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금군이 침략해 오고, 사신을 보내 배를 빌려달라고 요구하자
조선의 위기 의식은 높아졌다.
조정은 김시양(金時讓)을 도원수로, 이완(李浣)을 평안병사로 임명하여
서북으로 내려보내고 전국에 징병령을 내렸다.
하지만 후금과 맞설 수 없는 처지에서 계속 강경책을 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조선은 다시 기미책(羈策:오랑캐를 다독이는 정책)으로 돌아갔다.
1631년(인조 9) 7월, 조선의 ‘태도’와 ‘능력’을 확인한
후금은 서쪽으로 명 원정길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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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아닌 斥和 · 主和 논쟁
1631년 6월13일, 배를 빌려줄 수 없다는 통고에 불만을 품고 호차 중남 등이 뛰쳐나간 직후
입직 포수(砲手) 이덕탁(李德卓)이 승정원에 나타났다.
그는 ‘오랑캐 사신들은 우리의 허실을 엿보기 위해 왔으니 그냥 돌려보내면 후환이 있을 것’
이라며 빨리 그들을 억류하고 싸울 준비를 하라고 강조했다.
18일에는 후금군의 침략 소식에 놀라 이원익이 조정으로 달려왔다.
이원익은 당시 이미 은퇴한 데다 여든다섯의 고령이었다.
그는 인조에게, 하삼도의 군병을 동원하여 민심을 소란케 하지 말고
어영군(御營軍)을 비롯한 서울에 있는 정병을 평안도로 내려보내라고 건의했다.
그러면서 어떤 경우에도 선제 공격을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후금군과 일전을 불사해야 한다.’는 이덕탁의 건의를 계기로 때아닌 논쟁이 벌어졌다.
지평 심연(沈演)은 식량을 주지도, 회답사(回答使)를 보내지도 말고 후금을 공격할 계책을
의논하라고 촉구했다. 사헌부의 다른 신료들도 심연의 의견에 동조했다.
그들은 ‘정묘호란 이후 오랑캐와 서로 왕래한 것은 화호(和好)를 굳게 하려는 것이었는데
지금 그들이 이유 없이 쳐들어와 맹약을 어겼다.’고 지적하고,
더 이상 미봉책으로 대응하지 말라고 촉구했다. 홍문관 신료들은 한 발 더 나갔다.
그들은 ‘오랑캐가 부모의 나라를 짓밟고 가도를 공격하려 한다면 갓을 쓰고서라도 달려가
구원해야 한다.’며 강약과 승패는 따질 필요가 없다고 했다.
일부 신료들은 ‘조정이 아예 안주 이북의 방어를 포기했다.’고 통탄하고
군사를 총동원하여 싸우자고 주장했다. 삼사(三司) 신료들은 이참에 후금과의 우호관계를 끊고
척화(斥和)의 길로 나아가라는 주장을 폈던 것이다.
비변사(備邊司)의 입장은 달랐다.
비변사는 ‘후금과의 화의(和議)를 언제까지나 믿을 수는 없지만, 싸우려 해도 병마가 모이지 않고
군량도 제대로 댈 수 없는 처지에서는 어쩔 수 없이 후금을 다독거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조는 비변사의 의견에 동조하여 박로와 오신남(吳信男)을 회답사로 임명하여 심양으로 보냈다.
화친을 계속 유지하려고 결심한 것이다.
삼사 관원들은 굴욕적인 사신 파견을 당장 중지하라고 외쳤지만 소용이 없었다.
●인조, 훗날 대비 강화도 정비 ‘올인´
조선이 기존의 화친 관계를 유지하기로 결정하자 후금군은 철수 길에 올랐다.
당시 후금군은 조선군이 쉽게 맞설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이미 1629년과 1630년 이른바 기사전역(己巳戰役) 당시 만리장성의 외곽을 넘어 북경을 비롯한
명의 심장부를 유린했을 정도로 막강한 전력을 갖고 있었다.
잘 훈련된 병력이 많은 것은 물론, 실전 경험까지 풍부하게 갖추고 있었다.
6월28일, 후금군이 철수를 시작했다는 보고가 조정으로 전해졌다.
철수 소식을 들은 인조는 신료들에게 강화도를 대대적으로 정비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사실 인조는 후금군이 쳐들어 왔던 직후 강화도로 피란할 계획을 세웠었다.
또 강화도로 들어가는 것을 염두에 두고 삼남에 독운어사(督運御史)를 파견했다.
혹시라도 강화도의 군량이 떨어질 것을 염려하여 미리 양곡 운반을 독려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런데 이제 후금군이 물러가자 본격적으로 강화도를 재정비하려는 깜냥이었다.
