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 향하는 '조선통신사' 여로
‘조선통신사의 200여 년 여행길을 세계문화유산으로 !’
17~19세기 12차례나 일본을 다녀간 조선 왕조 외교사절 통신사의 여로가
2008년 한·일 학계와 문화재 동네의 민감한 화두로 떠오를 조짐이다.
한반도에서 현해탄을 건너 일본열도의 서부, 중앙부를 관통하며 지나간
조선통신사의 수천릿길 여행로와 그들이 머문 건축물, 시설물 등의 공간을 한국과 일본의 관민이
협력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공동 등재하자는 움직임이 일본 쪽에서 본격화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 건축학회 등의 현지 학계와 조선통신사의 사행로 유적이 남아 있는 일본 규슈,
본토 쪽의 지자체들은 최근 공동 등재를 위한 준비 추진 계획을 공개하고,
한국 학계와 지자체에도 공동 협력과 동참을 정식 요청하고 나섰다.
이에 대해 국내 지자체와 학계에서도 일부 관심을 보여,
사상 첫 한·일 공동 문화유산 등재 작업이 현실화할 수 있을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동아시아 문화교류·건축물 의미 커”
12월20일 낮 일본 도쿄의 도심인 게이오대 인근 시바의 일본 건축학회 건축박물관 갤러리는
한 · 일 건축사를 연구하는 학자들과 학생 등으로 북적거렸다.
이곳에서 조선통신사 400주년을 기념해 한국 건축역사학회와 일본 건축학회가 같이 꾸린
‘조선통신사의 길’이란 제목의 기획전이 막을 올렸다.
1월20일까지 예정된 이 기획전은 한·일 양국 최초로
조선통신사가 지나간 사행로의 건축 문화유산들을 한자리에 집약해 보여준다는 사실도 뜻깊었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예사롭지 않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개막 리셉션에 앞서 일본 학회를 대표하는 건축사 미야케 리이치 게이오대 교수는
전시의 기획 배경에 대해 한국 쪽 인사들에게 이런 발언을 했다.
“통신사의 길은 서울과 일본 에도(도쿄) 사이를 잇는 동아시아 문화교류의 길로서 그 사이 항구와
거리, 성곽, 각종 건축물들은 국경을 초월한 세계유산의 가능성을 충분히 지니고 있다.
한·일 공동유산으로 만들고,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공동 등재한다면
한·일 간의 문화 교류에 또 하나의 이정표가 세워질 것으로 생각한다. ”
200여 년간 이어진 통신사 여행길을 세계유산으로 키우자고
한국 인사들에게 동참을 공식 요청한 것이다. 이에 한국 쪽 관계자들은 말을 삼갔다.
대표로 나온 김정동 건축역사학회 회장(목원대 교수)은
“일본에는 당시의 흔적이 비교적 많이 남았으나, 한국은 숱한 전쟁으로 흔적이 별로 없고,
통신사 코스에 관심을 지닐 형편이 못 됐다”면서 즉답을 피했다.
전시 또한 서울 종묘부터 일본 닛코에 이르기까지 통신사들이 거쳐간
한·일 각지의 숙소, 거류시설 등의 건축 공간과 관련 자료들을 모은 것으로
공동 유산의 성격을 강조하는 데 초점이 맞춰진 인상이었다.
조선통신사가 한양을 출발해 일본 에도성에 닿기까지 주요 통과지점에서 숙소나 거처로 이용했던
고건축물 모형과 복원도, 옛 사진, 그림 등 50점 이상이 선보였다.
국내에서는 상주대 정명섭 교수, 부산대 이호열 교수가
통신사 숙소였던 상주 객사와 밀양 영남루 등지의 모형을 출품했으며,
일본 쪽에서는 쓰시마섬 이즈하라 해안사, 히코네의 종안사 등 주요 숙박지 건축물 모형과
각종 유적 사진, 실측도를 담은 패널 등을 선보였다.
