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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 위의 신선(파상군선도, 波上群仙圖)

Gijuzzang Dream 2008. 6. 12. 10:52

 

 

 

 

 

 파도 위의 신선

 

 파상군선도(波上群仙圖)

 

 

 

신선도(神仙圖)

도교의 신선사상을 바탕으로 발생하였으며,

불로장생 · 무병장수(無病長壽) · 부귀영화(富貴榮華) 등 사상과 현세기복을 추구하는 염원을

신선이라는 신앙적인 존재를 통해 나타낸 그림이다.

인물화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분야 중의 하나로

처음에는 고대(古代) 고분의 벽화나 부장용품에 그려지기 시작했으나

점차 일상적인 축수기복용(祝壽祈福用) 또는 감상용으로 발전했다.

 

우리나라에서 신선도의 소재로 많이 등장하는 신선으로는

종리권(鍾離權) · 여암(呂嵓, 呂洞賓) · 장과로(張果老) · 한상자(韓湘子) · 이철괴(李鐵拐) ·

조국구(曹國舅) · 남채화(藍采和) · 하선고(何仙姑) 등 신선 중의 대표적인 팔선(八仙)을 비롯하여,

노자(老子) · 황초평(黃初平) · 마고선녀(麻姑仙女) · 하마선인(蝦마仙人) · 동방삭(東方朔) ·

왕자진(王子晋) · 서왕모(西王母) · 장지화(張志和)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대부분의 작품에서 일관된 모습과 지물(持物) · 복식(服飾)으로 표현되는

도상적 특징을 보인다.

 

초기의 신선도는 도상과 양식이 어느 정도 도식화된 중국 신선도의 영향을 받았지만

조선 후기에 이르러 우리 민족 고유의 기호와 표현방식을 통하여 걸러지고 변화되어

한국 특유의 전통을 이룩했다.

여러 신선들은 단독상으로 그려지기도 하지만

여러 명이 무리지어 있는 군상(群像)으로 표현되는 경우도 많다.

신선도에 등장하는 신선은 모두 500이 넘지만 이 중에서도 가장 많이 그려지는 신선이

종리권(鍾離權), 여동빈(呂洞賓) 등 팔선(八仙)이며,

이밖에 노자(老子)나 황초평(黃初平) 등도 자주 등장한다.

 

군선도(群仙圖) 중에는

서왕모가 3,000년에 1번 열리는 장수의 선과(仙果)인 반도(蟠桃)의 결실을 기념하기 위하여 개최한

연회에 주나라의 목왕(穆王)이 참석한 장면을 그린 요지연도(瑤池宴圖),

서왕모가 주최한 반도회와 초대받은 여러 신선들이 요지연에 참석하려고 파도를 타고 오는 장면과

요지연 장면을 함께 그린 군선경수반도회도(群仙慶壽蟠桃會圖 또는 선경도, 仙境圖),

바다 위에 떠 있는 신선들을 표현한 파상군선도(波上群仙圖),

장수를 상징하는 수노인(壽老人)을 첨앙하는 신선들을 그린 군선경수도(群仙慶壽圖),

종리권 · 장과로 · 한상자 · 이철괴 · 조국구 · 여동빈 등 여섯 신선에

남채화 · 하선고 두 여자 신선을 포함한 팔선을 소재로 그린 팔선도(八仙圖) 등이 대표적이다.

이외에도 도교적인 습속의 세화(歲畵)로서 또는 장수기복용 선물로서 수노인도가 많이 그려졌다.

수노인은 인간의 수명을 관장하는 별인 남극성을 의인화한 것으로 수성(壽星)이라고도 한다.

 

 

 

 

 

 

 

 

 

 

조선 19세기 / 파상군선도(波上群仙圖)

 

병풍은 바람을 막거나 무었을 가리기 위한 것이지만,

글씨나 그림을 붙여 감상하거나 벽면을 장식하는 용도로도 쓰였다.

병풍중에는 폭마다 각각 하나씩의 그림을 붙인 것도 있으나,

이 그림처럼 각 폭을 연결하여 하나의 큰 화면을 구성하도록 꾸며진 것도 있다.

 

<파도 위의 신선>은 파도가 치는 물 위를 걸어 서왕모의 잔치에 가는 신선들을 그린 그림이다.

