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가 원종 추숭을 위해 골몰하고 있을 때 가도의 상황은 심상치 않게 돌아갔다.
반란을 일으켜 조선의 정벌 대상이 되었던 유흥치(劉興治)는
조선에 대한 물자 징색(徵色)을 멈추지 않았다.
유흥치를 토벌하려 했던 ‘원죄’ 때문에 조선은 그의 보복을 받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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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0년(인조 8) 8월, 비변사는
총융사 휘하의 경포수와 어영군을 평안병사 유림(柳琳)에게 배속시키고
도내의 정예병을 안주, 정주, 구성 등지에 배치하여 유흥치 일당의 노략질에 대비할 것을 청했다.
●가도 정벌 시도의 후유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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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자신을 공격하려 했던 까닭을 힐문하려 했다.
인조는 처음에는 그와의 면담을 회피했다.
하지만 결국 그를 만나 토벌 시도에 대해 유감을 표시했다.
유흥치는 9월에도 차관 이현(李見)을 보내왔다.
그는 먼저 ‘정충신이 가도 사람들이 배 만들고 숯 굽는 것을 방해했다.’고 비난했다.
정충신이 토벌에 나섰을 때 유흥치의 정탐꾼들을 체포하고 한인들을 살해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유흥치는 이어, 굶주리는 사람이 많다는 이유로 양곡을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뻔뻔함의 극치였다. 인조는 이현에게 요구를 대체로 수용하겠다고 했다.
같은 해 10월, 인조는 문안관 정유성(鄭維城)을 가도로 보냈다.
유흥치는 ‘기공대첩(奇功大捷)’이란 글자를 쓴 깃발을 세워놓고 정유성을 만났다.
그는 정유성에게 자신이 섬 안의 훼방꾼들을 제거했는데
조선이 자신을 왜 공격하느냐고 힐문했다. 그러면서 ‘조선이 천조(天朝)를 범하는 오랑캐는
토벌하지 않으면서 명나라 장수를 향해 군사를 들이대는 까닭이 무엇이냐?”고 다그쳤다.
정유성은 대꾸할 말이 없었다. 머쓱해진 정유성에게 유흥치는 본색을 드러냈다.
섬 안에 군량이 부족하니 조선이 그것을 공급하라고 다시 요구했다.
조선은 군사를 일으켜 아무런 성과도 얻어내지 못하고 힘만 낭비한 꼴이 되고 말았다.
유흥치에게 약점을 잡혀 코가 꿰인 셈이었다. 유흥치는 정유성을 만난 직후,
평안도 일대에 부하들을 보내 곡물을 운반해 오도록 했다. 그
들은 조선 관민들에게 수천 석의 군량을 빨리 운반하라고 독촉했다. 유흥치는, 압록강이 얼기 전에 군량을 보내주지 않으면 군사들을 평안도에 풀어놓겠다고 협박했다.
유흥치가 가도로 돌아온 뒤 조선에 보낸 게첩(揭帖)에는 모욕적인 언사가 많았다.
김상헌이 회답서를 썼는데, 유흥치의 무례함을 질책하고 비판하는 내용이 있었다.
인조는 유흥치가 노여워할까 우려하여 내용을 고치라고 지시했다.
김상헌은 인조의 지시에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인조는 김상헌에게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고,
김상헌은 홍문관 부제학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으로 맞섰다.
도무지 일관성이 없는 인조의 태도도 유흥치의 작폐를 조장하고 있었다.
●유흥치의 수탈이 격화되다
유흥치가 반란을 일으킨 뒤 명 조정은 가도에 대한 군량 공급을 중단했다.
굶주림을 이기지 못한 가도의 한인들은 조선에서 토색질을 벌였다.
조선의 관민들 가운데는 한인들의 작폐에 시달리다 못해 그들을 습격하는 경우도 있었다.
1630년 12월, 중화의 대장(代將) 양덕위(梁德渭)는 노략질을 일삼는 한인들을 공격하여
17명을 살상했다. 조정 일각에서는 유흥치가 알게 되면 문제가 될 것을 우려하여
양덕위를 처벌하자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평안감사 민성휘의 의견은 달랐다.
양덕위를 살인죄로 처벌한다면 한인들이 더욱 거리낌 없이 난동을 피울 것이라고 경고했다.
조선 관민들의 ‘자구책’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역시 같은 해 12월에는 황주의 백성들이, 배를 수리하기 위해 왔던 한인들을 습격하여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화가 난 한인들은 황주 관아로 몰려가 주동자 색출을 요구했다.
자신들의 작폐에 대한 조선 관인들의 태도가 과거와 달라진 것을 절감한 유흥치는
대책을 마련했다. 그는 우선 서울 등지에 정탐꾼을 들여보냈다.
정탐꾼들은 사대부가와 여염을 돌아다니며 조선 사정을 파악하려고 골몰했다.