전시를 기획한 재일동포 부학주 박사(게이오대 강사)는
1887년 부산 초량 지역에 있던 일본인 집단 거주 · 무역 시설인 초량 왜관 서쪽을 프랑스인이 찍은
희귀 사진을 공개해 호평을 받았다.
‘조선통신사의 길’ 전시장. 전시의 기획자인 부학주씨(왼쪽) 등이 경북 상주 객사 모형을 보고 있다. |
400주년 맞아 일본이 밑그림 작업
통신사 여행길의 공동 유산 등재는 2007년 조선통신사 400주년을 맞아 한국과 일본 곳곳에서
다양한 기념행사 등을 벌이면서 일본 쪽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요구다.
미야케 게이오대 교수를 비롯한 일본 건축학회 전문가들은 조선통신사 400주년 기념행사 등을
계기로 지자체들과 세계유산 공동 등재를 위한 치밀한 밑그림 작업을 벌여왔다.
통신사의 여행길 유적이 지나가는 일본 규슈, 혼슈의 현지 지자체, 시민단체 50여 곳이
수년 전 함께 결성한 조선통신사연지협의회(이하 협의회)와
일본 국회의원 20여 명이 결성한 조선통신사 교류의원의 모임 등과
세계유산화의 가능성과 근거 자료 확보 등을 위한 논의를 거듭해왔다.
부학주 박사도 “일단 한·일 민간 차원에서 공동 유산화를 추진하면서 공동 세계문화유산으로
신청하기 위한 분위기를 조성한다는 것이 현지 학계의 장기적 복안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그의 말처럼 통신사 여행로 세계유산화 사업의 핵심은 일단 공간이다.
통신사가 거쳐간 주요 경유지의 숙박시설과 건물들, 전용 도로, 성곽 등이
원모습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면, 대상이 된다.
일본 교토 근교 비와 호수 근처에 있는 오우미 부근에 통신사를 위해 닦은 조선인 가도나 우시마도를
비롯한 일본 세토나이카이 근처의 여러 숙박지 유적 등이 그런 사례다.
경우에 따라선 유명 유적을 공동 복원하는 것도 생각할 수 있다고 한다.
이런 맥락에서 ‘통신사의 길’전은 통신사 여행 공간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신청을 위한
기본적인 자료 축적과 검토의 성격도 지니고 있다는 게 일본 쪽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서구에 참고할 만한 사례도 있다.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에 걸친 성지 순례길 유적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경우
1천여 km의 순례길 가도에 있는 가톨릭 성당 등의 신앙시설을
두 나라가 공동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한 적이 있다.
중국과 우즈베키스탄 등의 중앙아시아 5국은
고대 비단길(실크로드)의 유네스코 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일본 규슈, 세토나이카이, 간사이 지방의 자치단체들은
관광수요 창출과 지역의 문화유산을 소개하는 좋은 기회라는 판단 아래 협의회를 통해
적극적으로 학계의 세계유산화 움직임을 지원하고 있다.
이번 전시회에서 처음 공개된 1887년께의 부산 왜관 서관 지역의 전경사진. |
국내엔 유적 거의 없고 지자체간 이견
국내 학계는 다분히 신중론 쪽이다.
여러 미묘한 요인들이 있어 공동 등재가 무난히 이뤄지기는 쉽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우선 유적의 수는 물론 관심도 측면에서
국내와 일본의 정서가 크게 다르다는 점을 꼽는다.
일본에는 통신사 관련 유적이 곳곳에 남아 있고 춤 · 노래 등 전승되는 문화행사들도 많이 열려
연관성을 찾기가 어렵지 않지만, 국내는 사실상 숙소 격인 객사와 대로 외에는 유적이 거의 없고
주민들이나 지자체의 관심도 크게 떨어진다.
국내의 통신사 역사적 흔적에 대한 문헌 · 유적 연구가 일본보다 미진하다는 점도 한 요인이다.