인조는 강화도에 10만 군사가 먹을 수 있는 양곡을 비축하라고 지시했다.
강화 읍성(邑城)과 갑곶성(甲串城)을 개축하고, 화기와 각종 장비들을 미리 옮겨 놓으라고 했다. 전국에서 올라오는 방물(方物)을 목면으로 바꿔 강화로 수송한 뒤,
나중에 군량 마련을 위한 자금으로 쓰려는 계획도 세웠다.
또 강화도 연안의 병력 주둔지에 큰 창고들을 지을 것을 주문했다.
측근들을 강화도로 보내 방어 상태와 시설 등을 수시로 점검했다.
인조가 강화도 정비에 ‘올인’ 하는 자세를 보이자 우려의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우선 조정에서 방어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청북(淸北) 지역 사람들의 불만이 높았다.
1631년 7월, 영유현령(永柔縣令) 정기수(鄭麒壽)가 상소했다.
그는 ‘청북은 포기할 수 없는 조종(祖宗)의 강토인데 조정에서는 청북을 지키려 하기는커녕
사람들을 지역에서 빼내려 하고 있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또 ‘청북 사람들은 정묘호란 당시 후금군에게 당한 원한을 갚기 위해
모두 싸우다가 죽으려는 결의가 넘친다.’며 조정의 지원을 촉구했다.
우의정 이정구는 다른 측면에서 인조의 ‘강화도 정비론’에 반대했다.
그는 서울이 팔도의 근원이며, 근원이 흔들리면 민심이 무너져 변경이 흔들릴 것이라고 지적하고,
먼저 서울 서쪽의 방어 태세를 점검하라고 촉구했다.
이정구는 또한 강화도는 들어가려고 원하는 사람들을 모두 수용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
진단했다. 따라서 ‘제대로 된 요새로 정비하려면 너무 많은 비용 때문에 불가능하고,
섣불리 강화도 정비에만 몰두하면 원망이 일어나 민심을 동요시킬 우려가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강화도 주변의 연도(沿島) 방어에도 신경 쓸 것을 주문했다.
하지만 인조는 이정구 등의 경고에 제대로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인조뿐 아니라 당시 많은 관인들이
‘후금군은 수전(水戰)에 약하기 때문에 바다로 둘러싸인 강화도는 안전하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1636년 병자호란이 터졌을 때 인조는 강화도로 들어가지도 못했고,
후금 수군은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강화도를 함락시켰다.
국가 안보를 책임지는 사람들이 ‘고정관념’에 집착할 때,
어떤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후금군, 대릉하성 공략 나서
조선 조정이 위기의식 속에서 강화도를 정비하는 데 골몰하고 있던 1631년 7월,
후금은 다시 명에 대한 원정에 나섰다.
이번 원정의 공격 목표는 대릉하성(大凌河城)과 금주(錦州) 등지였다.
모두 영원성과 산해관으로 전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명군의 전초 기지였다.
홍타이지는 원정 시작에 앞서 소규모 정예 병력을 수시로 대릉하 주변으로 보냈다.
명의 장졸들이나 민간인들을 납치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단순히 ‘인간 사냥’이 아니라 명군 관련 정보를 획득하기 위한 정찰의 일환이었다.
당시 후금의 정탐(偵探) 능력은 탁월했다. 이미 건주여진 시절부터 명 관인들은
누르하치의 간첩 활동과 정보 수집 능력에 경계심을 드러낸 바 있었다.
명 관인들 사이에서는 심지어 “건주여진인은 간첩 활동에 가장 뛰어나다.
내응하는 자들 때문에 견고한 성도 앉아서 무너지고 만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였다.
홍타이지는 ‘인간 사냥’을 통해 명의 총병(總兵) 조대수(祖大壽) 등이 대규모 인원을 동원하여
산해관 바깥에 대릉하성을 비롯한 여덟 개의 성을 수축하고 있다는 정보를 알아냈다.
후금군이 공격해 오기 전에 공사를 마치려고 밤낮으로 독려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홍타이지는 원정을 결심하고,
후금에 귀순한 몽골의 여러 패륵(貝勒)들에게도 동참할 것을 명령했다.
마침내 8월5일, 홍타이지의 대군은 대릉하 부근까지 전진했다.
대릉하 원정에 앞서 조선에 병력을 보내 위협하고,
배를 빌려달라고 한 것은 사전 정지작업이었던 셈이다.
받아들이기 곤란한 요구를 내세워 조선의 반응과 능력을 시험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이 서정(西征)하는 동안 조선이 배후에서 공격해 올 우려가 없다는 확신이 생기자
비로소 군대를 움직였던 것이다.
-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2008-01-23 서울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