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 여행] (11)
강원도 정선 아우라지의 청동기마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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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흐르는 강물따라 문명이 어우러지다 택리지(擇里志)를 쓴 이중환(1690~1756년)은 강원도 정선 땅을 걸으면서 혀를 내둘렀다. 요즘에야 도로가 뻥 뚫려 있지만 예전에는 “산 첩첩 하늘 한 뼘”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두메산골이었다.
기자는 조유전 토지박물관장, 이재 한국국방문화재연구원장 등과 함께 아우라지를 찾았다. 노추산을 돌아 구절리를 거쳐 흘러내려온 송천이 어우러진다 해서 붙은 아름다운 우리 말이다. 한강의 숨이 끊어질 듯 최상류에 놓인 이 아우라지에 예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다니…. 영월 쌍굴유적, 횡성 중금리 등 남한강 유역에서 신석기 유적들이 발견되었어요.”(조 관장) 확인됐고, 삼국시대 고분과 산성유적들이 다수 보이고…. 강변을 따라 있는 충적대지에서 사람들이 끊임없이 살아왔다는 얘기죠.”(지현병 강원고고문화연구원장)
조성한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그 뜻을 접어야 했다. 강변의 충적대지가 바로 신석기시대부터 조상들이 집단으로 살았던 흔적이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청동기 주거지가 무려 28동이 나왔는데요. 그러나 단순히 많이 나왔다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윤석인 강원고고문화연구원 조사1부장) 이른바 덧띠새김무늬토기(각목돌대문토기 · 刻目突帶文土器 · 눈금 같은 무늬를 새긴 덧띠를 두른 토기)의 출현이다. 독자들은 아마도 지난해 초 2007학년도 고교국사교과서에 수정된 청동기 기원문제에 대한 치열한 논쟁을 떠올릴 것이다.
“신석기시대 말인 기원전 2000년쯤에 중국 랴오닝(遙寧), 러시아 아무르강과 연해주 지역에서 들어온 덧띠새김무늬토기가 앞선 빗살무늬 토기문화와 약 500년간 공존하다가 점차 청동기시대로 넘어간다. 이때가 기원전 2000년께에서 1500년께로 한반도 청동기시대가 본격화된다.”(2007년판 국사교과서) 한반도 청동기문화의 기원을 500~1000년 올려본 것이기 때문이었다. 즉 가장 이른 시기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유물에 속한다. 청동기시대는 고조선이 출현하는 등 우리 민족사의 기틀이 마련되는 아주 중요한 시기이다. 이런 논쟁이 벌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이형구 선문대 교수의 말마따나 우리 민족문화의 시원을 한반도가 아니라 발해연안에서 찾으면 논쟁의 여지가 없을 텐데 말이다. 어찌됐든 당시 교과서를 쓴 최몽룡 서울대교수가 한반도 청동기시대를 끌어올리면서 단적인 예로 든 것이 바로 막 조사된 정선 아우라지 유적이었다. 각목돌대문토기(덧띠새김무늬토기)가 나온 것은 매우 중요하지요. 그리고 이런 토기는 정선뿐 아니라 경주 충효동, 진주 남강, 산청 소남리 등에서 숱하게 확인되었어요.” (최몽룡 교수) 발해연안인 다쭈이쯔(大嘴子), 상마스(上馬石)유적에서부터 한반도 신의주 신암리 - 평북 세죽리 - 평남 공귀리 - 강화 황석리 · 오상리 - 서울 미사리 - 여주 흔암리 - 진주 남강 상촌 · 옥방까지…. 다 BC 15~13세기 유적들이지. 남한강 최상류(아우라지)까지 그 당시의 덧띠새김무늬토기가 나온 것은 의미심장하지.”(이형구 교수) 남한강 최상류까지 선사유물이 존재하는 것을 설명했다. AMS(질량가속분석기) 측정결과 BC 14~13세기로 편년되는 유적에서 덧띠새김무늬토기가 나왔는데요. 모두 한강수계라는 점이 의미심장합니다.”(김권중 강원문화재연구소 원주팀장) (조유전 관장)
