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 오딧세이]

[간도 오딧세이] 11. 국경표시 돌무더기 흔적을 찾아라

Gijuzzang Dream 2008. 5. 17. 03:06

   

 

 

 

[간도오딧세이] 국경 표시 돌무더기 흔적을 찾아라

 


백두산 천지 남동쪽의 위성 사진.

빨간선이 석퇴 추정지역을 나타낸다.<(주)위아 제공>


 

조선과 청나라의 영토 분쟁과 관련해 가장 중요한 것은

1712년 정계비 건립 후 설치한 석퇴(石堆·돌 무더기), 토퇴(土堆·흙 무더기), 목책(木柵)이다.

압록강과 토문강을 연결하는 국경선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 만든

인공 구조물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이 울타리가 조·청 국경선이 되는 것이다.

 

청나라의 대표인 목극등은 토문강 상류가 마른 하천으로 늘 물이 흐르는 것이 아니므로

이 경계를 확실하게 할 것을 요청했고, 같은 해 이 인공구조물이 만들어졌다.

1885년 을유 감계담판(국경협상) 때 토문감계사였던 이중하는

중국 대표들과 함께 이 울타리를 확인했다.

 

경인교대 강석화 교수의 저서 ‘조선 후기 함경도와 북방영토의식’에는

이중하가 이렇게 조정에 보고한 것으로 나와 있다.

“토퇴와 석퇴가 연달아 쌓여 있는 것이 90리가량인데 퇴의 높이는 여러 척이며

그 위에 나무가 자생하여 이미 늙어 구부러진 것도 있습니다.

이것은 그때 한계를 표시한 것이 확실합니다.”

 


1948년 백두산 탐사대가 현장 확인

울타리가 만들어진 지 정확하게 174년 후의 일이다.

그 뒤 또 세월이 흐르면서 목책은 무너지고, 토퇴가 허물어졌을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찍은 사진에는 석퇴만 남았다.

 

간도 연구가인 김득황 박사 역시 이와 비슷한 시기에

이 지역에서 한 줄로 연결된 석퇴를 봤다고 증언했다.

마지막으로 확인된 것은 1948년 청진교원대학 ‘백두산 탐사대’ 대원들이

1957년 ‘문화유산’이란 학술잡지에 실은 글을 통해서다.

이 글에서 석퇴가 모두 106개로 석퇴가 시작하는 지점에서 끝나는 지점이 5㎞에 달한다고 적어놓았다.

236년 동안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선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위성사진을 통해 가장 먼저 찾은 것은 토문강이었다.

토문강을 정확히 찾기 위해서 석퇴의 역사 기록을 위성사진 분석 전문가에게 알려줬다.

처음에는 사도백하 주변에 아마 돌무더기 띠의 흔적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형이 비교적 뚜렷하지 않았던 고지도를 보면 사도백하가 가장 조건에 근접했다.

여기에다 일제강점기 때 현장을 답사한 김득황 박사 역시 위성사진 속에서 사도백하를 지목했다.

하지만 위성사진을 제공한 (주)위아의 전문가는

당초 제시한 사도백하보다 남쪽 밑에 있는 오도백하를 지목했다.

이 물줄기를 따라 돌무더기 띠의 연결선을 추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제강점기 사진으로 보면 돌 무더기는 10여 개의 큰 돌을 모아놓은 형태로,

5m 정도 떨어진 곳에 다른 돌무더기가 있다.

이를 1m급 위성사진으로 판독한 결과, 정계비 추정 지역에서 오도백하에 이르는 물줄기를 따라

돌무더기의 흔적을 추정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1948년까지 236년을 버틴 돌무더기가 60년의 세월 동안 갑자기 없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험준한 백두산 지형을 감안한다면 일부러 훼손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없앨 수 없는 역사적 증거물이다.

경인교대 강석화 교수는 위성사진을 본 후

자신의 저서에서 밝힌 것처럼 토문강이 오도백하임을 확인했다.

 


답사 통해 역사적 기록·사진 반드시 남겨야


위성사진의 추정 확인을 통해 토문강의 존재가 드러난 셈이다.

하지만 추정은 추정일 뿐이다. 현장에 직접 가보지 않고는 이 경계선의 현재 존재를 장담할 수 없다.

정계비의 존재도 중요하지만 석퇴의 존재 역시 간도의 영토 논란에서 매우 중요하다.

누군가는 언젠가 현장 답사를 통해

이 석퇴를 역사적 기록과 함께 사진이 아닌 현실 속의 존재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 2008 05/20  경향,
뉴스메이커 775호, 윤호우 기자