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아가는(문화)

순조기축진찬도(1829)의 내진찬(자경전)

Gijuzzang Dream 2008. 8. 5. 14:22


의궤’라는 코드를 통해 조선 궁중의 음식문화를 둘러싼 의복, 춤 등 다방면에 걸친

조선의 궁중 문화 고증. 문자로 기록된 당시 기록들을 바탕으로

‘의궤를 통해보는 궁중의 문화’를 생생히 복원해본다.

정조대왕 재위 24년(1800), 정조께서 돌아가시니 보령 49세이다.

그 해, 다음 임금이 되실 왕세자 순조(1790~1834)는 11세였다.

김조순(金祖淳, 1765~1831)의 딸이 삼간택에 통과되어 왕세자와 가례(嘉禮)를 치룰 계획이었으나,

정조는 왕세자의 가례를 보지 못하고 김조순에게 뒷일을 부탁한다.

 

순조 년간은 안동 김씨 김조순이 30년간 임금을 보좌하면서 세도한 시기로서

순조 1년(1801)에는 천주교 박해의 신유사옥(辛酉邪獄)이 나고,

11년(1811)에는 홍경래의 난 그리고 잦은 가뭄과 흉년이 일어나는 등 격변기였다.

 

순조 27년(1827) 2월 을묘일, 건강상의 이유로 전하께서 세자에게 정무 볼 것을 지시하심에,

의정부에서는 세자의 정사 보는 세칙을 제시하고,

세자는 2월 18일 묘시(5시~7시)에 종묘와 사직 그리고 경모궁에 고유제를 지낸 다음,

같은 날 오시(11시~13시)부터 대리 청정을 하게 된다. 『순조실록』卷28, 2월 乙卯條

 


방대한 규모의 화려한 진찬례의 시작

 

'순조 29년 기축년(己丑年, 1829)은

전하의 보령이 40세가 되고,

재위 30년이 되는 해였다.

 

왕세자 효명세자(후에 익종으로 추존)는

이 기쁜 해를 맞이하여 전하께 진찬(進饌)을

차려드리기 위한 상소를 두 차례 올려 드디어 임금의 영교(令敎)를 순조 28년 11월 24일 받는다.

 

진찬례(進饌禮)로 설행하게 된 근거는,

정조대왕이 어머님 혜경궁 홍씨께 봉수당과 연희당에서 올린 1795년의 회갑예가 진찬례였기 때문으로 선왕의 예를 따른다는 계지술사(繼志述事) 의미에서 진연 보다는 진찬으로 하게 된 것이며,

유교정신인 애민(愛民)사상에서 나온 겸양과 검약 정신은 전하를 위해 거행되는 연향을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으므로 이를 안 왕세자 효명세자는 두 번이나 상소를 올려 진찬례가 가능해졌다.


순조 28년(무자년 戊子年, 1828)에도 진찬례는 아니지만 진작례(進爵禮) 있었다.

이 해는 세자 익종이 대리 정사를 본지 1년이 된 것에 대한 자축과 중궁의 보령 40세 축하를 겸하여,

중궁을 위한 「자경전정일진작」과 「자경전야진별반과」외에

세자를 위한 「자경전 익일회작」이 별도로 구성되어,

대리정사를 보는 세자에 대한 특별 진작례가 생겨난 해이기도 하다.

 

18세기말까지도 없었던 이러한 연향 구성은 19세기 말까지 그대로 이어지게 되고,

물론 순조 29년의 진찬례에도 적용되었다.

다시 말하면 18세기까지의 검박한 궁중연향과 달리

외척세력의 영향에 의한 다분히 과시적인 화려한 무자년의 연향 구성은

서서히 조선왕조의 몰락과 비례하여 19세기 말까지 더 화려하게 이어져 갔다.

 

기축년 진찬례의 설행에 대한 하교에 의하여,

진찬의 원활한 진행을 위하여 임시 관청인 진찬도감(進饌都監)이 세워졌다.

무자년1828 11월 24일에 진찬소당상으로 행병조판서 박종훈을 비롯하여 일곱 명이

차하(差下, 벼슬을 시킴)되고, 낭청으로 부사과 이겸수를 위시하여 여섯 명이 차하되었으며,

그밖에 별간역등 50여 명이 차하되었다.  

 

같은 해 11월 27일에는 회동하여 진찬소(進饌所)를 훈국동영(訓局東營; 東別營)으로 결정하고,

무자년 진작례를 참작하여 자경전 내진찬을 포함한 기축년 연향이 구성되었다.

