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듬어보고(전시)

[일민미술관] 문화적 기억-야나기 무네요시가 발견한 조선, 그리고 일본 展

Gijuzzang Dream 2007. 11. 2. 15:25

 

 

 

 

 

 


 '문화적 기억- 야나기 무네요시가 발견한 조선 그리고 일본'전

 

(Cultural Memory -

 

                 The Joseon and the Japan of Yanagi Muneyoshi)

 

 


 

 

  전시기간 :  2006년 11월 10일(금) - 2007년 2월 25일(일), 연장전시중

  전시장소 :  일민미술관 1, 2, 3 전시실

 

  관람시간  :  오전 11시- 오후 7시(입장마감 오후 6시 30분)  / 월요일 휴관

  관 람 료  :  일반 5,000원 / 청소년 3,000원

  전시문의  :  일민미술관 02-2020-2055

  

  전시도슨트(docent) 전시설명 안내

     - 평일, 주말 2회(오후 2시, 4시)

     - 직장인을 위한 점심시간 전시설명 : 매주 수요일 12시30분

 

 

문화적 기억 - 야나기가 발견한 조선 그리고 일본

- 김희령  / 일민미술관 기획실장/큐레이터

1916년 해인사 3층 석탑 앞에서 중절모를 손에 들고선 한 청년의 사진이 있다.

조선과 중국을 처음 여행하던 이 일본 청년은 불국사와 석굴암 등지를 답사하며

조선과 기나긴 인연을 맺게 된다. 90년이 지난 지금,

이 사진은 우리로 하여금 먼 기억 속 우리의 실제를 찾는 여정으로 빠져들게 한다.


이미 조선 항아리의 아름다움을 접했던 야나기 무네요시는

20여 차례에 걸쳐 조선을 방문하며 조선의 미에 더욱 빠져들게 되었으며

우리 민족이 깨닫지 못한 미의식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단지 이론가이거나 또는 단지 수집가가 아니었던 야나기는

이론과 행동이 함께 어우러진 현실감 있는 글과 수집으로 많은 이들의 존경과 평가를 받았다.


야나기는 석굴암 조각의 가치에 대한 평가나 광화문 철거에 대한 애통함을 담은 글을 통해,

또한 일본의 미가 상당부분 조선으로부터 유래되었다는 사실을 토대로,

조선 미의 실용적 아름다움을 이론적으로 전개함으로써

식민지시대 우리문화의 가치와 조선인의 긍지를 깨달을 수 있도록 애를 썼다.

그 노력의 결실은 도자기를 포함해서 생활 미술,

즉 공예를 보여줄 수 있는 ‘조선민족미술관’을 개관하기에 이른다.


서구문물이 동양으로 유입되는 근대화과정을 겪으며

문화의 절대적 가치가 서양에 있는 것으로 잘못 생각하는 경향을 안타까워하며

야나기는 민중의 생활에서 고유의 개성을 찾아 근대성의 대안으로 제시하고자 했다.

그러나 의미 담긴 그의 노고가 제대로 평가되지 못한 채,

야나기가 조선 미를 비애의 미라고 했던 것은

식민지 하의 조선을 폄하하려는 시각이 그의 의식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라며 문제가 제기되어왔다.


야나기는 민중의 예술과 공예, 즉 ‘민예(民藝)’라는 용어를 만들고 민예운동을 이끌었으며,

조선 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민중의 삶이 담긴 공예품들을 수집하고

활발한 저작활동을 펼치며 민족의 다양성을 존중하려했다.

아직까지도 한국과 일본의 미학을 거론함에 있어

결코 빼놓을 수 없다는 사실에서 그의 역할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일민미술관이 마련하는 <문화적 기억 - 야나기 무네요시가 발견한 조선 그리고 일본>전은

야나기가 모은 수집품으로 세워진 일본민예관의 조선, 일본 관련 소장품과

관련 도큐멘터리로 이루어진 전시이다.

조선의 도자기 뿐 아니라 목기, 석기, 짚공예 등 생활 속에서

대중과 밀접한 관계를 맺은 다양한 민예품을 비롯해서 일본의 민예품,

그리고 조선 미와 야나기 공예론의 영향을 받은 일본 현대공예품들이 전시된다.

그의 콜렉션을 총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이 전시에는

야나기의 행동과 철학 뿐 아니라, 조선민족미술관 설립을 위해 함께 조선을 방문하여

기금마련 독창회를 개최했던 아내 가네코의 공연이 담긴 영상물도 보여진다.

 

     일민미술관은

     야나기의 문화적 삶, 열정, 사상을 어떠한 편견도 없이 있는 그대로 드러내어 보이고,

     감상하는 이들이 스스로 경험하고 느낄 수 있길 바라며 이 전시를 기획했다.

      야나기의 시선에서 조선을 돌아보는 이 전시가,   

     기억을 더듬어 우리가 알지 못했거나 혹은 잃어버린 우리의 참 모습을 찾아가는 밑거름이 된다면

      더더욱 의미 있는 일이 되겠다.  

- 일민미술관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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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네거리에 있는 일민미술관은

1926년 신축되어 1992년까지 66년동안 동아일보의 사옥이었으며,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언론사 건물이며, 서울시 유형문화재 131호로 지정된 유서깊은 건축물입니다.

 

 

 

 

 

 

 

 

 

조선의 영혼…야나기의 조선 사랑
  김유경의 문화기행 '서울, 북촌에서' <25> 야나기의 조선미술품 전시회

 

조선의 영혼, 야나기의 조선사랑

- 야나기의 조선미술품 전시회

 

 

민미술관에서 '야나기 무네요시가 발견한 조선 그리고 일본' 전시회를 봤다.

