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아가는(문화)

가마 - 조선시대 관요와 민요

Gijuzzang Dream 2008. 8. 5. 13:22

 

 

 

 

 

 조선시대 관요(官窯)와 민요(民窯)  

 

 


조선시대에는 전국 각지에서 백자를 제작하였다.

백자(白磁)를 만들기 위해서는 물과 흙, 땔나무와 기술을 가진 사기장(沙器匠)이 필요하며,

만들어진 자기(磁器)를 판매할 소비지(消費地)와 가깝거나

강을 끼고 있어 운반이 쉬운 곳이 적합한 장소로 인식되었다.

이런 이유로 가마는 숲이 우거진 산 아래에 강을 바라보며 조성되어 주변 경관이 아름다운 곳이 많다.

백자는 사용할 수요자(需要者)에 따라 그릇의 종류와 질(質), 장식 등에 차이가 있었다.

이것은 운영주체의 차별화로 비롯된 것인데,

국가의 관리 하에 운영된 관요(官窯)와

백성들의 필요에 의해 운영된 민요(民窯)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관요는 어선(御膳)을 담당하던 사옹원(司饔院)의 전용 사기제조소(沙器製造所)로 운영되었고,

왕실과 관청 · 궐내에서 사용될 백자를 제작하였다.

따라서 일반 백성들이 사용할 음식기명(飮食器皿)을 주로 만든 민요에 비해

백자의 질과 장식 등이 우수한 특징이 있다.

관요는 지금의 경기도 광주시 일대에서 1466년(세조 12)부터 운영되기 시작하여,

민영화되는 1884년(고종 21)까지 존속되었다.

이 때 관요는 지금처럼 한 곳에서 계속 운영된 것이 아니라

주변의 땔나무를 다 쓰면, 나무가 많은 다른 곳으로 옮겨

다시 가마를 짓고 백자를 제작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한 번에 여러 개의 가마가 동시에 운영된 관요의 경우 한번 번조에 막대한 양의 나무가 소비되었다.

일정한 구역의 시장(柴場)을 배정 받아 땔나무를 얻었지만

대략 10년이 되면 수목이 다하여 다른 곳으로 이전하는 것이 관례화되어 있었던 것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255冊 숙종 2년 8월 1일條)의 기사를 통해 알 수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관요가 존속된 약 400년의 기간 동안 운영된 가마터의 수는 엄청나며,

현재까지 경기도 광주지역에서는 약 290여 개의 가마가 조사되어 이 같은 기록을 실증해 준다.

관요백자는 380명의 사기장이 역할을 나누어 만들었는데, 이를 감독하는 관원은 중앙에서 파견되었다.

 

관요의 사기장은 지방 민요의 솜씨 좋은 장인 중에서 선별하여 구성하였으며,

철저한 분업제로 백자를 제작하였다.

여러 잡역을 제외하고도 흙을 준비하는 사람, 그릇을 만드는 사람, 장식하는 사람, 굽는 사람 등

각 단계를 세부적으로 나누어 진행하였다.

 

그리고 1478년~1486년의 상황을 기록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을 보면,

당시 감독관과 함께 화원(畵員)이 관요에 파견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일부 백자의 표면을 장식하는 일을 담당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반면 민요에서는 대체로 일가족을 중심으로 백자를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며,

가마의 규모도 상대적으로 작고, 여러 단계의 작업을 한 사람이 진행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래의 두 작품을 보면, 관요와 민요에서 만들어진 백자의 차이를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관요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백자청화용문호>(도 1)

푸른빛이 도는 백색 항아리에 당시 중국을 통해 수입된 청화안료로 정성스럽게 용문양을 그려 넣었다.

안료의 농담을 조절해가며 세밀하게 묘사된 용에서 화원의 기량을 엿볼 수 있다.

이런 항아리는 가마 안의 불순물이 백자에 녹아 붙지 않게 갑발(匣鉢)에 넣어 번조하였다.

갑발을 사용할 경우 가마 안에서 차지하는 공간이 커져

한 번에 구울 수 있는 백자의 양이 줄어드는 단점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질의 백자를 얻기 위해 관요에서는 많은 양의 백자를 갑발에 넣어 번조하였다.

민요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백자철화초화문병>(도 2)

백자의 빛깔이 회백색이며,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철화 안료를 사용하여

분방하게 초화문(草花文)을 그려내었다.

관요백자에 비해 흙이 덜 정제되어 백자의 유색(釉色)이 어둡게 보이며,

한 번에 많은 양을 생산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그릇을 포개어 번조하였다(도 3).

이와 같이 조선시대 백자는 수요자와 운영주체에 따라

사기장의 숙련도와 제작과정, 번조과정에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앞으로 조선시대 백자를 감상할 때

관요와 민요라는 제작체계를 기준으로 감상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도 1) <백자청화용문호>, 조선관요박물관 소장

(도 2) <백자철화초화문병>, 국립광주박물관 소장
(도 3) <백자파편>, 전남 강진군 월하리 백자가마터 출토




- 문화재청 인천국제여객부두 문화재감정관실 최윤정 감정위원

- 2008-08-04 문화재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