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지켜(연재자료)

고고학자 조유전의 한국사 - 무령왕릉 이후 최대발굴, 공주 수촌리고분

Gijuzzang Dream 2008. 8. 4. 11:07

 

 

 

 

[고고학자 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 여행](3)-(4)

 

 

 무령왕릉 이후 최대 발굴 공주 수촌리 고분

금동관 · 금동신발 … 백제인의 삶이 쏟아지다

2003년 12월2일 아침.
“빨리 와달라”는 이훈(충남역사문화연구원 연구실장)의 급보를 받은

조유전 관장(토지박물관)은 서둘러 행장을 꾸려 공주 수촌리로 떴다.
 

 

금동신발과 금동관, 환두대도가 쏟아진 수촌리 2지점 1호 토광묘의 현장 사진.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제공>

 


“전화는 받았지만 내심 가벼운 마음으로 현장에 도착했어요.

구제발굴이라는 점도 그랬고, 또한 도굴 무덤에서 그저 청동유물 정도나 나왔겠거니 했지.”

충남 공주시 의당면 수촌리 현장은
충청남도가 농공단지 조성을 위해

그에 앞서 사전조사를 벌이던 곳이다. 이른바 구제발굴을 벌이던 곳인 것이다.

과연 현장은 그렇게 매력적인 곳은 아니었다.
“전망은 확 트였지만 잣나무 숲과 풀이 무성해서 고분이 존재할 만한 환경으로는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현장을 보니 막 모습을 드러낸 금동신발의 윤곽이 뚜렷하지 않겠어요?

아! 큰 일이 터졌구나.”



■ 금동유물 품고 있던 백제 무덤 6기

37년 전의 일이 번개처럼 조유전의 뇌리를 스쳤다.
무령왕릉 발굴의 교훈.

흥분에 빠져 단 하루 만에 쓱싹 발굴을 해치워버린 바로 그 쓰라린 기억이었다. 그래 흥분은 금물이다.

‘내 손으로 큰 발굴을 했다’는 흥분에 사로잡히면 평정심을 잃게 되고,

그것은 도굴이나 다를 바 없는 졸속 발굴로 이어진다. 바로 1971년 무령왕릉 발굴처럼….

“자, 시간이 필요해. 절대 서두르지 말 것.
차근차근…. 언론에 먼저 보도되면 큰 혼란에 빠진다

(무령왕릉 발굴 때도 전쟁을 방불케 하는 언론의 취재경쟁으로 발굴현장이 혼란에 빠졌다).

보존대책을 미리 세워야 할 것이야.”

유전은 이훈에게 신신당부했다.

하지만 12월4일자로 대대적인 언론 보도가 터졌고,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무령왕릉 발굴 이후 최대의 발굴성과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결론적으로 말해 이 300평에 불과한 보잘 것 없는 구릉 한쪽에서 백제 무덤 6기가 확인됐다.

 

그 안에서는 금동관모 2점과, 금동신발 3켤레,

중국제 흑갈유도자기 3점, 중국제 청자 2점,

금동허리띠 2점, 환두대도 및 대도 2점 등

백제사를 구명할 수 있는 찬란한 유물들이 쏟아졌다.

이렇게 많은 백제의 금동제 유물이 쏟아진 것은 무령왕릉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러니 자지러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5년 남짓 지난 2008년 6월 어느 날.

조유전 관장과 이훈, 그리고 기자가 수촌리 현장을 찾았다. 감탄사가 절로 터져나왔다.

 


■ 각광 받지 못한 청동세트

“야, 전망이 좋네요.”

충남역사문화연구원의 이훈씨(오른쪽)가

조유전 관장에게 말끔히 정비된

수촌리 현장을 설명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사적으로 지정된 현장은 말끔히 정리되었고, 봉분까지 복원해놓은 상태였다.

무엇보다 현장은 동편 뒤로는 산을 등졌고,

서편 앞쪽으로는 드넓은 정안뜰이 펼쳐져 있어 시야가 확 트였으니 말이다.