국가 차원에서 유산 등재 작업을 추진한다 해도, 공동 유산 대상의 신청 지정 범위 등을 놓고도
적지 않은 이론이 나올 것으로 보인다.
일단 서울부터 일본 닛코까지 전 구간의 건축 문화유산을 대상으로 하자는 것이 일본 학계의 주된
의견이나, 국내 학자와 지자체들 사이에서는 이해관계에 따라 의견이 엇갈릴 소지가 크다.
부산과 밀양의 경우 통신사 행적 복원 사업에 적극적이고, 부
산시에서는 일본처럼 통신사 관련 유산의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공론화되고 있지만,
다른 지자체들도 보조를 맞추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김정동 교수는 “통신사 활동에 대한 객관적인 검토·평가가 진행 중인 상황에서 자칫하면
들러리 서는 것으로 비칠 수 있다”고 말했다.
정부 쪽도 최근 외교통상부와 문화재청 관계자들이 이 문제를 놓고 서로 의견을 교환하고 있다는 게
건축사학계 관계자의 전언이다.
일본 학계는 세계유산 등재가 양국 정부 차원의 문제인 만큼
일단은 공동 유산화를 위한 밑그림 작업에 치중하는 분위기다.
후지오카 도쿄공업대 교수(건축사)는 “한·일 사이에 역사적 장벽이 있는 것을 알지만,
함께 세계유산 등재를 시도한다는 것 자체가 의미 있는 일”이라고 했다.
그는 “한·일 월드컵도 결국 공동 행사로 하지 않았느냐”고 반문했다.
일본 쪽은 전시 행사로 2008년 1월12일 도쿄에서 열리는 ‘통신사의 길’에 대한 국제 심포지엄을 통해
세계문화유산 문제를 더욱 강하게 공론화할 것으로 보인다.
이 자리에는 김정동 목원대 교수, 김성우 연세대 교수, 미야케 교수 등의 한·일 전문가와
주일 한국대사관, 일본 〈NHK〉 등의 언론계 인사도 대거 참석할 예정이다.
구간 선정 놓고 벌써부터 신경전 오가
한편 개막식 뒤 인근 한식당에서 회식을 겸해 벌어진 한·일 학계 관계자 회합에서는
공동 유산의 범위, 즉 통신사 사행로의 구간 등을 놓고 신경전이 오갔다.
전문가들끼리 먼저 등재 대상이 될 구간에 대해 의견을 모아 공표하는 것이 좋겠다는 일본 쪽 의견에
“너무 앞서간다. 범위도 좀더 좁히자”는 한국 학자들의 응수가 이어졌다.
일본 전문가들은 세계유산화 운동에 적극 나서는 인상이었다.
진지하고 집요한 그들의 요청에 대해 국내 학계와 지자체, 정부는 어떤 응답을 내놓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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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 유산화는 두 나라 학계의 과제”
일본 건축학회 이사인 미야케 게이오대 교수 인터뷰
미야케 리이치 게이오대 교수
“통신사의 길은 두 나라를 대표하는 세계문화유산인 서울 종묘와 일본 닛코 도쇼쿠(에도시대 최고권력자 도쿠가와의 무덤 사당)를 잇는 의미심장한 길이다.”
일본 건축학회 이사인 미야케 리이치 게이오대 교수는 조선통신사 여행길의 세계유산 등재 준비 작업을 이끌어온 핵심 인사다.
그는 “길의 역사문화적 상징성을 보더라도 공동 유산화를 위한 분위기 조성에 힘쓰는 것이 두 나라 학계의 과제”라고 운을 뗐다.
“1643년 통사로 찾아왔던 윤순지의 경우 중국 선양의 청나라 황제 누르하치 묘와 한양의 종묘를 돌아보았고, 일본의 도쇼쿠도 방문했다. 통신사 여정에 당대 세계인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것 자체가 흥미롭지 않나. 한·일 공동 유산화 운동은 이런 기억들을 되새김하는 작업이다.”
