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나아가는(문화)

존경받는 명문家 / 내력과 자녀교육

Gijuzzang Dream 2008. 9. 9. 10:07

 

 

 

 

 

 

 

 존경받는 명문가, 자녀교육

 


대한민국 대표 가문들의 탁월한 교육법을 소개한다.

인맥네트워크를 중시하고, 4백 년 전부터 영재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어 실천했던 이황의 교육법,

‘지고 밑져라’는 희생과 손해도 볼 줄 알아야 한다는 아량을 가르친 이함 등

위대한 인물들이 직접 실행했던 자녀 교육법을 소개한다.

"자식 하나 키우기가 왜 이렇게 힘들까?” 이런 탄식이 절로 나오는 게 오늘날 우리 사회가 처한 현실이다.

그렇다면 수백 년 지속해온 명문가들은 어떻게 자녀교육을 했기에 대대로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면서 명문가로 유지해 올 수 있었을까.

 

영국 옥스퍼드대 자녀양육연구소는

어린이 1만7천명이 33세가 될 때까지의 성장과정을 추적 조사한 결과,

자녀의 성장과 교육에 적극적인 아버지의 자녀들이 학교 성적도 좋고,

사회생활과 결혼생활도 성공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자녀와 별거 중인 아버지나 의붓아버지도 자녀가 책 읽는 것을 들어준다거나,

숙제하는 것을 도와주는 등의 방법을 통해 자녀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아버지가 자녀양육에 참여한다는 것은 자녀 관리를 어머니와 나눠서 한다든가,

자녀교육에 관심을 갖고, 함께 외출하는 일 등이라고 보고서는 설명했다.

이 연구결과에서 보듯이 자녀교육의 해법은 ‘아버지’에게서 찾을 수 있다.

요즘과 달리 조선시대에는 아버지가 자녀교육에 적극 나섰다.

특히 대대로 인재를 배출해온 명문가들의 공통점은 바로 아버지가 자녀교육의 중심에 서 있다는 것.

특히 퇴계 이황과 다산 정약용, 서애 류성룡 등 역사상 위대한 인물일수록 자녀교육에도 헌신적이었다.

 


자녀들에 대한 세심한 관심 표출, 퇴계 이황

 

퇴계 이황의 자녀교육 열정은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철저하고 열정적이었다.

퇴계는 300여명이 넘는 수제자를 길러내고 140번이나 넘게 공직의 부름을 받았던

조선시대의 대학자이지만, 그 바쁜 와중에도 자녀뿐만 아니라 친인척의 자제 등

무려 90명을 꼼꼼하게 챙겼다.

“어제 너의 초사흗날의 편지를 보았다. 무사히 공부하고 있다니 위로가 된다.

지은 글이 등수에 들지 못한 것은 네가 탄식하고 안타까워하겠지만,

그러나 이것은 네가 평일에 놀고 게을렀던 결과이니, 이것 또한 무엇을 나무라겠는가?

다만 마땅히 가일층 공부에 힘써 진보할 것을 도모하여야 할 것이며,

스스로 자신을 잃고 붓을 꺾어버려서는 안될 것이다.”

이 글은 1551년 퇴계 이황이 아들 준에게 보낸 편지글이다.


“시원한 밤 책 읽기 좋을 때다. 시간을 아껴라. 좋은 계절에 고요한 절에서 힘써 공부해 주기 바란다.

술 한 병, 닭 한 마리, 생선 한 마리, 고기 한 덩어리를 보낸다.”

이는 퇴계가 맏형의 외손자(민응기)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이다.

요즘 극성 아빠를 능가할 정도로 자녀교육에 대한 열의를 읽을 수 있다.

대학자의 근엄한 모습만 남아있는 퇴계를 상상하면 쉽게 연결이 되지 않을 정도다.

퇴계는 이미 500년 전 가부장적 질서가 공고했던 시대에 섬세하게 보살피고 이끌어주는

이른바 ‘여성적 리더십’을 발휘했던 것이다.

퇴계의 자녀교육의 열정은 그가 쓴 편지에서도 알 수 있다.

퇴계는 생전 아들 준에게 613여 통, 손자 안도에게 125통의 편지를 썼다.

아들과 손자, 후손에게 무려 1,300여 통의 편지를 썼다.

