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 · 부여는 ‘君子의 후예’ 풍류 즐기고 禮 중시
은(상) 마지막 왕 주(紂)의 악행에 대해 변명할 필요는 없다. 충신의 심장을 갈랐고, 육포를 뜨고 젓을 담가 맛보게 했으며,
녹대(鹿台)를 만들어 세금으로 거둔 돈을 가득 채웠으니까.
폭군은 더 나아가 수많은 악공과 광대들을 불러놓고 주지육림의 난행을 펼쳤다.
벌거벗은 남녀들이 그 안에서 서로 쫓아다니게 하면서 밤새도록 술판을 벌인 것으로도 악명을 떨쳤다.
(사기 ‘은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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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 인쉬 거마갱(車馬坑)에서 발굴된 마차유적.
은(상)의 위용을 짐작할 수 있는 자료이다. |
- 주(紂)왕을 위한 변명 -
왕의 악행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지만
“악공과 광대를 불러놓고 밤새도록 술판을 벌인 일”에 대해서는 다소간 할 말이 있다.
바로 음주가무야말로 상나라 풍습의 영향을 받은 우리 민족의 ‘전매특허’가 아닌가.
“(은나라 정월에) 하늘에 제사 지내고 음식과 가무를 즐겼다(連日飮食歌舞).
밤낮으로 길을 가다가 노인 아이 할 것 없이 하루종일 음악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부여조)는 부여 풍습이 대표적이다. 마한도 그랬다.
“(5월이면) 파종을 마치고 신령께 굿을 올린 뒤 무리가 모여 노래하고 춤추며 술을 마시는데
밤낮으로 쉼이 없다.(群醉歌舞飮酒 晝夜無休)" (삼국지 위지 동이전 마한조)
이는 왜 현재 우리나라 전국에 4만여곳의 노래방이 성업 중인지를 설명해주는 근거가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 민족이 아무런 생각 없이 음주가무를 즐겼던 것일까.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 보듯 우리 민족은 무절제한 음주가무가 아니라
하늘에 제사를 지낸 뒤 며칠씩 밤낮으로 술을 마시며 놀았다.
그것은 천·지·인이 만나 한바탕 신명을 떨친 축제였다.
천지신명과 조상에게 만물의 소생을 기원하고 추수감사를 드리는 전통축제였던 셈이다.
조흥윤 한양대 교수는 “하늘에 제사를 올리고 축제를 벌인 것이 바로 굿이고,
그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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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시기 순장무덤인 랴오둥반도 강상무덤. |
“삼국시대 화랑도·풍류도와 고려시대 연등회·팔관회 등은 종교행사 형식이었지만, 내용면에서는 음주가무를 포함한 옛 제천의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무(巫)와 불교를 억압한 조선 때 크게 위축되었지만
신명과 음주가무라는 한국인의 민중문화는 면면히 이어졌다.” (조흥윤의 ‘한국문화론’ 동문선)
그렇다면 주왕의 난행은 어찌된 것인가.
동이족의 나라 은(상)을 멸망시키고 주나라를 세운 한족은 의도적으로 은나라와 주왕을 무도한 나라,
그리고 천하를 난도질한 망나니로 폄훼했다.
사마천의 사기는 한족이 기록한 ‘승자의 역사’인 셈이다.
일례로 축제 때 젊은 남녀들을 ‘풀어놓아’ 짝을 짓게 만드는 풍습은
지금도 동남아와 아프리카 등을 조사한 민족지 연구에서 심심치 않게 보이는 자료이다.
고대사회에서 이런 정도의 축제는 흉볼 ‘깜’도 안되는 자연스러운 풍습이다.
- 동이는 군자의 나라, 불사의 나라 -
은(상)나라가 무도하다고? 천만의 말씀이다.
탐사단이 추적해왔듯 이른바 동이족의 본향인 발해연안은
BC 6000년 전부터 문명의 씨앗이 뿌려진 곳이다.
발해문명의 창조자들은 이미 훙산문화(홍산문화 · 紅山文化, BC 4500~3000년) 때
하늘신과 조상신에게 제사를 드렸다.
