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자 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 여행] (1)
(1) 전남 화순 대곡리 출토 청동예기 | ||||||||||
절대적 사료의 부족에다 난개발까지 겹쳐 이리 찢기고 저리 찢긴 우리 역사의 편린이나마 복원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역사복원을 위해서는 공허한 주장보다는 증거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고고학 조사에서 확보된 유물과 유적을 토대로 살펴보겠습니다. 최근 조사된 따끈따끈한 발굴 성과를 중심으로 하겠습니다.
또 하나, 경제 개발에 모든 가치를 두고 문화유산을 개발의 걸림돌로만 여기고 있는 요즘 문화유산을 발견하고 지킨, 이름 없고 빛도 없는 백성들의 이야기와 역사복원에 정열을 바친 고고학자들의 이야기를 담겠습니다.
여행을 이끌 조유전 관장은 모든 학설 · 학맥 · 인맥을 모두 포용하는 한국 고고학계의 큰 그릇입니다. (편집자 주)
2400년 전 어느날. 전남 화순 대곡리에 큰 일이 터졌다. 이 일대를 다스리던 소국의 왕이 붕어(崩御)한 것이었다. 去한 것이다. 제사장이자 왕이 돌아가시자 나라 사람들이 장례를 의논한다. 왕은 본향, 즉 천신이 되어 다시 하늘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니 슬픔보다는 경건한 마음으로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돌로 파서 무덤을 만드는 한편 그 안에는 굴피나무로 통나무관을 만들기로 한다. 그런 다음 통나무관에 시신을 누이고 청동신기(神器)들 즉, 청동검과 거울, 방울, 도끼, 새기개 등을 넣고 뚜껑을 덮는다.
이 모두 생전에 제사장이 하늘신, 조상신에게 제사를 드리고 하늘과 인간을 소통시킬 때 쓰던 예기들이다. 통나무관을 구덩이에 내리고 돌과 흙을 채웠다. 무덤을 보호하기 위해 돌을 가득 쌓은 무덤형식은 훗날 적석목곽분이라 일컬어진다.
소국은 또 새로운 왕(제사장)을 세우고 또 다른 시대를 열어간다.
그로부터 사십 갑자(甲子)의 긴 세월이 흐른 1971년 12월20일. 갓 서른 살이 된 고고학도 조유전이 전남도청 문화공보실을 찾는다. 문화재연구소 신출내기 학예사였던 고고학도는 전국 문화유적 지표조사를 위해 전남도청을 먼저 들른 것이었다.
나흘 뒤인 12월24일 조유전은 윤무병 국립중앙박물관 수석학예관과 함께 현장을 찾는다. “얼마나 급했는지 프로펠러 비행기를 타고 광주를 거쳐 현장(대곡리)에 도착했어요. 한 20인승 되었던가? 당시만 해도 일개 말단 공무원이 출장가면서 비행기를 탄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지.” 사실 1971년이라면 한국 고고학 발굴 사상 엄청난 일이 벌어진 해였다. 그해 7월5일 그 유명한 무령왕릉이 발견되었지만, 단 하루 만의 졸속 발굴로 악명을 떨친 해가 아니던가. 무령왕릉처럼 빨리빨리 발굴하는 것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지. 지금 생각하면 모두들 후회하고 아쉬워하지만 그 당시의 풍토는 그랬지.” 무령왕릉 발굴소식이 전국을 강타했던 그 해 여름, 1971년 8월 어느 날. 자기 집 북쪽의 담장 밖에 떨어지는 낙수 때문에 물이 고이자 배수로를 확보하기 위해 땅을 파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땅 속이 비어있는 듯 텅텅 소리가 났다. 그런데 그 안에 희한한 물건들이 줄줄이 엮어 나오기 시작했다. 오랜 세월을 견뎌내느라 녹 슬고, 흙 묻은 물건들. 하지만 이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얼마 후 마을에 철컥컬컥 소리가 났다. 엿장수의 가윗소리였다. 구씨는 “때마침 잘 됐다”면서 땅속에서 줄줄이 사탕처럼 파낸 물건들을 엿장수에게 건넸다. 이제 엿장수의 몫이 된 것이다. 온동네를 돌아다니면서 온갖 철물들을 수거하면 그 가운데는 꽤나 값나가고 중요한 물건들이 우연히 흘러 들어오기도 하지 않는가. 엿장수가 보기에 구씨가 건네준 이 물건들은 예사롭지 않은 것 같았다. 게다가 구씨로부터 들은 바로는 땅을 파니 나온 물건들이라 하지 않는가.
엿장수 안목 덕분에 고철 위기 벗어난 ‘국보’
선택의 기로에 선 엿장수는 결국 ‘신고의 길’을 선택하고 전남도청을 찾았다. 마을 안에는 고인돌(지석묘)이 7기나 되어 칠성바위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고….” 현재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될 정도로 수많은 고인돌이 집중돼 있다. 마을 곁을 흐르는 개천의 이름도 지석천(砥石川·영산강의 지류)일 정도이다. 한 눈에 알 수 있었어. 특히 무덤이 확인된 구재천씨 집은 마을에서도 가장 높은 곳, 가장 양지 바른 곳에 자리잡고 있었지.” 무덤의 구조를 살펴보고 도면을 그리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어요.” 무령왕릉의 졸속발굴 이후 불과 6개월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조유전 학예사 등에 할당된 조사시간은 24일 단 하루, 즉 한나절뿐이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빨리빨리 조사’였던 것이다. 한국형 세형동검 3자루, 청동도끼와 새기개 등 총 11점이 이듬해 3월2일 한꺼번에 국보(제143호)로 지정되었을 만큼 하나같이 획기적인 유물들이었다. 보상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신고자인 엿장수는 사라졌고, 발견자인 구씨는 처음에 신고 없이 엿장수에게 팔았다는 것이 좀 걸리고 해서…. 결국 누구도 보상받지 못했어요.”