명문가의 자녀교육 가운데 한번쯤 시도해보아도 손해나지 않는 실천법이라면

바로 편지를 이용한 서신교육이다.

직접 손으로 쓴 편지를 이용할 경우 가족 간의 대화의 장벽을 허무는데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편지는 얼굴을 보고 이야기할 때보다 감정을 순화시켜 전달할 수 있기 때문에 교육적인 효과가 훨씬 크다.

 


유배지에서도 끊이지 않았던 자녀사랑, 정약용


퇴계와 함께 다산 정약용도 편지를 자녀교육에 적극 활용했다.

유배지에서 18년 넘게 보낸 다산은 두 아들과 100여 통이 넘는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자녀교육에 결코 소홀하지 않았다.

100여 통의 편지를 통해 자녀들에게 훈계한 내용은 먼저 문명세계(서울)를 떠나지 말 것,

두 번째는 독서에 힘쓸 것, 세 번째는 재물은 나눠줄 것,

네 번째는 근(勤)과 검(儉), 이 두 글자를 유산으로 삼을 것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 중에서 흥미로운 것은 자녀에게 내린 ‘한양 입성’이라는 특명이다.
“지금 내가 죄인이 되어 너희들에게 아직은 시골에 숨어서 살게 하였다만,

앞으로는 오직 서울의 10리 안에서만 살아야 한다.

또 만약 집안의 힘이 쇠락하여 서울 한복판으로 깊이 들어갈 수 없다면

잠시 서울 근교에 살면서 과일과 채소를 심어 생활을 유지하다가

재산이 조금 불어나면 바로 도시 복판으로 들어가도 늦지는 않다.”


다산은 자신의 유배와 형들의 불행한 일로 인해 집안이 위기에 처하자

자녀들에게 ‘서울 사수’라는 응급처방을 내렸던 것이다.

이는 자녀에게 ‘교육’과 ‘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지고 밑지는 것을 배우는 것이 참교육

 

우리 선인들이 생활 속에서 실천하기를 가장 강조한 게 있다면 다름 아닌 이웃에 대한 ‘배려’였다.

퇴계나 다산 등은 서신교육을 통해 이웃과 더불어 사는 것의 중요성을 들려주었다.

‘도움을 받고 싶다면 먼저 베풀어라’는 공동체의 덕목을 실천하도록 했다.

재령이씨(영해파) 운악 이함 가문에는 바로 배려의 정신을 실천한 가훈이 400년 동안 이어져오고 있다.

바로 ‘지고 밑져라’라는 가훈이다.

단기적으로 손해를 보는 것이야말로 장기적으로는‘미래를 위한 저축’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운악 이함 家는 이러한 정신을 실천함으로써 명가로 도약할 수 있었고

3대에 걸쳐 퇴계학맥을 잇는 학자를 배출했다.

바로 이함의 아들인 석계 이시명에서 시작해

갈암 이현일, 밀암 이재는 당대 퇴계학의 최고 권위자로 꼽혔다.

삼보컴퓨터를 창업한 이용태 전 회장이 바로 운악 이함의 17대 종손이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배려의 삶을 살도록 가르침을 받아왔다.

할아버지는 아이들에게 맞고 오면 칭찬을 해주었고 다른 아이를 때리고 오면 호되게 꾸중했다고 한다.

그는 요즘 손자들과 한 달에 한 번씩 ‘격대교육’을 실천하며

‘지고 밑져라’는 가풍을 후세들에게 전하고 있다.

격대교육이란 할아버지가 손자들을 가르치는 전통적인 가정교육이다.

 

우리나라는 동학혁명과 해방이후 좌우익 정치세력이 다투는 와중에 많은 고택이 불태워졌다.

동학군은 지역민들을 수탈한 양반가 저택을 급습해 인명을 해치고 집을 불태웠다.

 

경주최부잣집도 1894년에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동학도에 의해 소실될 뻔 했다.

동학군이 양반집을 불에 태우고 돈을 강탈하던 중 최부잣집에도 들러 처마에 불을 지르기 시작한 것이다.

 

“양반과 부자치고 도둑 아닌 자가 어디 있느냐”는 두목의 말에,

최부잣집 종손은 “우리 집이 그동안 어떻게 처신했는지 네가 다른 사람들에게 직접 물어보라”고 말했다.