“옛날에는 홍수가 나면 저 정안뜰까지 물이 들었다고 하네요, 그래서 수촌리(水村里)라고 했다네요.”(이훈)
세 사람은 발굴 당시의 기억 속에 빠져 시간가는 줄 몰랐다.

“그땐 여기보다는 저쪽에서 청동검(한국형 세형동검), 청동꺾창(靑銅戈)과 청동창(靑銅矛, 끝을 뾰족하게 하여 찌르는 창의 일종), 청동도끼, 청동 조각도 등

청동기 세트가 한꺼번에 먼저 출토됐잖아? 이런 청동기 세트가 한자리에 출토된 것도 획기적인데….”

(조유전)

“그랬죠. 실은 우리가 이 중요한 청동기 세트를 발견하고 나서 ‘어떻게 언론에 터뜨릴 수 있을까’하고

고민하고 있었는데요. 그러던 중에 여기서 더 엄청난 대형발굴이 터진 겁니다.”(이훈)

“그러니 청동기 세트는 운이 없는 거네요.”(기자)
“그것도 팔자지 뭐. 허허.”(조유전)

이게 무슨 말인고? 5년 전으로 돌아가보자.

 

2003년 9월 이훈이 소속된 충남역사문화연구원 발굴조사팀은

의당 농공단지 조성의 사전단계로 문화재조사를 벌이게 되었다.

이훈은 발굴대상을 1지역(1000평), 2지역(300평)으로 나누었고, 먼저 1지역부터 조사하기 시작했다.

10월20일. 1지역에서 뜻밖의 유물이 터졌다. 아까 언급한 청동세트가 확인된 것이다.

이훈은 마음이 급했다. 매우 중요한 유물세트이니만큼 언론에 공개하는 절차를 밟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렇게 이미 1지역에서 좋은 유물이 나온 터여서 2지역 조사는 서둘러 끝내려 했어요.

사실 2지역은 지형 자체는 좋은 편도 아니었고, 개인소유 땅이었어요. 조경수를 심느라

땅을 파내기를 수 십 년 간 해왔던 터라 유적이 있어도 훼손되었을 것이라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충남의 담당 공무원은 조바심을 냈다.

“(2지역에서) 중요한 유물이 나오면 농공단지 조성은 물건너 가는 것이 아니냐.

그냥 조사없이 끝내면 안되냐”고 걱정했다. 지금 생각하면 놀라운 선견지명인데,

조사단은 오히려 “별 것 없을 것이니 빨리 (조사를) 마무리 짓는 편이 낫다”고 설득했다.

조사단은 발굴조사에 앞서 통과의례처럼 지내는

개토제(開土祭, 흙을 파기 전에 토지신에게 올리는 제사)도 ‘별것 없겠거니’하고 생략했다.

 


■ 아! 금동신발, 어! 금동관

 

1호묘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금동신발.

그러던 11월3일.

연구실에서 서류정리를 하고 있던 이훈에게 한 통의 전화가 울렸다. 2지역, 즉 수촌리 현장에서 발굴을 담당하던 이창호 연구원의 다급한 목소리였다.

“부장님(당시 이훈의 직책). 지금 1호 토광묘에서 이상한 것이 잡혔어요. 금동관 하고, 환두대도(둥근 고리 칼)가 나왔어요.”

“금동관?”

머리가 띵 했다. 이게 무슨 조화인가.
며칠 전 본 청동기 세트도 처음인데, 이번엔 금동관이라니.

급거 현장으로 달려간 이훈의 앞에 희미한 금동관 같은 범상치 않은 흔적과 환두대도가 보였다.

   

“제 기억 속에 희미하게 각인된 신라금관의 T자형 형태였어요.

이 금동관은 환두대도의 칼날 끝부분 바로 아래 놓여있었고….