신선의 차림새와 행동, 손에 든 갖가지 물건, 옆에 따르는 동물 등

다채로운 내용과 화려한 채색이 보는 이에게 생동감을 준다.

몽글몽글한 구름은 다소 도식적으로 그려졌지만,

신선처럼 선경(仙境)에서 오래오래 살기를 바라는 보통 사람들의 꿈을 나타내주는 듯하다.

 

 

 

 

 

◆ 해상군선도(海上群仙圖)

   

 1-8폭 병풍

 

 

 

 

1-4폭 일부

 

 

 5-8폭 일부

 

 

 

 

 

 

신선도(神仙圖) 화제 중 하나로,

신선을 단독으로 그리지 않고 여러 신선이 함께 있는 군상(群像)을 그린 그림으로

해상군선도(海上群仙圖), 파상군선도(波上群仙圖), 팔선도해도(八仙渡海圖), 팔선과해도(八仙過海圖)

등으로 불리며,

종리권, 장과로, 한상자, 이철괴, 조국구, 여동빈, 남채화(마선고), 하선고 등 여덟 명의 신선들이

바다 위를 날고 있는 장면으로 표현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다.

 

팔선(八仙)은 도교에서 숭배되는 8명의 신선으로

자신의 육신을 잃어버려 쇠지팡이에 호리병을 찬 거지의 몸을 빌었다는 이철괴(李鐵拐),

죽은 자를 살리는 부채를 들고 있는 종리권(鍾离權),

불로장생의 비법을 가진 장과로(張果老),

세상의 악을 무찌르는 여동빈(呂洞賓),

복숭아를 먹고 선녀가 되었다는 하선고(荷仙姑),

술 마신 뒤 학을 타고 하늘로 올라간 남채화(藍采和),

퉁소를 잘 부는 한상자(韓湘子),

도는 하늘이요 하늘은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한 조국구(曹國舅)를 가리키는 것으로

중국과 한국에서 애호되던 화제였다.

 

이처럼 팔선(八仙)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된 연유와 그러한 그림이 시작된 유래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통속편(通俗篇)》의 도석(道釋) 항목에 의하면, 팔선(八仙)의 용어는 당나라때 부터 많이 보이고,

팔선도(八仙圖)의 이른 예는 오대(五代) 서촉(西蜀)의 도사(道士) 장소경(張素卿)이 그려서

촉주(蜀主) 맹창(孟昶)에게 바쳤다는 팔선도(八仙圖)가 알려져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때의 팔선은 이기(李己), 용성(容成), 동중서(董仲舒), 장도릉(張道陵), 엄군평(嚴君平),

이팔백(李八百), 범장수(范長壽), 갈영괴(葛永瑰)로 후대에 유행한 팔선과는 전혀 다르다.

 

후대에 널리 유포된 통상의 팔선(八仙)의 개념은

원나라 무렵 민간설화나 민담, 희곡 등을 통해서 형성된 뒤

대략 명나라 초중기경에 민간에서 많이 그려지며 일반화되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북송 곽약허(郭若虛)의 《도화견문지(圖畵見聞志)》만 하더라도

서촉의 장소경과 동일한 팔선을 말하고 있는데,

원나라 마치원(馬致遠)의 《악양루(岳陽樓)》나 범자안(范子安)의《죽엽선(竹葉船)》같은 희곡에는

대의 팔선 개념이 보이기 시작하고,

현존하는 그림도 1368년에 제작된 영락궁(永樂宮)의 “팔선도해도”가 가장 이른 예로 알려져 있어

대략 이러한 추정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명나라의 왕세정(王世貞, 1526-1590)은 <제팔선도후(題八仙圖後)>에서 원대 이전에는

팔선도를 전혀 볼 수 없고, 명 초중기의 두근(杜菫)이나 오위(吳偉) 같은 명가들도 그린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늙음은 장과, 젊음은 남채화와 한상자, 장군은 종리권, 서생은 여동빈, 귀인은 조국구,

병자는 이철괴, 부녀자는 하선고로 상징화한다고 하였다.