최부잣집의 내력을 확인한 동학도들은 순순히 물러갔다.

최 씨 집안은 12대에 걸쳐 이웃에 베풀어온 적선 덕분에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경주최부잣집의 적선은 바로 미래를 위한 저축이었던 것이다.

 

아이를 ‘명품 인재’로 키우려면 부모가 먼저 ‘본보기’를 보여야 한다.

부모가 먼저 일어나고, 매일 독서를 하고, 자신을 낳아준 부모님을 공경해야 한다.

부모의 행동은 미래 자녀의 행동으로 고스란히 이어지는 것이다.

최효찬, 자녀경영연구소장 / 사진, 남정우

- 문화재청, 월간문화재사랑, 2008-09-03

 

 

 

 

 

 

 

 존경받는 명문가들의 특별한 내력

 

명문가(名門家)는 왜 필요한가? 오랫동안 나 스스로에게 물었던 질문이다.

명문가는 필요하다. 사회가 혼란기에 처했을 때 명문가의 존재가 드러난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나, 경제 위기로 인해서 가난한 사람들이 고통 받는 상황이 되었거나,

이념의 갈등으로 사회적 분열이 심화되었을 때 명문가의 존재가 부각된다.



명문가가 명문가인 이유


명문가는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집안을 가리킨다.

존경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니다.

존경 받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고, 그만한 역사적 검증을 거쳤기 때문이다.

평소에 존경이 축적되어 있어야만 난세에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다.

여론을 통합시키는 힘이 있다. 존경이 없으면 말발이 먹히지 않는다.

지금과 같은 사회경제적 위기야말로 사회적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는 명문가가 절실히 필요한 때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명문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사회적 자본에 해당한다.

이 사회적 자본이 없는 나라는 난세에 피를 흘리기 마련이다.

그동안 필자가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조사해 본 명문가는 이렇다.



3백년 만석군 집안다운 넉넉한 베풂 

 


경주의 최부잣집이다.

경상도는 호남과 달리 들판이 적다. 3천석 이상의 부자는 배출되기 어려운 지형적 조건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부자가 적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경상도에서 최부잣집은 3백년 동안이나 계속해서 만석군을 유지해 왔다는 점이 독특한 것이다.

3백년 동안 만석군 기록은 서울이나 충청, 호남에서 찾아볼 수 없는 기록이다.

 

최부잣집의 만석군 비결은 독특하다.

첫째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한다는 철학을 가졌었다.

‘그 이상은 내 재산이 아니다’ 라는 깨달음이었다.

만석 이상은 가지고 있어 보아야 아무 필요도 없을 뿐만이 아니라,

오히려 유사시에는 화가 될 수 있다는 이 집안사람들의 선견지명이 작용하고 있었던 것 같다.

환원 방법은 소작료를 대폭 낮추는 방법이었다.

다른 부자들은 7할의 소작료를 받았던 데에 비해 최부자는 4~5할 정도만 받았다.

소작인들로 보아서는 대단한 행운이었다.

 

둘째는 흉년에 논을 사지 않는다는 방침이었다.

흉년이 되어 굶어 죽는 상황에 직면하면 가난한 사람들은 가지고 있던 논마지기를 10분의 1가격에

내 던졌다. 이때가 부자에게는 기회였다.

하지만 최부자는 이때 가난한 사람들의 논을 사지 않았다고 한다.

나중에 원망이 돌아오기 때문이다. 나중에 원망을 받을망정

지금 눈앞에 닥친 재테크의 찬스를 잡을 것이냐,

아니면 돌아올 원망의 과보를 현찰보다 더 무섭게 생각할 것이냐?

여기에서 다른 부자와 최부자의 판단이 갈라졌다.

다른 부자들은 전자를 택하였고, 최부자는 후자를 택하였다.

전자를 택한 다른 부자들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 이후로 유행한 활빈당(活貧黨)에게 걸려들어

떼죽음을 당하였고, 가지고 있던 재산을 탈취 당하였다.

활빈당들은 최부잣집에 대해서는 손 하나 까딱 안했다고 한다.