그는 “일본에 발을 디딘 통신사들은 새로 지어진 숙소, 절, 별장 등에 묵으면서 고급 문화의 향기를 흩뿌렸다”며
“세계유산 공동 등재 작업은 이런 교류가 이뤄진 공간들에서 새로운 유산적 의미를 발견하자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국 쪽의 빈약한 유적 현실, 지자체들끼리의 이해관계 대립 등이 난점이 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개의치 않는다는 답이 돌아왔다.
“200년을 넘겨 12차례나 사절을 보낸 한국에도 내놓을 자료는 분명 있을 것이다.
두 나라 지자체와 시민단체 사이에 협력체제만 구축된다면,
공동유산 운동은 잘될 것으로 본다. 관광자원 등의 지역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만큼
정치적 성격이 가미될 게다. 누가 십자가를 지고 나서느냐가 관건이다.
한국은 지자체장의 힘이 큰 편이니, 선의로 바라본다면, 잘될 것으로 생각한다.”
도쿄대 건축학과와 프랑스 국립 예술학교(에콜드보자르)를 나온 수재인 미야케 교수는
조선통신사 연구의 손꼽히는 권위자다.
현지 정·재계에 발이 넓고 한국 지인도 많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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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12월27일, 한겨레21, 제691호, 도쿄=글 · 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성신지교린’(誠信之交隣)은 성심과 신의의 관계란 뜻이다.
18세기 일본에 간 조선 정부 사절단(통신사)의 외교 교섭을 맡았던
쓰시마섬의 유학자 아메노모리 호슈(1668~1755)가 남긴 말이다.
양국 언론은 한-일 관계의 이상을 담은 금언으로 지금도 이 말을 인용한다.
최근 통신사 여행로의 세계문화유산 공동 등재 운동을 추진(<한겨레> 691호)할 정도로,
많은 후대인들이 통신사의 미덕을 칭송한다.
갈등이 얼룩진 양국 역사에서 드물게 오랜 평화와 문화 교류를 실현한 모범이라는 것이다.
일본 화가 하네가와 도에이가 그린 <조선통신사래조도> (朝鮮通信使來朝圖·일본 고베시립박물관 소장). 18세기 통신사에 대한 일본 현지의 환영 열기를 생생하게 묘사한 통신사 그림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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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이 “귀국에는 만국전도도 없는가”
이런 미덕을 쌓았다는 통신사의 실체를 한국인들은 얼마나 알고 있을까.
300년 넘는 세월 동안 모두 열두 차례, 3천 명 넘게 파견된 조선의 외교사절들은 에도(도쿄)까지
이어진 여행로 곳곳에서 글과 그림 등 문화 산물을 무지한 일본인들에게 나눠주었다는 것,
그 은혜를 받으려고 인파가 줄을 이었다는 것 등을 사람들은 되풀이해 기억하려 한다.
일본 우익들은 거꾸로 통신사를 일본 무신정권(막부)에 대한 조공사절 정도로 폄하하곤 한다.
임진왜란 뒤 재개된 통신사 외교의 이면에 기억들과 다른 ‘미묘한’ 역사적 사실들이
훨씬 많이 숨어 있다는 점은 종종 잊혀졌다.
한국 18세기학회에서 최근 펴낸 논문집 <18세기 한일문화교류의 양상>(태학사)은
18세기 통신사 문화 교류의 이면에 숨은 복잡 미묘한 진실을 담은 책이다.
책이 주목한 18세기는 조선-일본 간 교류가 가장 활성화한 때다.
통신사는 네 차례 파견됐고, 사절단 수(300~500명)나 일본 쪽 접대 규모 또한 최대였다.
학회 연구자들의 논문 10편은 이 시기 통신사 문화 교류의 양상들을 색다른 각도에서 뜯어보았다.
물론 분석한 결론들은 일반인들의 선입관과는 달랐다.
