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찾아 떠나고(답사)

퇴계 이황으로 찾아가는 안동

Gijuzzang Dream 2007. 11. 17. 12:51

 

 

 

 

 

 

 

   <시사단(試士壇)> - 소재지 : 안동시 도산면 의촌리 556


정조 16년(1792) 퇴계 선생의 유덕(遺德)을 추모하여 규장각 각신(閣臣) 이만수를 보내

도산서원에 치제(致祭)케 하고, 그곳에서 과거시험을 치러

총 응시자 7,228명 가운데서 임금이 직접 11명을 뽑아 시상하였다.

영남 인재를 선발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1796년(정조 20) 그곳에 단(壇)을 모으고

비와 비각을 세웠다. 비문은 영의정인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이 찬(撰)했다.

그 뒤 1824년(순조 24년) 개축(改築),

 

1974년 안동댐 건설로 인해 지상 10m 높이의 단을 높이 쌓아, 옛 건물과 비를 그 위로 옮겼다.

선비들의 과거 시험장이었던 낙동강 가의 솔밭은 간데 없고

비석만이 석축으로 둘러쌓은 대(臺)위에 앉아

봄의 갈수기 때는 바위 언덕이 되기도 하는, 섬 아닌 섬이 되어 버렸다.

 

 


 도산서원

 

 


 

질그릇 굽던 가마가 있었다고 하여 도산(陶山)이라 하였고,

퇴계가 서당을 세우고 친필로 <도산서당> 현판을 달았으며,

퇴계 생전에 농운정사와 함께 축조하여 벼슬길에서 물러나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선생이 서거한 뒤 제자들과 유림이 서당 뒤편에 새로 터를 잡아 서원을 지어 오늘에 이르렀다.

 

 

 

 

 

<도산서당>은 남향 세 칸 집으로, 사립문으로 된 서당 출입구 유정문(幽貞門) 이 있다.
서당은 왼쪽부터 차례로 부엌, 온돌방 완락재(玩樂齋), 마루 암서헌(巖栖軒),

그리고 살평상으로 구성되어 질박하고 단아하다.

완락재는 산 속에 기거하며 학문과 수양에 힘쓴다는 뜻이고,

암서헌은 진리를 탐구하며 즐긴다는 뜻이다.

마루 끝에 이어 붙인 살평상은 제자 한강 정구(1543-1620)가 퇴계선생의 뜻을 받아 만든 것이다.
그렇듯, 도산서당에 가면 곳곳에서 건축가 퇴계를 만나게 된다
.

 

암서헌에서 남쪽으로 바라보면 연못 '정우당' 너머로 화단 ‘절우사’가 펼쳐진다.

선생은 생전에 유난히도 매화를 사랑하여 서당 앞뜰에 심어두고 많은 시를 지었다.

 

 

ㆍ열정(冽井) - 물이 깨끗하고 맛이 좋아 선생이 식수로 사용하던 우물.

               즉 우물은 길어도 줄지 않으며 가만히 두어도 넘치지 않는 것이다.

               또 배운 지식은 혼자만의 샘이 되게 하지말고,

               뚜껑 없는 샘처럼 모든 사람에게 베풀 수 있는 우물이 되라는 교학적 의미.

ㆍ몽천(蒙泉) - 산에서 나는 샘물로서 <주역>에서 ‘어린 제자를 바르게 가르친다(蒙以養正)’는 뜻에서 이름붙였다.

ㆍ정우당(淨友塘) - 퇴계선생은 뜰 앞에 작은 연못을 파고 거기에 연(蓮)을 심어 완상하였다.

ㆍ절우사(節友社) - 서당 동쪽 산자락에 조그만 평지를 만들어 거기에 매화, 소나무, 국화, 대나무를 심어두고

                   절우, 즉 절개있는 벗들의 모임이란 뜻을 담아두었다.   

 

 

  

<농운정사>는 제자들이 공부하던 기숙사이다.

'농운정사'는 도홍경(陶弘景)의 시에서 취한 이름으로 언덕 위의 구름을 사랑한다는 뜻이다.