한국과 일본의 공예미술품 200점과 사진 등 기록자료가 3층에 걸쳐 전시돼 있었다.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4~1961, 소에쓰라고도 부름)

일제 강점기에 조선미술을 애호한 일본인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1921년 광화문이 헐리는 것을 그토록 슬퍼했다고.

민간차원의 많은 조선미술품을 소장하고 조선미술에 대한 최고의 찬사를 아끼지 않았는데

그중에 청승맞은 표현 '비애의 미'라는 말도 해서 반감을 갖게 했다는 것도.
  
일본이 저지른 여러 가지 범죄는 용서할 수 없지만 한국을 진정 사랑한 일본인들이 없지 않았다.

그들을 잊을 수 없고 이번 전시회는 그런 상호간의 애정과 신뢰의 교환같은 것이다.

무네요시(柳宗悅, 소에쓰)는 철학자로 일찍부터 조선미술의 아름다움에 눈떴다.

조선에 십수 차례 다녀가며 그의 열정은 여러 가지 활동으로 구체화됐다.

서울과 도쿄에서 조선도자기 전시회도 열고 1924년 경복궁에 조선민족미술관을 만들었다.

일본, 조선, 유럽의 민예품을 간수할 일본 민예관을 설립하고

방대한 저술활동과 강의를 하다가 1961년 타계했다. 그가 쓴 책이 국내에 여러 권 번역돼 있다.
  
조선의 미술이라는 명제를 두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정열을 쏟아 부었나.

그것은 단순한 애호나 실용 이상의 것이다.

야나기는 20대 나이에 조선미술의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그의 주변에는 같이 조선미술에 빠져들고 조선인이 다 되어 살았으며

조선민족미술관도 같이 세운 아사까와 노리다카(淺川伯敎), 아사까와 다꾸미(淺川巧) 형제가 있었다.

 
1984년 일본인에게는 최초로 그에게 대한민국 정부의 보관문화훈장이 수여됐다.

장남 무네미찌(柳宗理) 민예관장이 대신 받으러 와서 기자회견을 했는데

이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조선미술에 관한 야나기의 이야기를 얼마큼 들었다.

 

1986년경 그가 설립한 도쿄의 일본민예관을 가보았지만

거기서는 한국미술품이 그렇게 많이 전시돼 있지 않아서 야나기와 조선의 관계가 느껴지지 않았다.

조선미술이 언급된 민예지 몇 권과 사진을 구할 수 있었다.

몇 년 전에는 고 최태영 박사가 일본 명치대 재학중에 야나기 무네요시 부부와 얽힌 인연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기록해두고 싶었다.
그런 차에 야나기 무네요시가 지녔던 조선미술품 73점을 실물로,

그것도 일본의 민예품 및 현대도예와 대대적으로 비교해 볼 전시회가 펼쳐진 것이다.
  
2층에서 그가 지녔던 조선 도자기와 그릇, 가구, 불상 등을 보았을 때,

그 느낌은 '천상의 것처럼 산뜻하고 정교하고 부드러웠다.'

바로 옆에 더 많은 일본의 전통예술품이 같이 전시되고 있었다.

색감이나 자연스러운 손길 등에서 두 나라의 전통은 아주 달랐다.

"아, 이래서 조선 미술품을 좋아한 거구나, 좋아할 수밖에 없구나." 하는 것이 직감적으로 느껴졌다.
  
별로 크지도 요란스럽지도 않은 몇 개의 도자기, 연적, 놋쇠와 돌 그릇, 목가구 같은

생활미술품뿐이었는데 모두 정교하기가 이를 데 없고 뛰어난 장인의 손에서 나온 것임이

한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오래된 물건들도 아니었다.

대부분 18~20세기 조선 후기의 것들이어서 그 물건이 지닌 삶의 호흡까지 낯설지 않았다.
  
화려한 붉은 색으로 '福' 자가 그려진, 간장종지보다 더 작은 합이

몇 손을 거쳐 미국으로 나갔다가 우연찮게 야나기의 손으로 되돌아온 것부터

그가 좋아하고 아끼던 물건들을 별 꾸밈없이 늘어놓은 것도

박물관의 권위적이고 체계적 수집품을 보는 것과는 달랐다.

좋아서 찾아갖는 아름다운 물건은 이성의 대상을 넘어선다.

 

(왼쪽부터)청화 모깍기 초화문백자와 패랭이꽃이 그려진 병, 백자무릎연적. 맨위 13.5cm높이의 자그마한 18세기 청화백자단지는 무네요시가 처음으로 조선미술에 눈뜨게 된 미술품이었다. ⓒ하지권
 
13.5cm, 반 뼘 정도 작은 크기에 8각형 몸체, 푸른색 줄 몇 개로 꽃 한포기를 휙휙 그려놓은 백자는

야나기 무네요시가 처음으로 간직한 한국미술품이었다.

1914년 동료 노리다카에게서 이 단지를 선물 받고 그는 조선미술에 눈뜨게 되었다고 한다.

깨소금이나 꿀, 고춧가루 같은 걸 넣어두었을까? 소량으로 담그는 장김치 같은 걸 담아두었을까?
부엌 쪽에서 실용에 쓰인 그릇임이 확실해서 모가 닳고 얼룩지고 흠이 많았지만

이 단지야 말로 소리없이 천상의 느낌을 던져주었다.