활빈당도 여론 조사는 치밀하게 한 다음에 부잣집을 털러 다녔다는 증표이다.

 

셋째는 과객대접을 후하게 한다였다.

1년에 과객대접 하는데에 들어간 쌀가마가 약 1천 가마 분량이었다고 한다.

하루에 평균 두가마 반 분량은 밥을 해 댔다는 결론이다.

최소한 하루에 1백 명 이상의 삼시세끼를 공급할 수 있는 분량이다.

이 밥을 공짜로 얻어먹은 과객들이 전국에 돌아다니면서 입소문을 낼 수밖에 없었다.

최부잣집에 대한 소문이 전국에 퍼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여겨진다.

 

넷째 ‘벼슬은 진사이상 하지 않는다’였다. 최부잣집은 9대 진사를 지낸 집안이다.

고위벼슬을 하면 당쟁에 휘말려 몸 뺏기고 재산 뺏길 수 있다고 여겼던 탓이다.

조선후기에 영남 지역은 정치적으로 남인(南人)에 속한 집안이 많았다.

기호 노론(老論)이 2백년 동안 장기집권 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만년 야당이었던 영남의 남인들은 숨죽이고 살 수 밖에 없었다.

자칫 벼슬한다고 나섰다가는 어떤 정치적 풍랑에 휩싸일지 모르는 위험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은혜를 베풀어 대(代)와 명성을 지킬 수 있었던 명문가

 
전남 여수 봉강동에 가면 언덕 위에 커다란 한옥 저택이 자리 잡고 있다.

집의 당호는 봉소당(鳳巢堂)이다. 몇 년 전에 영화 ‘가문의 영광’에 등장했던 집이기도 하다.

영광김씨(靈光金氏)인 이 집의 사연도 기가 막히다. 이 집은 구한말에 장사를 해서 큰돈을 벌었다.

현 종손의 증조부인 김한영(金漢永) 대이다. 1만2천석을 했다.

김한영은 장사로 돈을 벌었지만, 가난한 과객 대접에 후했다고 전해진다.

김한영은 과객이 오면 반드시 주특기를 물어보았다.

덕석을 짜는 것이 주특기인 과객에게는 덕석을 짜게 하였다.

이걸 시장에 내다 팔게 해서 돈이 모이면 그 사람이 경제적으로 자립을 하게 도와주곤 하였다.

 

이 집은 평소 소작인들에게도 후하게 대했다.

자식들이 8~9명 되는 소작인들은 자식들 먹이느라고 소작료를 제대로 내지 못하는 일이 있었다.

그 처지가 딱하다고 해서 그냥 눈감아 주면

다른 소작인들이 ‘왜 그 집만 봐주느냐’고 항의를 할 것이기 때문에 다른 방법을 강구했다.
자식들 많은 소작인들에게는 수백 가마의 쌀을 배에다 싣고 내리는 하역작업을 대신 맡겼다.

화양면 고진(古津)이라는 곳에서 여수항까지 배에다 쌀을 싣고 운반하는 일이었다.

이 대가로 소작료를 면제해 주면 다른 소작인들이 보기에도 공평하게 여겨졌던 것이다.

 
평소에 쌓아둔 이러한 적선이 난리가 났을 때에 그 효력을 발휘하였다.

여순반란사건이 났을 때에 여수에서 가장 부잣집인 봉소당의 주인이 제일 먼저 좌익들에게 잡혀갔다.

공교롭게도 당시 좌익의 지도부 인물 가운데 하나가

평소 이 집의 혜택을 보았던 바로 그 소작인의 아들이었다.

좌익을 하긴 하였지만, 평소에 많은 신세를 졌던 ‘봉소당’의 주인을 죽일 수는 없었다.

결국 봉소당 주인이 몰래 탈출할 수 있도록 눈감아 줌으로써 그 보답을 하였다.

 

그 전말을 정리하면 이렇다.

1948년 여순반란사건이 터졌을 당시에,

여수의 대지주였던 여수 봉소당의 11대 후손인 김성환(1915~1975)은 당시 33세의 젊은 나이였다.

김성환이 반란군에게 끌려갔던 장소는 여천군청 2층이었다고 한다.

여기에는 소작인 아들로서 반란군의 책임자급으로 있었던 인물이 책상과 의자를 놓고 앉아 있었다.

