, 석각 등이 탑본되어 족자나 첩으로 꾸며지고
오래도록 보존되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특히 윤행임처럼 왕의 신임을 받은 신하라면 그 기억은 더더욱 각별할 것이다.
<온궁영괴대도>에는 영괴대를 그린 그림,
왕이 짓고 신하가 글씨를 쓴 비명, 신하에게 내렸던 왕의 은혜를 적은 글이 가지런하게 담겨져 있다.
윤행임 일가에게 이 그림은
신하를 믿고 아꼈던 왕을 더욱 깊이 기억할 수 있는 소중한 유품이 되었을 것이다.
왕의 글이 옮겨질 때는 왕에 대한 기억도 복제된다. <온궁영괴대도>의 어제 또한 그러하다.
그림을 보는 이들은 어제를 통해 신하에 대한 왕의 믿음과 아버지를 높이려는 정조의 행적을 동시에
기억할 것이다. <온궁영괴대도>가 누구에 의해, 어떤 맥락에서 제작되었는지를
정확히 알려주는 단서는 좀처럼 찾기 어렵지만
사도세자의 회화나무를 정성들여 그리고 어제를 수록하도록 한 주문자는 윤행임 일가에 내려진
정조의 은덕과 비운에 간 아버지 사도세자를 그리는 정조의 뜻이 오래도록 기억되기를 바랐을 것이다.
<온궁영괴대도> 정조의 어제
緬往蹟於溫水之涯兮
鬱乎童童而如華蓋者有三槐
溫湯之水混混而漑靈根兮
繚繞以高數尺之臺
窮獨愛此后皇之嘉種兮
其上蓋有五色雲
佳占本之百世兮
將以驗積慶之流於後來
온양에서 있었던 지난날이 일을 회상해 보니
아름다운 우산처럼 생긴 세 그루 회화나무가 울창하게 서 있다.
온천수의 물이 흘러흘러 그 신령스런 나무뿌리를 적셔주고
수 척 되는 사대(射臺)가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지신(地神)께서 심으신 나무를 내 유독 아끼는데
그 위에는 오색구름이 있다.
뿌리와 가지가 백세를 두고 아름답게 퍼지니
선행을 하면 경사가 후대까지 이어진다는 사실을 경험하겠다.
小子卽阼之二十年乙卯秋九月,
小子生朝前三日, 拜手敬銘,
昔歲庚辰八月, 幸溫宮,
命郡守尹琰, 植三槐於射臺.
今幾拱抱, 嘉陰垂地.
春初始聞於邑守, 增築識其蹟,
琰之者尹行恁, 今爲閣臣, 俾書碑陰
通政大夫禮曹參議奎章閣檢校直閣知製敎臣尹行恁敎謹書
내가 왕위에 오른 지 20년이 되는 을묘(1795년, 정조 19) 9월에
나의 생일을 사흘 앞두고 삼가 이 명을 쓴다.
옛날 경진(1760년, 영조 36) 8월에 온궁 행차길에
군수 윤염에게 회화나무 세 그루를 사대(射臺)에다 심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 나무가 지금은 거의 아름다리가 되었고 좋은 그늘이 땅을 덮고 있다.
금년 초봄에 그 고을 수령을 통해 이런 사실을 듣고 사대를 증축하고 그 자취를 기록하게 했다.
윤염의 아들 윤행임이 지금 규장각 신하이므로 그로 하여금 비의 음기(陰記)를 쓰게 했다.
乙卯九月十九日摛文院齋宿入侍,
以靈槐臺銘書下命大臣讀奏敎曰,
玆事豈不貴乎. 其時地方官, 卽閣臣尹行恁之父,
而此閣臣奉敎書碑, 亦不偶然矣.
을묘년 9월19일에 이문원에서 숙직을 서다 입시하였을 때,
영괴대명(靈槐臺銘)을 쓰라 하시고 또 대신들로 하여금 읽도록 하시면서 하교를 내렸다.
“이 일은 어찌 귀하지 않은가? 그 당시 지방관은 즉 규장각신하인 윤행임의 부친이다.
그리고 이 규장각 신하가 하교를 받들어 비석에 글씨를 썼으니 역시 우연은 아니다”고 하였다.
乙卯十月二十七日敎曰,
昔年地方官贈參判龍恩君尹琰也.
承敎手植三槐,
其子閣臣尹行恁, 今又奉敎書陰記,
大鹿皮一令賜給.