상당수 논문들이 18세기 일본 지식인 문화가 양과 질에서 조선을 능가할 정도로 급성장했고
내실도 탄탄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김태준 동국대 명예교수는 ‘동아시아 문학의 자국주의와 중화주의의 위기’라는 권두 논문에서
18세기 일본에 막대한 서양과 중국 문물이 들어오고,
신지식 경영으로 조선의 우월주의, 중화주의 자체가 흔들리게 되었음을 사례로 보여준다.
그 무대에 17~18세기 일본 막부의 외교 거물이자 최고 유학자라는 아라이 하쿠세키(1657~1725)가
등장한다. 1711년 파견된 통신사 정사 조태억(1675~1728) 일행이 아라이와 붓글씨로 대화한 기록을
담은 <강관필담>을 보면, 아라이는 동서양에 걸친 사유와 지식으로 논의의 주도권을 잡는다.
자국 항구를 통해 들어온 이탈리아, 네덜란드 등 서양의 여러 산물과
다양한 외국인들을 직접 다 보았다는 것을 자랑하면서 외국 사정에 어둡던 조선 사절들을 압도했다.
사신 일행이 구라파, 이탈리아, 화란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자
“귀국에는 만국전도도 없는가”라고 면박을 줄 정도였다.
1709년 이탈리아 선교사를 신문한 내용을 책으로 내고, 서양 세계지도도 수벌을 갖춘 그에게
조선 사신들은 문학적 우월주의만 믿고 대적했다가 낭패를 본 것이라고 김 교수는 평가했다.
사신단은 청나라도 중화문명의 정통인 조선을 존중한다고 애써 자랑했지만,
아라이는 “천하는 청나라 세상인데, 명나라 복색을 겨우 흉내내는 조선이 옛 속국처럼 엉거주춤하고
있지 않느냐”고 쏘아버린다.
일본 예 들며 국제교역 주장한 박제가
일본 문인들이 붓으로 그렸던 통신사 사절들의 초상 스케치. 1764년 방일 사절단 필담 기록인 <동사여담>에 실렸다. (정민 한양대 교수 제공) |
임형택 성균관대 교수가 쓴 논문
‘계미통신사와 실학자들의 일본관’은 또 다른 이색 사료들을 보여준다.
통신사의 젊은 수행원들이 전한 당대 일본 지성계 흐름에 대한 정보묶음이다.
이들을 엮은 기행기가 18세기 실학자들의 일본관을 재정립하게 했고, 실학 사상 형성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이야기다.
한 예로 1763~64년 500여 명이 다녀온 통신사 여행(‘계미년 사행’이라고 한다) 당시 수행한 서기 원중거가 기행기 <화국지>를 통해 언급한 구절이 인용된다.
“대저 이 나라 사람들은 총명하고 일되어서 4, 5살이면 능히 붓을 잡고, 10여 살이면 시를 지을 줄 안다.
여자들 중에도 시 짓고 글씨 쓰고 할 줄 아는 사람이 허다하다.
해중지향(바다 가운데 문명의 땅)이라 불러도 지나치지 않으리라.
…나카사키로 중국 책들이 통하게 된 뒤로 집집마다 글을 읽고 사람마다 붓을 잡고 있으니….”
같은 서기였던 성대중도 <일본록>에서
“에도(도쿄)의 인사들 사이에 시문이 매우 성해서 옛날에 비할 바 아니다”라며
“앞으로 통신사절들은 (상대를 만만히 여기면) 반드시 곤란을 당할 것”이라고 하고 있다.
임 교수는 박제가가 유명한 저술 <북학의>에서 국제 교역이 나라를 부강시키는 데 유익하다는 주장의 논거로 일본을 들었으며, 중국과 상선이 직통하고 30여 나라와 교역해 물화의 풍성, 문명의 변화가 놀라울 지경이라고 찬사를 보낸 구절도 소개했다.
