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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4.11. 530호 (p 84~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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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과 계미자] |
정적의 목 자르고, 머리는 빌리다 |
정도전 제거한 뒤 금속활자 아이디어는 수용 … 유교적 사대부 탄생의 기원 |
정도전이 만들자고 했던 서적포의 행방은 어찌 되었던가? 조선을 건국한 혁명의 실력자가 한 말이니, 공언(空言)은 아니었을 것이다.
‘고려사절요’ 공양왕 4년(1393) 정월에 “처음 서적원(書籍院)을 설치하여 주자(鑄字)와 서적 인쇄를 관장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안정복(安鼎福)의 ‘동사강목’에는 고려의 관직에 대해 서술한 부분이 있는데 “공양왕 3년 서적점(書籍店)을 폐지하고 4년에 서적원을 두었다. 주자를 관장한다”는 기록이 있다.
서적점을 폐지하고 만든 것이 서적원이었던 것이다.
그럼 서적점이란 무엇인가? ‘고려사’에 의하면 서적점은 문종 때 처음 설치됐다. 그 뒤 충선왕 때 한림원에 합쳤다가 다시 분리됐고, 공양왕 3년에 폐지됐다가 공양왕 4년에 서적원으로 부활한 것이다.
서적점과 서적원이 어떻게 다른지, 왜 바뀌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고려사’의 기록이 워낙 빈약하기 때문이다.
1392년 1월 서적원이 설치되고, 6개월 뒤인 7월에 조선이 건국됐다. 1392년 1월은 고려에 속하지만, 국가의 권력은 이미 혁명세력에게 넘어간 시기였다. 1392년 7월28일, 조선으로 말하자면 태조 원년 7월28일 서적원은 조선의 관제(官制)로 그대로 이관된다. 서적포가 아닌 서적원이지만, 금속활자와 인쇄를 관장하는 정식 관청이 새 국가에 설치된 것이니, 정도전의 구상이 더욱 구체화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태종 이전에는 목활자로 책 만들어
서적원에서는 실제로 책을 찍었다. 1395년 서적원에서 찍은 책인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의 중간본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대명률직해’는 명나라의 형법인 ‘대명률’에 이두로 구결을 소상히 달아 원문의 이해를 편리하게 한 책이다. 이 책에 정도전이 관여한다.
김지(金祗)가 쓴 발문에 의하면, 원래 조준(趙浚)의 명으로 고사경(高士 )과 김지가 이두로 구결을 달자 정도전과 당성(唐誠)이 윤문을 한 뒤 서적원에 인쇄를 맡긴다.
문제는 인쇄수단이다. 발문에 의하면 백주지사 서찬(徐贊)이 조각(造刻)한 글자로 인쇄했다는 것이다. 이 활자는 금속활자가 아니라 목활자다. 목활자라니!
서적원은 주자를 관장한다 했지만, 실제 보유한 것은 목활자였던 것이다. 목활자는 활자를 제작하기 쉽고, 또 가동성(可動性)이 있지만, 견고성은 훨씬 떨어진다. 이것은 목판인쇄와 금속활자 인쇄의 중간과정이다. 아직 금속활자는 만들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금속활자의 역사에 이제 다른 한 사람이 등장한다. 태종이다. 정도전이 아니라 정도전을 죽였던 정적(政敵) 태종이 금속활자를 만들었던 것이다. 1398년 8월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두 사람은 충돌하고 정도전은 태종에 의해 제거된다. ‘태조실록’ 7년 8월26일조는 정도전의 최후를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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