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자 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 여행] (17)
북한강변 화천 용암리 · 위라리 유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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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0년전 청동기마을’ 정밀한 사회구조 갖췄다 31평형 대형 주거지 · 선반 · 벤치 · 침상생활 흔적 마을행사 회의하고 석기공장 · 석기수리점 구비
지현병 당시 강원문화재연구소 연구실장의 눈이 반짝했다. 바로 윗동네에 있는 위라리 적석총도 조사할 겸 해서 왔던 것이고….”
이곳은 북한강변. 용화산(해발 878.4m)이 빚어낸 많은 지맥 가운데 북서로 향하는 구릉의 끝이 북한강과 맞닿은 곳에 펼쳐진 충적대지다. 꼭 나왔던 전방과 강추위의 상징. 대성산(1073.1m), 백암산(1179.2m), 사명산(1197.6m), 화암산(1468m) 같은 1000m급 산으로 둘러싸인 곳이니….”(조유전 토지박물관장) 이곳 용암리 충적대지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당연히 지표 조사가 수반되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어느 대학에서 지표조사를 벌였는데, 지표상에 유적이 확인되지 않았다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당연히 화천군은 공사를 진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표조사 결과 보고서에서는 ‘인접한 고고학적 양상과 지형적인 특성으로 보아 유적이 존재할 가능성은 높으니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고 여운을 남겼어요. 그래 이상한 기분이 들어 찾아온 겁니다.” 적합한 곳.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물이 있고, 어로활동을 할 수 있으니 먹을 거리도 풍부했기 때문이다. 화천군의 생활체육시설 조성도 같은 맥락이고…. 삶의 방식은 수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았겠죠.” (조 관장) 어쨌거나 선사유적의 존재를 확인한 지현병은 즉시 화천군청에 공사중지를 요청했다. 공사중지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요.” 그 결과 BC 12세기부터 조성된 주거지 170기와 수혈(구덩이)유구 35기, 굴립주 유구 13동, 추정 토광묘 12기 등 230여기의 청동기시대 유구가 쏟아졌다. 흩어진 조각들을 모아 정리한 유물만 1350점에 이를 정도다. 발굴은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며 진행되었다.
정말 잊을 수 없는 장대비가 2박3일 동안 내리더군요.”(김권중 강원문화재연구소 원주팀장) 3000평에 이르는 유구밀집지역은 순식간에 수심 1m50㎝가량의 물바다를 이뤘어요.”(지현병)
“속수무책으로 바라보았는데, 정말 밤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물론 유구 전체에 두꺼운 커버를 씌워놓기는 했지만…. 애써 조사한 유구가 물 때문에 모두 붕괴되거나 씻겨져 내려갔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에….” 조사단은 양수기 4대와 경운기 1대를 동원, 그야말로 사력을 다해 물을 빼내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선사시대에도 그랬을까. 이런 홍수와 범람이 반복되는데, 어떻게 사람들이 오랜 시간 이곳에 터전을 잡고 살 수 있었을까. 봐야지.”(조 관장) “무슨 소립니까?”(기자) 가뜩이나 손바닥만한 충적대지인데, 화천댐(1941년)과 춘천댐(1965년)이 잇따라 조성되면서 북한강 유역엔 물이 차기 시작했어요.”(김권중) 일단 유구의 윤곽만 잡아놓고 여름철이 끝나면 바닥을 깊게 조사하려 했는데…. 장마철을 고려해서 작업했기 때문에 유구손상은 거의 없었습니다.”(지현병) 갖가지 어려움 속에서도 발굴은 그야말로 ‘대박’ 그 자체였다.