일단 흥분을 가라 앉히고 내일(4일) 다시 정밀하게 조사하자고 하고 돌아왔어요”

이훈은 그날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거렸다. 낮에 보았던 1호 무덤의 장면이 파노마라처럼 스쳤다.
그러고 보니 한가지 이상한 것이 있었다. 왜 머리에 쓰는 금동관이 환두대도의 칼 끝에 있을까.

칼이 거꾸로 놓였단 말인가. 순간 이훈이 벌떡 일어났다.

‘그래, 왜 금동관이라고만 생각했을까. 금동신발…. 맞다. 금동신발이다.’
백제 금동신발은 무령왕릉, 즉 왕의 무덤에서 발견된 최상격의 유물이 아닌가
.

 

 

 

다음날 이훈은 이 무덤에 ‘요주의’란 딱지를 붙인 뒤 맨 마지막으로 돌려버렸다.

보통 중요한 무덤이 아니므로 철저한 계획을 세운 뒤 조사를 진행하자는 것이었다.

다른 5기의 무덤을 먼저 조사하기로 결정내렸다. 먼저 조사하기 쉬운 석실분(3호)부터….

그러나 절대 쉬운 조사는 없었다.
“아! 여기서도 또 한 켤레의 금동신발과 환두대도, 항아리 등이 줄줄이 엮여 나오잖아요.”
조사단의 눈과 귀가 다 멎었다. 어쩌자는 말인가.

 

그런 다음엔 4호 무덤.

여기서는 금동관모와 금동신발, 금동고리칼, 금동허리띠 등 지역의 수장층이 갖추고 있어야 할

모든 필수품을 갖추고 있었다. 이 외에도 색다른 유물이 걸렸다.
“살포(논에 물꼬를 트거나 막을 때 쓰는 농기구)와 등자, 재갈,

그리고 계수호(鷄首壺, 닭머리 달린 항아리) 등 도자기들이 쏟아졌어요.

6기의 무덤 가운데 최고의 부장품을 자랑하고 있었죠.

흙 속에서 검은색 닭머리(계수호)가 삐죽 삐져 나왔을 때는 얼마나 놀랐는지….”

가장 중요한 무덤이라 여겨 뒤로 미뤘던 1호분에서는

무령왕릉에서 확인된 청자육이호(靑磁六耳壺, 귀가 여섯개 달린 항아리)와 비슷한

청자유개사이호(뚜껑 있는 귀 네개 달린 항아리) 등 중요 유물이 더 나왔다.
“누구도 접해보지 못한 유물들이라 제가 직접 대나무 칼을 들고는 하루종일 쭈그리고 앉아

그야말로 신주 모시듯 유물의 노출을 시도했어요.

금빛 유물들이 터지면서 저도 가슴이 두근두근했지만 책임자가 흥분할 수는 없었고….

‘릴렉스 릴렉스’를 가슴속에 새기면서 차분하게 작업에 임했습니다.”

 


■ 속내까지 다 연 백제사람들

 

1지점에서 확인된 청동기 세트.

2지점에서 쏟아진 금동제 유물 때문에

각광받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벌어진 심상치 않은 일 하나.

3호 무덤에서 금동신발이 나올 무렵,

갑자기 강풍과 폭우가 쏟아졌다. 무서울 정도였다. 그때서야 느낌이 왔다. 가만 생각해보니 무덤을 파헤치면서 제사조차 지내지 않은 ‘싸가지 없는 후손들’이 아닌가.

“아! 우리가 너무 이 분들(무덤의 주인공들)을 우습게 보았구나.”

간단한 제사상을 차려 위령제를 지냈다.
다음 날 어르신들의 화가 풀렸다.

날씨가 거짓말처럼 말끔히 개었고, 포근해졌다.

“망국의 한을 품고 있어서인가요? 백제인들은 쉽게 마음의 문을 열지 않습니다.

하지만 한번 문을 열어주면 속내까지 다 보여주는 것 같아요. 바로 이 수촌리의 주인공들처럼….”