선생이 제자들에게 공부에 열중하기를 권장하는 뜻에서 한자 工자 모양을 본떠서 짓게 하였다.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이며 공부하던 동쪽마루를 '시습재' ,

기거하는 가운데 온돌방을  '지숙료' ,  휴식하던 서쪽마루를  '관란헌' 이라 하였다.

 

시습재(時習齋) - <논어>의 한 구절을 취한 것으로 배운 것을 때때로 복습한다는 뜻.

관란헌(觀瀾軒) - 흐르는 물결을 보면서 세월이 가기 전에 공부에 열중하라는 뜻.

 

 

 

도산서원의 정문, <진도문>

도(道)의 세계로 진입하는 첫 번째 문이란 뜻이다.

광명실은 진도문을 중심으로 동, 서 양쪽에 배치된 서원의 장서고(藏書庫)이며

습해를 막기 위해 누각식으로 지어졌다.

"수많은 서적이 인간에게 광명을 준다”라는 뜻에서 이름 붙인 것이다.

동광명실은 옛 전적을 수장한 곳으로 내사본(內賜本)을 위시한 귀중한 책들이 많으며,

서광명실은 역대 전장록(傳掌錄) 등 서원 관계문서와 근래에 발간된 서적을 보관하고 있다.

 

<전교당>은 전범을 보이고 교육을 행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진도문에 들어서면 바로 정면에 서원 정당(正堂)으로 1574년(선조 7)에 건립되었다.

<도산서원(陶山書院)> 현판은 1575년 선조의 사액(賜額)으로

당시 명필인 석봉 한호가 어전에서 쓴 것이라고 한다.

 

 

 

강당‘전교당’과 동재인‘박약재’, 서재인‘홍의재’로 구성되어 있다.

한존재(閑存齋) - 사특한 마음을 막고 진실한 마음을 가진다는 뜻.

박약재(博約齋)=동재 - 문식(文識)을 넓히고 예도(禮度)로써 행실을 적법하게 한다는 뜻.

홍의재(弘毅齋)=서재 - 공부하는 책임이 무겁고 갈 길이 멀기 때문에 넓고 굳세어야 한다는 뜻.

장판각(藏板閣) - 퇴계선생 문집을 비롯한 여러 종의 목판이 보관되어 있는 곳이다.

ㆍ상덕사(尙德祠) - 도덕을 숭상한다는 뜻, 퇴계선생의 학덕을 숭배한다는 의미이다. 도산서원 제일 뒤쪽에 위치하고 있다.

                  퇴계선생의 신위를 모시고 향사(享祀)를 지내는 사당으로 선조 7년(1574) 건립되었으며,

                  정면에 퇴계선생 신위‘퇴도이선생’을, 그 오른쪽으로 제자 월천 조목(1524-1606)을 배향하였다.

 

 

 

도산서원 전시실에 가면, 투호, 명아주로 만든 청려장, 청자 돈을 만날 수 있다.
또 혼상(渾象)과 함께 원생들이 지킬 규율을 적어둔 원규(院規)도 있다.




 퇴계태실 (온혜종택)  

소재지 : 경북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 604

 

퇴계 이황의 윗대 조상들은 두루마을에 살았는데

그 두루마을에서 온혜로 옮겨온 것은 이황의 조부인 이계양(李繼陽 : 1424~1488)이다.

 

 

대문에는 <성림문(聖臨門)> 이라 하여, 퇴계가 태어나신 곳임을 알려주며, 노송정이 보인다.

문에는 또한 ‘중수기’가 판각되어 높이 매달려 있다.

"연산 7년, 신유년 11월 기해일, 진시에 퇴계선생이 온계리 집에서 출생하셨다.

그 하루 전날 선생의 모친이신 정경부인 춘천박씨께서 공자가 문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으니,

참으로 좋은 꿈이었다......"

 

온혜종가, 퇴계태실의 정자 당호가  <노송정>

퇴계의 조부 이계양(李繼陽 : 1424~1488)의 호가 노송정공(老松亭公)

안동지방의 ㅁ자 가옥구조형태로,

왼편으로 보이는 사랑채, 그리고 안채로 들어가는 문에는 묵서가 붙어있다.

