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지 지나 남한강 수계로 입성 |
‘영남대로’ 직선 추구 고속도로와 비슷 … 통신사는 각 고을 들러 교류하는 일이 통례 |
<5일(기축) 맑고 늦게 바람 불었다. 죽산에 닿았다. 아침에 아우 인서와 손을 잡으며 작별하였다.>
경기 용인 고을을 나서면 바로 왼편(북쪽) 언덕에 향교가 보인다. 예전에는 숲 속이었을 텐데, 지금은 대성전(大成殿 · 공자의 위패를 모시는 전각) 바로 옆까지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길을 따라 아차현이라는 고개를 넘으면 양지읍까지 계속 기찻길이 따라온다. 일제시대 때 여주-이천-용인-수원-인천을 연결했던 협궤철도의 흔적이다.
기찻길과 나란히 멱조고개를 넘으면 이제야 현재의 용인 시가지가 보인다. 용인군청이 구성읍에서 이사 오기 전까지 여기에는 ‘금령역’이라는 역마을과 ‘김량장’이라는 오일장이 있었다. 지금도 5일과 10일에 김량장이 서는데 주변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번성하고 있다.
<양지에 당도하니 주수(원님) 박행원, 안산군수 임서, 이천부사 심공유가 보러 왔다.>
양지의 원래 이름은 ‘양량부곡’이었다. ‘부곡’이란 군현과 비슷한 행정구역이지만 군현보다 훨씬 작고 격이 낮은 지역을 일컫는 말. 그래서 부곡은 조선시대 전기 대부분 주변 군현에 통합돼버렸는데, 양지는 반대로 현으로 승격했다. 그러나 원래가 부곡 땅이었던 탓에 행정구역이 너무 협소하고, 정치적인 힘도 미약했다. 그래서 어느 때는 이천에 속하고, 또 어느 때는 양성(현재 안성시의 일부)에 속했다가, 일제시대 용인에 병합돼 아예 이름이 사라져버렸다.
최근에야 양지 읍치(邑治)가 있던 내사면의 이름이 양지면으로 바뀌어, 이름만은 명맥을 잇게 되었다. 왠지 유럽 약소 국가의 역사를 보는 것 같아 딱해 보이기도 하는 동네다.
문제는, 이처럼 빈약한 지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통신사를 비롯해서 한양과 영남 지방을 오가는 길손들은 대부분 양지에서 머물거나 점심을 먹었다는 점. 그래서 지대(支待 · 공적인 일로 지방에 나간 관리의 먹을 것과 쓸 물품을 그 지방 관아에서 바라지하던 일)에 따른 민폐만은 다른 격이 높은 읍치들과 별 차이가 없었던 것 같다. 예전의 양지 치소는 오늘날 청소년수련원이 되었고, 향교 정도만 남아 이곳이 읍치였음을 알려준다.
청소년수련원이 된 양지 치소
여기까지 오면 난개발 아파트촌이 사라지고, 길은 아늑한 시골의 인상을 준다. 대신 골프장·스키장·전원주택 등 ‘교외형 난개발’이 진행되어 있어서, 나무가 베이고 산이 깎이고 골짜기가 메워져가는 모습은 별 차이가 없다.
양지 읍치를 지나면 좌찬고개가 나오는데, 이 고갯마루에도 지산리조트가 자리잡고 있어서 옛 고갯길의 정취는 느껴지지 않는다. 조선시대에는 좌찬고개를 넘으면 좌찬역이 있었다. 지금도 역촌이었던 좌항마을에는 옛길이 그대로 남아 있다. 많은 통신사들이 이 역에서 쉬고 간 기록이 있지만, 조엄은 양지에서 쉬었기 때문에 이곳을 그냥 지나쳤다. 말은 갈아탔을지 모르지만.
좌찬역을 지나면 이제부터 남한강(청미천) 수계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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