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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켜(연재자료)

[조선통신사 길] 1. 교린외교 3,000리길 - 12차례 일본行

Gijuzzang Dream 2008. 6. 16. 22:00

 

 

  

 

 교린 외교 3,000리길 … 통신사 나가신다

 

 

정사 부사 등 많을 땐 500명 12차례 일본행 …

죽음 각오할 여행(?) 숭례문에서 긴 여정 시작

 

 

 

 

필자는 지난 6년 동안 한국에 남아 있는 조선의 옛길 10곳을 답사했다.

이제 더 갈 곳이 없어진 상태에서 찾아낸 것이 조선시대 통신사들이 일본으로 향했던 통신사 길.

 

 

한국인의 조상들은 일본에 가기 위해 300일 가까운 시간 동안 3000리 길을 걸었다.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 걸으며 한일관계를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하는 것,

그것이 한국의 옛길을 사랑하는 일본인인 나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조선 왕조는 기본적으로 쇄국정책을 취하면서도 이웃 나라와의 교류만은 꾸준히 이어 나갔다.

교류 대상국은 중국과 일본인데,

중국에 대한 외교는 ‘사대(事大)’,

일본과의 외교는 ‘교린(交隣)’이었다.

이 교린 외교의 주역이 바로 ‘통신사’다.

 

통신사(通信使)는 일본의 요청으로 파견하였는데,

말 그대로 국서(왕의 서신)를 일본 장군에게 전달하기 위한 사신으로,

이처럼 통신사의 파견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명, 청 교체라는 국제환경의 변화 속에서

안으로는 내정을 확립하고, 밖으로는 새로운 통교관계의 안정을 모색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 말기까지(1811년, 순조 11) 모두 12차례 파견되었다.

 

처음 네 번은 임진왜란의 전쟁 중 일본에 잡혀간 포로 송환 협상을 목적으로 했기 때문에

‘회답 겸 쇄환(刷還)사’라고 불렀다.

친선 외교를 위한 ‘통신사’ 교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임진왜란 전후 처리가 다 끝난 뒤부터다.

사신의 목적지는 에도막부(江戶幕府) 장군의 거처인 에도, 지금의 도쿄이다.

조선 왕조는 일본의 명목상 군주인 천황을 배제하고,

에도막부의 장군을 ‘일본 왕’이라고 부르며 정식 외교 대상자로 삼았다.

 

통신사행은 선린우호를 상징하는 외교사행으로 이조참의에 해당하는 정사(正使)를 비롯하여

400-500명의 규모로 구성되었으며, 체재 기간은 6-12개월 정도였다.

 

대마도에서 에도(江戶, 지금의 도쿄)까지 가는 통신사의 행렬 규모는 통신사절단을 비롯하여

이를 수행하는 쓰시마번서(對馬藩士), 그리고 접대를 맡은 지방의 번사(藩使)까지 합하면

2,000여 명 이상이나 되었다.

 

통신사 일행은 바쿠후쇼군(幕府將軍)에게 조선 국왕의 국서(國書)를 전달하고

각지의 일본인들과 주자학, 문학, 의학, 미술 등 각 분야에서 활발한 문화교류를 하였다.

통신사 파견을 바탕으로 적어도 1876년(고종 13) 개항 이전까지는 양국 간에 신뢰를 바탕으로 한

교린(交隣)관계가 유지될 수 있었다.

 

 

천왕 배제 에도막부와 대면

 

사신은 정사(정3품 이상) · 부사(정3품) · 종사관(5, 6품) 등 3명으로 구성되었고,

거기에 제술관(기록원) · 역관 · 화가 · 의사 · 사자관(서예 담당) 등

임무 수행이나 문화 교류를 위한 많은 인원이 더해져 많을 때는 무려 500명의 대행렬을 이루었다.

 

이제부터 내가 따라 걸으려는 길은 바로 통신사 행렬이 일본 도쿄로 향한 길이다.

 

옛길 걷기의 진정한 재미는

막상 길을 걷는 것보다 자료를 뒤지며 길을 알아내는 데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옛길을 하나하나 찾아내는 것은 흥미진진하다.

나도 길을 걷기에 앞서 우선 한국 내 행로를 알기 위해

조선 자료들을, 일본의 길을 알기 위해 일본 문헌을 찾아 뒤졌다.

 

<증정교린지(增訂交隣志)> 등 조선시대의 일본 외교 길잡이 책을 보면

‘노문식(路文式)’이라는 꼭지에 통신사 길에 대한 언급이 있다.

‘노문’이란 통신사가 가는 경로를 적은 여행 일정표 겸 통행증.

통신사 지나가는 길 중간의 마을 수령들은 노문을 보고 사신을 위한 접대 준비를 했으며,

역(驛)에서는 말이나 마부를 마련했다고 한다.

‘노문식’은 관례적으로 통신사가 가는 길을 명시한, 말하자면 ‘관습법’이었다. 

