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자 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여행] (13)-(14)
국보 205호 중원 고구려비 | |||||||||||
향토사학회가 발견한 ‘충청도의 광개토대왕비’
보물(봉황리마애불상군 · 보물 1401호)을 찾지 못했을 거야. 그뿐인가. 고려 광종이 954년 어머니 신명순성왕후를 기려 지은 숭선사의 위치를 알려주는 명문도 확인했잖아.”
당시에는 문화재 축에도 끼지 못했던 기와를 주우러 다녔고, 모임의 이름도 없었다. 그러나 1979년 9월5일 답사팀이 어느 식당에서 디딤돌로 사용하던 돌에서 연꽃무늬를 발견했다. 답사팀은 “고려 충렬왕 3년 충주성을 개축하면서 성벽에 이 연꽃을 조각했다 해서 꽃술 예(蘂)자를 써서 충주를 예성(蘂城)으로 일컬었다”는 고려사 기록을 떠올렸다. 이 돌은 충렬왕 당시 성을 쌓을 때 사용한 신방석(信防石 · 일종의 주춧돌)이었던 것이다. 이름을 붙인 겁니다.”(장준식 교수) 그래서 이 기회에 기념사진이라도 찍자고 해서 모였습니다.” 중앙탑(국보 6호) 부근을 답사하면서 기념촬영을 했고, 내친김에 중원 가금면 하구암리 묘곡에 있는 석불입상과 석재부재를 조사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답사단을 태운 차가 중앙탑을 지나 입석(立石)마을을 지나는 순간이었다. 일전에 제가 보았을 때는 백비(白碑·비문의 내용을 새기지 않은 비석) 같았는데….” 눈을 비벼가며 비석을 살펴보는 순간 “아!”하는 감탄사들이 일제히 터졌다. 눈에 불을 켜고 손으로 더듬어보니 삼면에 글자가 빽빽이 새겨지 있지 않은가. 그리고 안성(安城)이라는 글자를 읽었는데, 우리는 고개를 갸우뚱거렸어요. 충북에 무슨 경기도 안성? 그런데 이 ‘안성(安城)’은 나중에 고모루성(古牟婁城 · 고구려성)이었는데, 당시엔 안성으로 읽었던 거죠.”(장준식 교수)
사실 마을에서도 이 비석에 대한 두가지 전설이 내려오고 있었다.
즉, 먼저 조선 숙종이 이곳을 지나다가 마을에 사는 전의(全義) 이씨 문중에게 두 개의 돌기둥(石柱)을 기준으로 그 안쪽의 산과 밭을 하사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 하나의 이야기는 이 마을 사람의 18대 조상(15세기)이 경상감사를 하다가 순직해서 유해를 남한강으로 운구하는 도중에 이곳 부근에서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 그래서 이곳 하구암리 통점산에 산소를 정하고 그 분의 공적을 기려 땅을 하사하면서 이 문제의 입석을 포함해서 3개의 돌기둥으로 경계를 삼았다는 것이다. 이 비석도 쓰러졌다. 그러나 마을청년들이 ‘칠전팔기(七顚八起)의 마을’이라는 구호비를 세우고는 바로 그 옆에 쓰러졌던 비석을 다시 세워 마을의 상징으로 삼았다. 이러니 비석은 그저 토지경계비일 뿐이고, 그래봤자 조선시대 비석인데, 무엇이 그리 중요할까 하는 의견도 있을 수 있었다. 혹시 진흥왕순수비류의 중요한 비석일 수도 있다는…. 김예식은 그 해(1979년) ‘예성문화(蘂城文化)’ 창간호에 ‘중원고구려비 발견경위’를 생생한 필치로 그려내고 있다. 황 박사님은 ‘충주에서 진흥왕순수비류가 발견되어야 하는데, 만약 고비(古碑)가 발견되면 꼭 연락해달라’고 말씀하셨다.” 이 지역에서 진흥왕순수비 같은 비석이 나올 것이라 예측한 바 있다. 역시 그의 예견대로 1년 뒤인 1978년 단양에서 진흥왕대에 세워진 신라 적성비가 발견된다. (경향신문 9월6일자 참조) 어떻든 김예식은 황 교수의 이야기가 늘 귓전을 맴돌았다. 그랬기에 입석마을 비문을 예사롭게 보지 않은 것이다. 그런 지식을 토대로 이 비석이 고식(古式)의 풍취를 안고 있었다. 또 조선시대 것이면 어떠랴. 비문을 읽을 수 있다면 당대의 사회상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다.” 봉황리 마애불상군(이 역시 1978년 예성동호회가 찾았다)을 답사하러 온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문화재관리국이 중원군 문화공보실장이던 김예식에게 안내를 부탁한 것이다. 약속날짜는 4월5일 식목일이었다.