 

이 중 유일하게 여성 신선인 하선고는 명나라때 편입된 듯,

1368년에 그려진 영락궁의 “팔선도해도”에는 하선고 대신 서선옹(徐仙翁)이 등장하며,

대략 16세기경부터 하선고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여덟 명의 신선이 한 자리에 모여서 파도 위를 날아가는 도상이 왜 나타나게 되었는가는

아직 정확한 이유와 전거(典據)가 밝혀져 있지 않지만

추측컨대, 통상 신선은 동해 바닷가의 영주(瀛洲)나 곤륜산(崑崙山)의 약수(弱手) 건너에 산다고 하여

물로써 속세와 격리시키는 관념이 있었고,

또한 신선은 우화등선(羽化登仙)한다고 하여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닌다는 통념이 있어왔기 때문에

이 두 가지가 결합되어 바다 위 혹은 물 위를 날아가는 모습으로 형상화된 것으로 본다.

 

그러다가 대략 명나라때 곤륜산 서왕모(西王母)의 반도회(蟠桃會)를 주제로 한

“군선경수반도회도(群仙慶壽蟠桃會圖)”가 성립되면서부터

곤륜산의 요지(瑤池)에서 벌어지는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여러 신선들이 약수(弱手)를 건너가는

장면이라는 관념과 결합되는 서사화(敍事化)가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①종리권(鍾離權)

- 본래 한나라의 대장으로 토번(吐藩)을 정벌하다가 패하고 홀로 도주하던 중

한 호승(胡僧)을 만난 인연으로 결국 방외인(方外人)이 되었기 때문에

통상 건장한 체구에 옷을 풀어헤쳐 앞가슴과 배를 드러낸 채 파초선(芭蕉扇)을 들고 있는 경우가 많다.

 

②장과로(張果老)

- 당 현종 때 항주 조산(條山)에 은거하던 신선으로

항상 흰 당나귀를 거꾸로 타고 하루에도 수만 리를 갈 수 있었는데,

쉴 때는 당나귀를 종이처럼 얇게 접어서 두건상자나 책 속에 넣어 두었다가

물을 뿌리면 다시 당나귀가 되었다 한다.

그래서 흔히 두건을 쓴 노인이 흰 당나귀를 거꾸로 탄 모습이 가장 특징적이며,

박쥐의 정령이 화해서 장과(張果)가 되었다고 하여 박쥐를 동반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③여동빈(呂洞賓)

- 이름이 암(巖), 자(字)가 동빈(洞賓), 키가 8척2촌이나 되고 모습이 장자방(張子房)을 닮았다고 한다.

일찍이 여산(廬山)에서 화룡진인(火龍眞人)을 만나 천둔검법(天遁劍法)을 전수받고

회창(會昌) 연간(841-846) 64세의 나이로 과거에 두 번이나 응시했지만 낙방한 뒤

운방선생(雲房先生)을 만나 여러 가지 비술을 전도 받았다.

그리하여 여동빈은 키가 훤칠하게 큰 장년의 선남자(善男子)가 칼을 차고 파초선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④한상자(韓湘子)

- 한유(韓愈)의 종자(從子) 또는 종손(從孫)으로서 어려서 도를 배워 세상에 얽매이지 않았는데,

선비들을 모아 놓고 화분을 뒤집은 뒤 순식간에 꽃을 피게 하는 능력이 있었다 한다.

흔히 총각머리를 한 미소년이 어고간자(魚鼓簡子)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다.

 

⑤조국구(曹國舅)

본래 宋 태후(太后)의 동생이었으나 그 동생이 불법으로 살인을 일삼는 것을 부끄러이 여겨

산 속에 은거한 뒤, 종리권과 여동빈을 만나 환진비술(還眞秘術)을 전수받고 선반(仙班)에 들었다 한다.

국구였기 때문에 부귀로운 귀인이 관복을 착용하고 딱따기(擊析)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다.

 

⑥남채화(藍采和)

- 항상 누더기 적삼에 넓은 흑목(黑木)의 요대(腰帶)를 차고 한 발은 신을 신고 한 발은 벗은 채

3척의 큰 박판(拍板)을 들고 술에 취해 노래를 부르며 걸식으로 세상을 주유했는데,

어려서 본 사람이 반백이 되어 보았을 때도 그 얼굴이 전과 같았다고 한다.