다시 2008년 6월 어느 날.

기자가 “수촌리와 관련된 자료 좀 달라”고 하니 이훈이 몇가지 자료를 건네준다. 그 가운데

눈에 띈 것이 스스로에 대한 반성문이다. 무슨 반성문? 발굴 때의 실수담을 그대로 적어놓은 것이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연구원 한 명이 새파랗게 질려 달려왔습니다. 부장님, 어쩌면 좋죠? 하고.

사연인즉슨 2호분에 흩어져 있던 구슬들에 대한 보존처리가 필요했습니다.

바닥에 널려있는 구슬의 배치를 살펴서 머리장식과 목걸이 형태를 알아보려면

바닥면까지 한꺼번에 우레탄폼으로 굳혀 통째로 들어낸 뒤 보존처리실로 운반해야 합니다.

그런데 들어 올리다가 그만 바닥에 구슬을 쏟아버린 것이었습니다.”

물론 미리 평면실측도 했고, 사진촬영까지 마친 뒤라 보고서 쓰는 데는 문제가 없다지만

더욱 정밀한 사후조사로 파악할 수 있는 고고학 자료가 실수로 묻혀버린 것이었다.

이훈은 그것을 자책하는 것이다.

조유전 관장은 이쯤해서 다시 1971년 무령왕릉의 기억이 떠오르는 모양이다.

하룻밤 졸속 발굴로 수많은 정보가 묻혀버렸던 그 때의 몸서리쳐지는 일이….
“발굴자는 정말 조심, 또 조심해야 하는 거라. 잘못하면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는 것이야.

실수를 몰래 덮어 버리면 남 몰래 넘어갈 수는 있지만 더 이상의 발전은 있을 수 없지.

발굴자는 스스로에게 엄격해야 해.”

그러면서도 작은 실수를 인정하고 이렇게 공개하는 후학의 용기가 가상한 모양이다.

하기야 발굴자가 이렇게 후일담으로나마 실수를 인정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던가?

드물지 않을까 싶다.


자, 이제 AD 4~AD 5세기, 한성백제국 수촌리 마을로 돌아가보자.

당시 이 땅에 묻힌 무덤의 주인공들이 살았던 바로 그곳으로….



‘한 가문의 무덤’ 세대별 묘제 다르다

“제 사촌형수가 여기(수촌리) 살았는데
예전에 저기 보이는 학교(수촌초교)를 조성할 때

‘왕의 칼’이 나왔다는 소문이 돌았대요.”(이훈)
왕의 칼이라 하면 환두대도(둥근고리칼)를 뜻하는 것이리라.

 

이훈(충남역사문화연구원 연구실장)은

수촌리 현장 바로 곁에 있는 수촌초교를 지목하며 떠도는 이야기를 전한다.

고고학자의 야장(野帳 · 조사내용을 자세하게 기록하는 노트).

2003년 11월27일과 12월2일 수촌리 1, 2, 4호를 조사한 내용을

빼곡히 담고 있는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이창호 연구원의 야장이다.


 

조유전 관장(토지박물관)이 수촌리 현장과 학교 사이에 있는 무성한 풀숲을

범상치 않은 눈으로 쳐다본다. “저 풀숲에도 무언가 있을 가능성이 있네.”(조 관장)
“예, 이곳부터 저 학교까지의 사이에 아마도 고분군이 있었을 겁니다.

저 풀숲을 발굴하면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발굴자인 이훈은 그러면서 수촌리 고분이 AD 4~5세기에 조성된 거대한 가족묘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래 유구와 유물의 양상을 보면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네.”(조 관장)

5세기 무렵으로 돌아가보자.
부모님의 묘를 선산에 조성했다고 치면

1~2호분은 증조 할아버지 · 할머니 묘이고, 3호분은 할아버지, 4~5호묘는 부모묘인 것이다.
“할아버지 묘(3호분)는 있는데, 할머니 묘가 없는 게 이상하네요.”(기자)
“아니지, 어딘가 있는데 발견하지 못한 게지.”(조 관장)
“아마도 3호분 곁 어디엔가 있는데, 우리가 조사하지 못한 거죠.”(이훈)



■ 애틋한 부부의 정표

이훈은 왜 가족묘라고 단정을 내릴까. 그의 회고를 들어보자.