 

 


 

퇴계가 태어났다는 아주 좁은 방으로, 좁은 안마당 앞으로 돌출된 누마루형태를 보인다.

ㅁ자 형상의 태실 주변에는 좁은 난간이 둘러쳐져 있고,

그 정면 남쪽으로는 <퇴계선생태실> 현판이 높이 붙어있다.

태실은 오똑하게 솟아있는 느낌이고 방안은 비좁아서

큰사람이 누우면 머리와 발끝이 양쪽 벽에 닿을 만하고,

폭은 두 사람 정도가 겨우 누울 수 있는 정도이다.

 

 <노송정> 옆에 자리한 사당.

 


 

 퇴계종택  

소재지 : 경북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상계동 468-2

 

퇴계 이황의 후손들이 지금의 종택 터에 언제부터 집을 세우고 살게 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한서암 동남쪽 20m 쯤 되는 곳에 자리잡고 있는 지금의 종택(宗宅)은

화재로 불타 없어지고, 지금의 모습으로 재건된 것은 1929년의 일이라고 한다.

<퇴계선생구택>이라는 현판.......

 

<해동추로> 곧, 해동의 '추로지향' 안동.....그곳에 곧 퇴계가 있었으니.....


대문 위에는 홍살이,

그리고 <열녀 통덕랑 행 사온서 직장 이안도 처 공인 안동권씨지려>라는 13대조모의 '정려문'.....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은 가을달과 찬물이 함께하는 정자라는 뜻이다.

 

 

종택과 추월한수정 사이에는 깊이 물러나 앉은  <사당> 이 있다.

  

 

퇴계의 매화사랑은 유명하다.

그가 죽음에 임했을 때 자신의 초췌해지고 병든 육신을 '매형(매화형)'에게 보이고 싶지 않으니

평소에 가까이 두고 보았던 매화 화분을 치우라고 하였다는 일화처럼 

퇴계의 매화사랑은 그만큼 절절하다.

지금 종택의 사랑채 울 밖에 작은 매화나무들이 일선으로 심어져 있고, 울 안에도 역시 그러하다.

담을 타고 넘겨다보이는 안채에도, 또 공간이 있기만 하면 매화나무는 여지없이 들어서 있다.

종택 울 밖 서북쪽 모서리에는 세 그루의 큰 매화나무가 버티고 서 있다.

그리고 그 매화나무와 사당 사이의 공간은 매화나무밭으로 가꾸어지고 있으니,

매화로 퇴계 이어가기 하는 퇴계종택이다.

 

종택 앞으로 흐르는 토계 앞쪽으로 퇴계가 만년에 머물다 돌아가신 <한서암(寒棲庵)>

빈터로 푯말만 남아있고 또 <계상서당>은 현재 복원중이다.

퇴계종택을 조금 지나 퇴계묘소를 향하는 길에 만나는 당산나무와 당집...

지금도 그 앞에는 소주병이 있고, 서낭당나무에는 비선했던 흔적들이 여기저기 남아있었다.

유교의 본향과 민속의 본향답다......


 

 


 퇴계묘소

종택에서 남쪽으로 약 1㎞ 가량 떨어진 토계동 건지산 남쪽 산봉우리에 있다.

 

 

퇴계의 이름은 황(李滉 : 1501~1570),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 도옹(陶翁), 퇴도(退陶), 청량산인(淸凉山人) 등이며, 관향은 진보(眞寶)이다.
퇴계는

1501년(연산군 7) 11월 25일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현 노송정 종택 태실)에서 태어났고, 

70세 되던 1570년(선조 3) 12월 8일 토계리의 한서암에서 세상을 떠났다.

  

퇴계선생년보」에 따르면,

1570년 12월 3일 자제한테 '남에게서 빌려 온 서적을 돌려보내라' 하고,

집안사람에게 기도하지 말도록 했다. 다음날 조카 영(寗)에게 유계를 받아쓰도록 했다.