김성환이 끌려오니까 이 책임자는 옆에 있던 2명의 호위병들에게 ‘너희는 밖에 나가 있어라!’하고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김성환을 의자에 앉도록 한 다음,

이 책임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신문만 보고 있었다.

자신의 의자를 벽 쪽으로 돌려놓고 신문만 들여 다 보았다. 침묵 상태로 10분이 지나고 20분이 지났다.

끌고 왔으면 심문을 해야지 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벽을 향해서 신문만 보고 있을까?

이런 의문을 품고 있던 김성환은 30분쯤이 지날 무렵 그 이유를 알았다.

‘아! 나 보고 도망가라는 뜻이구나!’ 김성환은 군청 창문을 살며시 연 다음에

홈통을 타고 1층으로 내려와 야산으로 도망을 하였다.

이 소작인의 아들은 자신의 직책이 반란군의 책임자급이었으므로 대 놓고

‘너 도망가라’고 이야기 할 수 없는 입장이었고,

그렇다고 자기 조부 때부터 은혜를 입은 봉소당 아들을 죽일 수도 없었던 것이다.

 
여순사건 당시 12대 후손인 김재호(1942~ )는 초등학교 1학년이었다.

봉소당 머슴의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나이는 17세였다.

반란군에 가담하여 팔에는 완장을 차고 있었다. 완장을 찬 머슴아들이 봉소당 대문을 열고 들어오니까,

여섯 살 먹은 어린 김재호는 무심코 손에 들고 있던 삶은 밤을 ‘형! 이 밤 좀 먹어봐’하면서 건넸다.

이 밤을 받아든 머슴 아들은 한참동안 주인집 아들인 재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고 한다.

김재호는 ‘지나고 보니까 그때 무심코 내가 내밀었던 삶은 밤 한주먹이 내 목숨을 살렸다’고 회고한다.

논리(論理) 위에 정리(情理)가 있다.

이렇게 해서 이 집은 ‘여순반란사건’에서도 사람이 죽거나 집이 불타지 않고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집은 현재에도 여전히 여수의 부자이다.

 

누구나 능히 열 수 있었던 너그러운 뒤주

 

 

 

지리산 노고단을 배산(背山)으로 삼고, 섬진강을 임수(臨水)로 삼고,

그 가운데에 넓은 들판을 문전옥답으로 삼은 수십 칸 규모의 저택이 있다.

바로 류씨 집안인 운조루(雲鳥樓)이다.

전망도 좋고, 풍수상으로 대명당에 해당하는 터이지만

이 지리산 아래 동네는 동학, 빨치산, 6.25의 중심현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주집인 이 운조루가 불타지 않고 아직까지 남아 있다는 것이

알고 보면 대단한 사실이다.
왜 부잣집인 운조루는 빨치산과 6.25에서도 살아남았는가?

 

이 집의 사랑채 옆에는 나무통으로 만든 뒤주가 하나 있다. 두 가마 반이 들어가는 원통형 뒤주이다.

이 뒤주 아랫부분에는 조그맣게 네모진 나무에 ‘타인능해(他人能解)’라고 글씨가 적혀있다.

‘다른 사람도 능히 열수 있다’는 뜻이다.
이 부잣집의 뒤주에 들어 있는 쌀은 지나가던 과객이나, 아니면 동네의 가난한 사람들이 아무나 와서

마개를 열고 1~2되씩 쌀을 퍼갈 수 있도록 배려했던 것이다.

운조루에서 배려했던 쌀의 양은 1달에 두가마 반이었다.

만약 월말에 뒤주의 쌀이 남아 있으면 시아버지가 며느리를 책망했다고 전해진다.

“우리 집안이 덕을 베풀어야 하는데, 이렇게 쌀이 남아 있으면 덕을 못 베풀었다는 증거 아니냐!”

 

평소에 어려운 이웃들이 이 쌀을 퍼갔다. 6.25 때 빨치산들이 수없이 이 지역을 들락거렸지만

이 집은 피해가 없었다. 다른 동네 출신들이 뭣 모르고 운조루를 불태우려고 하면,

이 동네 머슴 출신의 좌익들이 이를 말렸다고 한다.