                 1636년(인조 14) 그려진 ‘한국 사신 입황성 행진도’, 31.0×595.0㎝

                  조선통신사, 일본 에도성에 들어가다(인조 14, 通信使 入江戶城圖) 

 

 동래부사 접왜사도(東萊府使 接倭使圖) 부분, 조선 후기, 81.5×460.0㎝ 

 

 조선 임금이 내린 국서를 싣고 강을 건너는 일본 배(國書樓船圖), 일본 에도시대, 59.9×1,524.0㎝

 

 

통신사들이 일본을 향해 출발하기 전 국왕에 숙배했던 창경궁.

2004년 조선통신사 행렬을 복원한 ‘통신사 행사’ 모습

지도에서처럼 ‘노문식’에 그려진 경로에는

‘좌도(左道)’와 ‘우도(右道)’가 있는데,

일본으로 갈 때는 좌도를,

한양으로 돌아올 때는 ‘우도’를 이용하도록 규정돼 있다.

일단 내가 걸어 내려갈 길은 ‘좌도’인 셈이다.

 

그렇다면 통신사들은 과연 노문식에 적힌 경로를 제대로 지키고 다녔을까. 과연 몇 박 며칠 만에 일본에 도착했을까.

 

이런 의문을 풀기 위해 나는 사신이나 수행원들이 남긴 기행문도 찾아 뒤지기 시작했다.

기행문들은 중국 사신의 기행 문집인 <연행록(燕行錄)>처럼

<해행총재(海行總載)>라는 전집으로 엮여 있는데,

다행히 국역본도 나와 있다.

 

여행기처럼 재미있게 쓰인 것, 딱딱한 내용의 출장보고서와 같은 것, 한시나 가사 형태인 것 등 저자의 취향에 따라 기술 형식은 제각각이다.

 

 

조엄 <해사일기> 경로로 도보 답사

 

이 자료들을 살펴본 결과를 말하면,

통신사들은 조선 안에서 정해진 길을 걷지 않고 제멋대로 길을 택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전례대로 가지 않은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다시 돌아올 수 없을지 모르는 위험한 대장정 도중 고향집에 들러 부모께 인사를 드린 경우다.

<해유록>의 저자인 제술관 신유한은 일본에 갈 때, 올 때 두 번 고향 경북 고령을 찾은 것으로 기록돼 있다.

 

두 번째는 민폐를 최소화하기 위해 3사가 일부러 각각 다른 행로를 택한 경우다.

특히 왜란과 호란 이후 3사가 뿔뿔이 흩어져 길을 걸은 사례가 많이 나타나는데,

세 통신사가 한 마을에 들어갈 경우 그들을 접대하느라 주민 생활에 큰 피해가 갈 것을 우려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때는 부사나 종사관이 죽령, 추풍령 등 경유로를 이용해 부산에 도착하곤 했다.

 

나는 이렇게 다양한 사례 중에서 1764년 11번째 통신사 행렬의 정사였으며

비교적 상세한 기행문인 ‘해사일기(海日記)’를 남긴 조엄(趙曮)을 모델로 삼기로 했다.

 

이제 나는 조엄이 된 기분으로 그와 같은 경로를 걸으며,

같은 곳에서 중화(점심)를 하고, 같은 곳에서 자려 한다.

물론 그는 말을 타고 갔을 테고, 나는 걸어서 가는 것이니 조금 힘이 들긴 하겠지만,

하루 이동거리가 40~50리(약 15~20km) 정도라 도보 답사로는 그만일 것 같다.

이제 출발이다.

 

통신사는 국왕이 직접 임명했기 때문에,

이들은 출발에 앞서 대궐에 들어가 왕 앞에 숙배(肅拜)를 했다.

왕은 일본 장군에게 전달할 국서를 하사하면서, 가서 해결해야 할 외교 현안에 대해 직접 하교하고,

마지막으로 석별의 물품을 하사했다고 한다.

당시 외국 여행은 죽음을 각오해야 할 만큼 위험한 일이었다.

그래서 3사는 대궐을 물러나온 뒤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 가족이나 친구들과 밤새 이야기를 나누고

다음날 숭례문(남대문)에서 기나긴 여정을 시작했다.

 

남쪽으로 내려가기에 앞서 마지막으로 한 일은

지금의 서울역 맞은편에 있던 남묘(南廟)를 참배하는 것.

남묘는 청계천가에 있는 동묘와 마찬가지로 중국 촉(蜀)나라 용장 관우를 모신 사당인데,

통신사들은 혼자 천 리를 주파한 관우에게 절하며 앞길의 안녕을 기린 것이다.

 

나도 통신사들이 서울을 떠나며 숙배를 올렸던 창경궁을 찾아 길의 시작을 다짐했다.

가을 단풍과 궁궐의 단청색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 창경궁에서부터

나의 여정도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도도로키 히로시/ 경상대 사회과학연구원 연구교수 hstod@hanmail.net
발행일 : 2004년 12월 02일(462호) 64~65쪽
 주간동아 [일본인이 쓰는 조선통신사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