내용은 

1) 조정에서 내려주는 예장을 사양할 것(예를 갖춘 성대한 장례를 피하라는 뜻)

2) 비석을 세우지 말고 조그마한 돌의 앞면에는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

(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 : 도산에서 물러나 만년을 숨어산 진성 이씨의 묘라는 뜻)라고만 새기고,

뒷면에는 고향과 조상의 내력, 뜻한 바와 행적을 간단하게 쓰도록 당부하였다.

 

퇴계묘소의 비석은 특이하게 동쪽을 등에 지고 서쪽을 바라보고 서 있으며,

비석의 윗부분에는 좌우대칭의 구름무늬 한가운데 앞면에는 태양이 뒷면에는 반달이 그려져 있다.
이 비석은 원래의 것이 아니라 1906년에 다시 세운 것이라고 한다
.

퇴계의 유언에 따라

묘비의 앞면에는  '퇴도만은 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 라고 써있고,

선생의 자명과 고봉 기대승이 지은 묘갈문이 새겨져 있다.


묘소 앞으로는 동자석이 좌우로 자리잡고 있고, 멀리는 망주석이 양쪽으로 벌려 서 있으며,

더 앞쪽으로 나아가서 문인석이 좌우로 서 있다.

 

 

 

 두루종가

 

두루종택(일명 周村종택, 경류정종택) - 안동시 와룡면 주하리 주촌(周村. 속칭 두루마을)

두루종가의 전면 모습.

왼쪽에 경류정뚝향나무, 사랑채(고송류수각) 누마루가 보이고,

그 옆으로 안채 들어가는 문, 맨 앞쪽으로는 행랑채가 약간..........

사랑채에 걸려있는 "고송류수각"의 당호는 현 종손 이세준씨 고조부의 호이기도 하다.

 

 


100명 이상이 이 <뚝향나무> 아래에 자리잡아 앉을 수 있다는........ 너른 향나무의 위용......

 

"뚝향나무는 향나무의 변종으로 줄기가 곧게 서지 않고 가지가 수평으로 퍼지는 점이 보통의 향나무와 다르다. ‥‥

(이 뚝향나무는) 나이 600년, 용이 꿈틀거리며 하늘로 오르는 듯한 형상 …

조선 세종 때 선산부사를 지낸 이정(이자수의 둘째 아들인 이운후의 아들)이 정주판관으로 있으면서

평북 약산성 쌓기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올 때 가져다 심은 것 ‥‥ "

뚝향나무 앞에 서 있는 안내판의 명문이다.

 

"이 나무의 유래를 기록한 <노송기>에는 선산공께서 세종조 판관으로 재직시

북쪽 오랑캐의 침공을 막기 위한 평북도 영변진 설치와 약산성 중축의 대역사를 감독하여 공적을 남기시고

귀향길에 약산 향송 3주를 옮겨와 한 그루는 본가인 경류정 앞(물론 당시에는 경류정이 없었다) 정원에 심으시고,

또 한 그루는 공의 셋째 아드님 판관공(이계양, 증직 이조판서)이 온혜 기지를 열 때 심으셨으며,

나머지 한 그루는 외가쪽 후손인 선산박씨 근손씨 가에 심으셨다고 ‥‥

그러나 조부님(이용순, 1982년 별세)의 고증에 의하면 온혜 노송나무는 임인년 폭설에 동사하였고,

지금(1983년)부터 약 46년 전 조부님께서 손수 우리 집 향나무 가지를 취목하여 옮긴 것이 지금의 온혜종택 향나무이며,

선산박씨 가는 임란(1592) 때 왜병이 뿌리를 잘라버렸다고 한다."

이상은 ≪열화≫ 4호에 이세준 씨가 기고하고 있는 <천연기념물 제 314호>라는 제목의 글 속에 나오는 내용이다.

 

어느새 까치 두 마리가 종가의 망와 위에도......
"기사년 4월 중건"의 명문으로 성주제삿날이 되었다는 근본을 보이는 망와. 이화꽃(?)같은 문양도 .....