필자는 일본의 국제 교역이 가져온 기술문명을 중시했던 연암 박지원 학파의 경우 일본을 하나의 발전 모델로 염두에 두었다고 단언한다.
17세기 이래 일본에 퍼진 신유학의 한 갈래인 ‘고학’(古學)이
이덕무, 정약용 등 18세기 실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하우봉 전북대 교수의 논문도 색다르다.
고학은 통치 이념이던 주자학을 벗어나 옛 고대 유교 경전들을 당대 시각으로 재해석하는 유파다.
특히 다산은 일본 고학파들의 성과를 유난히 높이 평가했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대표 저술인 <여유당전서>의 곳곳에서 일본의 문화·학술을 언급하고 있으며,
논어를 주해한 <논어고금주>를 지을 당시엔
오규 소라이 등 당대 일본 고학자들의 저술을 100여 군데 이상 인용했다고 글은 밝혀놓았다.
하 교수는 실학자들이 일본 고학에 동조한 배경으로 주자학을 극복하고,
조선 · 일본에 일어난 초기 자본주의적 변화를 사상적으로 대변한 점 등을 꼽았다.
실제로 다산은 유배지 강진에서 아들에 보낸 편지를 통해
“일본은 본래 백제를 통해 서적을 얻어 몽매했는데, 중국 강남과 직교역하면서 좋은 책을
사가지 않은 것이 없다. 과거제의 폐단도 없어 지금은 그들 학문이 우리를 능가하게 되었으니
심히 부끄러운 일”이라고 털어놓았다고 하 교수는 소개하고 있다.
당대 조선 일본 지식인들의 한문문체를 비교분석한 김성진 부산대 교수도 논문에서
에도 막부가 18세기 중국 강남 무역선을 통해 엄청난 양의 장서를 사들였다는 당대 기록을 언급한다.
정조 때 대장서가로 이름높았던 서유구의 할아버지 서호수의 망신담을 소개한 내용은 뜻밖이다.
1776년 중국 베이징에 사신으로 갔을 때 <고금도서집성>을 사려했는데, 중국 상인이
“간행 50년이 지났는데 당신 나라는 이제야 사는가. 일본은 나카사키, 에도에서 3부를 구해갔다”
고 웃어 창피함에 답을 하지 못했다고 적어놓았기 때문이다.
쓰시마섬의 조선어학교 ‘한어사’
<18세기…>에는 당대 교류의 직접 수단인 조선어, 일본어 어학 교육체계를 두 나라가 어떻게
관리했는지에 대한 생생한 설명도 나온다.
18세기 왜어와 조선어 강습 체계를 살펴본 이상규 동의대 강사와 정승혜 수원여대 교수의 글이다.
조선에선 17세기 말 정부 지정 일본어 학습서 격인 <첩해신어>가 간행됐으나,
이후 2세기 동안 일본어 변화를 수용하는 정부 교재가 편찬되지 않아
통역 수준에 대한 문제 제기가 계속됐다.
반면 일본은 외교관 아메노모리의 노력으로 1727년 쓰시마섬에 ‘한어사’라는 조선어학교를 세우고,
9~17살 청소년 30여 명에게 하루 6시간씩 3년 과정의 맹훈련을 시켰다.
문법, 발음부터 어휘력, 전문용어, 문화사 지식 습득까지 오늘날 외국어 공부와 비슷한 과정을
초 · 중급 단계로 가르쳤다. <십팔사략> 등을 읽어 발음을 익힌 뒤 <소학> <사서> 등을 배우고,
단어장 격인 <물명책>과 고전소설 <숙향전>을 강독하고 토론했다.
8가지 기준에 따라 학업 성취도를 평가하고,
학생 중 10명을 뽑아 부산 초량 왜관에 요리사가 딸린 정기 어학연수단을 보냈다는 대목에 이르면,
그 용의주도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 Flying Over The Canyons / Frederic Delar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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