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문(彰義門), 숙정문(肅靖門) | ||||||||
글 : 유홍준 문화재청장
창의문은 서대문과 북대문 사이의 북소문(北小門)으로 ‘올바른 것을 드러나게 하다’는 뜻이 있다. 그러나 창의문을 북소문이라고 부른 일은 없었고 이곳 계곡의 이름을 빌려 자하문(紫霞門)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창의문과 숙정문은 경복궁의 양팔과 같으므로 길을 내어 지맥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건의한 것을 받아들여 두 문을 닫고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세종 4년(1422)에는 군인들의 출입 통로로 이용할 수 있게 했고, 광해군 9년(1617)에는 궁궐 보수 작업 때 석재를 운반하기 위하여 열어 주도록 하였다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당시에도 길 자체는 있었던 것 같다.
영조 17년(1741) 이곳을 수축할 때였다. 당시 훈련대장 구성임(具星任)이 “창의문은 인조반정(1623년) 때 의군(義軍)이 진입한 곳이니 성문을 개수하면서 문루를 건축함이 좋을 것”이라고 건의한 것이 받아들여져 비로소 세워지게 되었다. 지금 창의문에는 인조반정 때 공신들의 이름을 새겨 놓은 현판이 걸려 있다.
서울의 사소문 중 유일하게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수백 년 동안 사람의 발길에 길들여진 박석이 윤기를 발하고 있고, 문루에서 바깥쪽으로 나와 있는 수구(水口)가 연잎 모양으로 맵시 있게 조각되어 이 성문에 매력을 더하고 있다.
또한 성문의 월단(月團), 무지개 모양의 석문 맨 위에는 봉황 한 쌍이 아름답게 새겨져 있는데, 속설에 의하면 이는 닭 모양을 새긴 것으로 창의문 밖 지형이 지네처럼 생겼으므로 지네의 천적인 닭을 새겨 넣은 것이라고 한다.
숙정문(肅靖門)
남대문인 숭례문(崇禮門),‘예를 숭상한다’는 뜻과 대비하여 ‘엄숙하게 다스린다’라는 뜻으로 이름 붙였다.
태조 5년(1396) 처음 서울 성곽을 쌓을 때는 지금 위치보다 약간 서쪽에 있었으나 연산군 10년(1504)에 성곽을 보수하면서 옮겨졌다고 한다.
서울 성곽 동서남북에 사대문의 격식을 갖추고, 비상시 사용할 목적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평소에는 굳게 닫아 두어 숙정문을 통과하는 큰길은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
다만 가뭄이 심할 때는 숙정문을 열고 남대문을 닫아 두었다고 하는데, 이는 태종 16년(1416)에 기우절목(祈雨節目), 기우제 시행규칙을 만들면서 북쪽은 음(陰), 남쪽은 양(陽)이라는 음양의 원리를 반영한 것이었다.
조선 후기의 학자 홍석모가 지은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정월 대보름 전에 민가의 부녀자들이 세 번 숙정문에 가서 놀면 그 해의 재액(災厄)을 면할 수 있다”라는 풍속이 전해진다.
그러나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라는 저서에서 “숙정문을 열어놓으면 장안 여자들이 음란해지므로 항시 문을 닫아 두게 했다”는 정반대의 속설을 전하고 있다. 1976년 북악산 일대 서울 성곽을 보수하면서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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