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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09. 534호 (p 86~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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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과 금속활자] |
활자 개량 통해 책 대량생산 시대 ‘활짝’ |
즉위 후 첫 정책사업으로 추진 … 하루 인쇄량 10장 미만에서 40장으로 급격히 늘어 |
책에 몰입했던 세종은 단순히 책을 좋아하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군주였다. 서적에 관한 정책을 세우고 집행할 수 있는 권력을 갖고 있었다. 그는 군주의 권력을 이용해 책을 생산했다. 왕위에 오른 뒤 그가 처음 했던 일은 금속활자의 개량이었다.
신하들 “어렵다”고 해도 거듭 개량 명령
태종의 의지에 따라 만들어진 계미자로 책을 찍어내기는 했지만 계미자는 몇 가지 약점이 있었다. 활자 모양이 그리 아름답지 않았고, 활자 크기도 들쑥날쑥했다. 무엇보다 큰 약점은 느린 인쇄 속도였다.
조선시대의 활자 인쇄는 조판틀에 활자를 배열한 뒤 활자판에 먹을 바르고 종이를 뒤집어 찍어내는 과정으로 이뤄졌다. 한데 활자를 배열하는 기술에 문제가 있었다.
구리로 만든 조판틀에 활자를 배열하고 인쇄할 때 활자가 움직이면 인쇄가 어려워진다. 따라서 활자가 움직이지 않도록 고정시키는 방법이 필요한데 계미자의 경우 그렇지가 못했다. 계미자는 밀랍을 녹여붓고 거기에 활자를 심어 고정시켰던 것이다. 밀랍은 간단히 말해 ‘양초’ 성분 물질이라 생각하면 된다. 녹이기는 쉽지만, 무르고 열에 약하다. 밀랍에 의해 고정된 활자는 쉽게 흔들린다. 인쇄를 몇 장 하고 나면 활자가 삐뚤삐뚤해진다. 다시 고정시켜야 하는 것이다. 이 같은 밀랍 고정방식 때문에 계미자로는 하루에 10장도 인쇄할 수가 없었다. 목판인쇄보다 나을 것이 전혀 없었다.
이쯤에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고려가 강화도로 피난했을 때 금속활자로 ‘고금상정예문(古今詳定禮文)’을 인쇄한 이후 밀랍 고정방식은 한 번도 개량된 적이 없었단 말인가? 이것은 고려의 금속활자 인쇄 목적이 대량의 인쇄물을 빠른 시간 안에 얻는 데 있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만 조선은 더욱 많은 서적을 필요로 했다. 이 때문에 마침내 활자와 인쇄방법의 개량이 시도된다. 이때의 정황이 ‘세종실록’ 16년 7월2일조에 소상히 기록돼 있다.
세종은 이날 이천(李천)을 불러 새 활자의 주조를 명하면서 과거 한 차례 있었던 활자와 조판술의 개량을 회상한다.
- 태종께서 처음으로 주자소(鑄字所)를 두시고 큰 활자를 주조할 때 조정 신하들이 모두 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지만, 태종께서 우겨 만들게 하시고, 그것으로 많은 책을 인쇄해 중외(中外)에 널리 보급했으니, 또한 위대한 일이었다.
다만 일을 처음 시작한 탓에 제조방법이 정밀하지 않았다. 예컨대 책을 찍을 때 반드시 먼저 조판틀에 밀랍을 편 다음 그 위에 활자를 심었다. 그런데 밀랍의 성질이 원래 물렁해 꽂은 활자가 고정되지 아니하므로, 몇 장을 인쇄하면 활자가 움직여 한쪽으로 쏠리는 탓에 또다시 바로잡아줘야 했기에 인쇄공들이 골치를 앓았다. 내가 이런 문제를 걱정하여 경에게 개량할 것을 명했으나 경은 또한 어렵게 여겼다. 내가 강요하자 경은 그제야 지혜를 짜내어 조판틀을 다시 만들고 활자를 다시 주조했던 바, 모두가 평평하고 방정(方正)하여 단단히 고정이 돼(竝皆平正牢固), 밀랍을 쓰지 않고도(不待用蠟) 많은 양을 인쇄해도(印出雖多), 활자가 한쪽으로 쏠리지 아니하므로(字不偏倚) 내가 아주 아름답게 여겼다. -
- 주간동아 - 강명관 부산대 교수 · 한문학 hkmk@pusa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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