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로 표류했던 바다 밖 세상
1723년 3월 제주도 백성 김시위는 배를 탔다가 험한 바람을 만나 일본 규슈의 오도로 떠내려갔다.
그는 귀환을 위해 규슈의 큰 도시 나가사키로 옮겨졌다가 뜻밖에도 별천지를 구경한다.
임진왜란 때 끌려간 조선인 후예인 통사(통역관)의 안내로,
중국 남경의 상선단에 천금을 주고 샀다는 각종 진귀한 보물들과
중국, 네덜란드의 거대한 상선들을 보았다.
포구 한쪽에서 콧대 높은 남만(네덜란드)인들도 만났는데, 그는 이렇게 증언했다.
“눈동자는 노랗고, 코는 가늘고 길다. 사지와 몸이 몹시 길고 컸다. 머리에 붉은 담요를 둘렀고…
이리저리 다니자 50보 떨어진 거리에서도 노린내가 코를 찔렀다.”
18세기 후반 나가사키에 들어온 아란타(네덜란드) 무역선의 그림. 돛대에 걸린 깃발에 동인도 회사를 상징하는 로고가 보인다. 일본 고베 시립미술관 소장. (사진/ <탐라문견록, 바다 밖의 넓은 세상>) |
20세기까지 유일한 ‘14인의 해외 체험기’
18세기 초 문인 정운경이 쓴 제주도 주민 표류자들의 논픽션 인터뷰 모음 <탐라문견록>의 한 내용이다.
그는 1731년 9월 제주 목사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 건너온 뒤
여가 삼아 섬의 풍토 · 문화를 기록하던 중 뜻밖의 증언을 얻는다.
백성들 가운데 일본, 대만, 베트남 등까지 표류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을 알고는,
직접 그들의 사연을 듣고 옮겨 적었다.
쇄국의 시대 먼 나라 사정을 생생히 전해주는 그네들 이야기는 흥미롭기 그지없었다.
이 독특한 문헌이 현대 우리말로 번역되고 해설까지 덧붙여져 나왔다.
한문학에 대한 대중적 저술로 잘 알려진 정민 한양대 교수가 발굴해 번역한
<탐라문견록, 바다 밖의 넓은 세상>(휴머니스트 펴냄)이 그 책이다.
정 교수는 이 문헌이 20세기 이전 표류자들의 해외 체험기 모음으로는 유일하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공식 외교사절이 접할 수 없었던 인근 중국, 일본, 유구, 대만, 베트남 등의 풍속, 사회 실상은 물론
표류, 송환 과정의 구체적인 과정들이 생생히 나와 있었다.
이웃 외국의 폭넓은 실상을 흥미진진한 체험담으로 알려주었기 때문에
18세기 진보적 지식인들의 필독서로 큰 관심을 모았으나 19세기 이후 잊혀졌다는 것이다.
인터뷰에 응한 표류자는 14명. 대개 전라도 쪽으로 항해하다가 근해에서 풍랑을 만나 규슈 서쪽인
나가사키 부근의 오도 혹은 사쓰마(가고시마현) 쪽으로 표류했다.
더 남쪽으로는 유구국, 대만, 베트남 북부까지 밀려가 필담으로 소통하면서 구조된 뒤
긴 송환 절차를 거쳤다.
1화로 나오는 1687년 조천관 주민 고상영의 안남(베트남) 표류기를 보면,
베트남 북부까지 떠내려가 현지 왕조의 후한 접대를 받은 뒤 왕의 친서까지 받아 중국 상선을 타고
귀환길에 오른다. 어이없게도 조선 정부는 주민들을 귀환시켜준 중국 상인들을 한양으로 압송한 뒤
육로로 베이징에 돌려보낸다.
정 교수는 “조정의 표류민 관련 행정 처리는 서투르고 국제적 안목이 없었다”고 평가한다.
또 1612년 제주로 표착해온 유구국 태자의 상선을
제주 목사 등이 습격해 재물을 빼앗고, 살해한 사건의 후환 때문에
이후 표류민들이 제주 출신임을 한사코 숨기려 했다는 대목도 이런 맥락에서 눈을 끈다.
납치자 후손과 표류민 만나 눈물 흘려
일본으로 간 표류민들은 임란 때 끌려가 통역사가 된 조선인 후손의 삶에 대해서도 상세히 술회한다.
조선의 의식주 습속을 지키며 사는 납치자 후손과 눈물 흘리면서 손을 맞잡은 표류민들의 절절한
회고담은 오늘날 재일동포에 대한 한국인들의 감정, 정서와 빼어닮았다.
이와 달리 송환 때 거쳐간 대만의 한족 주민들은 표류자들이 찬 호패의 명나라 연호를 보고는
반가워하는 기색을 보여 당시 이민족 청왕조에 대한 한족의 미묘한 감정도 알 수 있다.
중국에서 만난 인도네시아, 타이 사절에 대한 견문기록,
제주 특산 귤 품종을 기록한 <탐라귤보>도 흥미로운 이야기들이다.
- 2008년 02월14일, 한겨레21, 제697호,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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