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괄의 난을 계기로 인조정권의 취약점과 한계는 여지없이 드러났다.
뿐만 아니라 인조정권이 구상하고 있던 계획들을 흐트러뜨렸다.
인조반정 성공 직후 ‘후금을 정벌하여 명의 은혜에 보답하겠다.’고
호기롭게 내세웠던 표방은 물거품이 되었다.
흔들리고 있는 내정을 추스르기에도 겨를이 없는 처지에 정벌을 시도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우선 땅에 떨어진 인조의 권위를 회복하고, 질서를 수습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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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추된 권위, 동요하는 민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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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상관이었던 두 사람은 이괄이 입성했을 때 각각 좌우변 순장(巡將)이 되어 이괄을 경호하는 데 앞장섰기 때문이다.
무신만이 아니었다. 문신들 가운데도 이괄의 난을 맞아 심각하게 동요했던 자들이 있었다.
부호군(副護軍) 이안눌(李安訥)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이괄의 난 당시 공조참의 김덕함(金德)과 함께 가도( 島)에 파견되어 있었다.
김덕함이 모문룡에게 원군을 청해다가 이괄을 토벌하자고 했을 때 이안눌은 동의하지 않았다.
얼마 후 ‘인조가 저자도(楮子島)로 피난 가고 이괄이 인목대비를 모시고 있다.’는 풍문이 들려오자
이안눌은 거침없이 인조에 대해 불경한 말을 내뱉었다.
‘자전(慈殿-인목대비를 지칭)을 모셨다면 또한 우리 임금의 아들일 것이다.’,
‘저자도에서 어떻게 모면할 수 있겠는가?’ 등등 인조는 이미 끝났다는 평가를 내렸다.
이안눌은 그 밖에도
‘반정 이후 개혁이 지지부진했고 공신들의 운이 좋지 않다.’는 등의 이야기를 쏟아냈다.
동요했던 것은 백성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안현 전투에서 관군이 승리할 기미를 보이자
도성 문을 닫아걸어 반란군에게 타격을 주기도 했지만,
‘이괄이 입성했을 때 도성 백성 대부분이 이괄에게 붙었기 때문에 법으로 논하면 죽여야 한다.’는
논의가 나올 정도였다.
우의정 신흠(申欽)은 백성들의 ‘불충(不忠)’을 불문에 부치자고 했다.
그는 “나라의 형세가 당당할 때는 조정에 문제가 있어도 백성들이 감히 원망하지 못하지만,
쇠약한 때에는 한 가지 잘못만 있어도 원망이 일어나는 법”이라고 했다.
당시를, ‘늙고 병들어 숨이 끊어지기 직전의 급박한 상황’이라고 규정하고
백성들에게 책임을 묻지 말자고 했다.
정경세(鄭經世)는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정권 차원에서 반성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는 ‘반정 직후부터 조정이 신의를 잃었기 때문에 백성들이 원망한다.’고 진단했다.
하지만 민심은 쉽사리 안정되지 않았다. 난이 진압된 지 한달 여가 지난 1624년 3월 중순,
“장차 큰 변란이 다시 일어날 것”이라는 풍문이 퍼지는 와중에
서울을 떠나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밤에 여염을 돌아다니며 피란하라고 소리치며 선동하는 자들도 나타났다.
조정이 민심 수습을 위해 ‘과거를 불문에 부치겠다.’고 했지만
이괄 치하에서 부역(附逆)했던 사람들의 불안과 의구심은 좀체 가시지 않았던 것이다.
●‘정권 안보´에 올인
이처럼 불안한 상황에서 인조와 반정공신들은 우선 인조에 대한 경호를 강화했다.
1624년 3월, 비변사(備邊司)는 ‘숙위(宿衛)하는 병력이 적고 약하다.’며
외방의 출신들 가운데 재주 있고 용맹한 자들을 뽑아 경호 병력의 숫자를 늘리자고 요청했다.
뿐만 아니라 반정공신 네 사람이 거느리고 있는 군관(軍官)의 숫자를
400명에서 1000명으로 늘리자고 했다. 그것은 당시의 민심과는 거리가 먼 조처였다.
인조와 반정공신들은 군관의 수를 늘리면 정권의 안보가 확보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민심은 달랐다. 군관들이 자행하는 폐해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급료를 국고에서 지급 받음에도 불구하고 군관은 사실상 반정공신들의 사병(私兵)이었다.
언필칭 ‘인조 호위’를 강변했지만 실제로는 공신들의 집안 일을 건사하는 집사였기 때문이다.
유사시에도 공신 집안을 호위하고 재물을 운반하는 등 사사로이 부려졌다.
