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최고의 초상화가, 화산관 이명기와 『채제공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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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초상화가 제작되어 ‘초상화의 왕국’이라고 칭해지기도 하는 조선시대에서도 조선후기는 초상화 제작이 성황을 이루었으며 양식과 화풍에 있어서도 뚜렷한 변화를 보여준다.
이 당시 초상화는 이전의 전통적 화법에 음영법, 투시도법 등 서양화풍이 수용되어 입체감이 두드러지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18세기 후반 정조대 초상화는 서양화법과 전통 초상화법을 성공적으로 절충시킴으로써 사실성과 한국초상화 특유의 아름다움을 잘 살려낸 것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정조대 초상화풍을 이끈 대표적인 화가가 바로 화산관 이명기(李命基, 1756~?)이다.
20대 후반에 이미 초상을 그리는데 있어 ‘독보일세(獨步一世)’라는 평가를 받은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이다.
그는 정조 15년(1791)과 정조 20년(1796) 두 차례에 걸쳐
정조어진의 주관화사(主管畵師)를 맡았는데, 정조 15년의 어진제작 시에는 김홍도를 제치고 주관화사로 선발되고 있어 초상화에 있어서는 김홍도를 능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명기는 정조의 명으로 채제공의 초상과 17세기 거유(巨儒)인 허목의 초상 등을 그렸으며, 조선후기 권세 있는 사대부들이 모두 그에게 그림을 그려줄 것을 청하였다고 할 정도로 전문 초상화가로서 활발하게 활약하였다.
초상화는 10여점 가량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그 중 대표적인 작품으로 채제공 초상, 오재순 초상, 김홍도와 합작한 것으로 유명한 서직수 초상 등을 들 수 있다.
여기서는 정조대의 명재상으로 유명한 채제공의 초상 2점에 대해 소개해보도록 하겠다.
채제공 초상은 65세상과 73세상이 금관조복(金冠朝服), 흑단령(黑團領), 홍포(紅布) 등 다양한 복식을 한 모습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당시의 초본이 함께 전해져 더욱 주목되는 작품이다. 의자에 앉아 홀을 들고 있는 ‘금관조복본’은 채제공의 65세상으로 이명기가 28세에 그린 작품이다. 얼굴과 옷 주름에 음영을 가하여 입체감을 살리고 있으며 바닥에 깔린 돗자리의 화문석은 투시도법을 사용하여 원근을 나타내었다. 금으로 표현된 화려한 금관과 붉은 빛깔의 조복에 이명기의 정치한 필치와 화법이 어우러져 장엄한 시각적 효과를 부여해준다.
채제공 73세상인 ‘시복본’은 오사모에 옅은 분홍빛의 홍포를 입고 손에 부채를 들고서 화문석에 편안하게 앉아 있는 전신좌상으로 역시 음영과 투시도법을 사용하여 입체감을 표현하였다. 빳빳하게 다림질하여 사락사락 소리가 날것만 같은 홍포는 안감의 옅은 푸른빛이 은은하게 비치고 있는 모습까지 성공적으로 묘사해내고 있는 점이 인상적이다. 부채 끝에는 정조에게 하사받은 짙은 보라색의 향낭이 달려 있는데 그림에 묘사된 것과 동일한 모양의 향낭이 초상과 함께 문중에 전해지고 있어 초상화의 사실성을 더해준다. 심경까지 묘사한 뛰어난 당대 국수(當代 國手)
채제공 초상과 관련하여 『승정원일기』에는 정조와 채제공이 나눈 흥미로운 대화가 전해진다.
정조 15년(1791) 10월 정조가 채제공의 화상을 보고,
“안면에 우울하고 우수에 찬 기색이 있다. 금일 요직에 쓰임으로써 권력을 잡은 후 의형(儀形)과는 크게 다르다. 고로 지금 또한 다시 모(摹)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대해 채제공은 “신(臣)이 그때에 이명기로 하여금 사출(寫出)케 했는데, 그때인즉 실로 우울한 기색이었던 고로 이렇게 묘출되었습니다. 신이 스스로 보아도 태평재상의 기상은 결코 아닙니다. 이명기는 가히 좋은 화사(畵師)입니다.”라고 답하였다고 한다.
65세상인 ‘금관조복본’과 73세상인 ‘시복본’의 얼굴을 비교해보면, 65세상이 8년이나 젊은 데도 눈가와 이마의 주름이 더 길고 깊게 파이고 턱선이 좀 더 뾰족하며 인상을 쓰듯 눈을 찌푸리고 있어 침울한 안색을 하고 있는데 반해,
73세상의 얼굴은 수염만 더 희었다 뿐이지 좀 더 원만한 턱선과 완화된 주름표현으로 더욱 평안하면서도 위엄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73세상인 시복본에는 정조15년 어진을 그린 뒤 왕명을 받아 초상화를 그려 대궐로 들여보내고 그 나머지 본을 다음해 임자(1792)에 장황하였다는 화제가 적혀져 있어, 채제공이 은거생활 중 그린 65세상을 정조가 본 후, 재상의 기상에 맞게 새로이 초상을 그리도록 명하였으며 이 때 함께 제작된 것이 이 시복본임을 알 수 있다.
당시 정조가 보고 우수에 찼다고 평한 초상이 이 금관조복본인지 분실된 흑단령을 입은 65세상인지 확언할 수는 없으나 이명기가 그린 채제공 65세상 중 하나로 금관조복본의 안면과 동일한 모습을 한 초상이었을 것이다.
피사인물의 당시 심경과 기분을 얼굴에 들어낼 정도로 핍진한 사실성을 보여준다. 이러한 그의 초상화는 인물의 고매한 인격과 정신까지 나타내야 한다는 동양의 초상화론인 ‘전신(傳神)’의 경지에 달한 것이라 하겠다. 아울러, 전통회화기법 속에 신법(新法, 서양화법)을 절묘하게 소화시켜, 붓을 표현매체로 삼는 동양회화의 특성상 음영표현 시 여러 번의 붓질로 인해 얼굴의 색이 어두워지고 탁해지는 단점을 극복해내고 정치하면서도 절제된 필치를 이용하여 사실성을 최대한 확보하면서 맑고 단아한 인물의 모습을 성공적으로 표출해내었다.
이렇듯 화산관 이명기는 ‘당대 국수(當代 國手)’라는 칭호에 걸맞게 조선시대 초상화의 수준을 한 단계 더 끌어올린 조선후기 최고의 초상화가라 하겠다. - 문화재청, 월간문화재사랑, 2008-05-2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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