가장 높고 볕바른 뒷쪽에 자리잡은 <사당>

<경류정>의 현판.

 

좁은 통로위를 지나면 경류정, 그 앞에는 오죽(烏竹)이 운치를........

 

행랑채 앞쪽에서 옹기종기....... 안채 노종부할머님을 부르다가,

결국 외출중이어서 못 뵙고 발걸음을 돌렸다 ...

 




 작산정사, 가창재사  

 

1480년(성종 11)에 이황(李滉)의 조부 3형제가 창건하였고,

1715년(숙종 41)에 사림의 건의로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정사에는 앞면에 강당(講堂)을 두고,

그 뒷면에 송안군의 위패(位牌)를 봉안(奉安)한 사당(祠堂)을 세웠다.

 

송안공(松安君) 이자수는 고려말엽의 인물인데 진보에서 살다가  왜구를 피하여

안동부 서쪽 현재의 풍산읍 마애리로 다시 옮겨 살았으며

만년에 또 주촌(周村)으로 옮겨 살았기 때문에 진성이씨 안동 입향조라 한다.

묘소는 서후면 명리 사리곡(沙理谷)에 있는데,

1600년(선조 33)에 후손인 현감 이정회(李庭檜) 공이 묘갈을 세웠다.

  

안동에 처음으로 진성이씨 가문이 자리를 잡은 입향조, 송안군 이자수를 기리기 위하여

퇴계선생의 할아버지 삼 형제분이 뜻을 모아 위패를 모셨던 것.

현재, 6대손 기암(企庵) 완(完), 7대손 송계(松溪) 형남(亨男), 8대손 송간(松澗) 정회(庭檜) 배향.

 

작산정사 위 동쪽에는 가창재사가 세워져있다.

재사는 이정(李禎)의 묘제(墓祭)를 위하여 마련한 건물로 성종 11년인 1480년에 건립.

기록에 의하면 1775년 봄 가창동대(可倉東臺)에 강당과 주사 12간을 신축하였다고 한다.

 

 

정사로 들어가는 입구의 송림 조성은 1776년에 이루어졌다.

소나무 숲의 조성은 풍수적인 의미도 있지만

만약 이 소나무 숲이 없었다면

작산정사를 바라보는, 또 작산정사에서 내려다보는 계곡의 입구는 매우 허전하였을 것이다.

 

 


 

 제비원석불  

 



-  어두워지기 시작하면 조명받는 부처님. 제비원석불, 이천동석불.

  

안동시내에서 북쪽으로 6㎞ 정도 영주방면으로 국도를 따라가면

이천과(泥川洞) 태화산(太華산) 기슭의 소나무 우거진 곳에 제비원 석불이 자리잡고 있다.

 

영남에서 충청도나 경기도, 또 서울로 갈 때에

안동을 거쳐 소백산맥을 넘어야 했는데, 그 길목에 있던 것이 바로 제비원이다.

많은 전설을 남긴채, 자비로운 미소를 머금고 있는 이 제비원 석불은

자연적으로 생긴 화강암의 암벽에

전신상(全身像)의 높이 약 12m, 별개석으로 된 두부(頭部)의 높이 2m 로,

우리나라에서 충남의 은진미륵 다음으로 큰 석불이며, 보물 제115호로 지정되어 있다.

신라 선덕여왕때 의상조사가 그 곳 5층석탑 앞 토굴에서 수도를 했다고도 전한다.

 

이 웅대하고 우아한 석불이 있는 제비원은

 "성주본향 어디메냐, 경상도 안동땅의 제비원이 본이더라‥‥" 하는 성주풀이의 발상지일 뿐더러,

 "선어대 제비원, 명승고장에 끼쳐 주신 찬란한 문화‥‥" 로 시작되는 안동시민의 노래에 나올만큼

안동의 상징과 신앙의 대상이 되어 정신문화의 한 기둥이 되고 있다.

- 2006년 11월24일 답사 . . . 기주짱 정리.

 

 

 

 

- 마음에 향기를 담고 / 해금, 가야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