후손대에 이르면 다시 그 위에 새로운 집을 짓고 사는 형식으로 1000년 이상 지속된 청동기시대 마을이라는 것이다. 아니 유적의 규모와 연속성으로 보면 ‘청동기타운’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BC 12~9세기로 편년되는 초기 청동기시대와, BC 8~5세기를 풍미한 중기, 그리고 BC 5~2세기 사이에 조성된 청동기 후기의 유구로 나눌 수 있습니다.”(김권중) 우선 길이 19.34m, 폭 5.30m, 깊이 40㎝, 즉 102.5㎡에 이르는 대형 건물지이다. 평수로 따진다면 전용면적 31평이나 되는 중형아파트. 그리고 그 가운데 주공 열 사이에는 모두 5기의 화덕이 역시 일렬로 설치됐다. 그런데 화덕에서는 불을 땐 흔적, 즉 목탄과 불에 탄 흙이 역력했다. 또 하나, 주거지 안에서는 무엇을 저장한 것으로 보이는 저장공이 27개나 됐다. 이 청동기 마을을 지배했던 수장(지도자)의 집일 수도 있지요. 아니면 예컨대 3대가 함께 사는 대가족 제도의 흔적으로도 보이고….”(지현병)
“19호는 면적이 약 11평 정도인데요. 가장 특이한 점은 바로 벽을 따라 요즘의 벤치나 침상, 혹은 선반 같은 구조물이 3곳이나 존재했음을 알리는 기둥구멍들이 있었다는 겁니다. 길이 201㎝·폭 57㎝, 길이 197㎝·폭 72㎝, 길이 203㎝·폭 58㎝짜리 등 3곳….”(김권중) 19호 건물에 모여 벤치에 앉아 마을 행사에 대해 논의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용암리 사람들은 일찍부터 침상생활을 즐긴 것은 아닐까. 혹은 선반 위에 물건을 보관해놓는 지혜를 지닌 것은 아닐까. 상상만 해도 즐겁다. 돌가루와 미세한 석판들이 많아요. 잠을 자지 않았던 곳. 이곳은 바로 석기를 만드는 ‘석기공장(工房)’이었을 겁니다.” 즉 이곳에는 끝이 닳아버렸거나 깨진 석촉과 석부, 그리고 숫돌이 확인됐다. 한마디로 ‘석기 수리점’이었던 셈이죠.” 회의를 통해 행사와 의례행위를 결정했으며, 석기공장과 수리점까지를 완비한 하나의 정밀한 사회구조를 확립하고 있었다는 추측을 할 수 있게 만든다.
2008년 9월. 기자가 조유전 관장 · 지현병 강원문화재연구원장과 함께 용암리를 찾았을 때…. 이미 조성된 체육공원에서는 초등학교 축구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청동기타운 밀집지역은 지금 국궁장(國弓場)이 되었다. 유적은 바로 그 땅 밑에 그대로 묻혀있고, 인접지역은 강원도 기념물 제83호로 지정됐다. 이곳 용암리~위라리에 걸쳐 얼마나 넓은 청동기 타운이 조성됐는지 누구도 짐작할 수 없다.
일행은 용암리와 인접한 위라리로 향했다. 소유자가 우사(牛舍)를 만들려고 했지만, 올 1월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시굴조사 결과 용암리와 다를 바 없었다. 정식 발굴이 필요했던 상황. 문제의 땅을 사는 데 필요한 돈이 7000만~8000만원 정도라고 했어요. 그러니 거액의 발굴비를 들이느니, 차라리 8000만원으로 땅을 사서 보존하자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어요.” 땅값이 오르면 사고 싶어도 살 수 없는 상황이 올 수 있어요. 천문학적인 보상비가 필요한 풍납토성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하는데….” 구릉이라고 보기에도 너무 작다. 지현병 원장이 소리친다. 차마 들어가 볼 용기를 내지 못한다. 이미 적석총의 외부벽은 주민들의 경작으로 인해 파먹히고,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다. 위라리 적석총은 북한강변을 기준으로 볼 때 가장 상류에 있는 적석총이다.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노발대발했다는 후문이다. 그런데도 이 적석총은 아무런 조치없이 9개월이 지난 지금에도 ‘그냥 그대로’다. 강원도 문화재위원회는 무엇을 하는지, 문화재청은 또 무엇을 하는지 모르겠다. 좋은 기분으로 출발했던 청동기 마을에서의 하루는 이렇게 ‘짜증 지대로’인 상태로 끝나고 말았다. - 경향, 2008년 10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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