그래서 흔히 총각머리의 남루한 젊은이가 넓은 요대를 차고 한 발을 벗은 채

큰 박판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⑦이철괴(李鐵拐)

- 철괴리(鐵拐李)라고도 불리는데,

서주시대 선도를 수행하던 도사인 철괴선생의 속명은 ‘이응양’이다.

그는 어려서 도를 배워 몸에서 혼이 빠져나왔다가 다시 들어가는 능력이 있었는데,

어느 날 제자가 죽은 줄 알고 몸을 없애버렸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굶어죽은 거지의 시체 속으로 들어가 다시 살아났다 한다.

원래 철괴선생은 미목이 수려한 중년의 문사(文士)같은 고아한 생김새였으나

그래서 대개 남루하고 추한 거지가 쇠지팡이와 호로병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같은 연유로 인해 절름거리는 다리에 쇠지팡이(철괴)를 짚은 부스럼투성이의 거지몰골이 되었다.

일단 죽었던 영혼이 막 숨이 끊어진 다른 사람의 육신을 빌어 되살아나는 예도 종종 발견되는데

도교에서는 이런 현상을 ‘차시환혼(此時還魂)’ 이라 한다.

 

⑧하선고(何仙姑)

- 당나라 때 사람으로, 나면서부터 이마에 육호(六毫)가 있었다.

14, 5세 때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운모(雲母)가루를 먹으면

몸이 가벼워지고 불사(不死)한다는 말을 듣고 이를 실행하여 여선(女仙)이 되었는데,

산곡(山谷)을 날듯이 오가며 산과(山果)를 들고 돌아왔다 한다.

'대바구니'에 각종 약초와 영지(靈芝), 선도복숭아를 가지고 다니며 민중들을 구제하였다.

그래서 흔히 젊은 여인이 과일바구니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다.

 

 

 

 <전(傳) 맹영광 팔선도(八仙圖)>

 

맹영광(孟永光)은 17세기 청나라 초기의 중국화가로 절강성 소흥(紹興) 출신이며 자는 월심(月心)이다.

그림을 잘 그려 청나라 조정에서 벼슬을 받았으며 특히 인물과 초상화를 잘 그렸다고 전해진다.

그는 병자호란 직후 심양에 잡혀있었던 소현세자(1612-1645)를 따라 우리나라에 와서

3년간(1645-1648) 머물며 많은 작품을 제작하고

이징(李澄, 1581-1674) 등 조선화가들과 가깝게 지내는 등 조선 중기 화단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맹영광은 한 폭에 두 명씩 4폭의 족자에 총 8명의 신선을 묘사한 ‘팔선도’가 전한다.

강하면서도 부드러운 선묘에 강렬한 묵색의 대비가 돋보인다.

- 전(傳) 맹영광 팔선도(八仙圖), 1640년대?, 견본수묵, 각 43.5×25.8㎝

 

 

 

서왕모(西王母)

- 서왕모란 여신에 대한 이야기는 항아분월(嫦娥奔月)의 고사에도 있다.

그러나 서왕모의 전설은 각양각색이어서 하나로 통일되기는 어렵지만 <산해경(山海經)>에는,

“서왕모는 중국에서도 서쪽으로 멀리 옥산(玉山)이라는 산에 살고 있었다.

그 형상은 사람과 비슷하고 표범의 꼬리에 호치(虎齒)를 지녔으며,

휘파람을 잘 불고 봉발(蓬髮)에 화승(華勝-머리장식)을 꽂고, 천려와 오잔을 관장하는 여신으로서

질병의 신을 취재하는 임무를 띤 괴수(怪獸)와 같은 모습을 지닌 여신이었다.”

그러나 서왕모는 후세에 이르러 기품있는 여신으로서 전해 내려왔다.

그리하여 동왕공(東王公)이라는 동방의 남신(南神)과 한 쌍이 된 여신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또한 후세에는 도교(道敎)의 신으로서 민중신앙의 대상으로도 되어 있다.

 

 

◆ 청오자(靑烏子), 靑烏生

- 사슴을 데리고 걷는 노인의 모습이 청오자의 도상이다.

청오자는 팽조(彭祖)의 제자이며 471세에 금액(金液)을 먹고 승천한 신선이다.