지난해 7월 말 뉴허량 유적에 선 이형구 선문대 교수의 말은 의미심장했다. “이미 이곳 둥산쭈이(동산취, 東山嘴)의 제사유적과
뉴허량(우하량, 牛河梁)의 여신묘와 적석총에서 봤잖아요. 하늘신, 지모신에게 제사지내고,
그리고 적석총에 마련된 제단에서 조상을 기린 그런 모습들을 그릴 수 있잖아요.
웅녀의 원형이 뉴허량 여신묘에 그대로 나타나잖아요.
그리고 적석총 제단은 지금으로 따지면 조상에 대한 시제를 올리는 성스러운 장소라고 봐야 합니다.”
이교수는 “발해문명 창조자의 일파가 서쪽으로 남하해서 건국한 상나라에서는 제천(祭天),
즉 하늘에 대한 제사와 조상에 대한 제사(祭祖)가 확립된 시기였다”고 말한다.
중국학자들도 훙산문화 시기에 벌써 신권과 왕권이 합쳐진 제정일치 시대가 개막되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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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으로 만들어진 부여인의 얼굴 |
그런 점에서 동이족의 나라 은(상)을 극악무도한 나라로 폄훼하는 것은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후한서’ 동이열전(5세기 유송의 범엽이 저술)과 ‘설문해자’(說文解字·후한 때 허신·許愼이 펴낸 최고의 자전)를 종합해 보자.
“동방은 이(夷)이며, 이는 근본이다. 만물이 땅에서 나오는 근본이다.
동이의 풍속은 어질다. 천성이 유순하다. 군자의 나라요, 불사의 나라이다.
(天性柔順 易以道御 至有君子 不死之國焉)
때문에 공자는 ‘중국에 도가 행해지지 않으니 나는 군자불사의 나라인 구이(九夷)에 거하고 싶다’
(故孔子欲居九夷)고 말했다.”
‘후한서’ 동 이전과 ‘삼국지’ 위지 동이전은
동이의 역사를 나열하기 전 ‘서론’ 형식으로 쓴 전언(前言)에서 이렇게 칭찬하고 있다.
“동이는 모든 토착민을 인솔하여 즐겁게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며 그릇은 조두(俎豆·제기)를 쓴다.
중국에서 예를 잃어버리면 사이(四夷)에서 구한다는 것은 믿을 만 한 일이다.
(중국) 천자가 본보기를 잃으니 이것을 사이에서 구했다.”
“난 은나라 사람이다.”(공자의 고백) 동이가 예(禮)의 민족임을 중국사료도 인정한 것이다. 그뿐이랴.
만고의 성인인 공자도 동이족의 후예였음을 고백했다.
“천하에 도가 없어진 지 오래다. ~장사를 치를 때 하나라 사람들은 동쪽 계단에,
주나라 사람들은 서쪽 계단에 모셨지만 은(상)나라 사람들은 두 기둥 사이에 모셨다.
어젯밤 나는 두 기둥 사이에 놓여져 사람들의 제사를 받는 꿈을 꾸었다.
나는 원래 은나라 사람이었다.(予始殷人也)”(사기 공자세가)
죽음을 앞둔 공자의 생생한 육성유언이었다.
“주나라가 하나라와 은나라의 제도를 귀감으로 삼았기에 나는 주나라를 따르겠다”고 선언했던 공자.
하지만 그런 공자도 군자의 나라이자 불사의 나라인 동이로 가고 싶다고 했다.
결국 죽음에 이르러 “나는 원래 은나라 사람”이었음을 세상에 알린 것이다.
은나라 주왕 때 세 명의 성인이 있었다. 바로 훗날 기자조선을 세운 기자(箕子)와 송나라를 세운 미자(微子),
그리고 주왕에게 심장을 도륙당한 비간(比干) 등이다.
미자는 주왕의 서형(庶兄)이었다. 은을 멸한 주나라는 미자에게 은(상)의 제사를 모시게 했다.
미자는 ‘미자지명(微子之命)’을 지어 뜻을 알리고는 송나라를 건국했다.
그런데 공자는 바로 그 송나라 귀족의 후손이었다.
공자는 동이족의 후예답게 어릴 때부터 타고난 듯 예법을 따랐다.
“소꿉장난을 할 때 늘 제기(祭器)인 조두(俎豆)를 펼쳐놓고 예를 올렸다.”(사기 공자세가)
‘조두’에서 조(俎)는 제사지낼 때 편육을 진설하는 도마처럼 생긴 제기이고,
두(豆)는 대나무·청동·도자기 등으로 만든 제사지낼 때 음식을 담는 그릇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조두라 하면 제기를 뜻한다. 공자는 만능 뮤지션이었다. 동이의 후예다웠다.