실제로 반란 당시 인조가 피난길에 올랐을 때 대가를 호위했던 군관은 몇 명 되지 않았다.
또 군관을 거느리고 있던 신경진은, 나아가서 적을 막으라는 인조의 명령도 무시했다.
이제 그런 군관의 숫자를 더 늘리자고 하는 판이었다.
이괄의 반란으로 혼쭐이 난 인조는 이후 반정공신들에게 더 의지하는 태도를 보였다.
명령을 어긴 신경진을 불문에 부치고, 군관의 수를 늘리는 데 이의를 달지 않았다.
그 같은 분위기에서 반정공신들의 권세는 더 높아졌고, 이런 저런 비리가 터져 나왔다.
자연히 ‘광해군대의 폐정(弊政)을 개혁하겠다.’는 구호는 힘을 잃어 갔다.
정권이 바뀌면 무언가 과거와는 확 달라진 모습을 기대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인조정권도 광해군대의 ‘과거’를 청산하기 위해 재생청(裁省廳)이란 기구를 설치하고
나름대로 개혁을 추진했다. 하지만 이괄의 난을 계기로 ‘개혁’은 지지부진해질 수밖에 없었다.
‘정권 안보’가 발등의 불로 떨어진 상황에서 그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인조정권의 실세였던 김류와 이귀가 박승종 부자의 저택을 불하(拂下) 받은 것에서 드러나듯이
반정공신들의 탐욕스러운 처신은 사람들을 실망시켰다.
‘다만 주인이 바뀌었을 뿐 달라진 것이 없다.’는 냉소가 번져갔다.
1625년(인조 3) 6월, 도성에는 상시가(傷時歌)라는 노래가 떠돌고 있었다.
아, 너희 훈신들이여(嗟爾勳臣)
잘난 척하지 말라(毋庸自誇)
그들의 집에 살고(爰處其室)
그들의 토지를 차지하고(乃占其田) 그들의 말을 타며(且乘其馬)
또 다시 그들의 일을 행하니(又行其事)
너희들과 그들이(爾與其人)
돌아보건대 무엇이 다른가(顧何異哉)
●반란의 대외적 여파
이괄의 반란은 나라 밖으로도 영향을 미쳤다.
인조정권은 이괄의 반란군이 도성을 압박해오자
가도의 모문룡(毛文龍)에게 자문(咨文)을 보내 원병을 요청했다.
모문룡은 조선의 보고를 접한 뒤,
유격(游擊) 왕보(王輔)에게 선사포(宣沙浦)에서 군사를 점검하도록 지시했다.
왕보는 자신이 ‘군사 1만을 거느리고 진격한다.’고 큰소리쳤다.
조정은 다급한 마음에 원병을 요청했지만
당시 모문룡의 접반사(接伴使)였던 윤의립(尹毅立)은 신중했다.
그는 모문룡의 군대가 육지로 나온 이후의 상황을 우려했다.
왕보의 말대로 1만이나 되는 대군이 나올 경우,
그들에게 군량을 지급하는 문제는 물론이고 그들이 자행하는 민폐가 심각해질 것을 우려했다.
윤의립은 왕보를 만나 ‘이 적은 얼마 안 가서 주벌될 것이니
천병(天兵)을 역적 토벌에 끌어들여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다.’며 원병 요청을 취소했다.
결과적으로 윤의립의 판단은 정확했다. 반란이 곧 진압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모문룡의 병력이 나왔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에 대한 접대와 그들이 자행하는 민폐 때문에 온 나라가 몸살을 앓았을 것은 분명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섬으로 다시 돌려보내는 것이 너무도 어려웠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후금을 군사적으로 자극하여 또 다른 사단이 발생했을 것이다.
앞으로 서술하겠지만, 반란 종식 이후 모문룡과 그의 군대가 보여주었던 행태를 보면
윤의립의 ‘결단‘이 얼마나 빛나는 ‘혜안’이었는지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반란의 여파는 후금에도 미쳤다.
한명련의 아들 한윤(韓潤)이 조선을 탈출하여 후금으로 투항했던 것이다.
한윤은, 당시 후금에 억류되어 있던 강홍립(姜弘立)을 만나 “강씨 일족이 다 죽었다.”고 무고했다.
강홍립은 격앙되었다.
‘새로 들어선 인조정권이 흔들리고 있다.’는 정보도 후금 측으로 건네졌다.
한윤의 투항은 정묘호란이 일어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이괄의 반란을 계기로 조선은 명과 후금의 대결 구도 속으로 점점 깊숙이 빠져들고 있었다.
-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2007-08-01 서울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