 

2004년 여름 어느 날, 나른한 오후였다.

졸린 눈을 비비고 있는데, 이형주 연구원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잠이 확 달아났다.
“부장님, 이것 두 개가 붙어요.”
이 무슨 소린가? 안경너머로 보니 이형주 연구원이 자색 관옥 2점을 들고 있었다.

4호분과 5호분에서 한 점씩 출토된 것이었다.


그런데 출토유물을 정리하다가 유물의 형태가 비슷한 것 같아 서로 맞춰보니 딱 맞는 게 아닌가.

“그래, 부부묘다”라고 외치며 뛰어온 것이었다.
“아, 부절(符節, 돌 · 대나무 · 옥 따위를 잘라 신표로 삼던 것)이다.

살아생전 부부의 도타운 정을 죽어서도 간직하고픈 것이었겠지.”(이훈)
아니면 먼저 간 사랑하는 남편(혹은 아내)의 머리맡에 옥을 부러뜨려 고이 넣고는

자식들에게 말했으리라. “나 죽으면 나머지 부러진 옥을 내 머리맡에 놓아주거라”라고….

죽은 뒤 하늘에서 만나 맞춰보려면….

결국 4~5호분도 애틋한 부부의 정을 담고 있는 무덤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할아버지, 아버지의 묘는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이것 역시 고고학의 묘미다. 바로 묘제의 차이를 살펴보는 것이다.
“수촌리 유적은 한 집안의 무덤들이 분명한 것 같은데,

일정한 시차를 둔 다양한 묘제를 자랑하고 있다는 것이 드라마틱해.

하나의 고분군에서 이렇게 시기별로 나타난 것은 드물지.”(조 관장)

중요한 것은 흙무덤과 돌무덤의 차이
.

충청도나 전라도의 토착세력들, 즉 마한사람들은 흙무덤(토광묘 · 土鑛墓)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한성백제가 마한을 복속시키면서 점차 돌무덤이 전파되었다.

돌무덤은 발해연안에서 선진문물을 창조해낸 사람들의 후예,

즉 백제인이 BC 18년 남하하면서 가져온 고급 묘제이다.

 

그런데 이 수촌리 1~2호분의 주인공은 마한의 전통이 남은 토광목곽묘를 썼다.

반면 3호분은 백제 묘제인 횡구식석곽묘(橫口式石槨墓 · 앞트기식 돌방무덤),

4~5호분은 횡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墳 · 굴식돌방무덤)이다.

토광목곽묘는 위에서 구덩이를 판 뒤 목곽을 짜맞춰 놓고 그 안에 시신을 넣는 묘제인데,

1~2호분은 목곽 안에 목관을 조성했다.

3호묘인 횡구식석곽묘는 돌방무덤을 만든 뒤 앞에 문을 만들어 출입하게 했다.

4~5호묘인 횡혈식석실분은

무덤 앞에 안팎으로 통하는 무덤길(연도)을 만든 뒤 무덤방, 즉 돌방무덤을 조성했다.

 


■ 수촌리 가문

“고대 묘제는 토광목곽묘→횡구식석곽묘→횡혈식석실분의 순서로 발전합니다.

증조 할아버지 때까지는 마한의 전통을 살렸지만

할아버지, 아버지 대에는 선진 묘제인 돌무덤을 쓰기 시작한 것이죠.

지체높은 분들이었으니까 첨단 묘제를 쓰기 시작했겠죠.”(이훈)

1~2호(토광목곽묘)는 AD 380~390년,

3호(횡구식석곽묘)는 AD 400~410년,

4~5호(횡혈식석실분)는 AD 420~440년으로 추정된다.

