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글(어제)이 있는 그림
4. 사현파진백만대병도(謝泫破秦百萬大兵圖)
조선 1715년(숙종 41), 병풍(8폭), 비단에 색, 170×418.5㎝, 남궁련 기증
[사현파진백만대병도: 사현(謝玄)이 전진(前秦)의 백만대군을 물리치다]
[사현파진백만대병도 부분/ 전진의 병사들을 뒤쫓는 동진의 장수들]
[사현파진백만대병도 부분/ 도망가는 전진의 병사]
383년, 전진(前秦)과 동진(東晋=漢族)이 벌인 유명한 전투 ‘비수대전(淝水大戰)’을 주제로 한 그림이다.
무수한 병사와 말이 험한 산모퉁이를 커다랗게 감싸면서 휘몰아치듯 구성한 화면이 보는 이를 압도한다.
그림은 눈이 쌓인 겨울산을 배경으로 산길을 도망쳐 빠져나가는 전진의 병사들과
이들을 쫓는 동진의 군사들이 뒤얽힌 모습을 스펙터클하게 구성하였다.
화면이 시작하는 맨 오른쪽 윗부분에는 멀리 비수(淝水)의 경치가 보인다.
비스듬한 절벽과 강안(江岸)의 토파(土坡)는 겨울안개에 가려 희미하다.
화면 중앙은 크게 위 아래로 나누어
윗부분은 기기묘묘한 언덕과 나무들로 이루어진 험한 산세를 표현하였고,
아랫부분은 오른쪽에서 아래로 크게 반원형을 지으면서 산길을 빠져나가는 병사들의 대열을 그렸다.
마지막 폭에는 백마를 타고 달아나는 왕(前秦의 符堅)의 모습이 있고, 여백에 숙종의 어제시를 써 넣었다.
숙종 어제(1715, 숙종 41년)
晉時安石有高名 진(晉=東晋)나라의 사안(謝安)은 뛰어난 명성이 있어
坐却符堅百萬兵 전진왕(前秦王) 부견(符堅)의 백만병사를 앉아서 물리쳤다.
靑岡一潰旌旗倒 청강(靑岡)에서 부견의 전진군대가 궤멸되자 깃발이 거꾸러지고
鶴喉風聲走者鶯 학이 외치는 소리와 바람소리만 들어도 적들은 놀라서 달아난다.
歲在乙未 春題 을미년(1715년, 숙종 41) 봄에 쓰다.
전쟁이 일어난 때가 겨울임에 따라 산수의 청록색채는 약하게 하고, 나뭇가지 등을 먹으로 그려 넣었다.
바위 가장자리를 희게 칠하고 솔잎 끝과 잔가지 위의 흰눈을 표현하여
바위의 윤곽을 변화와 굴곡이 많은 필선으로 정의하고,
각진 모양을 켜켜이 쌓고 틈새 부분에 마른 붓으로 잔붓질을 하여 질감을 나타냈다.
초록색의 태점을 찍어 장식적인 효과를 냈다.
소나무는 도식적이지만 둥치는 가운데를 밝게 하여 둥근 원통형의 느낌을 살려 표현했다.
삐죽삐죽한 마른 잔가지는 날카롭게 휘어져 겨울의 스산한 기운이 느껴진다.
전투를 앞둔 전진의 부견 눈에는 팔공산의 초목이 모두 동진의 병사로 보였다고 한다.
[그림에는 나무와 바위 사이로 동진 군사의 깃발이 보인다.]
도망가는 전진(前秦)의 병사들은 처진 눈, 벌어진 입, 찌푸린 표정 등으로 겁먹은 얼굴을 표현하였는데,
이에 비해 적을 뒤쫓는 동진(東晋)의 장수들은 입을 굳게 다문 당찬 표정을 보여준다.
이처럼 기묘한 절벽과 바위의 형상은 절파 화풍을 바탕으로 하지만
조선시대의 어떤 그림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표현을 보여준다.
대략 360여 명의 병사들이 등장하는 전투장면은
좁은 공간에 말과 사람이 겹쳐지고 뒤얽혀 있는 복잡한 모습을 실감나게 묘사하였다.
통 좁은 소매의 옷주름, 펄럭이는 군복자락 등 필선은 고르고 유연하다.
현실적이지 않은 갑옷의 다양한 무늬와 색깔, 군데군데 쓰인 금채는 그림에 화려함을 더한다.
군마도(群馬圖)에 등장할 법한 다양한 말의 생김새 등
관습적이고 분업적으로 이루어졌음이 분명한 세부 표현은
숙종 연간 화원의 회화적 성취가 얼마나 다양하게 이루어졌는지를 잘 보여준다.
전진(前秦)의 왕 부견(符堅)은 역사적으로 오호(五胡)를 통합하고 화북(華北)을 손에 넣었으나
‘비수대전’ 이후 세력이 약해져 화북은 다시 분열되지만, 결코 어리석은 군주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림에서는 허둥지둥 도망치는 모습으로 다소 우스꽝스럽게 표현되었다.
