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지켜(연재자료)

한국사 미스터리 6. 신라 금관

Gijuzzang Dream 2008. 9. 3. 18:01

 

 

 

[한국사 미스터리](6)

 

 

 

 신라 금관

 

 

1921년 9월, 경주 로동리 봉황대 주변에서 주막을 운영하던 박아무개는 장사가 무척 잘되었다.

‘사세확장’을 해야 했다. 그는 주막을 늘리기로 하고 뒤뜰의 조그마한 언덕을 파기 시작했다.

그런데 9월23일 이상한 유물들이 발견되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박아무개는

자기 집이 원래 신라 무덤이 평탄하게 돼버린 자리에 세워진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소문이 꼬리를 이어 경주전역에 삽시간에 퍼졌다.

당시 경찰서 순경(미야케)이 이 풍문을 듣고 곧바로 소문의 진원지를 찾아 나섰다.

곧 내막을 알게 되었다. ‘보통 사람의 무덤이 아니야. 신라 귀족이거나 아니면 왕족?’.

심상치 않은 유물임을 직감한 미야케는 당장 터파기 작업을 일단 중지하게 한 후

상관인 경찰서장에게 보고했다.

바로 1,500여 년의 긴 잠에서 깨어나 우리 눈앞에 나타난 최초의 신라금관(금관총)이었다.

 

 

- 금관총의 금관

 

  

  

- 천마총에서 출토된 금관

 

 

 

 

  

- 황남대총 북분에서 출토된 금관

 


◇ 스웨덴 황태자까지 발굴에 관여

금관은 우리나라 고대 유물 가운데 단연 눈을 끄는 유물로 꼽힌다.

세계에 내놓아도 아무런 손색이 없을 뿐 아니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하게 만드는,

독특한 형태의 금관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금관은 5개나 된다.

바로 첫번째 출토금관인 금관총 금관을 비롯, 금령총 · 서봉총 · 천마총 · 황남대총 북분금관 등이다.

금관은 앞서 밝힌 금관총 금관처럼 출토 당시 많은 사연과 얘기를 간직한 채 발굴된다.

금관총 금관 발굴 이후인 1924년에는 역시 봉황대 아래의 민가 사이에 있는 무덤을 조사해

두번째의 신라금관이 발견됐다. 이것이 바로 금령총(金鈴塚) 금관이다.

이 무덤 역시 주인공을 알 수 있는 유물이 발견되지 않아

금관에 매달려있는 독특한 한쌍의 금방울을 보고 이름을 금령총이라 했던 것이다.

 

 - 금령총의 금관과 금관도안

 


이어서 1926년에는 역시 봉황대 서편으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무덤에서 세번째 금관이 출토되었다.

이 역시 무덤의 주인공을 알 수 없었다.

출토된 금관에 봉황으로 여겨지는 새(鳥)의 장식이 있고 고고학에 관심이 많았던

당시 스웨덴의 구스타프 아돌프 황태자가 발굴에 참관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이름붙였다.

스웨덴의 한자표기가 서전(瑞典)이어서 '서(瑞)'자와

봉황(鳳凰) 장식의 '봉(鳳)'자를 취해 바로 ‘서봉총(瑞鳳塚) 금관’이 된 것이다.  

 

 

    

   

 - 서봉총에서 출토된 금관

 


◇ 나무와 사슴뿔 상징

신라금관은 내관(內冠)과 외관(外冠)으로 구분되는데

특히 외관은 그 형태가 독특하고 꾸며놓은 면면이 호화로우며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신비로운 느낌까지 들게 한다.

그런데 금관을 만든 의미는 무엇이며 어떻게 만들었는지도 의문이지만

지금까지의 연구로는 명쾌한 해답이 없다.

외관을 보면 한자(漢字)인 산(山)자 3~4개를 위에서 아래로 연속적으로 붙여놓은 형태가

앞면과 좌우측면에 장식돼있고, 다시 좌우로 사슴뿔 형태의 장식가지를 세워

산(山)자 형태와 함께 전체 뼈대를 이루고 있다.

이들 뼈대에 많은 영락(瓔珞, 목·팔에 두르는 구슬을 꿴 장식품)이나 굽은옥(曲玉)을 장식했다.

그래서 바람이 불면 영락이 움직이면서 햇볕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게 되어 호화의 극치를 이루게 했다.

금관의 뼈대가 되는 산(山)자 형태는 식물인 나무를 도안화(圖案化)한 것으로 해석되고

거기에다 동물인 사슴뿔을 상징화(象徵化)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서양에서도 동물이나 식물이 문양으로 도안화되어 많이 사용됐다.