그들이 무엇보다 관심을 가졌던 것은 조선과 후금의 왕래 상황이었다.
정탐꾼들을 통해 파악된 정보를 바탕으로 유흥치는 잔꾀를 부리기 시작했다.
1630년 11월, 전국해(錢國海)라는 자가 등래순무(登萊巡撫) 손원화(孫元化)의 차관이라 칭하며
조선으로 출발했다.
그는 ‘조선에서 군량 2만석과 전마 3000필을 얻어 유흥치에게 공급한다.’고 떠벌렸다.
가도에서 그를 만났던 조선 접반사 이경헌(李景憲)은
‘조선에서는 전마를 키우지 않고 평안도는 이미 황폐화되어 군량을 더 이상 마련할 수 없다.’고
조선행을 만류했다. 전국해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서울로 올라왔다.
전국해는 본래 유흥치의 부하였다. 유흥치는 그에게 위조한 자문(咨文)을 주었다.
자문의 내용은 가관이었다. ‘명 조정은 이제 유흥치를 용서했다.
감격한 유흥치는 공을 세우고 싶지만 식량과 전마가 부족하여 이웃에 의지해야만 한다.
듣건대 조선이 후금을 돕고 한인들을 많이 죽였다는 소문이 있다.
부득이하게 후금에게 머리를 숙인 것은 이해한다.
하지만 조선이 명에 대한 충성심을 버리지 않았는지의 여부는 곡식과 전마를 제공하는가에
달려 있다. 즉시 전마 2000필을 가도로 보내고 한인들을 핍박하지 말라’.
조선이 후금과 우호적으로 지내는 것을 빌미로 군량과 전마를 뜯어내려는 수작이었다.
조선 조정은 전국해의 정체를 금세 알아차렸다. 과거부터 등래 군문(軍門)이 바다 건너 조선으로 사람을 보내 군량과 전마를 청했던 전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전국해는 인조를 만났을 때, 자신이 손원화가 보내서 온 차관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인조는 양곡과 전마를 보내달라는 그의 요구를 거부했다.
비변사는 서울에 있는 한인들을 모두 색출하여 가도로 돌려보내자고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조선 상인과 역관들이 가도에 들어가 무역하는 것을 엄격히 제재하자고 했다.
그들을 통해 조선 사정이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처였다.
바야흐로 조선과 유흥치 사이의 긴장이 높아가고 있었다.
●계속되는 가도의 변란
1631년(인조 9) 1월, 가도로 들어간 조선 문안관을 만났을 때 유흥치는 다시 길길이 뛰었다.
그는 한인들을 살해한 범인을 체포하여 자신에게 묶어 보내라고 요구했다.
그러지 않으면 병력을 풀어 자신이 직접 살인자를 찾아내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당시 유흥치는 위기에 처해 있었다. 명 본토로부터 군량 공급이 여의치 않은 데다
조선 또한 과거처럼 고분고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흥치는 결국 1631년 3월, 부하 장도(張濤)와 심세괴(沈世魁) 등에게 피살되었다.
유흥치는 가도를 통제하는 것이 여의치 않자 후금으로 투항을 시도하다가
심세괴 등의 반발을 사서 죽은 것이다. 모문룡과 원숭환이 죽은 뒤,
사실상 방치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가도의 난맥상이 여지없이 드러난 사건이었다.
가도에서 다시 일어난 변란의 불똥은 조선으로 튀었다.
인조는 유흥치가 후금으로 투항을 시도하다가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
‘가도 정벌’을 다시 운운했다. 그런데 당시는 ‘가도 정벌’을 운운할 상황이 아니었다.
1631년 5월, 후금의 홍타이지는 조선 사신을 만난 자리에서 협박을 늘어놓았다.
그는 우선 조선이 보낸 방물(方物)의 양이 해마다 줄어들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어 ‘굶주린 유흥치가 자신에게 귀순하려고 했는데
조선이 식량을 공급해 주는 바람에 귀순을 거부했다.’고 따졌다.
그는 조선이 이후에도 가도에 식량을 대주면 병력을 의주로 보내 차단하겠다고 협박했다.
조선의 원조가 없으면 가도는 쉽사리 자신의 수중에 떨어질 것이라는 계산에서 나온 협박이었다.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다.
조선이 가도와의 관계를 정리하지 않는 한, 후금과의 관계는 안정될 수 없었다.
하지만 오락가락했던 인조의 태도에서 드러나듯이
조선의 가도 정책은 일관성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그것은 결국 후금과의 원한을 쌓아 가는 과정이었다.
파국이 다가올 것을 뻔히 알면서도 가도와의 관계를 정리할 수 없었던 것,
바로 거기에 조선의 비극이 자리잡고 있었다.
-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2008-01-09 서울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