야나기 무네요시가 '어째서 조선의 것은 아름다운가.' 라고 쓴 글이 십분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그는 "조형의 세계에서 이 정도의 것을 영속적으로 지니고 있는 나라는 별로 흔치 않다고 생각한다"

고 했다. - ('지금의 조선', 국제타임스 1947.9.17. 이길진 옮김 <조선과 그 예술>, 1994, 신구, p181.)
  
'뭘 천상의 것이라고까지?' 하던 이도 막상 보고 나더니

"일본 민예품하고 비교해 보니 정말 조선 미술품 다른 걸 알겠다"고 했다.
  
대나무를 이어붙이고 4개의 개다리를 붙여 만든 벼루함은 국내전문가도 기법을 알아채지 못한 것이다.

민예관 측에서는 '한국에서 알면 좀 가르쳐달라'고 했다.

현대미술보다 더 현대적인 석조주전자 등 석물이 많았다.

미술관 측에서는 석조공예품에 많은 비중을 두고 전시했다.

어디 한 군데 허점이 안 보일 만큼 정교한 놋쇠주전자는 방짜유기 같았다.

패랭이꽃과 도라지꽃이 양면에 그려진 편병, 북두칠성 문양이 선명한 호리병 등도 있었다.

그리고 아주 조그만 연적들이 한웅큼 모여 있었다. 

 

그중에는 처음보는 녹색 돌의 복숭아 같은 연적도 있고 놋쇠거북이연적, 하얀 백자 무릎연적도 있었다.

조선사람들은 어떻게 무릎을 미적 대상으로 삼아 불렀단 말인가.

극작가 정복근 씨가 "누가 여기 있는 것 같아요. 명작을 보면 언제나 그걸 만든 사람이 떠오르지요.

요 조그만 꽃무늬 연적을 만들어 놓고 혼자 즐거워 했을 사람도." 했다.
  
탄성이 나올만한 물건이 또 있었다.

조그만 돌부처 하나가 서너살 난 귀여운 소년의 얼굴을 하고 놓여 있었다.

즐거움 가득한 눈, 행복한 기운을 머금은 앳된 얼굴, 인중을 돋운 금은 그 아이가 코를 흘린 자국 같았다.

조그만 입은 웃음을 머금고 머리도 부처님 머리라기 보단 어린애의 머리였다. 그래도 걸친 옷은 스님 옷이다. 그런데 손에 여의주를 쥔 약사보살의 형상이었다.
"요렇게 인간적인 불상을 만드는 데는 한국밖에 없을 거다."
  
"이렇게 귀여운 아들이 만일 병이 나서 아프다 죽었다면…

부모가 얼마나 괴로워하고, 잊지 못했을지 알 것 같군요.

아마 그래서 아들의 얼굴로 약사보살을 새긴 것 아닐까.

낫게 해주려는 염원을 그렇게 나타내지 않았을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았을, 눈앞에 자꾸 어른거리는 그 얼굴이

돌에 새겨져 영원히 살게 된 것 아닌지.

 
아기 돌부처. 여의주를 손에 쥔 약사보살 형상을 했다.

따뜻하고 순수한 어린이의 아름다움과 종교적 자비가 결합됐다.

귀여운 아이가 보는 이 앞에 와 있는 듯한 생기를 준다. 19~20세기, 높이 32cm. ⓒ하지권

  
 
"도공이 자기의 얼굴을 자화상처럼 조각한 것일 수도 있겠지요.

화가들이 자기 얼굴의 특징을 다른 사람으로도 잘 그리잖아요."

"이렇게 좋은 물건은 정말 옆에 두고 보고 싶어요. 모조품이라도 만들면 안될까."
출판인 김예옥 씨 등 일행 사이에 두런두런 그런 이야기들이 오갔다.

이 불상의 유래같은 것을 더 알 수는 없을까. 출토된 곳이나 야나기에게 건네진 경위만이라도.

이 어린 돌부처의 얼굴을 한번이라도 더 실물로 보려고 전시장을 몇 번이나 드나들었다.
  
맨 아래층에는 야나기 무네요시의 일생을 보여주는 사진과 책 등이 있었다.

1920년 서울 인사동의 태화정(지금의 하나로 빌딩)에 십여 명의 장년신사들이 모여 찍은 사진에는

무네요시 일행 말고 조선사람으로 김우영(외교관, 나혜석의 남편), 친일파가 되기 전의 윤치호 등이

있다. 누구의 딸인지 맵시있게 차려입은 10여 세 전후 두 명의 조선 소녀도 있다.
  
1922년 서울에서 '이조도자기 박람회'를 연 사진도 있는데, 전시장은 조선귀족원이다.

일제로부터 합방의 댓가로 높지도 않은 귀족 작위를 얻어가진 한국인들이

지금 을지로 1가에 전용건물을 마련했는데, 그 내부 사진을 여기 사진에서 처음 보았다.
  
경복궁 집경당 안에 차려졌던 조선민족미술관 사진도 있다.

1924년 야나기와 아사까와 형제가 자신들의 소장품을 가지고 차린 박물관이다.

야나기는 조선사람들이 '천한 도공의 도자기를 뭐 좋다고 전시하나' 하는 반응을 보였다고 적고 있다.
  
1984년 아들 무네미찌 씨가 서울에 왔을 때 '아버님이 조선에 미술관을 만들어놓으셨는데

이후 흐지부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라고 냉정한 어조로 하는 말에 뒤통수를 세게 맞은 듯 띵 했었다.

그 미술관이 어떻게 없어졌는지, 소장품들이 어떻게 흩어졌는지에 대해 아무 자료도 증언도 못 들었다.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에 가 있다고도 한다.
  
당시 무네미찌 씨가 해준 이야기를 다시 꺼내 보았다.