 

즉, 5세기 중반에 살았던 수촌리 어떤 가문의

증조 할아버지 부부, 할아버지, 아버지와 어머니 무덤 등으로 추정할 수 있다는 얘기다.

여기서 금동제 유물이 쏟아진 수촌리 2지점과 붙어있는 1지점에서 확인된 청동기세트를 떠올려보자.

“이 수촌리 가문은 청동기 시대(BC 4세기)부터 뼈대 있는 가문이 아니었을까요?

청동기시대 수장(首將)이 지니고 있었을 청동기세트를 땅에 묻은 집안의 후예가

마한의 지배세력으로 이어졌을 겁니다.”(이훈)

자, 시계를 기원 전후로 되돌려보자.

이복형인 고구려 유리(주몽의 적자)의 핍박에 밀려 북쪽에서 내려온 백제 온조왕은

마한의 도움으로 위례성에 도읍을 세웠다(BC 18년).

이 무렵 한반도 서남부에는 마한 54개국이 연맹체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굴러온 돌’인 백제 온조왕은 차츰 남쪽으로 영역을 넓히더니 BC 6년 강역을 획정했다.

북으로는 패하(浿河 · 예성강), 남으로는 웅천(熊川), 즉 금강까지였다.

10년이 흐른 AD 5년에는 급기야 웅천책(熊川柵), 즉 금강에 목책을 세우는 지경에 이른다.

그러자 마한왕은 참다못해 사신을 보내 질책한다.
“왕(온조)이 처음 왔을 때 발디딜 곳이 없어 내가 동북쪽 100리의 땅을 내주었는데…

이제 나라가 안정되고 백성이 모여들자 ‘나와 대적할 자 없다’고 생각해…

우리 강역을 침범하니 이 어찌 의리라 하겠는가.”

마한왕의 질책에 백제 온조왕은 부끄럽게 여기고 그 목책을 헐었다.

하지만 불과 2년 뒤인 AD 7년 강성해진 온조왕의 야욕은 끝내 발톱을 드러낸다.
“마한은 어차피 망해가는 나라다.

우리가 아닌 다른 나라가 병합하면 순망치한 격이니 우리가 먼저 치는 편이 낫다.”

온조왕은 사냥을 빙자하여 군대를 일으켰으며, 이듬해(AD 8년) 마침내 마한을 멸망시킨다.

이것이 삼국사기에 나온 백제의 흥기와 마한의 쇠망에 관한 기록이다.

 

물론 마한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마한이 완전하게 멸망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마한은 백제가 강성해지면서 점차 그 영역이 축소되면서

그 중심이 남쪽으로 이동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조유전 관장은 이쯤에서 또 한마디 지적한다.

“생각해봅시다. 온조왕이 마한을 정복했다고 해서 마한의 전통이 쉽게 사라질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도리어 백제의 입장에서 보면 토착세력을 위무시키려고

마한인들을 북돋는 정책을 펼쳤을 겁니다.”

이형구 선문대 교수도

“이렇듯 명백하게 나온 삼국사기 초기 기록은 당연히 믿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훈도 두 선생의 말에 동의한다. 이와 관련해 한가지 의미심장한 기록이 있다.

즉 온조왕이 마한을 병합한 뒤 7년이 지난 AD 16년의 삼국사기 기록이다.

“마한의 옛 장수 주근(周勤)이 우곡성에서 반역하였다.

온조왕이 몸소 군사 5000을 이끌고 이를 치니 주근은 스스로 목을 매고….”

마한의 입장에서 보면 백제는 배은망덕한 나라다.

이복형(유리)에게 쫓겨 내려와 ‘집도 절도 없던’ 온조에게 땅까지 주며 거둬주었는데, 배신했으니….

그러니 주근과 같은 마한 잔여세력의 반항이 만만치 않았을 것이고,

백제로서는 이들에 대한 위무정책을 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백제가 마한을 정벌했다고 해서 직접 통치하지는 않았겠지.