한편 금박의 붉은 용포 차림은 실제 전투 상황에서는 있을 수 없는 동진(東晋)시대 차림이지만,
도망치는 왕 부견이 눈에 잘 띄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도망가는 전진(前秦)의 왕, 부견의 모습]
병사와 말의 차림새도 위진(魏晉)시대의 것과는 전혀 다르다.
408년의 연대를 가진 덕흥리고분의 행렬도에 그려진 갑옷 입은 기병,
조금 후대인 7세기에 조성된 둔황 막고굴 285굴 벽화의 전투장면과 비교해보면 그 차이를 알 수 있다.
[행렬도 - 왼쪽(덕흥리고분 - 고구려, 408년) / 오른쪽(둔황 막고굴 285굴 남벽 - 서위 6세기) ]
당시 전투에서는 전진의 병사들이 겁에 질려 학이 날아오르는 소리와 바람소리에도 놀라 도망쳤다고 한다.
‘풍성학려(風聲鶴唳)’라는 말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는데
산 위로 날아오르는 학 두 마리를 그려 이 고사를 나타내고 있다.
또한 말을 탄 병사들은 저마다 손에 채찍을 들고 있는데,
당시 군사력을 자랑하며 전쟁을 주도한 부견이 “병사들이 든 채찍만 던져 넣어도 강물이 막힐 것”이라고
했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열성어제(列聖御製)>에는 이 그림의 시 말고도
‘비수대전(淝水大戰)’을 소재로 한 숙종의 시가 세 편 실려 있다.
숙종은 왜 이처럼 여러 수의 시를 지었고, 그림에도 시를 써서 이 전투에 대한 관심을 드러냈을까.
위(魏), 촉(蜀), 오(吳)가 솥발처럼 천하를 삼분했던 삼국지의 시대는
위(魏)를 이어 중원의 주인이 된 진(晉=서진, 西晉)이 오(吳)를 멸망시키면서 끝이 났다.
그러나 반세기도 지나지 않아 서진(西晉)은 북방에서 세력을 키워온 유목민족에게 밀려
남으로 피난할 수밖에 없었다.
중원에는 오호(五胡)의 시대가 도래했고, 강남에는 한족(漢族) 왕조인 동진(東晋)이 세워졌다.
북강남약(北强南弱)의 형세 속에서 화북을 통일한 강력한 전진(前秦)의 왕 부견은
완전한 통일을 이루고자 백만대군을 이끌고 동진(東晋) 정벌에 나서게 되는데,
이 전쟁이 바로 ‘비수대전(淝水大戰)’이다.
이 전투에서 동진(東晋)이 패하였다면
이후 중국 역사에서 한족(漢族)의 이름이 등장하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당시 부견이 이끄는 전진(前秦)은 막강한 군사력으로 중국 통일을 눈앞에 두었지만
패배로 인해 결국 무산되고 화북(華北)은 다시 분열되었다.
동진(東晋)의 재상 사안(謝安, 320-385, 安石은 字)은 부견의 출진 소식에도 동요하지 않고
태연하게 앉아 바둑을 두면서 동생 사석(謝石)을 토벌대장군 정토대도독(征討大都督)으로,
형의 아들인 조카 사현(謝玄)을 선봉장 전봉도독(前鋒都督)으로 임명하였고,
아들 사염(謝琰)도 장군(將軍)이 되어 종군하였다. 또한 여러 장수를 보내어 8만의 군대로 이를 막아냈다.
부견이 동진(東晋)을 정벌하고자 했을 때 그의 신하들은 대부분 이를 만류하였다.
제갈량과도 같았던 한족(漢族) 재상인 왕맹(王猛)은 동진(東晋)을 도모하지 말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신하들이 정벌을 반대한 이유는 동진 정벌의 명분이 약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한족을 포함한 대다수의 신민(臣民)들은 여전히 동진을 중화(中華)의 정통왕조로 생각하고 있었다.
부견의 동생이자 동진 정벌을 총지휘한 부융(符融) 또한 “전진(前秦)은 융적(戎狄)으로 정삭(正朔)이
이어지지 않았고, 동진이 비록 미약하나 중화의 정통이므로 천의(天意)는 그 명맥을 끊지 않을 것”임을
들어 정벌을 반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진 정벌을 감행한 부견에 대하여, 남송(南宋)의 주희(朱熹)는
“부견은 조급히 정통이 되고 싶었던 것으로,
후세인들이 자신을 일러 정통이 아니라고 할 것을 두려워하여 급히 진(晉=東晋)을 멸망시키려 했다”
고 단정지었다.
주자의 견해는 곧 조선지배층의 견해가 되었을 것이다.
특히 조선성리학의 거목 송시열은 주자를 계승한 것으로 평생을 자부하였고
모든 말과 행동의 근원을 주자로 삼았다.
심지어 그의 시대를 주자가 살았던 남송의 시대와 동일시하기도 하였다.