을묘년 10월27일에 하교하시기를,
“옛적에 지방관이며 참판으로 추증된 용은군(龍恩君) 윤염은
하교를 받들어 세 그루 회화나무를 몸소 심었다.
그의 아들 규장각신하인 윤행임이 지금 또 하교를 받들어 음기를 썼으니,
큰 사슴 가죽 한 장을 하사해서 준다.”고 하였다.
丙辰二月初三日敎曰,
地方官故郡守龍恩君尹琰加贈一階(贈吏曹判書),
又敎曰,
龍恩君夫人貞夫人趙氏, 其時在衛中,
而今年已過七十云, 可謂稀貴,
今日政, 以貞敬夫人下批事, 分付吏曹.
병진년(1796, 정조 20) 2월3일 하교하시기를,
“지방관 고(故) 군수 용은군 윤염에게 일계급을 추가로 더한다”고 하였다.
또 하교하시기를,
“용은군 부인 정부인 조씨는 그 당시 관아에 있었는데
지금 나이 이미 칠십을 지났다고 한다. 희귀하다고 할 수 있다.
오늘의 인사행정에서 정경부인으로 비답을 내리니 이조에 분부를 하라.”고 하셨다.
**** 영괴대의 회화나무
여러 기록에 의하면 사도세자가 온양행궁에 심게 했던 나무는 한자로 ‘괴(槐)’라고 쓰는데
이는 회화나무를 뜻하는 글자이다. 회화나무는 홰나무로도 불리고,
위로 가지를 뻗은 모습이 자유롭고 기개가 있어 ‘학자수(學者樹)’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또한 주나라 때는 정승을 뜻하는 삼공(三公)을 상징하기도 했다.
조정에 일이 있을 때마다 삼공이 항상 이 나무 아래 자리하였기 때문에
정승의 지위를 일컬어 ‘괴위(槐位)’라고도 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도 이러한 상징성은 유지되어 창덕궁 돈화문 안쪽,
소위 정치공간인 외조(外朝)에는 회화나무가 심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창덕궁의 회화나무는 그 역사적 가치와 상징성을 인정받아 천연기념물 제427호로 지정되었다)
이 나무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그린 고려대학교 박물관소장 <동궐도>에도 분명한 모습으로 표현되었는데,
그 형태는 <온영영괴대도>의 회화나무와 비슷하다.
동궐도 / 창덕궁 돈화문 안쪽 금천교 앞의 회화나무, 고려대 박물관
온궁영괴대도 / 회화나무 부분
그렇다면 현재 남아있는 나무도 회화나무일 것으로 짐작되지만,
어찌된 까닭인지 지금 영괴대비가 있는 온양관광호텔 뜰의 나무는 느티나무이다.
영괴대비와 느티무 / 일제강점기 시대
느티나무를 한자로 표기할 때도 ‘괴(槐)’라를 쓴다.
그러니 온궁 관련 기록에 보이는 ‘槐’는 실제를 바탕으로 하면 느티나무가 된다.
그런데 <온양영괴대도>의 나무는 회화나무가 분명하니 그림이 잘못된 것일까?
이러한 혼동은 조선시대에 중국이 원산인 회화나무와 우리나라에서 자생하는 느티나무를
정확히 구별하지 않고 비슷한 용처에 심으면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아마도 회화나무를 심어야 하는 곳에 더러 구하기 쉬운 느티나무를 심었을지도 모르겠다.
- 영괴대비(靈槐臺碑) 탑본 / 한신대 박물관
사도세자는 활터에 그늘이 없음을 애석하게 여겨 나무를 심으라고 명했다 한다.
그가 뜻한 나무가 회화나무였다면 그것이 삼공(三公)을 상징하는 나무임을 의식한 것이었을까?
무성히 자라나 그늘을 만들어 자신의 쉼터가 되어줄 신하를 기대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로부터 두 해 후, 활터에 심은 어린 나무가 채 자라기도 전에 그는 비극적인 죽음을 맞게 된다.
그의 아들 정조는 큰나무처럼 훌륭한 군주로 성장하여 아버지를 생각하는 글을 짓고 비석을 세웠으니
이곳이 바로 그를 위한 쉼터가 된 셈이다.
- <왕의 글, 御製가 있는 그림>, 국립중앙박물관 미술관 테마전도록,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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