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나아가는(문화)

흙과 불에 혼을 담고 - 도공, 김정옥

Gijuzzang Dream 2008. 6. 3. 04:57

 

 

 

 

 

 

나의 숙명은

나는 도예가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들판은 넓고 하늘은 높았지만, 나의 어린 가슴은 키 작은 풀잎처럼 생 앞에서 어른거릴 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나의 피가 망댕이 가마 속의 불처럼 뜨겁다는 사실을 내내 알고 있었다.

 

나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까지 조상들은

내내 흙을 빚으며 살았다.

그들의 외롭고 고독한 작업은 눈부시지도 화려하지도 않았지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빚어냈다.

 

아버지도 그랬다. 그러나 아버지는 가난했다.

양은그릇이 쏟아져 나오면서 사람들은 사기그릇을 더 이상 찾지 않았다.

나는 중학생이었고 더 이상 학교에 다닐 수 없게 되었다.

나는 아버지에게 도예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돈도 되지 않는 일을 아들에게 물려주려 한다고 아버지를 원망했다.

나는 아버지의 무거운 생을 함께 어깨에 짊어지고 물레를 돌렸다.

물레가 돌면서 흙이 빚어지듯이 나의 생도 숙명 따라 빚어지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망댕이 가마에 불을 지피며

그릇을 빚는 것은 사람의 일이지만 그 나머지는 온전히 자연의 힘이다.

내가 빚은 그릇들은 자연의 일부이다.

그릇을 빚기 위한 흙이 그렇고 가마에 넣을 땔감인 적송이 그렇다.

적송은 땔감이 되기 위해 5년 동안 수분이 사라지기를 누워서 기다린다.

그 5년 동안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오로지 기다리는 것이다.

기다리며 나는 좋은 그릇을 빚기 위해, 자연을 닮기 위해,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운다.

 

마음에서 무언가 넘쳐나는 것은 자연을 거스르는 일이다. 그릇은 이렇게 탄생한다.

남들은 전통을 지키는 일에 대해 때론 추상적으로 때론 형이상학적 개념으로 생각하지만

나에게는 생활이고 삶이다.

나는 맨발로 흙을 반죽하고 물레를 밀며, 가마 속 나무와 불의 조화를 살피며 불을 지핀다.

망댕이 가마 구멍 사이사이로 연기가 피어오른다.

자연의 기운을 거스르지 않고 마음이 투명한 불꽃이 될 때까지 기다리노라면,

흙으로 빚은 그릇에서 하얗게 살이 돋아나기 시작한다.

 


나를 찾아 외길 40년

지금 나는 장인이라 불린다.

그러나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남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도공이었다.

깊은 숲 속에 묻혀있는 이름 없는 흙처럼 살았다.

 

힘들고 배고파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흙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흙이 불을 통과해야 아름다움을 얻듯이, 나의 생도 혹독한 시련을 이겨내며 빛을 얻고 생명을 얻은 것이다.

 

쉬운 것은 단 한 가지도 없었다.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틈을 내 농사를 지으면서도 언제나 내 가슴 속에는 물레가 돌고 있었다.

나의 그릇들은 가마 속에서 태어나 사람들의 친구가 된다.

시름에 젖은 자에게는 술사발로, 아픈 자에게는 약사발로, 배고픈 자에게는 밥사발로,

마음을 닦는 자에게는 차사발로 그들의 생을 채워주고 보듬어 주었다.

 

이제 나의 아들이 나의 물레를 물려받을 준비를 한다.

나는 손자 녀석에게까지 나의 물레가 전해져, 멈추지 않고 영원히 돌기를 꿈꾼다.

얘들아, 예(藝)에는 요행이 없다. 자연은 그 모든 것을 안다.
- 글, 이지혜 시인 / 사진, 이은영
- 문화재청, 월간문화재사랑, 2008-0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