때는 바야흐로 춘추시대 말기. 세상이 어지러워져 자신의 숭고한 뜻을 알아주지 않자 거문고를 뜯고,
경(磬, 돌 혹은 옥으로 만든 타악기)을 치고 노래를 부르며 안타까워했다.
음악에 대한 공자의 철학은 심오했다. “감정이 소리에 나타나 그 소리가 율려(律呂)를 이루면 그것을 가락이라 한다.
세상의 가락이 편안하고 즐거우면 화평하지만 어지러운 세상의 가락은 슬프고 그 백성은 고달프다.”
우리 민족의 무용·문학·음악 등 예술의 바탕에 공자의 음악철학이 깔려있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 순장제도의 실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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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없는 순장자들의 유골 |
중국학계는 또한 은나라의 습속인 순장(殉葬)제도를 야만성과 연결짓기도 한다.
은(상)의 말기 도읍지인 안양(安陽) 인쉬(은허 · 殷墟)의 제1001호 대묘에서 확인된 360명의 순인(殉人)의 예를 들면서….
중국의 황잔웨(황전악 · 黃展岳)는
“순장과 같은 야만적인 습속은 은나라 통치세력권에서 성행한 것으로 은의 동방 회이와 동이 지역에서 널리 유행했다”고 비난했다.
그도 그럴 것이 1963~65년 랴오둥 반도 강상(崗上) · 러우상(樓上)유적에서는 100여명, 수십명을 순장한 고조선시기의 순장무덤이 발굴된 바 있다.
그리고 “부여에서는 사람을 죽여 순장했는데 많을 때는 100여명이 된다”(삼국지 위지 동이전)고 했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동천왕조를 보면
“248년 왕이 죽자 순사하는 자가 많아 이를 금지하도록 했지만, 그래도 속출했다”는 기록도 있다.
또 신라는 지증왕 3년, 즉 502년에 비로소 순장제도를 금지했다.
하지만 중국에서도 춘추전국시대 진(秦)나라 목공이 죽었을 때 무려 177명을 순장시킨 기록도 있다.
순장은 고대사회에서 유행한 장례풍습이었다.
진시황이 죽었을 때는 1만여명을 생매장했으며, 명나라 성조가 죽자 무려 3000여명의 비빈이 순장됐다.
이형구 교수는 “순장제도는 전제적인 지위와 통치권을 갖춘 통치자의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라면서
“동이의 습속이 야만적이냐 아니냐는 단순논리로 순장제도를 해석하면 안될 것”이라고 말했다.
- 부여와 은(상)의 끈질긴 인연 -
사서를 들춰보면 눈에 띄는 점이 나오는데,
그것은 ‘부여’를 늘 맨처음에 올려놓고는 돋보이게 기술한다는 점이다.
진서(晋書 · 당태종 때 지은 진왕조의 정사)를 보면
“부여 사람들은 강하고 용감하며 모임에서 서로 절하고 사양의 예로 대하는데 중국과 같은 것이 있다
(會同揖讓有似中國)”면서 중국과의 친연성을 강조한다.
“오랑캐의 나라지만 조두(俎豆)를 사용하여 음식을 먹고~, 풍습이 대체로 중국과 비슷하다
(大體中國如相彿也)”(삼국지 위지 동이전)는 기록도 무시할 수 없다.
조두는 바로 공자가 어릴 때 소꿉장난을 했던 제기가 아닌가.
물론 중국측 기록으로 따져봐도 부여가 BC 3세기쯤부터 494년 고구려에 병합될 때까지
700년이나 이어진 강력한 왕국이었기에 비중있게 다뤘을 것이다.
하지만 중국과의 친연성을 유난히 강조하는 것을 보면
은(상)으로부터 이어진 끈질긴 인연의 끈이 작용한 게 아닐까.
부여, 즉 우리 민족과 은(상)의 수수께끼를 풀어줄 단서가 또 있으니 바로 점복신앙, 즉 갑골문화이다. - 2008년 02월 22일, 경향 - 후원: 대순진리회, <뉴허량 · 선양 · 하얼빈/ 이기환기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