"민예관 소장품은 일본, 유럽, 한국 등의 실용을 겸한 예술품을 망라합니다.

수량은 셀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약 2만여 점 가량). 부친이 처음 조선에 온 것은 1915년이었고

그때는 이런 물건을 수집하는 이가 드물고 양이 많았기 때문에 쉽게 구할 수 있었습니다.

생활예술을 가지고 박물관을 세운 것은 아버님의 일본민예관이 세계 최초입니다." 

 

네미찌 씨가 서울에 와서 처음 찾은 곳은

1931년 조선에서 사망해 조선옷을 입고 조선인 묘지에 묻힌 아사까와 다꾸미(1891~1931) 씨의

망우리 묘소였다.

"부친의 조선미술에 대한 애정은 아사까와 씨 형제한테서 영향을 받은 것이 크다"고 그는 말했다.

아사까와 다꾸미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임업시험장 기사를 지내면서

형 노리다카와 함께 조선미술을 사랑하고 일본을 비판했으며 조선인을 위해 헌신했다.

저작으로 <조선도자명고>, <조선의 소반>이 있다.
  
"일본인으로서는 선친께서 처음으로 대한민국의 문화훈장을 받게 됐습니다.

열심히 한국을 위해 애쓴 부분에 대한 답례로 알고 감사드립니다.

선친도 살아계셨다면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무네미찌 씨는 현대공예디자인을 전공, 독일에서 교수를 지내고

지금은 일본민예관장을 맡고 있는 산업공예디자이너다.

1984년에 벌써 '컴퓨터를 사용한 최첨단의 현대 디자인을 하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했었다.
  
"부친의 영향을 받아 한국의 미와 전통을 존경합니다.

옛날에 겪은 문화는 한국이 일본의 선생이었습니다.

한일 양국의 현대화 과정에 서로 존경과 신뢰가 동반되기 바랍니다. 양국 모두 그 점이 문제 됩니다.

한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나도 그런 일을 하고 싶습니다.

민예관에서 한국미술전을 개최할까 합니다. 아버지를 닮아 그런지

나도 물건을 보면 한국 것인지 여부를 금새 알아봅니다.

진열품을 보면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가려낼 수 있죠.

나라에서 처음 다까마쓰(高松塚) 고분이 발굴됐을 때 벽화의 인물상이 한국 것이라는 걸 느꼈습니다."
  
일본민예관은 관료가 개입되는 걸 아주 싫어해서 초기에 정부의 지원도 거절했다고 한다.

그러나 야나기 무네요시에 대한 존경으로 많은 사람들이 기부를 해 오고, 한국인의 기부도 있다고

그 당시 감사해 했다. 관료의 도움을 받지 않고 간섭에서부터 자유로우려는 그 말은

지금도 굉장히 의미있는 이야기로 생각된다.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이 말하는 대로 무네요시의 조선미술 소장품은

'허황되지 않고도 정교하고 알찬 물건들'이다.

아름답다는 본질이 돋보이는 것은 그러한 기품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 생각에 아버지는 철학자이자 여행가, 이상주의자, 로맨티스트였습니다.

20대에 조선의 미를 발견하고 놀라고 한국의 여러 가지 불행과 그 시대적 상황에서 고통받는 것이

당신의 이상주의와 상반되어 의분을 가지셨다고 생각합니다. 조선의 미가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치고요. 부친이 수집한 한국관계 물건은 대개 민예품들이고 도자기, 가구 등 총망라되어 있습니다."
  
무네요시의 부인 가네코(柳兼子)는

성악가로 일본에서뿐만 아니라 조선의 천도교당, YMCA 등에서 음악회를 열고

수익금을 조선민족미술관을 위해 기부하는 등 야나기과 함께 활동했다.

1921년 가네코가 서울 천도교회당에서 가진 독창회를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도 자료로 나와 있었다.

노래 곡목은 롯시니, 슈베르트, 죠르다노의 가곡 등이고

음악회 평은 1920년대 신문명에 대한 갈망과 호감이 물씬 배어 있는 음악회 스케치 기사였다.

무네요시는 곳곳에서 강연도 했으며 많은 청중이 호응했다.
  
그런데 뜻밖에 야나기 무네요시와 가네코 부인에 대한 특별한 일화 하나를

1999~2005년 사이 고 최태영 박사에게서 들었다.
  
"나는 1920년대 메이지대학 법과 학생이었는데

야나기 무네요시가 그 대학에서 윤리학을 가르쳐서 내가 배우댔어.

조선미술을 애호해 조선미술전시회도 열고 서울의 광화문이 헐리는 것을 반대하고 그러니까

일본인 학생들이 '야나기 선생이 자꾸 조선미술 이야기만 한다. 조선인인가 보다'고 배척하려 들었어요.

그래서 내가 나서서 '야나기 선생은 진짜 일본인이다' 하고 적극 옹호했어.

배척운동은 더 이상 일지 않았죠."
  
"당시 도쿄의 조선유학생회 경비도 마련할 겸 그의 부인 알토 성악가 가네코의 음악회가 열리면

내가 음악회 표를 팔러 다니기도 했어요. 가네코의 음악회라면 다들 두말 없었어요.

팔린 표값만큼의 돈을 유학생회에서 기부 받았습니다.

그 돈은 조선유학생을 위한 활동비로만 쓰는 겁니다. 그래서 야나기 선생과 친했더랬어.

가네코가 부른 노래 중에 알토 음색에 잘 맞던 노래를 내가 우리말로 옮겨 불렀더랬어.
  
'은빛 나는 작은 새가 / 바다 밀물 따라 왔다가 / 썰물에 떠나 어디론가 간다.'
 