황 교수가 석비가 있다는 말을 듣고 제자인 정영호 교수에게 연락하여 “함께 가보자”고 한 것이다. 하지만 김예식은 마음이 급했다. 비석을 한바퀴 돌아보시는 그 분의 표정이 심상치 않더군요.” 원래의 목적지인 마애불상군이 있는 봉황리로 떠났다. 문제의 비석은 정영호 교수와 예성동호회의 이노영 회원 등이 남아 탁본하기로 했다. 김예식이 봉황리 답사 도중에 황수영 교수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온통 그 비석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던 것이다. 마음은 콩밭에 가있고…. 안절부절 못했습니다.”(김예식) 다방 실내 장식용 병풍에 걸었습니다. 정영호 교수는 탁본 1장을 일행에게 주고는 친지를 만난다고 나갔습니다. 그런데….” 황수영 교수와 일인학자 둘, 예성동호회 김풍식, 장기덕, 최영익, 이노영, 허인욱과 김예식 등 9명은 흥분감에 몸을 떨었다. 이 “○○대왕”을 “진흥대왕(眞興大王)”으로 오독한 것이다. 진흥으로 볼 수밖에 없었겠지.”(조유전 관장) 그날 석비를 탁본한 정 교수는 이미 이 석비의 글자와 중요성을 간파하고 있었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
7일, 보슬비가 내리는 가운데 석비의 이끼를 걷어냈다. 한 여인이 달려와 “예배를 해야 한다”고 거듭 요청하는 것이 아닌가. 정순택(당시 57)이라는 여인이었다. 시할아버지부터 3대째 이 석비에 기도해왔는데, 그도 여기서 기도한 뒤에 아들을 낳았다는 것이었다. 그 아들이 당시 영남대 졸업반이었다. 온전하게 남아있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모두 입석마을 사람들의 공이다.”(정영호 교수) ‘前部大使者’ ‘諸位’ ‘下部’ ‘使者’ 등 고구려 관직명이 주로 보이는 게 아닌가. 특히 처음에 안성(安城)으로 오독했던 글자가 자세히 보니 고모루성(古牟婁城)이 분명했다. 고모루성이면 바로 광개토대왕비문에 보이는 바로 그 성의 이름이 아닌가. 고구려 관직명과 고구려성 이름이 보이는데 고구려라는 명문은 보이지 않고….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때 서울에서 버스를 놓치는 바람에 뒤늦게 현장에 도착한 김광수 당시 건국대 교수가 탁본을 보더니 대번에 말했다. 진흥왕에 대한 인상이 워낙 강렬해서 ‘진흥대왕(眞興大王)’으로 읽었던 것이었는데…. 선입견이 없던 김 교수가 그걸 고려(高麗)로 바로잡은 것이다. 충북지역에서 광개토대왕비와 비슷한 고구려 석비가 발견되었으니…. 그럴 만도 했지.”(조유전 관장)
- 경향, 2008년 09월 19일 / 09월 26일 -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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