2005년 7월14일 오후. 당시 조사단(강원문화재연구소) 현장책임자였던 윤석인은 아우라지 유적 한쪽에 서 있던 고인돌을 노출시켰다. 서울대 해부학교실에 분석을 의뢰했는데, 뜻밖에 서양인의 염기서열과 비슷하다는 결과를 구두로 통보받았습니다. 키 170㎝ 정도의 남성인데, 현재의 영국인과 비슷한 DNA 염기서열이라는….”(윤석인) 덧띠새김무늬토기(중심연대가 BC 13세기)가 나온 곳과는 시간차가 있다. 어쨌거나 만약 2800년 전 서양인의 염기서열을 지닌 사람이 한반도에서도 두메산골인 정선에서 살았다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46년 전인 1962년 제천 황석리 고인돌에서도 수수께끼 같은 인골이 확인된 적이 있었다. “두개골과 쇄골, 상완골 모두 현재 한국인보다 크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현대 한국인의 두개장폭지수(頭蓋長幅指數 · 이마~뒤통수의 길이와 귀~귀 사이의 길이 비율)는 100대 80~82이고, 서양인은 100대 70~73 사이입니다. 그런데 황석리 인골은 100대 66.3이란 말이지. 이로 미루어 보면 황석리 인골은 한반도로 이주한 초장두형 북유럽인일 수밖에 없어.” (김병모 한양대 명예교수) 또한 지금도 충북과 경북 산간지역의 사람들 가운데는 황석리인과 비슷한 사람들이 있다고 하니 얼마나 놀라운가. 이런 상황에서 아우라지에서 출토된 서양인 염기서열을 지닌 인골의 노출 소식이 알려졌으니…. 무엇보다 황석리와 정선은 같은 남한강 수계가 아닌가. BC 18~17세기 무렵 히타이트족의 정복으로 흑해지역에 살고 있던 아리아족이 인도 쪽으로 이민했거든. 그런데 인도에서 살던 사람들 가운데는 벼농사 전래경로를 따라 동남아시아~한반도로 이주한 사람들도 있었을 겁니다. 이들의 경로는 고인돌 문화의 전파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고….” 제천 황석리나 정선 아우라지나 모두 고인돌에서 나온 인골이다. 고인돌은 청동기시대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가 서양인의 후손이냐는 회의감이 들기도 한다. 다만 현대의 한국인이 하나의 유전자로 이어지지는 않았겠지. 갖가지 교류를 통해 여러 인자를 받았을 테지. 그렇게 생각해야 해.”(김병모 교수) 분석을 맡은 서울대 해부학 교실팀은 신중에 신중을 거듭하고 있다. 확실한 결과를 얻기 위해서다. 검증된 결과가 나와야 하고 해외 학계에서도 학술적으로도 인정받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아직 결과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 주십시오.”(신동훈 교수) 아직 분석팀의 연구결과와 공식발표가 없는 만큼 기다릴 수밖에 없다.
긴 풀을 헤치고 한참이나 더듬거리던 일행의 눈앞에 뭔가 흉측스러운 장면이 목격되었다. 줄로 아무렇게나 쳐놓은 펜스와, 그 안에 쓰레기를 덮은 듯한 파란 포장덮개가 내리는 비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저게 뭐야. 저게 고인돌을 덮은 포장덮개야?” 정선군이 무슨 축제를 벌인답시고 포클레인을 동원해서 고인돌 4기를 마구 훼손시켰다. 그것뿐이면 다행이랴. 그것도 모자라 인골이 확인된 고인돌의 덮개돌을 조형물로 꾸미는데 사용했단다. 함께 놓여 있던 덮개돌 좌우편 파편들은 사라져 버렸다. 시굴조사 때부터 한반도 청동기시대 개막의 열쇠를 쥔 아우라지 유적에 대한 중요성을 간파한 전문가들이 ‘빨리 사적으로 지정하라’고 권고했지만 아직까지 오불관언(吾不關焉)이다. 더욱이 고인돌 훼손사실을 조사한 뒤 문화재청이 한 일은 훼손된 고인돌을 흉물스러운 포장덮개로 덮어놓은 것에 불과하다. 그것이 2007년 11월이니 9개월째 그런 한심한 상태로 방치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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