로마시대에는 식물문양이 성행하였고, 동물문은 유목민족이 즐겨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오고 있다.

신라금관과 같이 동·식물 문양은

동·서양이 접하고 있는 흑해 지방에 살던 유목민들에 의해 수용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곳에서 발전한 동물문양이 유목민들을 통해 중국에 흘러들어가면서

주로 용이나 봉황문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양의 흐름이 변화하고 발전해서 신라금관에 나타난 것으로 해석되고 있는 것이다.

 


◇ 세계에서 가장 독창적인 위세품

더구나 내관인 관모(관 속에 쓰는 모자)의 속내는 자작나무 껍질로 만들었다.

이 나무는 고산지대에 사는 식물로서 시베리아와 같은 북방의 황량한 곳에 무성하고

우리나라 고산지대에도 분포하고 있어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특히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백화수피모(白樺樹皮帽)는

외몽고 노인울라와 남러시아의 쿠르간(무덤)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결국 이렇게 기원전 2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중국의 만리장성 밖의 남러시아 등 유목민들이 사용한 수목 · 녹각을 장식한 관 또한

신라 · 가야의 외관과 유사한 점은 삼국시대 관모의 원류를 북방민족에서 찾는 이유가 되었다.

삼국 중에서도 신라시대의 관모는 북방 아시아 계통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 스키타이적인 문화와 깊은 관계에서 신라나 가야식의 금관으로 변화, 발전되어

결국 화려한 신라금관을 탄생시켰다는 주장이 지금까지 신라금관의 연구결과이다.

고대에 실크로드를 통해 동서교역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증명해주고 있는 유물들이

발굴조사시 많이 출토되고 있어 이러한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이 가운데 경주 황남대총 북분에서 발굴된 나뭇결 무늬 유리잔은 로만글라스 계통으로

실크로드를 통한 교역관계를 증명해주고 있는 훌륭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이렇게 고대부터 동서교역이 성행하고 있었고 신라금관 또한 그 교역의 영향을 받았다지만,

금관은 신라인이 만든 위세품(威勢品)으로 세계에서 그 형태가 없는 독창적인 걸작품으로 칭찬받고 있다.

 


◇ 용도는 영원한 수수께끼로

그렇다면 과연 이 금관의 용도는 무엇이었을까.

단순한 금관의 구실이라면 논의의 대상이 되지 않겠으나,

특수한 형태에 실용성의 문제 등도 있어서 여러가지 추측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말하자면 평소 사용하는 실용품이냐, 아니면 죽음에 함께 하는 장례용이냐,

나아가 어떤 의식에 사용된 의례용이냐. 궁금증은 이와 같이 크게 3가지로 요약되고 있다.

 
실용품으로 보는 견해는 직접 머리에 쓰고 권위를 상징하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특히 어떤 의식, 즉 샤만적인 행사나 국가의 큰 행사가 있을 때 권위의 상징으로서

머리에 쓰는 관이라는 것이다.

이에 반해 무덤의 발치에 함께 묻혀 출토되는 금동신발의 경우

신발 바닥에 스파이크처럼 장식된 것은 실용성이 없고 다만 단순한 부장용품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신발과 함께 출토되는 금관 역시 장송용에 지나지 않는다는 견해도 있다.

그렇다면 과연 금관의 용도는 정확히 무엇인가. 의문은 그대로 남아 있다.

어쨌든 지금까지 발굴된 금관을 연구하면서 얻은 결론은

내·외관 가운데 외관은 의식용의 정관 또는 예관이며 내관은 모두 일상의 실용관이라는 것이다.

즉, 행사의 성격에 따라 내관이나 착용관식의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결론적으로 화려한 ‘외관’은 즉위식이나 외국사신을 맞이할 때나

나아가 국가의 커다란 행사, 즉 하늘이나 조상에게 제사할 때 의식용으로 사용되었고,

죽게 되면 함께 묻어주었다고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신라금관이 정확히 언제부터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언제 사용이 끝났는지 알 수 없고

형태는 동일하지만 금관마다 장식이 각기 다른 것 또한 무엇을 의미하는지 밝힐 수가 없다.

어쩌면 영원히 수수께끼로 남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무리 학문이 발전한다 해도 해결할 수 없는 이것이 바로 고고학의 한계인지 모른다.
- 2003년 06월 02일, 경향

- 조유전, 고고학자

 

 


 

 

 

 

 "금관 뿌리는 시베리아 아닌 신라"

 

임재해 교수 "금관 장식은 계림 신수(神樹)"

 

세계 무대에서도 경쟁력을 갖춘 한국 문화유산은 두 가지뿐이라는 말을

문화유산계 인사들조차 심심찮게 한다.