 

그때 표를 팔러 다니다 한 교회에 가보니까 무슨 박사 무슨 박사 아주 점잖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한일합방을 반대한 유명한 7박사라고 지금 생각하지요. 당시엔 박사가 아주 귀했거든.

일본에서는 7박사가 한일합방 반대성명을 낸 사실을 애써 덮어두려고 했지요.

박사가 귀하니까 처벌도 하지 못했고. 구마모도(熊本) 출신으로 와세다 대학의 법과 선생

우끼다 가즈오(浮田和民)가 7박사의 선두에 있던 사람이었소."
  
이 사실은 최 박사의 역사회고록 '인간단군을 찾아서'와

2004년 12월호 학술원통신에 발표한 '한일합방을 반대한 일본의 7박사' 글에

7박사 이야기를 하기 위한 설명으로 조금씩 언급됐었다.
  
법학자 최태영 선생은 일본에서 일본인 스승을 통해 서양법철학을 공부했지만 평생 친일 한 적이 없고

일본의 역사왜곡에 맞서 고대사를 연구한 역사가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에 그는 일본어를 국어로 쓰라는 일본정부 방침에 공식적으로 반대한 유일한 교육자이며

조선청년들에게 학도병이나 정신대 나가야 된다는 반민족 연설을 하지 않았다.
  

1920년 서울에 온 야나기(뒷줄 왼쪽에서 다섯 번째). 김우영( 뒷줄 왼쪽에서 여섯 번째) 등 흰 두루마기 입은 조선지식인들과 청초한 소녀들이 같이 했다. ⓒ일본민예관

 


야나기 무네요시 또한 군국주의가 팽배한 일본사회에서도 관료의 간섭에 길들여지지 않으려 했던 자유주의자였다.

그가 어느 부분 조선을 옹호한 것, 수집한 물건을 이리저리 거간하지도 않았고 순수한 아름다움을 평가했으며 자신의 민예관 운영에 정부의 지원을 거절했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나는 각자의 입장을 지키면서 우의를 나눈 최태영 선생과 야나기 무네요시 부부 사이의 이 일화가

그 어려운 일제강점기에 있었던, 참으로 아름다운 한일 간 지성인 사이의 교류였다고 생각한다.

최태영 선생의 장서 중에 무네요시가 지은 책 <信과 美>(1943년 생활문화연구회 발행) 한 권이 있는데,

이번 전시회에 나온 그의 저서 일괄 중에 이 책은 보이지 않았다.
  
아들 무네미찌 씨도 "어머니는 당시 유명한 성악가였습니다.

한국에 대해서는 아버지로부터 많은 가르침을 받고 가정적인 문제가 없진 않았으나

아버지가 하는 일에 이해가 많았고 한국에 기부하는 일이 자연스러웠습니다"고 했다.

그는 또 "아버지가 친한파로 공격받던 당시의 신문 기사를 모아 출판했으면 합니다"고 말했었다.

최태영 선생이 일본학생들이 그를 배척하려 했다는 증언과 일치하는 자료다.

22권이나 되는 야나기의 전집에 이러한 언급이 포함돼 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일본 시부야 노부코(澁谷昶子) 영화감독이 2004년 성악가 가네코의 다큐멘터리 단편영화를 제작하면서

자료를 찾아 한국에 왔었는데 최태영 선생이 그 소식을 안 것은 한참 뒤라서 이야기를 전하지 못했다. 

 

이번 전시회를 기획한 일민미술관의 김희령 실장에 의하면,

이 단편영화가 제작된 소식을 민예관에서 동아일보에 알려오면서 차제에 전시회를 열게 되었다.

민예관에서는 장소도 좁고 해서

이처럼 광범위하게 한일 전통민예품을 대조전시하는 일 같은 건 하지 못했다.
  
영화는 가네코 부인을 중심으로 제작됐다. 그녀의 음색은 날카롭고 힘찼다.

83세, 85세 때에도 독창회를 열었으며 많은 제자를 가르쳤다.

일본의 철학자 쯔루미 슌스케가 평가하는 다음의 말이 나온다.
  
'무네요시가 한국문화에 몰입했다. 가네코는 성악가로 번 돈을 전부 남편 일에 쏟아 넣으면서

남편이 하는 일의 짐을 나눠 지었다. 이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시대를 앞서나갔다.

메이지 시대의 군국주의에서도 그들은 일본사회의 편협한 국수주의에 함몰되지 않았다.

두 사람이 부부로서 같이 어울린 것은 근사한 일이다. 이런 사람들이 일본에 있어 다행이었다.'
  
야나기 무네요시에 대한 평가가 어떻게 나올까 하는 것이 관계자들의 주목거리다.

'비애의 미'라는 표현에 일찍이 박종홍(철학자)이 '고구려의 웅장한 미술을 지닌 우리다'고

이런 감상을 거부하고 고유섭 등이 '그저 詩적인 말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원래 무네요시의 그 말은 '위엄의 미', '건강의 미'라는 표현과 같이 나온 것이었다고 한다.

조선미술을 말할 때 아무 생각 없이 한이니 비애니 하는 표현을 쓸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야나기의 글에는 조선미술에 대해 생각할만한 좋은 표현이 더 많다.

민화에 대한 다음 글은 조선의 민화를 자리매김하는 예리한 평론이다.
  
"조선의 민화는 모두 조선풍으로 이루어져 있어 결코 중국의 모방이 아니라는 점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조선민화는 확실하고 독자적인 세계를 이루고 있으므로

결코 다른 나라나 화풍에 종속된 표현을 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므로 무명인 민화뿐만 아니라 記銘한 조선화도 크게 다시 보아야만 한다.

