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병자호란 다시 읽기]

(51) 원숭환의 죽음과 그 영향

Gijuzzang Dream 2008. 7. 20. 20:51

 

 

 

 

 

 

 

 (51) 원숭환의 죽음과 그 영향

 

홍타이지의 반간계에 휘둘리고,

엄당의 참소가 곁들여져 원숭환에 대한 반감과 증오가 높아 가던 분위기 속에서

엄당 계열의 온체인(溫體仁)은 다섯 차례나 상소를 통해 원숭환을 죽이라고 촉구했다.

반면 동림당 계열의 신료들은

‘적이 성 아래까지 와 있는 상황에서 스스로 장성(長城)을 허물 수는 없다.’며

숭정제에게 구명을 호소했다.

원숭환의 생사는 바야흐로 동림당과 엄당 대결의 핵심 현안으로 등장했다.

절체절명의 순간 숭정제는 엄당의 손을 들어주었다.

 

 

숭정제가 평소 시기심과 의심이 많다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홍타이지는 결국 이신 범문정을 활용하여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명의 간성(干城)을 제거할 수 있었다.

 

 

원숭환의 죽음과 그 배경

 

1630년 9월22일, 원숭환은 북경 서시(西市) 거리에서 ‘임금을 속여 모반을 꾀한 죄’로 처형되었다.

원숭환은 책형(刑)이라 불리는 가장 잔혹한 형을 받았다.

기둥에 묶어 놓고 형리들이 달려들어 칼로 온몸의 살점을 발라내고,

나중에는 두개골까지 부숴 버리는 상상을 초월한 끔찍한 형벌이었다.

후금이 파놓은 반간계에 휘말려 원숭환을 처형했던 사람은 숭정제였지만

그 일련의 과정에서 원숭환을 죽이고 동림당 계열을 제거할 음모를 주도한 자들은

온체인과 왕영광(王永光)이었다.

이들은 숭정제 즉위 후 약화된 자신들의 권세를 만회하기 위해 엄당의 잔당들을 규합하려 했다.

온체인은 모문룡과 같은 고향인 절강 출신이었다.

위충현을 찬양하는 송가(頌歌)를 지을 만큼 엄당의 앞잡이 노릇을 했던 온체인은,

모문룡을 살해한 원숭환에 대해 반감을 품고 있었다.

이부상서 왕영광 또한 위충현의 잔당으로서 동림당에 대한 보복을 늘 꾀하고 있던 자였다.

 

그렇다면 이들이 원숭환을 제거하려 했던 것과 ‘모문룡 문제’는 어떻게 연결되어 있었을까?

이미 언급했지만, 모문룡은 가도에 위충현의 소상(塑像)을 세웠을 만큼 그와 밀착해 있었다.

모문룡은 해마다 자신에게 공급되는 막대한 요향(遼餉 · 명 조정이 요동으로 보내던 군량) 가운데

상당한 양을 횡령했고, 그렇게 착복한 자금을 바탕으로 위충현 등 엄당의 요인들에게

뇌물을 바쳤다.

 

조선과 후금 상인들을 통해 흘러들어 온 인삼, 모피, 진주 등의 보화도 철철이 엄당 신료들에게 보내졌다.

엄당은 뇌물을 챙기는 대신 모문룡의 뒤를 든든하게 봐주었다. 그런데 그 모문룡이 죽었다.

때마다 쏠쏠하게 들어오던 뇌물도 뚝 끊어졌다. 당연히 모문룡을 죽인 원숭환에 대한 반감과 그와 연결된 동림당에 대한 적의(敵意)는 높아갈 수밖에 없었다.

 

여타 조정 신료들 중에도 원숭환에게 반감을 품은 자들이 있었다. 그들 가운데는 북경 주변의 경기 지역에 원림(園林)이나 정사(亭舍)를 소유하고 있는 자들이 있었다.

그런데 후금군이 장성을 넘어와 경기 지역을 유린하자 그들이 소유한 원림이나 정사가 망가지거나 파괴되었다. 자연히 그들은 원숭환을 원망하게 되고, 궁극에는 그가 후금군을 고의로 끌어들였다고 여기게 되었다고 한다.

 

 

원숭환, 반청흥한(反淸興漢)의 영웅으로 추앙

 

원숭환의 죽음을 계기로 명은 확연히 자멸의 길로 들어섰다.

원숭환을 죽이고 전용석 등 동림당 관인들을 몰아내는 데 성공한 온체인 등은

숭정제를 주무르며 정권을 좌지우지하게 되었다.

상황 파악이 어두운 황제와 그에게 달라붙은 간신들의 발호 속에

후금에 대한 방어 대책이 제대로 마련될 리 없었다.

한 예로 원숭환을 믿고 따랐던 부하 조대수(祖大壽)는

주장(主將)의 투옥과 죽음을 통탄하다가 결국 후금으로 투항하고 말았다.

 

명에 대한 후금의 도전이 본격화되었던 만력 연간부터 숭정 연간까지

원숭환은 명의 마지막 보루였다.

그런 그가 너무도 어처구니없이, 허망하게 죽자 많은 사람들이 비탄에 잠겼다.