등에는 황정경을 메고, 손에는 단지(丹芝)를 가지고 있으며,

허리에는 호리병을 차고 있으면 묻지 않아도 청오자임을 알 수 있다.

 

 

하마선인(蝦蟆仙人)

- 유해(劉海)는 본명이 유현영(劉玄英)이며, 호는 해섬자(海蟾子)로

후량(後粱) 연왕(燕王) 때 재상을 지낸 실존인물이다.

하루는 도인이 찾아와 달걀과 금전을 섞어 쌓으면서

속세의 영욕이 이처럼 위태롭고 허무한 것이라고 말하자, 깨달은 바가 있어

관직을 버리고 전국 각지를 유랑하다가 도를 닦아 신선이 된 인물이다.

그는 세상 어느 곳이나 데려다 줄 수 있는 세 발 달린 두꺼비를 가지고 다니는데,

이 두꺼비가 가끔 심술을 부려 우물 속으로 도망치면 유해는 끈에 금전을 달아 낚아 올리곤 했다고 한다.

 

<유해희금섬, 보보표금전(劉海戱金蟾 步步釣金錢)>이라 하여

'유해가 금 두꺼비와 장난치고 놀고, 발걸음마다 금돈을 낚는다'라는 속어가 생기고 

이 말은 '유해가 금전을 갖고 논다'는 말로 바뀌었다.

그 후로 유해가 세 발 달린 금두꺼비와 노는 장면을 그린 길상화(吉祥畵)를 집안에 걸어두는 풍습이

생겼고 이 풍습은 청나라 때 크게 유행하였는데, 세 발 두꺼비는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희귀하므로

큰 행운, 큰 재물로 인한 기쁨을 가져올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유해와 관련되어 전해지는 두꺼비나 동전에 대한 이야기는

이처럼 흔히 재물과 행운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져

현세구복적인 성격이 강한 조선후기 도석인물화에 등장하게 된다.

 

 

◆ 노자(老子)

- 도교경전인〈도덕경(道德經)>의 저자로 알려져 있는 노자(老子)는

노군(老君) 또는 태상노군(太上老君)으로 신성화되었다.

노자는 유가에서는 철학자로, 일부 평민들 사이에서는 성인 또는 신으로,

당(唐)에서는 황실의 조상으로 숭배되었다.

 

노자는 그 역사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신원이 자세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사마천(司馬遷)이 쓴〈사기〉의 '노자전(老子傳)'에 따르면,

노자는 초(楚)나라 천문(天文) · 점성(占星) · 성전(聖典)을 전담하는 학자였다.

노자의 2번째 신화는 노자의 서행(西行:함곡관으로 간 것) 이야기다.

그는 주가 쇠망해가는 것을 보고는 외뿔소를 타고

주를 떠나 진(秦)으로 들어가는 길목인 함곡관(函谷關)에 이르렀다.

관문지기 윤희(尹喜)가 노자에게 책을 하나 써달라고 간청했다.

이에 노자는 5,000언(言)으로 이루어진 상편 · 하편의 저서를 남겼는데

그것이 도(道)와 덕(德)의 뜻을 말한〈도덕경〉이다.

사마천은  "노자는 150년의 수명을 누렸다고 하는데 어떤 사람은 200년 이상 살았을 것이라고 한다."

 

 

◆ 황초평(黃初平)

- 황초평은 唐代에 항주 조산(條山)에 은거하던 신선으로 <신선전>에 소개되어 있다.

조선시대 그림 가운데서는 황초평의 설화와 관련된 ‘금화편양도(金華鞭羊圖)’가 가장 유명하다.

15세 때 양을 치러 나갔다가 신선에게 이끌려 40여 년 동안 집을 잊고 살았던 황초평의 이야기를

담은 것인데 채찍을 든 소년과 뒤를 따르는 흰 양들의 무리가 그려져 있다.

황초평은 진(晉)대에 금화산(金華山)에서 은거하다가 도인이 되었는데

그가 돌을 보고 소리를 지르면 모두 양이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白石頭都站起來變成山羊(백석두도참기래변성산양 -산양이 몽땅 흰색 돌덩이로 변한 이야기)'이다.