후자인 경우도 중국 직계인 것과 조선계인 것이 있는데 후자에 훨씬 더 특색이 있다.
  
그리고 이 분야에 있어서도 아직 어느 미술관도 충분히 다루고 있지 않은 것이 유감이다.

앞서 이(李)왕가 및 총독부 미술관 등에서 수집한 조선화는 대부분이 중국 계통의 것이었다.

더더구나 민화는 한 폭도 그 가운데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회화사에서 민화기 제외되어 있는 현재의 사정은 바뀌어야 한다.

아마도 이들 민화가 오히려 현대 화가들에게 더 경탄을 주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만큼 무언가 새로운 자유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 야나기 무네요시 '조선의 민화', 민예80호, 1959년 8월호;

   이길진 옮김 <조선과 그 예술>, 신구, 1994, p.323.
  

 
민예관 소장 한국 미술품 중 조선민화가

2005년 서울 역사박물관에서 '반갑다 우리 민화' 전시회 때 다수 나와서 전시됐었다.

이번에는 73점의 생활예술품들이 나왔다.

다만 무네미찌 전 관장(91)은 고령으로 거동이 불편해 전시회 개관에도 오지 못했다.
  
전시회는 초반엔 별로 방문객이 없다가 차츰 늘어난다고 한다. 오는 2월25일까지 연장전시한다.

이번에 공개된 민예관 소장 조선미술품을 전문가들이 미적으로 더 분석하고

무네요시의 조선미술론이 더 많은 토론 등을 통해 학문적으로 발전된다면

우리 미술이 갖는 자산이 될 것이다.

그렇게 해서 더 깊이 있어진 조선미술의 다채로운 면모를 보고 싶다.

그리고 이처럼 아름다운 물건들을 더 자주, 더 가까이, 물건의 개인적인 내력과 애호의 열정이 뒤섞인

흥미로운 일상으로 접해보고 싶다.
  
전시장 밖에 나오니 야나기도 사랑했던 광화문이 제자리를 잡아 복원되느라고 가림막을 친 채

저녁 어스름 속에 서 있었다. 그 앞에 광장이 조금이라도 만들어지려나?

광화문 네거리의 대한제국 기념비각과 그 앞의 만세문, 길상의 동물 조각이 얹힌 풍경이

더할 나위 없이 '서울다운' 아름다운 삽화처럼 눈에 들어왔다.

야나기의 조선미술품은 이런 풍경과 삼위일체가 되었다.

-  2007-01-18

- 김유경의 문화기행 '서울, 북촌에서' . 언론인

 

 

 

 

 

 

 

 

 

풀이여 싹 나거라, 꽃이여 피거라

 

야나기 가네코와 야나기 무네요시. 그들은 부부였습니다.

아내 가네코는 일본을 대표하는 알토 가수였고, 남편 무네요시는 종교학자이자 미학자였습니다.

이들 부부의 조선사랑은 남달랐습니다.

3·1독립운동의 좌절로 절망의 늪에 빠져 있을 때 노래로, 글로 우리 국민들을 위로했습니다.

1919년 5월 야나기 무네요시가 쓴 ‘조선인을 생각함’이라는 글을 읽으며

당시 그의 한국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강렬했는지 느껴볼 수 있습니다.

“조선에 대한 경험이 있고 지식이 있는 사람들의 사상이, 거의 아무런 현명함도 없고 깊이도 없으며

또 따스함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나는 이웃 국민들 때문에 종종 눈물을 글썽였다.

……불행하게도 일본은 칼을 휘두르며 윽박질렀다.

이것이 과연 서로의 이해를 낳고, 협력을 증진시켜 줄까?

아니, 조선의 모든 백성들이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것은 끝없는 원한이다, 반항이다, 증오다, 분리다. ……사람은 사랑 앞에서는 순종적이지만 억압에 대해서는 완강해지는 법이다.

나라와 나라를 연결하고 사람과 사람을 가깝게 하는 것은 과학이 아니라 예술이다.

정치가 아니라 종교다. 지(智)가 아니라 정(情)이다.”

그는 1920년 4월 다시 조선의 벗에게 글을 썼습니다.

물론 외롭게 고통 받고 있는 우리민족을 생각하면서 쓴 글입니다.

“조선은 지금 외롭게 고통 받고 있다. 고유의 문화는 나날이 멀리, 태어난 고향에서 사라져가고 있다.

오가는 사람들의 머리는 수그러져 있으며 고통과 원한이 그 눈썹에 나타나 있다.

…… 모든 사람들이 자유로운 공기를 원하고 있다. 인정의 따뜻함을 그리워하고 있다.

나는 이런저런 생각에 억누를 수 없는 동정을 여러분에게서 느낀다.

조선의 벗이여, 알지 못하는 많은 벗들이여, ……나는 바다를 넘어서 두터운 마음을 여러분께 보낸다.

나는 여러분이 이 마음을 받아주실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정애에야말로 참된 평화가 있으며 행복이 있다.“

그리고 절망속에 빠져있는 우리나라를 노래로 격려하기위해 서울에서 음악회를 열기로 했습니다.

그들은 음악회 개최를 위한 취지를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저희는 조선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지금 거기서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들의 심정과 운명을 생각할 때마다 서글픈 기분에 사로잡힙니다.

……이 세상에 참된 평화와 우정을 내면에서부터 가져다주는 것은 종교와 예술의 길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그와 같은 길을 통해서 서로의 사랑을 일깨우고 싶습니다.