그 지역의 토착세력, 즉 옛 마한 수장급의 후예들로 하여금 해당지역을 통치하도록 했을 거야.

간접지배라는 뜻이지.

백제 중앙정부는 금동관이나 금동신발, 환두대도 같은 예기(위세품)를 하사했을 테지.”(조 관장)

특히 강정원 충남역사문화연구원 문화재연구팀장은

“AD 4세기말~5세기초로 편년되는 수촌리 고분에서 출토된 하사품들은

AD 392년 광개토대왕의 남침 등 고구려의 남하에 대항하기 위해

내부결속을 다지려고 지방세력에게 하사한 위세품일 수도 있다”고 보고 있다.

 


■ 한성백제왕이 하사한 왕 · 후 작위

이훈은 특히 송서 백제전 및 남제사 백제전에 등장하는 왕 · 후제에 주목한다.

“중국 역사서를 보면

백제는 국가에 일정한 공로를 세운 자를 예우하기 위해 왕(王) · 후(侯)제를 두었습니다.

이른바 작호제(爵號制)라 할 수 있는데, 수촌리 가문이 바로 그 경우가 아니었을까요.

마한의 후예, 즉 공주를 기반으로 성장한 귀족에게

금동관과 금동신발 같은 최상급의 하사품을 주지 않았을까요?”(이훈)

또 하나, 수촌리 가문 계보의 출자에 대한 노중국 계명대 교수의 해석이 그럴듯하다.

“마한 54개국 가운데 공주지역을 기반으로 한 소국인 감해비리국(監奚卑離國)이 있어요.

수촌리 고분의 주인공은 바로 옛 감해비리국의 수장 출신으로

백제의 중앙귀족으로 편입된 가문이 아니었을까요?”

더 자세히 묻는다면? 그 가문의 성씨는?
“이 가문의 성(姓)과 관련해 주목되는 것이 백가(加)입니다.

웅진세력이 기반인 백가는 백제의 웅진 천도 이후 새로이 두각을 나타냅니다.

수촌리 고분 가문과 백씨 가문에 어떤 연관성이 있지 않을까요?”(노중국 교수)

이렇게 보면 수촌리 고분의 주인공은

BC 4세기부터 공주 지역을 기반으로 한 지배계급의 후예임을 알 수 있다.

후에 마한 54개국 중 감해비리국의 수장으로 이어지며,

훗날 한성백제의 지방 혹은 중앙귀족이 된 뼈대있는 ‘백씨’ 가문이었다.

물론 이것도 지금까지 고고학 발굴 성과와 문헌자료를 토대로 엮어본 그럴듯한 추정일 뿐이다.
“앞으로 본격적인 역사전쟁이 벌어질 것 같아요.”(이훈)

이것은 무슨 말인고?

지금까지는 몇 안되는 고고학 발굴 성과를 갖고 일부 학자들이 우리 고대사를 멋대로 해석해왔다.

하지만 최근 10여년간 특히 백제사와 관련된 고고학 성과들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지면서

기존 학자들의 학설이 ‘거짓말’로 판명되기 일쑤다.

여기서 조유전 관장의 한마디는 경청할 만하다.
“며칠 전 풍납토성에서 쏟아진 수많은 토기들을 보라고.

수촌리 고분이 조성되었던 바로 그 시기에 전국 각지에서 생산된 토기들이 중앙,

그러니까 풍납토성으로 운반되잖아. 기원 전후부터 활발했던 국제교역의 증거들은 또 어떻고.

쾌도난마로 학설을 독점하고 남의 이야기는 무시해왔던 학자들이 지금 어쩔 줄 모르고 있잖아.”

‘제발 섣부른 단정을 내리는 어리석은 고고학자가 되지 말라’는 노학자의 충언이다.

- 경향, 2008년 07월 04일,  07월 11일

- 공주 수촌리/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