71년 당시 국보가 11점이나 나온 대곡리 옛 구재천씨 집 담장너머에 대한 국립광주박물관(관장 조현종)의 재조사가 시작했다.
발굴단은 무덤 바닥에 남아있던 목관의 흔적을 두부처럼 잘라 들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목관의 흔적을 3분의 2나 걷어냈지만 더 이상 유물은 나오지 않았다. 중요한 부장품을 매장하는 시설)을 확인할 수 있을까 기대했으니까요. 그러나 막판까지 징후가 없어 포기상태였죠.”(은화수 국립광주박물관 학예연구관) 조사를 마무리하기 위한 일종의 수순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날인 21일 오전 11시30분. 무덤 바닥 남쪽에 있는 옅은 검은색 띠가 수상했다. 뭔가 걸렸다. 살살 흙을 걷어냈다. 청동검의 끝이 2㎝ 정도 노출되었다. 이렇게 해서 2400년 전 청동기인들이 붕어한 왕의 영원불멸을 기원하며 부장했던 청동기 세트를 모두 찾아낸 것이다. 이 대곡리 유적은 적석목관묘로 확인되었다.
한반도에서는 적석목관묘가 BC 4~BC 3세기쯤 출현, 기원 전 후까지 축조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시기 적석목관묘에서 출토되는 대표유물은 한국형 세형동검이다.
차오양(朝陽) · 젠핑(建平) · 진시(錦西) · 푸순(撫順) · 칭위안(淸原) · 뤼다(旅大) 등에서 쏟아진 발해연안식 청동단검(비파형 청동단검)이다. 이 청동단검의 전통이 한반도로 이어져 BC 4세기 무렵부터 한국형 세형동검이라는 독특한 청동기 문화가 창조되는 것이다.
2400년 전 제정일치 시대의 왕은 제사장을 겸했다. 그는 양손에 든 청동방울을 흔들며 신(神)을 부르고, 가슴팍에 단 청동거울로 태양의 신비로운 빛을 백성들에게 비추었을 것이다. 빛은 하늘과 사람을 연결하는 매개체인 동시에 사람과 왕 사이를 구분하는 절지천통(絶地天通)의 도구였을 것이다. 한반도 특유의 청동유물로 알려져 있다. 팔주령은 방사상의 여덟개 가지 끝에 방울을 만든 형태이다. 오목한 불가사리 모양의 판에 방사상의 돌기가 달리고 그 끝에 각각 둥근 방울이 하나씩 붙어있다. 방울 안에는 청동구슬이 삽입돼 있어 흔들면 딸랑딸랑거린다. 쌍두령은 양끝에 방울이 있고, 그 안에 구슬을 넣었다. 8개의 방울이 있는 팔주령에도 태양을 상징하는 일광문이 보입니다. 8이라는 숫자는 일본에서 ‘풍요’ ‘많음’을 뜻합니다. 결국 청동거울과 팔주령 등은 당대 샤먼이 풍요로움을 기원하는 도구가 아니었을까요.” (이건무 문화재청장) 수수께끼의 제작기법이죠.(이건무 청장)
이제 칠순을 바라보는 노학자가 되어 다시 현장에 섰다. 보물이 13점이나 확인된 곳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바뀐 모습이다. 그래도 정비계획이 섰다니 그나마 다행이기는 하다. 참, 마을 안쪽에 서있던 석비는 어디갔나? 마을 안엔 고인돌이 여럿 있었는데….” 함께 간 후학(이종철 국립광주박물관 학예사)의 대답이 줄을 잇는다. 젊은 고고학자의 시절로 돌아간 조유전 선생의 뇌리를 떠나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최초 발견자 구재천씨와 이름 모를 엿장수다. 그리고 끝내 모습을 나타내지 않은 엿장수도….” 하지만 고철은 사려깊은 ‘엿장수의 마음대로’ 신고가 되었고 마침내 11점의 국보로 거듭났다.
이름없이 사라져버린 엿장수의 이야기는 요즘 문화유산을 전봇대쯤으로 아는 사람들에게 소중한 교훈을 던지고 있다.
|
'지켜(연재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고학자 조유전의 한국사 - 무령왕릉 이후 최대발굴, 공주 수촌리고분 (0) | 2008.08.04 |
---|---|
고고학자 조유전의 한국사 - 충남 공주시 장선리유적 (0) | 2008.08.04 |
[조선의 인물, 조선의 책] 1. 정도전의 <삼봉집> (0) | 2008.07.07 |
[조선의 인물, 조선의 책] 2. 태종과 계미자 (0) | 2008.07.07 |
[조선의 인물, 조선의 책] 3. 타고난 독서가 세종 (0) | 2008.07.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