……저희는 이웃 나라 사람들에 대한 오랜 신뢰와 애정의 표시로 이번에 조선으로 건너가

음악회를 열고 그 모임을 조선 사람들에게 바칠 생각입니다.”

1920년 5월 서울 종로에 있는 기독교 청년회관에서 야나기 가네코의 독창회가 열렸습니다.

1300명 이상의 관객이 몰려 들었습니다.

처음으로 열린 서양음악독창회로 감동의 무대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의 조선에 대한 열정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신청사를 건설하면서 경복궁 앞에 서 있는 광화문을 철거, 파괴하려 했습니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조선의 전통건축을 파괴하려 하는 총독부에 맞서 이의를 제기합니다.

1922년 7월 그가 쓴 ‘장차 없어지려는 한 조선의 건축을 위해서’라는 글입니다.

“광화문이여, 광화문이여, 네 생명은 이제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다.

네가 과거에 이 세상에 있었다는 기억이 차가운 망각 속으로 사라지려 하고 있다.

모두가 말을 주저한다. 그러나 침묵 속에 너를 묻으려고 하는 것은 내게는 너무나도 비참한 일이다.……”

국가를 초월하여 빚어진 이같은 사랑 이야기에는 또 한 사람, 아주 중요한 주인공이 있었습니다.

천재 시인 남궁벽입니다.

이들이 있었기에 암흑의 시대에 기적과도 같이 사랑과 우정의 이야기가 꽃을 피울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와세다 대학에 유학하던 중

야나기 무네요시의 ‘조선인을 생각함’을 읽고 무네요시를 찾아가 친분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폐허, 창간호에 실린 남궁벽의 시 속에는,

야나기 가네코가 조선에서 불렀던 노래의 세계와 조화를 이루는 정신이 약동하고 있습니다.

흙이여 기름져라, 풀이여 싹나거라, 폐허의
꽃이여 피거라, 열매여 맺거라, 폐허에,
나비여 춤추거라, 새여 웃음 짓거라, 폐허에 와서
시내여 샘솟거라, 고기여 뛰놀거라, 폐허의
흑운(黑雲)아 흩어져라, 춘풍아 불날려라
그리하여 모든 것이 태양 밑에서 성장하여라
그리하여, 폐허가 변하여 화원이 되어라
그리하여, 우리도 세계 예원(藝苑)을 구성하는 일부가 되어라


올해는 한일합병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지 65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암울합니다. 외롭게 고통을 감내하며 스스로를 지켜왔습니다.
절망의 벽에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꿋꿋하게 미래를 준비해왔습니다.

폐허의 더미에 와서 나비여 춤추거라, 새여 웃음 짓거라를 외쳐왔습니다.

역사의 얼음판위에서 우리는 100년의 드라마, 기적을 이루어 냈습니다.

중요한 것은 앞으로 100년입니다. 분열과 갈등이 계속되는 한 새로운 100년은 준비되지 않습니다.

미래는 꿈이 아름답다고 믿는 사람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분열과 갈등, 끝없는 싸움과 미움속에서 미래의 아름다운 꿈이 영글수는 없습니다.

잘못된 관습과 과거의 성공경험에서 벗어날 때 새로운 미래가 보장되는 법입니다.

- 2010.03.08  권대우 아시아경제신문 회장 ⓒ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누구를 위한 민예(民藝)인가?

 

 

 

 

서명일(근대1분과)

  

 

 

 

      "가령 조선이 부흥해 에도성이 헐린다고 생각해보라.
     누가 에도성(江戶城)의 죽음 앞에 슬퍼하지 않겠는가?”

 

    인용문은 총독부 청사의 완공을 앞두고 광화문의 철거계획이 발표되자 야나기 무네요시가  

    1922년 9월 [개조]라는 잡지에 투고한 <사라지려 하는 한 조선건축을 위하여>라는 글이다. 

 

 

  지난 11월부터 광화문 일민미술관에서는 일본의 미술사학자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를 기념하는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철거위기에 놓인 광화문을 바라보며, 조선이 강대해져 일본의 궁성(宮城)인 에도성을 허물어버린다면 일본인의 마음이 어떨지 되물으며 광화문의 보존을 역설한 것으로 유명하다. 영어로까지 번역 · 소개된 그의 글은 여론을 촉발시키며 광화문을 철거의 위기에서 구해낼 수 있었다.

 

  도자기에 매료되어 이 땅을 처음 밟은 이래 3.1운동을 옹호하는 등 일본의 무력적인 식민지배를 비판하며 조선의 문화적 우수성을 알리는데 힘을 기울인 까닭에 그는 조선을 사랑한 양심적 지식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 결과 일본인으로는 처음으로 대한민국 정부의 훈장을 받기도 했다.


△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 1889~1961 - 사진출처 : 일민미술관)

 

  잘 알려진 것처럼, 야나기는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민예(民藝)’라는 말을 만든 장본인이다. 익살스런 호랑이 그림으로 대표되는 조선시대 민중들의 그림에 ‘민화(民畵)’라는 이름을 붙여준 것도 역시 그였다. ‘민중의 공예’를 뜻하는 민예라는 말 속엔 수 천년을 이어온 귀족적 예술에 대한 염증과 자본주의 시대에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몰개성의 공장제 생산품에 대한 반발이 담겨 있다.