두 점뿐인 금동미륵반가사유상과 모두 6점이 보고된 신라금관이 그것이다.

이는 그만큼 신라 금관이 세계 어느 지역에서도 보기 힘든 독자적인 산물임을 보여준다.

이 때문인지 그 유래를 찾는 움직임이 활발했다.

 

지금까지 대세는 시베리아다.

19세기 이후 활발한 민속지 조사를 통해 보고된 시베리아 지역 샤먼들이 쓰는 관이

신라 금관을 닮았다 해서 그 뿌리를 아예 시베리아에서 구한 것이다.

 

고고미술사 연구는 편년(編年)이 절반을 차지한다고 할 만큼 제작 연대 추정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편년이 확립되지 않으면 21세기에 제작돼 깔린 서울 종로구청 앞 보도블록이

서기 200년 무렵 풍납토성 백제 전돌로 둔갑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19세기 이후에 제작되고 사용된 시베리아 샤먼들의 철제 관을

그보다 천 수백년 전에 제작돼 사용된 신라시대 금관의 뿌리로 간주하는

시대착오적인 기원 캐기 작업이 이뤄져 왔다.

이런 연구경향에 대해 민속학자인 임재해 안동대 교수가

"너는 여기 있는데 나는 어디로 갔지"라며 다른 곳으로 달려나가 자기를 찾아나선

얼빠진 사람으로 비유하면서 호된 비판을 가하고 나섰다.

 

근간 '신라 금관의 기원을 밝힌다'(지신산업사 펴냄)에서 저자인 임 교수는

"신라 금관의 기원 연구도 꼭 그 짝이다.

신라는 금관왕국이라 할 만큼 일정한 양식의 금관이 경주지역에 집중 분포되어 있는데도

금관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시베리아의 철제 무관(巫冠. 무당이 쓰는 관)에서

그 기원을 찾는다"고 비난했다.

그 결과 "신라 김씨 왕실의 시조를 알타이족에서 찾는가 하면,

아예 신라왕들을 무당왕으로 취급하기도 한다"고 말한다.

 

그의 지적이 얼마나 정곡을 찔렀는지 말해주는 증좌가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1층 역사관 중 무속코너에는 주변 전시품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금빛 찬란한 신라시대 유물이 복판을 차지한다. 경주 서봉총 출토 신라금관이다.

왜 이곳에다가 신라금관을 전시했을까? 임 교수의 말마따나 신라왕을 무당으로 취급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신라 금관이 대표하는 한국문화 기원을 외부에서만 찾은 흐름을

임 교수는 다음과 같이 냉소적으로 말한다.

"(우리 민족의 기원이) 시베리아에 없으면 알타이에 있고,

알타이에 없으면 몽골에 있고, 몽골에도 없으면 흉노에 있다.

흉노에도 없으면 또 다른 북방민족으로부터 연원을 찾아낸다.

북방에서 찾지 못하면 중앙아시아에서 찾고, 거기에도 없으면 남방에서 찾는다.

마침내 우리 문화의 남방기원설이 득세하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이런 그가 찾은 신라 금관의 기원은 어디일까?

여기 있는 나를 두고 엉뚱한 데 가서 그것을 찾는다고 요란을 떤다고 비판했으니,

이런 그에게 그 기원은 자연 한반도와 신라 자체로 귀결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이번 단행본에서

신라 금관이 5세기 무렵 김알지 후손인 김씨왕조에서 출현한 사실을 주목하면서

김씨왕조가 그들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시조 김알지 신화를 시각적으로 형상화한 것이

바로 금관이라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금관의 세움장식은 출(出)자나 사슴뿔 모양이 아니라

모두 다양한 형태의 나무를 표현한 것으로

김알지의 탄강지(誕降地. 임금이나 성인이 태어난 곳)라고 김씨왕권이 주장한

경주 계림(鷄林)의 신수(神樹)를 형상화한 것이다.

따라서 금관의 세움장식은 계림의 신성한 숲이라는 것이다. 700쪽. 

 

이번 책과 같은 시리즈에 포함되어 동시에 선보인

상명대 사학과 박선희 교수의 연구서 '우리 금관의 역사를 밝힌다' 또한

신라 금관의 중국 혹은 북방지역 기원설을 부정하고

고조선 시대 관모(冠帽)에서 그 뿌리를 찾는다.

박 교수의 주장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신라 금관은 한민족 고유성과 정체성 및 계승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372쪽. 

- 2008-05-20  연합뉴스, 김태식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