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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켜(연재자료)

승정원일기 연재 - 17. 조선시대 암호, 군호(軍號)

Gijuzzang Dream 2007. 11. 3. 17:52


 

17. 조선시대 암호, 군호(軍號)  

 

                ‘은대조례(殷臺條例)’ 의 군호 조항

 

 

병조에서 두 글자 정하면 왕이 결재

'화(火)' 등 금기어 썼다 화(禍) 입기도

 

 

조선 초기에 도성문과 궁문은 모두 파루(罷漏, 오전 3~5시)에 열고 인정(人定, 오후 9~11시)에 닫도록 하였다. 하지만 남이의 옥사 이후로 예종은 궁문을 해뜰 무렵에 열고 해질 무렵에 닫도록 하였으며 조선 후기까지 유지되었다. 도성문과 궁문을 닫고 나면 통행금지가 실시된다. 도성 및 궁의 각 문에는 파수병이 배치되고 야간 순찰자는 각문을 돌아다니며 근무상태를 점검하고 순찰을 통해 불의의 사태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군호(軍號)는 통행금지시간 동안 군사들이 서로 같은 편임을 확인하기 위해 사용했던 암호였다.


군호는 왕의 안위가 달린 일급 보안사항이다. 이 때문에 다른 관서의 보고가 승정원을 거쳐 왕에게 보고되던 것과는 달리 병조에서 신시에 직접 왕에게 보고하였다. 병조의 당상관이 그 날의 군호를 정하여 친히 쓰는 것이 원칙이며 이를 밀봉하여 병조 낭관을 통해 왕의 결재를 받았다. 이렇게 결정된 군호는 병조를 통해 파수 및 순찰을 도는 군사들에게 전달되었다. 군호와 관련된 이야기들을 승정원일기는 어떻게 전하고 있을까?


군호는 두 글자로 이루어졌으며 당시의 시정을 반영하는 단어를 선정하였다. 예컨대 영조 13년 4월 어느 날의 군호는 석청(惜晴)이었다. 굳이 풀이하자면 ‘맑은 날씨가 원망스럽다’이다. 5월은 모내기의 계절이니 논에 물을 찰랑찰랑 채울 정도의 비가 내려야 한다. 그러나 무심한 하늘은 청명하고 서늘한 바람만 불 뿐 비가 올 기색이 전혀 없었으니 어찌 그 맑은 하늘이 원망스럽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시정을 너무 잘 반영해도 탈이 나는 경우가 있었다. 영조 19년 7월5일 영의정 김재로(金在魯)는 경연에서 그믐날에 군호를 금화(金火)로 정한 입직 당상관을 추고할 것을 청하였다. 이유는 일찍이 ‘화(火)’자를 군호로 사용하지 말라는 왕의 명령이 있었는데 입직을 서던 당상관이 이를 살피지 못하고 군호책에서 무심코 ‘금화’를 선정하여 군호로 보고했던 것이다. 음양오행에서 여름에는 화(火)가 왕성하고 가을에는 금(金)이 왕성하다고 한다. 당시는 여름과 가을이 서로 교차하던 시절로 입직을 서던 당상관은 이러한 절기를 감안하여 ‘금화’를 군호로 사용했던 것인데 그만 왕의 금지 명령을 살피지 못했던 것이다.


사람이 너무 바쁘다보면 실수도 있게 마련이다. 영조 25년 3월25일 병조좌랑 최대윤(崔大潤)의 경우가 그러했다. 이날 군호단자를 본 영조는 어이가 없었다. 군호단자에 있어야 할 군호가 써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 날은 왕이 친히 참석하는 시험이 열리는 날이었다. 시험장은 팔도에서 모여든 유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고 최대윤은 병조의 좌랑으로서 왕에게 유생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유생을 통제하며 왕을 호위하는 일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렇게 바쁜 와중에 군호를 보고해야 할 신시가 되자 병조의 서리가 전하는 군호단자를 무심코 왕에게 보고하였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군호단자가 예비 군호단자였다니….


그런데 하필이면 서리가 그 군호단자를 진짜와 바꿔서 들고 왔던 것이고 왕의 경호에 정신이 없었던 최대윤은 이를 제대로 살피지 못하고 그 군호단자를 왕에게 보고했던 것이다.


숙종 10년 10월25일 병조참의 유거는 너무나 일에 익숙하여 탈이 난 경우이다. 그는 당시 입직당상으로서 군호를 친히 쓰지 않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대필케 하여 왕에게 보고하였다. 하지만 그의 필체를 알고 있는 숙종이 이 사실을 알아버렸고 결국 그를 파직시켰다. 예나 지금이나 일이 너무 익숙하면 타성에 젖어 일을 그르치기 십상인가 보다.

- 최재복 /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 경향, 2006년 12월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