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1년(인조 9) 8월5일 밤, 후금군은 대릉하성을 포위했다.
당시 성안에는 사령관 조대수(祖大壽)를 비롯하여 1만 5000명 남짓한 명군이 있었다.
성의 치첩(雉堞) 공사가 끝나지 않은 상태라
미처 돌아가지 못한 인부가 3000명, 상인이 2000명 정도 있었다.
후금군은 만주병과 몽골병, 그리고 한인으로 구성된 포병대를 합쳐
모두 4만명 가까운 병력이었다. 누르하치 시절 이래 후금군은
요동 지역의 명군을 공격할 때마다 항상 수적 우세를 유지해 왔다.
명군보다 월등히 많은 수의 병력을 집중시키는 작전을 통해 승리를 거두었는데
대릉하 원정에서도 어김없이 그 원칙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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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타이지, 4만 병력으로 1만5000 대릉하성 포위
휘하 병력의 수가 명군에 비해 월등히 많았음에도 홍타이지는 신중했다.
그는 과거 누르하치가 영원성을 공격하다가 실패했던 전철을 뒤풀이하지 않으려고 했다.
병사들을 성을 향해 돌격시키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공격할 경우,
후금군의 인명 손실이 커질 것을 우려했다.
명군이 갖고 있는 화포의 위력을 의식했기 때문이었다.
홍타이지는 성을 포위한 뒤, 성 주위에 두 겹으로 참호를 파라고 지시했다.
참호의 바깥에는 담을 쌓았다. 성과 후금군의 참호 사이의 거리는 약 3리(里) 정도였다.
3리 정도면 명군 화포의 사정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거리였다.
대릉하성에서 금주로 이어지는 대로에는
만주와 몽골군 분견대(分遣隊)와 한인 포병대를 배치하여
바깥 지역으로부터 명의 지원군이 오는 것을 차단하도록 했다.
성을 완전히 고립시킨 상태로 장기전을 펼침으로써 명군을 고사시키겠다는 작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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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금군은 명군의 출격에 대비하여 곳곳에 복병을 배치했다. 이후에도 명군은 간헐적으로 병력을 내보냈지만 그 때마다 후금군에 격퇴되었다.
홍타이지는 물 샐 틈 없는 포위 상태를 유지하는 한편, 대릉하성 바깥에 위치한 명군의 독립 성보(城堡)들을 각개 격파하려고 시도했다.
대(臺)라고도 불리는 개별 성보들을 향해 홍이포를 비롯한 화포들을 쏘아 타격을 가한 뒤, 점령하는 방식이었다. 작전의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각 대에 머물던 많은 명군 장졸들과 백성들이 포격을 받고 전사하거나, 투항해 왔다.
10월12일에는 대릉하성 주변의 성보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던 우자장대(于子章臺)가 함락되었다.
후금군은 홍이포 6문, 대장군포 54문을 이용하여 3일 동안 맹렬한 포격을 가했다.
성첩이 무너지고 사상자가 속출하는 와중에 남녀 587명이 투항해 왔다.
우자장대가 무너졌다는 소식은 주변의 각 대들에도 연쇄적으로 충격을 주었다.
겁을 집어먹은 장졸과 백성들의 도주와 투항이 이어졌다.
10월14일에는 대릉하성 외곽의 마지막 보루였던 진흥보대(陳興堡臺)마저 무너졌다.
●명 대규모 지원군마저 참패
포위를 통해 명군의 목줄을 조여들어 가는 한편, 홍타이지는 강온 양면 전략을 구사했다.
8월13일부터 수 차례에 걸쳐 조대수에게 편지를 보내 화친과 투항을 촉구했다.
때로는 투항한 한군(漢軍) 장수들을 성으로 보내 항복을 종용했다.
처음 홍타이지로부터 화친과 투항을 요구받았을 때 조대수는 애써 무시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시간과 상황은 조대수의 편이 아니었다.
8월15일, 포위된 대릉하성을 구원하기 위해 송산(松山) 방면에서
명군 지원군 2000명이 달려 왔지만 기다리고 있던 후금군 병력에 의해 격퇴되었다.
25일에도 금주성으로부터 6000명의 원군이 출격했지만 역시 후금군에 차단되어 도주했다.
대릉하성을 구원하기 위해 보낸 병력이 번번이 패퇴하자
9월24일 명군은 마지막 카드를 뽑아들었다. 산해관으로부터 대규모 구원군을 다시 보낸 것이다.
감군도(監軍道) 장춘(張春), 총병 조대락(祖大樂) 등이 병력 4만명을 이끌고 출동했던 것이다.
명군은 소릉하(小凌河)를 지나 주둔지에 참호를 파고 화기 등을 정렬 배치하는 등
후금군과 전면전을 벌일 태세였다.