나라가 북방의 이적(夷狄)에게 밀려 있고, 붕당의 대립으로 점철되어 있는 상황이 같다고 보았던 것이다.
8만의 군사로 백만대병을 이긴 ‘비수대전’의 이야기는 훗날 윤색되고 부풀려진 것이라 해도,
당시 군사력에서 절대 우위를 점했던 전진(前秦)의 패배는 결코 쉽게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조선의 사대부들에게 ‘비수대전’은 의미 있는 사건이었던 것이다.
그림에서는 동진(東晋)의 재상 사안(謝安)이나 전투를 이끌었던 사석(謝石), 사현(謝玄)은 보이지 않고
많은 수의 군사를 이끌고 내려왔다가 패배하여 도망치는 전진(前秦)의 왕 부견을 강조하였다.
이 장면은 보는 이에게 ‘비수대전’의 역사에서 교훈을 얻을 사람으로 왕, 다름아닌 숙종을 떠올리게 한다.
이 그림이 그려진 1715년(숙종 41)은 45년간 어좌에 있었던 숙종 치세의 끝무렵이었다.
1701년 희빈 장씨를 사사한 이후 정국은 당파간의 반목과 대립이 점차 첨예해지고는 있었지만
환국과 같은 큰 사건은 없는 비교적 조용한 날이 이어졌다.
그러나 1714년(숙종 40) 소론(少論) 영수 명재(明齋) 윤증(尹拯, 1629-1714)이 卒한 후
최석정(崔錫鼎)이 윤증의 제문을 쓰면서 노론(老論)의 우상이었던 송시열(1607-1689)을 모욕했다는
노론의 시비가 점점 격화되는 것을 숙종은 목도하고 있었다.
1715년에는 송시열의 수제자 권상하(權尙夏, 1631-1721)가 <가례원류(家禮源流)>의 서문을 쓰면서
윤증을 일러 송시열을 배반한 인사라고 비난하자, 이를 두고 정국이 다시한번 논란에 휩싸였다.
이 논란은 결국 1716년 병신처분(丙申處分)에 이르러 숙종이 노론의 손을 들어주면서
정국이 노론 전제로 가게 되는 경로를 밟았다.
1715년 봄, 노론과 소론의 갈등 속에서 숙종은 이 그림을 대하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열성어제에 실린 숙종의 시 또한 한편은 부견의 동생이자 신하였던 부융을 언급한다.
부견은 부융의 간언을 물리치고 동진 정벌에 나섰고, 부융은 비수전투에서 전사하였다.
淸河將死其言善 사람이 죽으려고 할 때는 하는 말이 선(善)해
獨待符融淚亦泫 유독 부융(符融)을 맞이할 때는 눈물 또한 흘렀다.
窮兵極武成何功 온갖 무력을 다 동원한들 무슨 공을 이루랴?
自古人君納諫鮮 예로부터 임금이 간언(諫言)을 받아들임이 드물었다.
- 숙종 御製 -
숙종은 마지막 구절에서 신하의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은 왕(부견)의 처신을 마음에 담는다.
송시열은 후궁이 낳은 아들을 성급히 원자로 삼으려는 숙종의 뜻에 반대하다가 죽음에 이르렀다.
그는 정통인 동진(東晋)이 이적(夷狄) 부견을 물리친 것이 천리(天理)였듯,
明을 계승하여 중화를 지켜온 조선이 나날이 강성해가는 淸을 극복할 수 있기를 기원했을 것이다.
자신이 사사(賜死)한 송시열을 기억하면서 숙종은 한 해 후의 병신처분을 구상하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백만대병을 앞에 두고도 여유 있던 사안(謝安)의 배포를 지닌 신하를 기대했을까?
어제(御製)는 그림을 그린 의도, 보는 이에게 전하고 싶은 왕의 메시지이다.
어제는 그림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과 교훈을 상당 부분 제한하면서 왕의 의지를 효과적으로 각인시킨다.
누가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는 그림의 주제는 이 메시지가 감상자에게 보다 더 잘 전해지도록 돕는다.
<사현파진백만대병도(謝玄破秦百萬大兵圖)>와 그림에 써 있는 어제(御製)를 보는 숙종의 신하들은
그림을 보자마자 그것이 어떤 사건을 그린 것인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멀리 보이는 물, 날아오르는 학은 오해를 방지하고
그림의 주제가 바로 ‘비수대전’임을 명확히 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화가는 이러한 장치들을 전면에 내세워 설명하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다.
병사와 말, 칼과 창이 뒤얽혀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전투 장면과 그것을 화려하고 치밀하게 그린
화가의 솜씨는 보는 이의 눈을 사로잡으며 깊은 인상을 남길 것이다.
또한 동시에 그림과 글 속에 담긴 왕의 뜻을 헤아릴 수 있었으리라.
- 국립중앙박물관 미술관 회화실 학예사, 장진아
- 국립중앙박물관 제104회 큐레이터와의 대화(2008년 9월3일)
- 미술관 테마전 <왕의 글이 있는 그림> pp28-34, 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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