“다른 집은 다 태워도 저 집은 태우면 안 된다!”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必有餘慶)’이라는 말은 그냥 나온 말이 아니다.

적어도 1백 년은 지나가 보아야 그 이치를 깨닫는 것 같다. 그 이전에는 알 수 없다.



정승도 따르지 못했던 한 명의 처사

 

 
충남 논산의 노성리에 가면 명재 윤증(明齋 尹拯, 1629~1714) 고택이 있다.

함양 개평에 있는 일두 정여창 고택과 더불어 가장 보존이 잘 되어 있는 고택이 명재고택이다.

이 집안은 보통 노성 윤씨(魯城 尹氏)라고 불린다.

충청도에서 1급 양반으로 꼽히던 집안이 회덕의 송씨(우암 송시열 집안), 광산 김씨(사계 김장생 집안),

그리고 노성의 윤씨 집안이다. 명재는 벼슬을 거부한 처사(處士)로 유명하다.

 

‘정승 세명이 대제학 한명만 못하고, 대제학 세명이 처사 한명만 못하다’는 말이 있다.

처사는 벼슬을 하라고 해도 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서 공부하는 선비를 가리킨다.

 

명재는 임금이 40번 넘게 벼슬하라고 불렀어도 끝내 벼슬을 거부한 학자이다.

마지막에는 임금이 명재 얼굴도 보지 못한 상태에서 우의정을 준다고 했지만 이것도 거부했다.

‘탕평인사’라는 명분에 맞지 않는 벼슬은 절대로 받지 않았던 것이다.

‘대제학 세명이 처사 한명만 못하다’는 경우는 바로 일생동안 처사였던 명재를 가리킨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처사는 두 명 있다고 한다. 명재와 지리산 밑에 살았던 남명 조식이다.

명재가 지닌 카리스마는 대단하였다. 그만큼 주변으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소론(少論)의 당수로서 추호도 흔들림이 없었다.

명재는 자기가 죽은 뒤에 제사상의 크기도 미리 정해 놓았다.

제사상의 크기를 가로 세로 석자(90㎝)를 넘지 말게 하라는 당부였다.

음식을 간소하게 차리라는 당부였던 것이다.

지금도 명재 고택에 가보면 석자 안 되는 제사상이 남아 있다. 음식 몇 가지 올리면 상이 다 차버린다.

 

당시에 명재 집안의 윤씨들이 뽕나무 사업이 잘된다고 하니까, 너도 나도 뽕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이를 안 명재는 “우리 집안은 뽕나무를 키우면 안 된다.

이는 가난한 서민들이 먹고 살기 위해서 심는 나무인데, 우리 같은 양반 집안마저 뽕나무를 키우면

다른 사람들은 어찌 되겠느냐, 절대로 뽕나무를 심으면 안 된다”고 엄명을 내렸다.

윤씨들은 이를 그대로 지켰다.  

 

현재 남아 있는 명재 고택도 사랑채에 담장이 없다. 대문도 없다.

외부인이 곧바로 사랑채에 접근하거나 쳐다볼 수 있는 구조이다.

집안에 담벼락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 집안은 거리낄 것이 없다’는 표시이다.  

이 집안의 이러한 가풍이 있었기 때문에 6.25 때에도 이 저택은 불에 타거나 손상당하지 않았다.

충청도 양반을 대표하는 집안이다.

 

우리나라는 조선조가 망하면서 양반도 몰락하였다. 양반들도 약자를 착취하는 토색질을 많이 하였다.

하지만 양반의 나쁜 점만 사라진 것이 아니라 좋은 점도 같이 사라졌다.

양반의 자존심과 주변을 배려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도 같이 사라진 것이다.

해방 후에 남은 것은 ‘상놈정신’이다.

상놈정신의 좋은 점은 체면 따지지 않고, 근면성실하고, ‘너와 내가 동등하다’는 평등의식이다.

상놈 정신의 나쁜 점은 졸부근성이다.

‘남이야 죽건 말건, 내 배만 부르면 장땡이다’는 의식이 바로 상놈의식이다.

이 부정적 의미의 상놈의식을 어떻게 바꾸어 나갈 것인가?
- 조용헌, 칼럼니스트
- 사진, 이상무

- 월간문화재사랑, 2009-0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