따라서 그는 막대를 들고 양을 치는 도상으로 등장하는데

갖가지 기물을 넣은 고비를 등에 메고 양을 몰고 가는 모습으로도 그려졌다.

 

 

◆ 윤희(尹喜)

무상진인(無上眞人) 윤희는 자(字)가 공문(公文)이다.

윤희가 세상에 막 태어나자 정원가운데 맨 땅에서 갑자기 연(蓮)이 솟아올라 피어났으며,

그는 자라면서 천문과 길흉화복에 대한 예언서인 참위학(讖緯學) 등에 능하여

천문을 보고 지리를 살펴서 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소왕(昭王) 때 어느 날 천상을 관찰하고 있는데 문득 동방의 자기(紫氣)가 서쪽으로 이동하는 것을 보고

성인(聖人)이 서쪽인 함곡관(函谷關)을 넘어간다는 것을 알고 함곡관 책임자 관령(關令)을 자청했다. 

“내가 간밤에 별자리를 살펴보니 지금으로부터 90일 이내 대성인께서 이곳 함곡관을 반드시 지나가니

만약 수레나 복장이 특이한 사람이 지나는 것을 보면 즉시 나에게 보고하라. 그를 꼭 만나야겠다.”

하고 부하인 손경을 불러 명령을 내렸다.

함곡관 앞 40리길을 청소하고 향을 사르도록 분부했으며 매일 목욕재계하여 몸과 마음을 정히 하여

성인출현을 대비한 영접의 만반준비를 하였다.

주(周) 소왕(昭王) 23년 7월 12일 손경이 함곡관을 지키고 있는데

백발노인이 커다란 귀를 어깨까지 드리우고 푸른 소(靑牛)가 끄는 하얀 수레에 앉아서 가고 있었다.

푸른 소가 이끄는 수레를 타고 대진국으로 들어가는 길에 서관(함곡관)을 지나게 된 노자를 맞이한

윤희는 글을 써 달라고 부탁하자, 노자도 윤희의 비범함을 알고《도덕경》上, 下 2권 곧《老子道德經》을

지어 주었다. 나중에 노자와 함께 유사(流沙)를 여행하고 서역인으로 귀화했다.

그는 참깨씨를 복용했으며 그의 마지막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한편 윤희도 스스로 9편의 글을 지었는데 그것을 《관령자(關令子)》라고 한다.

 

 

◆ 동방삭(東方朔) 

- 3,000갑자를 산 동방삭은 기행의 인물이며,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재미있는 사람이다.

3,000갑자를 살았다.

또는 서왕모의 선도복숭아 밭(蟠桃園)에 몰래 들어가 선도복숭아를 세 번 훔쳐 먹었다는 등

가지가지 수많은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 삼성도(參星圖)

복을 관장하는 복성(福星) - 온화한 얼굴이 넉넉하고 아름다우며

관록을 관장하는 녹성(祿星) - 높은 관에 화려한 옷을 입었으며

수명을 관장하는 수성(壽星) - 노인 모습에 머리 골격이 길다.

 

 

삼선도(三仙圖)

여동빈(呂洞賓), 여동빈의 스승인 종리권(鍾離權), 종리권의 선생인 동화자(東華子).

 

여동빈은 唐나라 때의 신선으로 종리권을 만나 신선이 되었는데

유건(儒巾)을 쓴 칼을 찬 장년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종리권은 머리에 쌍상투를 틀고 배를 드러내놓고 파초선을 들고 있는데

그는 호리병을 뒤집어 금단(金丹)을 쏟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지며 동화자에게 배웠다고 한다.

동화자는 동화제군(東華帝君). 동왕공(東王公)으로 서왕모와 함께 신선(神仙)의 영수(領袖)로 칭해진다.

신장은 1장(丈), 머리칼은 하얗고 신체는 사람 형태이지만 얼굴은 새와 같았으며

몸 뒤에는 호랑이처럼 꼬리가 있었다고 한다. 그는 검은 곰을 타고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는 형상으로

묘사된 옛날 기록과는 달리 후대로 내려오면서 삼유관을 쓰고 아홉 가지 색의 구름무늬 같은 옷을 입은

엄숙하고 장중한 신성불가침의 모습으로 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