 

자경전(慈慶殿, 경복궁의 가장 안쪽에 있는 내전) 내진찬을 위하여,

자경전에서는 내습의(內習儀, 연습)를 다섯 번 하고,

훈국동영에 설치된 진찬소에서는 외습의(外習儀)를 세 번 함으로써,

거듭되는 연습으로 거의 완벽에 가까운 연향례를 하도록 하였다. (『진찬의궤』, 1829)

 

외진찬이 군신간의 연향으로 철저히 남성으로만 구성된 연회라고 한다면,

내진찬은 전하를 중심으로 한 집안의 연향이다.

전하, 대왕대비, 중궁전, 왕세자와 왕세자빈이 주인공이 되어

내명부(품위를 가진 여관),

외명부(왕족과 종친의 처 및 문무관의 처로서 그 부직에 따라 봉작을 받은 여자의 통칭),

의빈(왕족의 신분이 아니면서 왕족과 통혼한 사람의 총칭), 척신(임금과 척분이 있는 신하),

종친(임금의 친족) 그리고 진찬을 주관한 진찬소 당상만이 참여하였으며,

전하와 왕세자를 제외한 종친, 의빈, 척신, 진찬소당상 등 모든 남성의 연회좌석은

전문(殿門) 밖에 배치하여 격리시켰다.

 

따라서 내진찬의 중심 공간에는 행사를 돕는 여관(女官)과 여집사(女執事) 외에

의장(儀仗)을 드는 자 또한 가의녀(假醫女)이고

정재(呈才)도 여령(女伶)과 여기(女妓)에 의하여 공연되었다.

혹시 악(樂)을 연주할 때 여성 악사가 없을 경우에는 맹인 악사가 동원되었다.

내외가 엄격한 궁궐 법도가 연향에도 이처럼 철저히 반영된 결과이다.


기축년 2월 12일 진시(7~9시)가 되자 『국조속오례의』 「진연의」의 의주를 근간으로 하여

주인공인 전하가 익선관에 곤룡포를 갖추고

중명지곡(重明之曲)이 연주되는 가운데 출차(出次)하시고 보좌에 오른신 후

전하에게 왕세자, 왕세자빈, 좌우명부반수, 종친, 의빈, 척신반수가 일곱잔의 헌작(獻爵)을 올리면,

전하께서 왕세자와 왕세자빈에게 초작(酢爵)한 후

연회에 모인 사람들에게 수(酬), 행주(行酒)하는 연회 구성이다.

술의 헌작, 초작, 수작이 진행됨에 따라 점진적으로 올라가는 초미, 이미, 삼미 등

술안주의 시계열적인 배선에 맞추어 악이 연주되고 정재가 추어졌다.

 

 

기록화를 통해보는 궁중의 연회

 

 

 

 

 

 

 

그림은「기축진찬도병」의「내진찬도」일부인데

전하의 용평상 위에 용교의(龍交椅)가 있고

뒤에 일월오봉병이 북쪽벽에서 남쪽으로 향하여 설치되어 있다.

 

 

 

전하좌 오른쪽에는 보안(寶案)이, 전(殿) 밖 좌우에는 향안(香案)이 놓여져 있다.

붉은 칠을 한 전하의 수주정(壽酒亭)과 다정(茶亭)이 주기(酒器)와 다기(茶器)가 올려진 채

동쪽 보계(補階) 위에 있고 수주정이 보다 전하와 가깝게 앞쪽에, 다정이 뒤편에 있다.

 

 

수주정 안에는 시첩반도 보인다.

전하의 용평상 마주 편에 놓여있는, 가장자리에 초록색의 단을 댄 붉은 비단 상보를 깔고

위에 곡수좌면지를 깐 전하의 찬안에는, 46그릇의 음식이 당화기와 유기접시에 담겨 차려져 있고

이들 중 34기에는 상화(床花)가 어지롭게 꽂혀진 채 화려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서쪽에는 동쪽으로 향하여 홍색의 무명 상보를 깔고

이 위에 곡수좌면지를 깐 다음 31그릇의 음식이 당화기에 담겨 차려져 있는데

이들 중 22기에는 상화가 꽂혀진, 왕세자빈의 찬안이 놓여 있다.


전하의 찬안을 마주하고 술을 올리는 진작위(進爵位)가 바닥에 깔려있다.

머리에 꽃을 꽂은 여관과 여집사가 보이며

실내를 외부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주렴(朱簾)이 처마 부근까지 접혀져 올라있다,

커튼 형태로 보이는 홍주갑장(紅紬甲帳)이 걷혀있고,

악공들 앞에는 황색 목면으로 휘장을 만들어 시야를 차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날 여령에 의하여 정재된

몽금척, 장생보연지무, 헌선도, 향발무, 아박무, 포구락, 수연장, 하황은, 무고, 연화대, 검기무, 선유락,

오양선 중에서 선유락, 검기무, 무고, 헌선도, 포구락, 하황은, 몽금척 등의 춤이 보이고 있다.

 


- 김상보 대전보건대학 전통조리과 교수

- 문화재청, 월간문화재사랑, 2008-07-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