원숭환은 자연스럽게 과거 송(宋) 시절 금(金)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분투하다가

주화파 진회(秦檜) 등에 의해 제거되었던 명장 악비(岳飛)에 비견되었다.

청나라 말엽 반청흥한(反淸興漢)의 열기가 높아갈 무렵

‘한족의 영웅’으로서 원숭환을 추모하는 분위기도 고조되었다.

변법자강 운동에 가담했던 지식인 양계초(梁啓超)는 원숭환을 기려

‘원독수전(袁督師傳)’이라는 글을 썼다.  

광서(光緖) 연간 일본에 유학했던 장백정(張伯楨)은 누구보다도 열렬한 원숭환 찬양론자였다.

원숭환과 같은 광동(廣東) 출신이었던 그는 원숭환이 남긴 시문(詩文)을 수집하여 문집을 만들고

그를 추모하는 사업을 주도했다.

‘원숭환유집(袁崇煥遺集)’의 발문에서 그는

‘원숭환이 죽음으로써 명이 드디어 망했고 애신각라씨(愛新覺羅氏)가 중원을 차지하게 되었다.’

라고 썼다.

장백정은 원숭환을 죽음에 이르게 만든 명의 문제점을 지적했지만,

‘궁극적으로 반간계를 써서 원숭환을 죽게 만든 것은 청’이라고 하여 청에 대한 반감과 복수심을

드러냈다. ‘반청흥한’의 분위기 속에서 원숭환이 재발견되었던 것이다.

 

원숭환에 대한 추모 분위기는 계속 이어졌다.

1952년 북경시 정부가 도시 정비 차원에서 원숭환의 묘를 외곽으로 옮기려 할 때,

북경의 지식인들은 모택동에게 원숭환의 묘를 보전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모택동은 당시 북경시장 팽진(彭眞)에게 원숭환 묘를 원위치에 보전하도록 지시했는데,

모택동 또한 원숭환을 ‘민족영웅’으로,

후세 사람들을 감동시킬 ‘애국주의의 화신’으로 평가한 바 있다.

 

 

이신(貳臣)들 홍타이지 명령받아 반간계 실행

 

원숭환이 투옥되고 결국 처형되었던 것은 명이 스스로 무너져 가는 과정이었다.

명이 이렇게 자멸하는 과정에서 주목되는 역할을 담당했던 부류가 이신(貳臣)들이다.

이신이란 ‘두 조정을 섬긴 신하’,

즉 명에서 벼슬하다가 후금으로 귀순하거나 투항하여 벼슬했던 한족 신료들을 가리킨다.

명이나 한족의 입장에서는 이들이 ‘배신자’였지만

후금이나 만주족의 입장에서는 매우 소중한 존재였다.

특히 홍타이지는 이신들을 중용(重用)하여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고

후금의 국가 제도와 체제를 정비하는 데 활용했다.

 

실제 당시 원숭환을 제거하기 위한 반간계를 제시했던 사람도,

홍타이지의 명을 받아 반간계를 실행으로 옮겼던 사람도 모두 이신 출신이었다.

홍타이지의 명령을 받아, 사로잡은 명의 환관들이 있던 옆방에 머물면서

‘원숭환이 후금과 내통했다.’고 말하며

반간계를 실행했던 고홍중(高鴻中)과 포승선(鮑承先)은 모두 한족 출신이었다.

 

홍타이지에게 원숭환을 제거할 반간계를 기획하여 제공한 사람은

한족 출신 범문정(范文程)이었다.

그는 심양의 명문 출신으로 증조 범총(范총)은 명 조정에서 병부상서를 지냈고

조부 범심(范瀋)은 심양위지휘동지(瀋陽衛指揮同知)를 역임했다.

범문정은 1618년 누르하치가 무순을 공격했을 때 자발적으로 투항했다.

홍타이지는 그의 재주를 높이 사서 자신의 책사(策士)로 중용했다.

범문정은 1629년 홍타이지의 관내(關內) 원정에 수행했는데,

원숭환 때문에 전황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그를 제거할 반간계를 구상했다.

숭정제가 평소 시기심과 의심이 많다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홍타이지는 결국 이신, 범문정을 활용하여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명의 간성(干城)을 제거할 수 있었다.

 

범문정은 뒤 시기 순치(順治) 연간에도 시정(施政)의 계책과 방향을 제시하여

청이 중원을 원활히 통치할 수 있는 기반을 닦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뿐만 아니라 병자호란 이후 청이 조선을 ‘제어하는’ 과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많은 이신들이 청으로 귀순했던 이유는 제각기 다양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명으로부터 무엇인가 ‘상처’를 받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북경까지 달려와 사투 끝에 적을 물리쳤지만,

간신들의 참소에 넘어가 원숭환을 처형하는 숭정제를 보면서 조대수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신들의 후금으로의 귀순은 결국 ‘부메랑’이 되어 명의 목줄을 겨누게 되었다.

원숭환의 죽음과 이신들의 존재 앞에서 ‘자멸한 왕조’ 명이 던지는 역사의 교훈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2007-12-26  서울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