 

  그는 인위적인 감상용 작품이 아니라, 현실의 필요가 만들어 낸 민중의 소박한 생활용품 속에서 진정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쓰임이 없는 것은 아름답지 않다”는 그의 유명한 명제는 이를 잘 보여준다. 그 결과 대량생산 체제가 진척된 일본보다는 산업화의 손때가 덜 묻은 식민지 조선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그는 일본에서 국보처럼 떠받들어온 다기(茶器 · 이도다완)가 조선에선 평범한 막사발에 불과한 것을 보고는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에게 조선의 미적 정체성은 민중의 소박한 삶 속에 베어있는 자연스런 아름다움에 있었다.

 

  이번 특별전 역시 허름한 찻잔과 삐뚤어진 항아리, 각종 짚공예품과 목기류 등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것들로 채워져 있다. 그저 평범한 생활도구들로 보이지만 당대 최고의 미학자였던 야나기의 눈에 든 것들이어서 그런지, 전직 국립중앙박물관장의 친절한 해설을 곁들인 작품소개란이 일간지 지면을 장식하고, 스타급 미학자들의 관람평이 이어질 만큼 예술성을 인정받는 모양이다. 그들은 한 목소리로 말한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 조선시대의 막사발과 목조편구(사진출처 : 일민미술관)

 

  하지만 안타깝게도 찌그러진 항아리를 보고 예술의 향기를 느낄만한 심미안은 없는지라 ‘이 얼마나 아름답지 않냐!’는 말들이 가슴에 와 닿지는 않는 게 사실이다. 감수성이 부족하면 사람이 삐딱해지기 마련이다. 지난 한 시절 야나기를 식민사학의 이론가 정도로 폄하하며 맹렬히 비판했던 적이 있지만, 조선의 문화를 바라보는 그의 시각은 분명 애정과 존경의 마음에서 출발한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그가 조선의 문화적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선택한 민예품들이 정작 대다수 조선 사람들에겐 하루하루 반복되는 고단한 일상의 일부에 불과했단 사실이다. 자신이 매일 접하던 것들이 어느 순간 ‘예술’로 칭송될 때, 예술로 둔갑한 생활용품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심정은 어떨까? 겉으로야 어떨지 모르겠지만 속으론 “무슨 이 따위 것들이 예술이냐”고 빈정대지나 않을까? 생활의 궁핍함을 이기지 못하고 도시로 혹은 만주로 떠나가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사용한 막사발과 주전자, 그리고 그들의 헤진 옷을 기워 입던 목각실패에서 아름다움을 느낄 만한 여유가 있었을지 의문이다.

 

  민예에 대한 관심은 아무 개성없이 대량생산되는 자본주의 시대의 생활용품들에 대한 반발에서 촉발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반면 식민지 조선의 민중들은 아직 공장제 대량생산품에 질릴 만큼 충분한 자본주의의 세례를 받지 못했다. 요컨대 前자본주의적 일상이 남아있는 조선에서 민예론은 일부 지식인의 고상한 취미생활에 머물 공산이 크다.

 

  민중이 느끼지 못하는 민예론은 일종의 권력이다. 매일같이 사용하던 항아리가 낯선 외국인의 입을 통해, 그것도 조선을 식민지배하고 있는 일본 지식인의 입을 통해 예술품으로 칭송될 때, 좌우 대칭조차 맞지 않는 항아리를 두고 예술이라 생각해 본 적이 없던 사람들은 일순간 미적(美的) 무지렁이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이제 그들은 곁에 두고도 예술품을 몰라본 자신을 질책하며 개안(開眼)을 서두를 수밖에 없다.

 

  더욱이 식민지란 조건에서 민예론은 정치적으로 악용될 여지가 다분하다. 조선 문화의 우수성을 보여주려던 야나기의 본 뜻과는 달리 식민지배자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작고 소박한생활용품에서 미적 정체성을 발견하는 민예론이 이미 ‘내지’(內地)로 편입된 조선을 보편성이 결여된 향토색 짙은 ‘지방’문화로 설명하거나 자본주의적 전망을 결여한 저발전의 증거로 설명하는데 유용한 이론적 토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3.1운동을 옹호한 이후 총독부의 요주의 인물로 감시당하던 야나기였지만, 그가 조선에서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1920년대 ‘문화정치’가 마련한 틈바구니 때문이었고 조선에서 그의 연설이 열릴 때면 언제나 총독부의 지원이 이어졌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조선을 사랑했고 자신이 사랑한 조선의 아름다움을 알리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이번 전시의 부제이기도 한 “야나기가 발견한 조선”은 어디까지나 조용하고 소박한 시골마을에 불과하다. 귀족적 예술과 자본주의적 대량생산 시스템에 대한 반발이 그를 조선으로 이끌었지만, 정작 민족적 자긍심에 목말라있던 조선 사람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그가 외면한(?) 호사스럽고 휘황찬란한 것들이 아닐런지.

 

  야나기가 조선의 아름다움을 탐색하기 이전, 조선의 문화를 말하는 사람들은 고려청자나 금속활자 등을 거론하며 문화적 자긍심을 드러내곤 했다. 아마도 서구와 같은 문명국임을 증명하기 위해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크고 화려한 것들을 찾게 된 까닭일 것이다.

 

  야나기가 조선에서 소박한 민예품을 발견하는 동안 이 땅의 사람들은 그것과는 전혀 다른 고려청자에 시선을 빼앗긴 셈이다. 민예품과 고려청자의 차이는 그들이 딛고 선 조건의 차이를 말해준다. 끊임없이 ‘문명’임을 증명해야 하는 사람들과 서구적 문명에 반기를 들며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외부를 관찰하는 사람의 차이랄까? 흔히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인다지만, 똑같이 사랑하면서도 그들이 발 딛고 서있는 곳이 어디냐에 따라 보이는 것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필진 : 서명일 | 등록일 : 2007-0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