하지만 3일 뒤에 벌어진 전투에서 명군은 병력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다시 패하고 말았다.
전투 도중 후금군 진영 쪽으로 불던 바람이 역풍으로 바뀌었다. 날씨도 철저히 후금군 편이었다.
명군은 결국 사령관 장춘을 비롯한 33명의 지휘관이 포로가 되는 등 참패하고 말았다.
전투를 감독하던 대학사 손승종(孫承宗)은 산해관으로 패주했다.
구원군이 오는 족족 패주했던 데다
외곽에서 전초 기지 역할을 하던 각 대들이 하나 둘씩 무너지자
대릉하성의 상황은 갈수록 심각해졌다.
외부로부터 지원이 끊긴 상황에서 식량과 땔감, 마초(馬草)가 고갈되고 있었다.
땔감을 구하기 위해 성밖으로 몰래 나오는 명군 병사들은
매복하고 있던 후금군에 살해되거나 체포되었다.
8월24일, 포로로 잡힌 명군 병사로부터
‘성을 쌓는 공사에 동원된 인부들 가운데 이미 30명 가까이 굶어 죽었다.’는 진술이 나왔다.
9월19일에는 ‘성안에 남은 곡식이 불과 100석뿐이고, 탈 수 있는 말은 70마리밖에 없다.
인부들의 절반이 굶어 죽었고, 살아 남은 병사들은 말고기로 버티고 있으며
말 안장을 쪼개 불을 피우고 있다.’는 형편이었다.
장춘이 이끄는 구원군이 패하고 우자장대마저 무너진 10월 이후의 상황은
절망과 처참 그 자체였다.
10월10일, 성을 탈출하여 후금군 진영으로 투항한 왕세룡(王世龍)의 진술은 충격적이었다.
‘성안의 양식은 다 떨어졌고, 인부와 상인들은 모두 죽었으며,
남아 있는 병사들은 서로를 잡아먹고 있다.’는 것이었다.
대릉하성은 마침내 ‘서로를 잡아 먹는(人相食)’ 상황으로까지 치달았다.
고립된 명군과는 달리 후금군은 금주를 거쳐 심양까지 이어지는 대로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심양으로부터 병력과 군수 물자를 수시로 실어올 수 있었다.
조대수의 항복은 이제 ‘시간문제’가 되고 말았다.
●‘부메랑’된 홍이포
대릉하성의 명군을 최악의 상황으로 몰아넣은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당시 후금군이 보유하고 있던 화포의 위력이었다.
1626년 영원성을 공격하다가 명군의 홍이포(紅夷砲) 공격 때문에
누르하치가 끝내 절명했던 ‘아픔’을 겪었던 후금은 이후 명군의 화기를 획득하기 위해 부심했다.
처음에는 전장에서 노획한 명군의 화기를 활용하는 정도에 불과했던 후금은
마침내 1631년 1월과 3월, 대장군포(大將軍砲)와 홍이포를 각각 자체 제작하는데 성공한다.
대장군포는 16세기 전반, 포르투갈 상인들이 명에 전해준 불랑기포(佛狼機砲) 가운데
제원이 큰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홍이포는 17세기 초반 역시 마카오를 통해 명에 전해진 최신 화포였다. 포신이 길어 사정 거리가 길 뿐 아니라 탄환이 날아가는 속도와 파괴력이 당시 그 어느 화포보다도 발군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홍이포를 주조하고 그것을 전장에서 활용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주역이
대개 명과 관련이 있거나 명에서 귀순한 한족(漢族)들이었다는 점이다.
홍이포 주조의 총감독이자 나중에 한인으로 구성된 포병대를 이끌었던 동양성은
원래 무순(撫順)에서 한족 상인들과 오랫동안 거래했던 인물이다.
절반은 한족이나 마찬가지였던 그는 이후 누르하치에게 귀순했다.
홍이포 주조의 실무를 감독했던 정계명(丁啓明)은
원래 명군 부장(副將)이었다가 기사전역 당시 후금군에 투항했던 인물이다.
주조를 직접 담당했던 장인(匠人) 왕천상(王天相)과 두수위(竇守位) 등도
기사전역 당시 후금군이 획득했던 한인들이었다.
홍타이지는 화포 주조의 공을 인정하여
이들 장인을 노비 신분에서 모두 해방시키고 많은 상을 내렸다.
귀순한 한인들의 협조 덕분에
대릉하 공격 당시 후금군은 명군보다 더 많은 수의 대형 화포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명 출신 장인들이 만든 홍이포에서, 명 출신 포병들에 의해 발사된 포탄은
견고한 대릉하의 성보들을 파괴하고 용장(勇將) 조대수를 궁지로 몰아 넣었다.
무너져 가고 있던 명으로부터 유출된 인력과 최신 기술들이 ‘부메랑’이 되어
명군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던 것이다.
-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2008-01-30 서울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